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고맙습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역사(history) 2016. 2. 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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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힌츠페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분이 돌아가셨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마운 분이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80년 광주 항쟁의 진실의 절반은 기록으로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의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을 촬영해 진실을 독일과 세계에 알렸던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쯔페터가 자신의 고향인 라쩨부르크에서 79세의 나이로 지난 1월 25일 별세했다. (1937년~2016.1월 25일) 1980년 5월 당시 위르겐 힌쯔페터는 독일 방송 아.에르.데(ARD) 일본 됴쿄 지부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9일 일본에서 광주 소식을 듣고, 5월 20일 새벽에 광주에 도착했다. 


http://bit.ly/1L4ZupQ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 힌츠페터 : kbs 제작) 


- 5월 20일 광주에서 계엄군의 몽둥이 맞고 사망한 광주시민들을 촬영,

- 5월 21일 도청앞 계엄군 최초 집단 발포 이후, 시민군들이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무장하는 장면을 촬영

- 5월 22일 일본으로 돌아가, 공항에서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 촬영한 10개의 필름을 독일로 보냈다.

- ( 당시 전두환 계엄군은 한국에서 외국으로,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해버렸다.)

- 5월 22일 독일 텔레비젼 타게스샤우에서 광주 항쟁 장면이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2003년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려,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기 때문에, 그는 한겨레 신문 송건호 언론인상 수상했다. 


- 1980년 9월 17일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위르겐 베트람은 광주항쟁의 진실과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의 학살을 다룬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45분짜리 다큐멘타리를 만들어 독일에서 방송했다. 


Jürgen Hinzpeter und Jürgen Bertram 2003년 송건호 언론인상 수상 광주항쟁 진실보도.





(2003년 KBS와 인터뷰 :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 ) 



1980년 5월 20일 오후, 광주에 도착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헤닝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 시민 희생자. 5월 20일~21일. 




우리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 수 있게끔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 시민군들을 아래와같이 촬영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중에 5월 20일, 그리고 5월 21일 (부처님 오신날, 수요일) 광주 도청앞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를 한 이후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시민들이 무장하고 있는 장면들을 촬영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일본에서 가져온 10개의 필름을 다 촬영했다. 그는 독일과 일본으로 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이 필름 10통을 들고 일본으로 5월 21일 들어간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 촬영한 필름들을 독일로 보내고, 5월 22일 마침내 독일 텔레비젼 뉴스, 타게스샤우 (Tagesschau)에 광주 참상과 시민군들이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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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2일 다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위르겐 힌츠페터는 서울 김영삼 자택 앞에서 촬영을 강행하려다 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한다. 




(출처: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2003년 KBS) 

- 위르겐 힌츠페터는 다시 5월 23일 광주로 들어간다.




5월 23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시민들의 저항,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들의 집회 등을 위르겐 힌츠페터는 촬영했고, 우리가 지금도 보는 대부분 중요한 장면들이다.




(당시 조선대 3학년 김종배,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1980년 5월 18일부터 1980년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광주 도청 내부 시민군들에 대한 무참한 학살이 끝나기까지, 국내 언론들은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당했다. 
- 5월 21일 도청앞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최대 사상자들이 발생했는데도, 국내 신문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헤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 동아일보는 5월 21일에서야 1면에 처음으로 광주 소식을 다뤘다. 그러나 계엄사 이희성의 발표만 간단히 실었다.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사회면 보도.


광주 시외 전화 불통, 교통 두절.

소년 체전 연기

그리고 물놀이 사진만 내보냈다.





- 경향신문, 1980년 5월 22일, 사회면. 모내기 한창 사진 보도.








1980년 5월 22일. 경향신문 1면 기사.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발표, 광주는 지금 외부인과 고정간첩들이 폭력사태를 일으키고 있다고 발표.







1980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 계엄군 광주 장악




1980년 5월 28일자, 조선일보 사설 "악몽을 씻고 일어서 "





계엄군이 신중하게 광주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군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 지시했듯이, 계속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민의 군대로서의 사명을 다해줄 것을 우리는 거듭거듭 당부해 마지 않는다 (조선일보 5월 28일자 사설)







1980. 5월 24일, 경향신문 사회면. "극렬분자와 일부 폭도들이 탈취한 시내버스에 올라타고 중심가를 누비고 있다"고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왜곡보도 했다.

경향신문 뿐만 아니라, KBS, MBC TV 등 방송국과 모든 신문들을 신군부가 장악하고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폭도'로 매도했다. 







2003년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는 공로로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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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힌츠페터는 자신을 광주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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