살면서, 다들 최악의 날이라고 기억하는 그런 날이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아직까지는 1997년 12월 22일이다.
벌써 20년 전이다. 1997년 12월 22일은 전두환 노태우가 사면되던 날이었고, IMF 긴축통치를 굴욕적으로 수용하던 시절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앞으로 더 나쁜 날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12월 22일이 최악의 날이다.
김영삼은 1996년 신한국당 총선 승리를 위해,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켰고, 언젠가는 석방시키려고 했다. 언론에서는 역사바로잡기, 1212군사 쿠데타 세력 척결이라고 찬양했고 대다수 국민들도 찬성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대선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 복권시켜버렸다. 1945년 이후 친일반역자 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두 대통령들은 또 범하고 말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점도 있다. 하지만 2017년 지금까지도 한국 시민사회는 빈부격차, 지역차별, 세대간 갈등으로 일상이 전쟁터로 변했다. 그 출발점이 1997년 IMF 권고안인 '긴축 정책'을 김대중 정부가 굴욕적으로 수용해버린 이후이다.
노동자 해고 자유는 '노동유연성'이라는 나쁜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어린이들과 청년들은 유명 브랜드와 아파트 평수 크기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법을 어린시절부터 배우게 되고, '부자 아빠 되세요'를 거침없이 출판사들과 미디어가 대대적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 바로 IMF 역사에서 가장 지독하고 비인간적으로 '정부 지출 삭감, 복지비 삭감' 정책이 한국에서 김대중 정부 하에서 관철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 직전에 박지원 등을 비롯한 최측근들에게 "내가 가장 후회되는 것이 97년 IMF 환란을 막으면서 노동자들의 해고 자유로 인해서, 또 비정규직 양산되어서, 빈부격차가 커지고 말았다. 서민들이 살기 어려워졌다. 이 점을 막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 말했다.
97년 환란 위기 원인들은 한국자본주의의 과잉생산, 재벌들의 비합리적 경영, 정경유착 등 내부적인 원인도 있지만, 클린턴 행정부와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이 한국은 IMF 긴축통치 (Austerity) 를 수용해야 함을 강조하고 이를 관철시킨 탓도 있다.
그 이후 20년간 한국 시민들의 민심은 최악으로 갈기갈기 찢겨졌다.
한국 사람들은 파리, 런던, 뉴욕을 동경한다. 서구 1968년 청년들은 자기 부모 세대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복지 제도 하에서 '문화적 정치적 반란'을 일으키면서 속칭 '68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1997년 이후 한국 청년들은 서구의 복지국가 제도가 막 정착되려던 찰나에, 복지제도와는 가장 거리가 먼, 그 복지제도를 '무임승차'라고 공격했던 신자유주의적 'IMF 긴축 통치' 체제 하에서 '생존'과 '안정된 직장'을 찾아, 마치 서구 68세대 부모 세대처럼, 또 한국전쟁 이후 한국 부모들처럼 일만 해야 했다. TV에서는 한류 문화 산업이 흥행했지만, 97년 이후 한국 청년들은 스스로 '문화 빈곤' 세대, 연애 섹스도 자유롭게 하기 힘든 세대 '삼포 (연애, 결혼, 출산 포기)' 세대라고 규정했다.
내가 1997년 12월 22일을 최악의 날이라고 규정한 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IMF 원인들을 대학 연구소나 연구자들이 제대로 진단하지도 못했고, 이론적 실천적 근거들을 시민들에게 제공하지도 못했다. 1950~1953년 한국전쟁 효과만큼이나 시민들 삶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1997년 IMF 환란위기와 미국 헤게모니 하에 놓여져 있던 IMF 의 긴축통치 방안이었다.
1997년 당시 환란 위기 원인 진단과 해법을 놓고, 소위 '고금리, 노동유연화-해고자유, 민영화, 바이코리아'로 대표되는 IMF식 '긴축정책'에 저항할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제시하는 연구자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 진보적 관점, 노동자의 관점을 가지고 일관되게 IMF 외환위기 원인과 IMF역사상 가장 혹독한 '긴축정책'의 문제점들을 비판한 진보진영의 이론가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 정책전문가들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당시 파산선고당한 것에 대한 자성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시 한국 사회과학계는 좌건 우건 파산선고했다. 돌이켜봐도 부끄러운 학계였다.
- 박근혜 사면 이야기가 벌써 나오고 있고, 이재용 사면도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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