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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

르포-또 불길 덮친 ‘판자촌’ 구룡마을··. 신문.기사. 666가구.대책 절실

by 원시 2023. 1. 22.

르포-또 불길 덮친 ‘판자촌’ 구룡마을···“불 걱정 없이 자는 게 소원”
2023.01.20 16:35
강은 기자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소방대원들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화장실이 멀어서 부엌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형광등이 ‘번쩍’ 하는 거야. 문을 열고 나와 봤는데…. 세상에, 이런 난리가 있나.”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 불길이 덮친 20일 오전 마을 주민 신모씨(71)는 폐허가 된 마을의 좁은 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안팎에 이른 추운 날씨에도 그는 보라색 내복 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신씨는 “집이 전부 다 타버렸다”며 담담히 말을 이어가다 갑자기 눈물을 보였다.

“머리털 나고 평생 텔레비전을 처음 샀는데, 정말 처음 샀는데….” 그는 구입한 지 1년이 채 안 된 ‘유일한 낙’을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


90만원 넘는 텔레비전을 36개월 할부로 장만했다는 그는 “(SBS 예능프로그램) 미운오리새끼를 많이 본다”고 했다. “나는 웃긴 것만 봐. 슬픈 건 이제 못 봐.”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이날 오전 6시27분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 큰불이 났다.


화재 발생 3시간이 지난 오전 9시30분,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서 신축 건물과 아파트 공사 현장이 줄줄이 이어지는 선릉로를 따라 들어가니 잿덩이로 변해버린 ‘강남 한복판 판자촌’이 눈앞에 펼쳐졌다. 큰 불길은 잡혔다고 했지만 여전히 마을 곳곳에선 회색 매연이 피어올랐다. 이곳에는 약 666가구가 살고 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소방대원들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소방대원들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강남구청이 지원하는 숙소로 아직 이동하지 못한 주민들은 ‘마을회관’이라 불리는 컨테이너 건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대부분 이곳에서 30년 넘게 살아 온 이웃들이다. 주민들은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서로를 살뜰히 챙겼다. 옹기종기 모여 컵라면을 나누어 먹거나 급히 대피하느라 넘어졌다는 이들의 몸에 파스를 붙여주는 등 서로를 다독이는 모습이었다.

맨발로 대피하는 바람에 발이 꽁꽁 얼어버렸다는 이모씨(60)는 “어제 늦게 잠들어서 밖에서 주민들이 불이 났다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며 “전화 울리는 소리를 듣고 간신히 깼는데 안 그랬으면 나는 지금 여기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조모씨(55)도 “도대체 (화재가)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면서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구룡마을은 1980년대 후반 강남 도심 개발로 파생된 곳이다. 주거지에서 밀려난 영세민 1000여 가구가 구룡산과 대모산 자락에 모여 살며 판자촌을 이뤘다.

면적 26만여㎡, 축구장 37개가 넘는 규모다. 주민자치회 실장을 맡고 있는 김재완씨는 “그나마 강남이니까 ‘파출부’라도 하지, 이곳 주민들이 다른 데서는 일거리를 구할 수 없다”고 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헬기가 진화에 동원되고 있다. 성동훈 기자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헬기가 진화에 동원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구룡마을에서 재난은 상시적이다. 2012년에 발생한 화재는 30분 만에 21가구로 번졌고 2014년 11월에는 고물상에서 벌어진 화재가 63가구를 태우고 주민 1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7년 3월에도 주택 29채가 불탔고, 지난해 3월에도 11채가 소실됐다. 화재만이 아니다.


지난해 8월 폭우 때는 주택 침수로 100여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조씨는 “구룡마을은 불이 나면 1분이면 전부 다 번진다”면서 “제발 걱정 안 하고 깊은 잠 자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신씨도 “추석엔 물난리가 나고 설에는 불이 난다”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말했다.

구룡마을의 주택들은 ‘떡솜’이라 불리는 솜뭉치를 사방에 두르고 있었다. 방한과 단열을 위해 건물을 덮고 씌운 비닐, 합판, 스티로폼도 불이 붙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화재로 이어진다.



구룡마을은 노후 가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데다 가스통, 연탄이 늘어서 있고 전선이 엉켜 있어 작은 불씨가 큰 화재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주변 소화전이 드문 탓에 소방당국이 소방용수를 끌어오기도 어렵고, 복잡히 얽힌 전선 탓에 소방장비의 접근도 쉽지 않다.

화재가 구룡마을을 덮칠 때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대응책을 냈다. 2011년부터 답보 중인 구룡마을 정비방안뿐만 아니라 2015년 구룡마을 소방안전 종합대책, 2017년 소방안전 대책 추진 등에 이어 지난해에는 ‘구룡마을 재난발생 제로화’ 정책도 추진됐다. 그럼에도 크고 작은 화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구룡마을 주민들이 행정을 불신하는 이유다.



구룡마을 2지구에 살고 있다는 정모씨(77)는 “이번처럼 큰일이 있을 때만 정치인들이 찾아오지 늘 이용만 당한다”면서 “전깃줄이라도 정리해 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조씨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고, 서울시민 아니고, 강남구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번 화재로 구룡마을에서는 주택 60채가 소실됐으며 마을 4~6지구 주민 500여명이 대피했다.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지만 6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소방당국은 발화 원인과 정확한 피해 규모를 조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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