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jung Kim
November 17, 2014 ·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100년간 마르크스주의라고 알려진 것들 그 차이에 대해서:
전광철님의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주의 해석은 나와는 많이 다르다. 1953년에 아예 단절되었다가 1980년대 소련과 북한 정부판본으로 소개된 "마르크스주의" 국정교과서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1980년대 민주화 투사들이 울며겨자먹기로, 다른 해석들이 배제되거나 '숙청'당한 채, '국정 교과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읽어야 했다.
전광철님의 마르크스 이해가 '국정 교과서'라는 것은 아니지만, 주장은 상당히 유사하다. 쟁점 1) <자본 1867년>에 나온 자본에 대한 비판적 설명과 '혁명론/정치학'은 다르다. <자본>에 언급된 유의미한 내용은, 임금 노동자가 혁명 주체이다라는 <공산당선언>의 내용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 (자본과 집중과 집적) 관계가 오히려 노동자 스스로 '협동'과 '협업'을 통해서,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이,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서, 이 자본가 소유의 생산수단을 '사회화' 시킬 것인가? 이 문제는 마르크스를 뛰어넘는 다른 정치적 과제이다.
쟁점 2) 비정규직이 혁명 주체나 변혁 주체로 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는 그들이 정치적 목표를 '정규직화'로 삼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정치적으로는 이 체제에 흙탕물을 일으키는 정도이고 (그것도 유의미하고 어려운 일임), 자본주의 체제와 법률적 소유관계는 그대로 지속될 수 있다. 마치 서구 유럽 (자본주의적 ) 사회복지 체제처럼.
문제는, 비정규직이건 정규직이건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단지 회사나 공장 안에서 경제적 지위나 노동여건 향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시,군,도시 공동체와 정치적으로 연대할 조건을 만드냐 못 만드냐이다.
지금은 특정 경제적 계급 하나, 둘로, 전 사회를 다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전광철님이 지적한대로, 노동자들이, 과거 <자본>이 나온 1867년 영국이나 당시 세계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달리, 2014년은 노동자 직종 숫자만 해도 아마 1867년보다 1000배는 더 증가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존재 자체의 분화와 그에 따른 의식과 정치적 견해 차이와 분화는 1867년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쟁점 3) 자본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마르크스의 설명 전제에 따르면 전혀 창출하지 않는다. 내가 마르크스 말만 되풀이 하고 그가 옳다고만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이론적 패러다임과 그 전제, 내적 논리적 정합성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죽은 노동 dead labor,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보는 '자본 (공장, 기계, 부품)'이라는 물리적 물체도 실은 인간 노동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 <자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적 전제이긴 하지만, 기계, 부품, 생산시설은 모두 다 인간노동의 '화석'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러한 '화석'들은 생산과정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그 화석 '덩어리'를 떼어서, 새 가치를 창출하는데로 그대로 '이전'되는 것이다. 양적으로 그대로 이전되고 분할되는 것이지, 새로운 창조물은 아니다.
가치를 창출하고 새로운 '양'과 '질'을 첨가하는 것은 오직 노동자의 노동력 (머리 근육, 손, 심리적 감정 등)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말이 다 옳은가? 아니 타당한가? 이것은 다른 경제학 패러다임을 가진 (예를들면 토마스 피케티 Piketty) 사람들이나 주류경제학자들은 당연히 '아니오'라고 할 것이다. 컴퓨터가 얼마나 생산적이고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고 있는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문제는 세계관, 이론적 패러다임의 선택 문제에 가깝다. 따라서 전광철님이 평가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본도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 이론은 사실을 무시한 잘못된 이론이다"라는 광철님 평가는, '사실 facts'가 뭐냐? 그 사실에 대해서 마르크스 패러다임 설명이 다르고, 다른 패러다임 (신고전학파나 제도학파, 케인지안 등)을 채택하면 그 '사실'이 마르크스 '사실'과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이나 패러다임이 더 좋냐 나쁘냐, 더 낫냐를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누구의 관점이냐, 정치적 목표가 뭐냐를 두고 다시 따져 묻는다면, 이 문제는 더 어려운 선택으로 빠져든다.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따져물음이지만 말이다. '이론이 탑재되지 않은, 세계관과 가치관이 장착되지 않은' 사실은 없다. 이것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법률에서는 '중립적 시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관찰도 이미 '이론이 탑재된 관찰 theory-laden observation'이기 때문이다.
쟁점 4) 마르크스 주장이 "노동자 궁핍화론, 양극화론"이냐 "자본주의 발달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을 가져오는가" , 이 두가지 중에 어느 것이 진짜 마르크스 주장이냐?
1848년, 마르크스가 만 30세에 엥엘스와 같이 작성한 <공산당 선언>에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썼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과거 봉건제 귀족제도와 우아함을 모두 파산시키고, 또 쁘띠부르조아와 농민을 비롯한 자영업, 수공업자들을 생산수단이 결여된 '임금 노동자'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섰다. 이는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또 다른 조건에서는 다른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또 다른 마르크스 주장과 얼굴이 있다. 그것은 유럽, 특히 영국이나 미국 (USA)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으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본 1867> 1권에서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오히려 노동자들 스스로 조직하고 경영하고 협동해서, 대공장을 운영해 나갈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형성했다고 보고, 이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실천'할 것인가? 이것은 남겨진 과제로 봤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이민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미국에 대해서도, 미국이야말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한 조건을 구비했다고 봤다.
따라서, 이 두가지 얼굴에 대해서 수 많은 논쟁들이 지난 100년간 있었다. 다만 이것은 경제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실천 주체들과 그 나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가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자기의견과 답변을 해주긴 했지만, 러시아 경제를 다 연구한 것도 아니었다.
쟁점 5) 파업하는 노동자가 혁명적이거나, 자본주의 질서를 바꾸는 세력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것은 선험적으로 마르크스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한국이 노동운동이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파업 숫자는 캐나다보다 더 빈도수에서 적다는 통계도 있다. 그만큼 한국 노동운동과 노조는, 특정 몇 군데에서 강력하게 정치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실제로 5~10인, 10~50인 사이 중소규모 회사에서는 '노조 건설'이나 '파업'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후자 같이 '노동3권'이 언감생심인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에게는 노조활동도 '주관적으로는' 혁명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나 소유권 법률을 바꾸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정치,문화, 교육제도와 연결이 되어야 하고, 정당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통해서든, 법률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매개로 하건, 전체 사회적 합의를 바꾸고 개혁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임금인상 투쟁, 정리 해고 반대 투쟁, 노동 여건 개선, 직장 내 성추행 금지 등 다 유의미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투쟁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상승할 것인가? 그 문제는 또다른 정치 투쟁 영역이다.
쟁점 6)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주의인가?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 1844년 파리-경철 수고, 이런 책에서 나오고 있는 자연-인간과의 관계, 공산주의 최고 목표는 인간의 5감각의 발달에 있다는 마르크스 주장이나, 자연 (nature)을 인간의 몸과 비유하고, 몸은 자연의 연장이라고 본 점 등을 더 발달시킨다면, 단지 마르크스 생각을 '생산력주의'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도, 마르크스와 엥엘스가 대화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마르크스가 말하길,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낚시를 하고, 밤에는 양을 몰고 집으로 돌아오고, 저녁 먹고 나서는 문학 비평을 하고, 그렇지만 어느 한 개 특정 직업에 매달릴 필요는 없고" 그런 사회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노동 분업' (계급 지배를 동반한)을 극복하는 다음 단계,우리가 바라는 이상사회라고 말한다.
따라서, 생산력주의나, 마치 자본주의 '성장'만을 강조하는 신-고전파나 보수층과 마르크스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은, 1) 마르크스가 말한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실제 마르크스를 읽지 않았거나 (*대부분 소련 북한 학자들이 그러함)
2) 과거 존재했던 소련, 동유럽, 혹은 북한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의 정치적 실천을 보고서, 그것이 마르크스의 정치적 실현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을 주요 단어로 선택하고 분석하고 설명적 비판용어로 사용했다는 것과, '노동' 중심이나 '노동만이 최고', 혹은 자본주의 성장을 찬성하고 '생태계' 파괴를 용인했다는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적절한 비판은 아니라고 본다.
마르크스 정치학은 '노동 안에서' 그리고 '노동 바깥에서', 인간의 자유를 묘사하고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쟁점 7)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생각이나 책으로, '생태' 문제를 해결하거나 진단할 수 있는가?
이것은 세종대왕에게 스마트 폰 건전지를 계발하라는 요구와 비슷하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는 자본주의 생산력에 '경외'를 보내던 때였다. 평균수명 50세도 안되던 시절이고 의학기술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2014년은 '근대화'를 반성해야 하는 시대이고, 한국도 선진국 따라잡기에서,지금은 '근대화'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고 '전통과 현대'라는 주제를 가지고, 보다 더 나은 문명과 '안전한 도시 ' 친-자연적인 도시' '친-여성 어린이 노인 도시'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70년대~80년대 찬영하지 마다 않던, 영남 임해공업단지 (포항 울산 부산 거제 마산 창원)가 지금은 공해와 위험도시 (핵 발전소 등)로 변했다는 점은, 굳이 마르크스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전광철님이 제기한 주제들과 본래 문제의식에는 미흡하지만, 우선 토론용으로 답변을 드립니다.
위 주제들은 거의 100년간 토론된 주제들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실천적인 주제들이니까요.
전광철
November 17, 2014
맑스주의의는 공장노동자(조직된 노동자, 즉 우리로서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단결된 힘으로 혁명을 일으켜 경제 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사회의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이론이다. 이 기본 근거는 노동자들은 모두 착취당하고 있으며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프롤레타리아' 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현실에서 맞을까? 이 현실을 기초로 해서 우리의 노력을 현 상황에 맞게 전개시키면 될까? 다시 말해, 예를 들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계급의 단결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만들면 될까? 매우 회의적인 경로이다.
노동자들은 모두가 착취당하고 있지 않다. 모든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믿음은 매우 큰 부분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에서 생겼지만, 이는 자본도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잘못된 이론, 또는 이데올로기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오히려 자본의 이 막대한 가치생산의 힘을 알기에 그곳에서 어떻게든 머물며 이점을 취하려는 현상유지적 관점을 갖는다. 오히려 착취는 자본을 중심으로 그들과 결탁한 노동자들이 비정규 노동자, 열악한 중소기업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실업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여기서 착취는 잉여가치설의 착취가 아니라(냉혹한 금전적 계산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치법칙의 세상에서는 자본과 기술 효율성의 혜택을 보는 것이, 즉 다른 여타 계급과 열악한 처지에 놓인 존재들의 상태에 무관심한 것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 상대적 삶의 악화와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하는 의도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무관심의 착취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대부분) 지금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구조조정 당하여 심각한 삶의 후퇴를 겪게 될 경우에는 혹 모르겠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 혁명론(또는 변혁론)의 배반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덫은 생산력주의이다.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부의 불평등이 강화되고, 노동자들은 더욱 착취당하고, 생산력 향상을 위한 기술혁신이 끊임없이 생산관계를 불안에 빠뜨리고, 과잉생산과 이윤율 저하에 따른 공황이 발생하면 혁명이 일어날 조건이 무르익기 때문이다. 이는 성장주의의 또 다른 설명이다. 자본은 성장 자체를 위해(즉, 부의 축적, 확대재생산) 성장을 원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반대, 즉 성장의 혼란을 틈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장을 반대하지 않으며 그 혼란을 기다리며(의식적 노력을 하면서) 또는 생산력(성장)의 주요 담지자인 대기업이나 대공장의 조직된 노동자들에 초점을 맞추며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이러는 가운데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으로 해왔던 일은 물질적 부의 확대와 그에 따른 생태계 파괴이다.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시점에 와있다. 노동자 계급은 '당연하게 하나'이지 않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고, 자본과 함께 자연을 착취할 수도 있다. 노동자가 마찬가지로 노동하는 계급인 농민들을 착취하는 구조는 산업사회의 역사이자 우리의 근대화의 역사이자 소비에트 혁명 러시아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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