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정의당2021. 1. 14. 12:14

비정상적인 단일화 이제 그만하자. 결선투표제도 도입하던가, 우상호 후보는 정의당에 양보하고 사퇴하던가, 그게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도 정의로운 길이다. 


'다음에 정의당 지지하고, 이번에 민주당 찍어줘'라고 했던 우상호의 약속을 실현하는 길이다. 한국처럼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가치'가 절실한 나라도 없다. 1차 선거는 모든 정당이 다 출마하는 게 한국 민주주의발달 수준에 어울린다. 


안철수 국민의당과 국힘의 단일화 보도, 민주당A 우상호와 민주당B 아직도 사랑을 몰라 김진애의 단일화 보도, 고장난 레코드 40년째 틀고 있다. 



에너지와 돈 낭비를 이제 그만하자. 선거전에 후보단일화는 결선투표제도에서 1차전과 같다. 그럴 바에는 1차,2차결선투표제도 도입해서, 1차전에서 모든 정당들의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 


우상호와 유시민은 '다음번에 정의당, 다음번에 민주노동당 찍어준다고' 했었다. 때가 왔다. 다음 4년 임기 선거 바라지도 않는다. 이번 1년 남짓 서울시장 선거, 민주당이 정의당에 양보해야 한다. 그게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해버리고, 결과도 엄청 정의로운 길'이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었던 조국 전교수와 민주노동당 간부를 하다가 문재인 청와대 갔다가 금방 해고당한 C씨, 박원순 마지막 비서실장 고한석씨가 '결선투표 제도 도입하면, 라틴 아메리카 꼴난다'고 백년대계라는 친민주당 온라인에 오른 글들을 찬양했었다.


 내용도 틀렸거니와, 얼마나 비겁한가? 과거 전두환,노태우 일당과 박근혜 이명박 등이 썼던 수법 아닌가? "한국이 라틴 아메리카 꼴난다. 혼란해지고 경제망한다" 


난 2019년 8월 조국 사태가 발발할 때부터, 플랜 B를 발동해야 보수파들의 부흥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조국이 자진사퇴하는 게 가장 현명한 정치적 판단이라고 제안했었다. 필자 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국힘 편도 아닌 수많은 현자들이 그렇게 제안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던 석두 민주당 브레인들의 어리석음과 탐욕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 역사적 기원이 있다. 


1987년 대선 전, 김영삼과 김대중은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제도를 6공화국 새헌법에 명시하지 않았다. 1971년 대선 예비전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당내에서 '결선투표'를 치른 경험도 있었다.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김영삼이 1차전에서 1위,2위는 김대중,3위는 이철승이었다. 2차전에서 김대중이 김영삼에 역전승해서, 71년 대선에서 박정희-김대중 대결을 펼쳤다. 


1987년 10월 새헌법(6공화국) 제정을 앞두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결선투표가 있는 프랑스 대선제도' 때문에, 1981년 5월,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던 사회당 미테랑 후보가 2차전에 당선되었다는, 당시 전 세계적인 뉴스를 너무나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과 김영삼은 1987년 대선에서 자기들이 당선된다는 오만과 탐욕에 젖어있었다. 용서하기 힘든 역사적 실수이자, 오만에 절은 탐욕 그 자체였다.


1987년 김대중과 김영삼의 어리석은 탐욕 때문에 그 이후 얼마나 많은 학생들, 노동자들, 시민들이 죽고 다쳤는가? 그래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후예인 민주당 586들이 지금 이렇게 어리석은 탐욕질을 계승하고 있다. 당선만 되면 그만인 것이다.


민주당은 어리석음과 오만을 거둘 때이다. 


대통령제도를 유지하려거든 '결선 투표제도'를 도입하라. 정정당당하게 유권자의 과반 지지를 받아 정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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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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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거 때마다 거론 `결선투표`...승부 뒤집는 변수
    [레이더P] 민주당 도입, 서울·경기·인천·대전·대구·전남 등 6곳서 가능
    김수형 기자입력 : 2018-04-03 16:09:40 수정 : 2018-04-16 10: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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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오른쪽), 박영선 의원(왼쪽 두번째), 박원순 서울시장과 경기지사 선거에 나선 전해철 의원(오른쪽 두번째)이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오른쪽), 박영선 의원(왼쪽 두번째), 박원순 서울시장과 경기지사 선거에 나선 전해철 의원(오른쪽 두번째)이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지방선거 광역자치단체장(시·도지사) 후보를 정하는 데 결선투표를 전격 도입했다. 지난 2일 민주당 광역자치단체장 후보 면접이 진행되는 동안 당내에서는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결선투표를 결정했다.

    박범계 수석대변인은 이날 "경선은 최대한 치열하게 한다는 당의 정신과 국민 여러분의 경선에 대한 관심 주목도를 최대한 높인다는 방침에 따라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결선투표는 경선 후보들이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지 못하면, 1위와 2위가 2차 투표를 하는 것이다. 1차에서 1등을 했다고 하더라고 2차에서 2위와 3위 후보가 연합하면 1차 투표가 뒤집어질 수 있다.

    결선투표제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당선자의 대표성이나 정통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선거 등에서 3명 이상이 출마할 경우 현실적으로 30%대의 득표로 당선이 가능하다. 결선투표의 경우 1등이 무조건 50% 이상을 득표하기 때문에 30%대 득표보다 대표성과 정당성이 높다.

    또 2차 투표를 통해 유권자를 고민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2차 투표에서 다양한 정치적 연대가 가능하다.

    그러나 단점은 1차 투표 1위가 특정한 이유로 인해 낙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미국에서 1차 투표에서 흑인 후보자가 1등을 했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 백인들이 몰표를 하는 바람에 1차 1위인 후보가 떨어지곤 했다. 이 때문에 1985년 미 대법원에서는 결선투표제 규정을 폐지하도록 했다. 많은 나라에서 결선투표제를 실시해왔지만 많은 국가에서 이를 폐지하기도 했다.

    우리 정치사에 궤적을 남긴 결선투표 사례는 1971년 제7대 대선을 앞둔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이다. 당시 야당에서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김영삼·김대중·이철승 후보가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1등을 차지했다. 그러나 과반을 넘지 못했고 2차 투표로 들어갔다.

    결과는 뒤집어졌다. 이철승 후보 지지자들이 2차 투표에서 김대중 후보를 밀어주면서 김대중 후보가 신민당 대선후보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대선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결선투표가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87년 치러진 13대 대선이다. 당시 노태우 후보는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고, 김영삼·김대중 후보는 각각 28%, 27%를 얻어 민주화 정권으로 교체에 실패했다. 정치사에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 이 당시 결선투표제였다면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2차 투표를 진행하고, 2차 투표에서는 양김의 민주화 세력이 힘을 합쳐 노태우 후보를 역전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이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42%, 15대 대선 김대중 40.3%, 16대 대선 노무현 48.9%, 17대 대선 이명박 48.7%, 18대 대선 박근혜 51.6%, 19대 대선 문재인 41.1%의 득표율로 당선돼 50%를 넘는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대선을 앞두고는 항상 결선투표에 대한 여론이 일곤 했다.

    결선투표가 다시 부각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정부개헌안 때문이다. 국회에 제출된 개헌안 제71조에 따르면 과반을 얻은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2차 투표를 통해 다수 득표자가 대통령이 된다. 결선투표는 첫 선거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실시하도록 했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선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정과 협치로 가게 돼 있다"며 결선투표제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를 정하기 위해 결선투표를 진행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결선투표를 도입하면서 대통령 개헌안에 결선투표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대통령 개헌안이 명분이 될 수 있겠지만 민주당은 그동안 결선투표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와 전격 도입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바른미래당 인재영입위원장이 서울시장 출마 뜻을 밝히면서 결선투표가 도입됐다는 해석도 내놓는다. 서울시장 후보에 안철수라는 강력한 후보가 있다 보니 민주당에서 바람몰이를 하기 위해 이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결선투표가 전격 도입되면서 민주당 경선 자체가 뜨거워졌다. 서울시장의 경우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차지하기 위해, 박영선·우상호 의원은 2차 결선투표까지 간 뒤 뒤집기에 총력을 다할 전망이다.

    경기도 역시 뜨거워졌다. 3인 경선으로 이재명 전 성남시장이 과반을 넘지 못하게 될 경우 2차 결선투표로 이어지게 된다. 이 밖에 대구 인천 대전 전남 등 6곳에서 결선투표가 가능하다. 각 후보는 선거인단과 여론조사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박상병 경기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후보의 성향과 지역에 따라서는 결선투표제는 결과를 뒤집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판세를 뒤집을 만큼 영향력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수형 기자]

    2021.01.14 13:0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대선 후보 김대중’ 소식에 박정희는 줄담배만…
    등록 :2015-08-02 15:33수정 :2017-01-0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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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10회) 신민당 전당대회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1970년 9월29일 오전 서울 시민회관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대중 후보 진영은 한국 정당의 전당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대회장 벽면을 후보 얼굴이 찍힌 포스터로 채웠다. 하늘에는 대형 풍선을 띄웠다. 시민회관 주위를 메운 지지자들은 피켓을 들고 ‘김대중’을 연호했다. 전례 없는 축제 분위기였다.
    “1968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한 적이 있었어요. 전당대회 전 과정을 지켜봤는데, 그쪽은 축제를 하듯이 대회를 치르더라고요. 그걸 본떠서 우리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피켓을 들고 플래카드를 걸고 포스터를 붙였지요. 상대 후보 쪽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대회장으로 들어갔어요. 그쪽에서는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는 전당대회장을 압도했다. 김대중이 대세를 장악한 것 같았다. 신민당 원로이자 6선 의원인 정일형의 응원은 이희호를 감동시켰다. “정일형 박사가 ‘김대중 동지를 대통령으로’라고 쓴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가슴이 뭉클했지요.” 정일형은 지지자들과 함께 “대통령 김대중!”을 외쳤다. 총재 유진산의 지원을 업은 김영삼 후보 진영은 사태를 낙관했다. 김영삼은 시민회관 2층 ‘그릴’에서 후보 지명 자축파티를 벌이기로 하고 맥주 200상자를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1970년 9월29일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 후보가 역전승을 거두는 데는 후보 얼굴 포스터와 대형 풍선 등으로 미국식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 이희호의 선거전략 아이디어도 큰 몫을 했다. 그 뒤 71년 대선 유세 때도 김대중 지지 당원들이 앞장선 이런 홍보전략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0년 9월29일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 후보가 역전승을 거두는 데는 후보 얼굴 포스터와 대형 풍선 등으로 미국식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 이희호의 선거전략 아이디어도 큰 몫을 했다. 그 뒤 71년 대선 유세 때도 김대중 지지 당원들이 앞장선 이런 홍보전략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전당대회 의장 김홍일이 개회를 선언했다. 유진산의 지명을 받지 못한 이철승은 후보 사퇴 선언을 하고 퇴장했다. 개표 결과를 발표하기도 전인 오전 11시 석간신문 한 곳은 ‘김영삼 압승’이라고 보도했다. 개표 결과가 발표됐다. “재석 885명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 이철승 지지자들이 단체로 백지 투표를 던졌다. 아무도 과반수를 얻지 못한 가운데 김대중의 표가 김영삼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전당대회장은 뜻밖의 결과에 술렁거렸다.
    김대중은 1차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손을 흔들며 앞으로 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승리할 겁니다.” 1위와 2위를 놓고 2차 투표가 속개됐다. 개표 결과는 ‘재석 884명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였다. 김대중의 장담이 현실로 나타났다. 김대중은 과반수를 확보했고, 김영삼은 표가 오히려 줄었다. 그날 아침까지 대다수가 예측하지 못한 이변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나는 남편이 후보로 지명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이희호는 대의원이 아니어서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남편의 승리 소식을 들었다.
    개표 발표전 한 신문은 “김영삼 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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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와 김대중의 확신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김영삼 쪽이 느긋이 전당대회를 기다렸던 것과 달리 김대중과 이희호는 전당대회 전날 밤 통행금지 직전까지 청진동 여관을 돌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이 여관에 묵고 있었거든요. 여관마다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지요.” 당시 대의원들은 계파별로 무리를 지어 투숙했다. 어느 여관엔 유진산계 대의원들이, 또 어느 여관엔 비주류 대의원들이 진을 쳤다. 계보가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여관마다 문 앞에 파수꾼을 세워두기까지 했다.
    김대중 일행은 이날 밤 유진산계 대의원들과 이철승 쪽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공략했다. 장수가 단기필마로 적진 속으로 뛰어든 꼴이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큰절을 올리고 대의원들과 마주앉았다. 김대중은 자신의 신념과 달변으로 대의원들의 표심을 흔들었다. 김대중이 그해 내내 전국을 돌며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를 공격하고 야당이 나아갈 길을 설파한 것도 대의원들의 마음을 얻는 데 힘이 되었다. 이희호가 대의원들을 찾아 산동네를 뛰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대중은 이철승 쪽 대의원들에게 “이철승 후보가 불출마하면 그때는 나를 지지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날 밤 사이 김대중 지지자는 김영삼 쪽과 선두를 다툴 만큼 불었다. 김대중은 이철승 지지자들의 표까지 확보함으로써 역전승의 발판도 마련했다. 김대중의 승리는 더 멀리 보면 1967년 목포 총선 때 박정희와 벌인 불퇴전의 대결과 그 뒤 쉬지 않고 계속한 삼선개헌 반대투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김대중의 투쟁은 대의원들의 심중에 ‘김대중을 후보로 세운다면 대통령 선거에 이길 수 있겠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1970년 9월29일 ‘40대 기수 3명’이 겨룬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예상을 뒤엎고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사진은 애초 선두 후보였으나 2차 결선 끝에 패배한 김영삼이 당선자 김대중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0년 9월29일 ‘40대 기수 3명’이 겨룬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예상을 뒤엎고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사진은 애초 선두 후보였으나 2차 결선 끝에 패배한 김영삼이 당선자 김대중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방송과 신문은 앞다투어 신민당 전당대회의 이변을 전했다. “남편은 마지막까지 득표에 모든 힘을 쏟아붓느라 후보 수락 연설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대회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함성 속에 김대중은 즉석연설을 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대중이 주인이 되어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이 잘사는 시대를 만들 때입니다. 나는 새로운 시대의 선두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고 건국 이래 국민의 숙원인 민주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하겠습니다.”
    김대중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재떨이가 수북해질 정도로 줄담배를 피웠다. 김대중이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에게 불벼락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주일대사로 나간 이후락을 불렀다. 그해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이후락이 들어섰다.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1971년 대통령선거 총지휘를 맡겼다. 이후락은 영남의 지역감정에 불을 지르는 지역분할 술책을 필승의 전략으로 내놓았다.
    1967년 목포 선거가 전국 차원에서 재연될 상황이었다. 박정희가 떨어뜨리려고 그토록 애를 썼던 김대중은 목포 혈투에서 살아남아 박정희와 맞서는 자리에 섰다. 민심의 바다에 배를 띄운 김대중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를 무기로 삼은 박정희의 대회전이 벌어질 참이었다. 김대중의 신념은 이런 것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기는 필요하지 않다. 무기가 있다면 국민에게 호소하는 변설(辯舌)이라는 무기다.” 김대중은 이 신념대로 변설로 무장하고서 중앙정보부의 암수에 맞섰다.
    1970년 10월16일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서 첫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1950년대를 ‘암흑 전제시대’로, 1960년대를 ‘개발을 빙자한 독재시대’로 규정하고 1970년대를 ‘희망에 찬 대중시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선거를 인신공격이 아닌 정책 대결로 끌고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정책으로 선거전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공약 중 ‘민족외교’ 항목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대중은 남북의 화해와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서신 교환, 기자 교류, 체육 왕래 같은 비정치적 접촉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미국·소련·일본·중국이 한반도의 안전을 공동으로 보장하는 ‘4대국 안전보장’ 방안을 내놓았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김대중을 ‘용공’이라고 비난했다. “김일성이 피리를 불면 김대중이 춤을 추고, 김대중이 북을 치면 김일성이 맞장구친다”는 말도 했다.
    김대중의 공약 가운데 유권자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향토예비군 폐지였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 뒤 박정희가 만든 향토예비군은 생업에 바쁜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김대중의 공약에 민심이 출렁거렸다. 다급해진 정부는 “향토예비군 폐지 주장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고 촉진하는 이적행위”라고 윽박질렀다. 이희호는 남편의 공약이 박정희 정권의 총공격을 불러오자 무슨 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저쪽에서 ‘용공이다’ 하며 덮어씌우니까 걱정이 됐지요. 속으론 불안했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어요.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지요.”
    김대중의 공약 가운데 가장 많은 공이 들어간 것이 ‘대중경제’였다. 경영과 생산과 분배에 대중이 주체로 참여한다는 획기적인 경제정책이었다. 독일(서독)처럼 기업 경영에 노동조합 대표가 참여하고, 종업원이 기업의 주식을 나눠가짐으로써 이익을 공유하고 책임을 분담하며, 노사공동위원회를 만들어 능률 향상과 공평 분배를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되 사회주의 정책을 절충하는 경제 대안이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숙고를 거듭해 내놓은 독자적인 경제체제론이었다.
    대중경제론의 뼈대는 김대중이 1955년 <사상계> 10월호에 쓴 논문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에서 제시됐다. 여기서 김대중은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를 존중하되, 자본만의 우위·지배를 배격하고 노동·자본·기술의 3자가 평등하게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기업 운영과 이윤 분배의 사회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에는 대중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대중민주체제론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했다. 김대중은 이 글에서 대중경제를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지닌 모순을 대중민주주의와 산업민주주의로 극복하고 자유경제의 장점을 살려나가는 한국적 형태의 혼합경제체제”라고 규정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1971년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책자로 출간됐다. “남편은 국회에 들어간 뒤 한국내외문제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소를 세웠는데, 여기서 김병태·정윤형·박현채·최호진 같은 경제학자들과 일대일 토론을 거쳐 대중경제론을 다듬었지요.”
    1971년 1월말 신민당 대선 후보 자격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한 김대중은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주의 신념’을 설파해 미국의 조야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은 박정희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미 활동을 주선해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왼쪽), 제롬 코언 하버드대학 교수와 함께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1월말 신민당 대선 후보 자격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한 김대중은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주의 신념’을 설파해 미국의 조야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은 박정희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미 활동을 주선해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왼쪽), 제롬 코언 하버드대학 교수와 함께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대통령 선거운동이 막 본격화할 무렵인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의 평화시장 피복노동자 전태일이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스물두살 청년의 죽음은 온 나라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평화시장엔 영세한 봉제공장이 1000여개나 들어차 2만7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10대의 여공들이 창도 없는 먼지투성이 작업장에서 하루에 15시간씩 중노동을 했다. 그렇게 일해 하루 일당으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받았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을 직업병과 과로사로 내모는 현실을 바꿔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전태일의 죽음은 이희호와 김대중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나는 전태일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종로 기독교회관에 있다가 들었어요. 뒤에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사는 집에 찾아갔지요. 집이 너무나 초라했어요. 움막 같은 집이었어요. 그런데 뒤에 이소선 여사를 강연장에서 만났는데 공부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 놀랐어요. 그런 어머니에게서 그런 아들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 뒤로 이소선 여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가까운 관계로 지냈어요.”
    이희호와 김대중은 수유리 근처에 살고 있던 이소선을 찾아가 위로했다. 움막집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동대문 근처에 새로 집을 마련해 주었다. 김대중은 1971년 1월 새해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노동3권을 재정비하여 자유로운 노동조합운동을 보장하고 근로기준법의 잘못된 조항을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1971년 1월 이희호와 김대중은 미국을 방문했다. 하버드대학 교수 제롬 코언의 소개로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 윌리엄 풀브라이트와 만났다. 김대중은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신념을 밝혔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일행이 미국의 주요 인사와 만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나려 했으나 주미 한국대사의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닉슨 면담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희호는 대통령 부인 퍼트리샤 닉슨과는 백악관에서 만났다. 이 만남은 당시 <문화방송>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던 문명자가 다리를 놓았다. 박정희의 3선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문명자는 한국 정부의 방해를 뚫고 2월3일 이희호와 퍼트리샤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문명자씨의 도움으로 퍼트리샤를 백악관 집무실에서 만났는데, 긴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어요. 서로 손잡고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였지요.” 동행한 문명자는 퍼트리샤가 이희호의 손을 꽉 잡고 밝게 인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1971년 2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이희호(오른쪽)는 중앙정보부와 주미대사관의 철벽 방해를 뚫고 백악관 집무실에서 닉슨 대통령 부인 퍼트리샤(왼쪽)를 만났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으로 몰고 간 바로 그 장면이다. 당시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이 극적 만남을 주선했던 문명자는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년)에서 ‘2월3일 백악관으로 들어갈 때 이희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2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이희호(오른쪽)는 중앙정보부와 주미대사관의 철벽 방해를 뚫고 백악관 집무실에서 닉슨 대통령 부인 퍼트리샤(왼쪽)를 만났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으로 몰고 간 바로 그 장면이다. 당시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이 극적 만남을 주선했던 문명자는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년)에서 ‘2월3일 백악관으로 들어갈 때 이희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 후보 진영은 이희호와 퍼트리샤가 만나는 현장을 담은 사진을 보도용 자료로 만들어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 사진을 복사하려고 무교동의 한 사진관에 맡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탈세 혐의로 사진관을 조사한다며 가택수색을 했어요. 그러고 나더니 사진이 사라져버렸어요. 우리가 항의를 하니까 공화당에서 ‘김대중씨 부인은 닉슨 대통령 부인과 만난 적이 없는데도 거짓말을 한다’고 우리를 공격했어요.” 졸지에 이희호가 거짓말쟁이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실은 우리집에 문명자씨가 찍은 사진이 한 장 더 있었거든요. 그래서 사진 전문가를 집으로 불러 복사해서 공개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단순 분실인데 정부에 덮어씌운다고 비난하는 거예요. 참 어처구니가 없었지요.”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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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02747.html?fbclid=IwAR1guj4MitdbORjIICsvTRKYBteFqCcD1TJAvx83IYNEMvCciH-wTRw4tX0#csidx95fa2bf05e4008e9bdece0a59eda2ec

    2021.01.14 13:0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