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더워 잠시, 인터넷과 정치를 생각해보다.

1. 난 논객이 아니고, 태권도로 치면 파란띠나 되려나?

내가 진보신당 게시판에 글을 쓴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논객'이냐고. 웃고 말았다. 논객(論客)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맹자이다. 맹자(孟子)가 양혜왕을 만나서, 하필이면 '왕이 되어가지고 이익을 이야기하느냐 ?'(하필왈리 何必曰利)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논객은 이런 사람을 일컫는 거 아닌가? 혹은 하마못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수많은 식객(食客)들 정도는 되어야 논객의 반열에 오르는 것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내가 그냥 웃고 만 것이다. 한국에서 인터넷 논객은 2002년부터 만들어진 말이다. 컨텐츠 부족으로 1~2년 못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그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야망이 정해진 사람들 (서프라이즈 등), 혹은 '진보'를 이야기하지만 준비가 너무 부실했다.  

2. 자기 색채가 뚜렷해야 하는 진보신당 인터넷 게시판 

포르노 동영상 공급, 인터넷 게임, 홈 쇼핑, 일반 동호회와 비교해서, 예를들어 진보신당 게시판은 무슨 색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맹자 이야기를 해보다. 맹자는 아마 군자(이상적인 왕)에게 한 이야기겠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나이가 많다고, 돈이 많다고, 지식이 많다고, 자기 배후 배경이 많다고' 이 네가지가 많다는 것을 내세워서는 안된다고 <맹자>에서 말한다. <맹자>를 처음 접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이 말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1) 인터넷에서는 맹자가 말한 4다 (네가지 많은 것)를 피하고, 수평적으로 만났으면 한다. 
한가지 사례를 이야기하면, 민주노동당 시절, 최장집 교수를 마치 '진보의 대표적인 지식인'처럼 권위를 부여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좌파는 우파와 달라야 한다. 사람을 대할 때, 절대적인 숭배 태도나, 무작정 묻지마 '권위 부여'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슨 타이틀, 직위 등을 먼저 내세우거나 거기에 의존하는 작태는 버려야 한다. 인터넷 여론장은, 마치 투표 4대 원칙(부르조아 민주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처럼, 그런 속성을 지닌다.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현실 사회적 관계의 편견을 괄호치고, 1인 1표 행사를 하는 곳이다. 

(2) 대화를 즐겨야 한다. 
그 다음은,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고찰해야 할 것은, '대화 (對話: 상대가 있다는 의미)'의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다. 이명박 몰입영어교육 때문에 영어 쓰는 게 꺼려지지만, 대화의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잠시 써본다.  다이얼로그 dialogue, 독일말로는 디알레틱(Dialektik) 이라고 하는 것도, 다 di (two 두개, 두 사람, 두개의 사물, 두 측면, 두가지 특질)가 붙어있듯이, 인터넷에서는 대화를 잘 했으면 한다. 

(*   rabbit/rabbit (12).gif이거 요새 내가 배운 것이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한물지난 유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한물지나갔지만 배울려고 애쓴다) 대화는 실은 한자어로 보면 인간 (人間)할 때, 그 뒷자 '사이 間'을 의미한다. 

(3) 가급적이면 자기 주장의 근거들을 제시했으면 한다.

인터넷이 없으면 해외에 있으면서 진보정치 공간을 학습할 기회를 박탈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인터넷 발달과 와이브로와 정치공간의 결합을 긍정적으로 난 해석한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 경험으로 비춰보건대, 글이나 말의 컨텐츠가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것은 부정적인 모습이고 인터넷의가장 큰 맹점이고 한계이다. 소위 논객들은 이미 정해진 목표들을 향해 "목소리는 큰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가수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눈빛도 맑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고. 굳이 논객들이 아니더라도, 민주노동당 게시판 (2004년-2008년)은, 당원들이 혹은 논객들이 대화를 통해서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하려는 마음 보다는, 그리고 나의 상-대(對)와 교접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 제왕의 성을 쌓으려고 할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악날한 범죄행위도 자행되었다. 관객들은 다 떠나게 되어있다.

(4) 물질적 심리적으로 뭔가 얻어가는 인터넷 공간이었으면 한다.

 좌파가 아직 아마추어라도 진실성을 가지고 있고,그 진실성과 구체적인 전문 능력을 결합시켜낸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주의 좌파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앎이 어떠한 타인의 지배나 군림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배체제를 조장하는 큰 바위를 뚫는 한 방울의 낙수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럽의 역사 기록을 보면, 좌파와 사회주의 개념, 혹은 민중들의 저항 철학은 '너무나 너무나 윤리적인' 요청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심리적 위안이란, 이러한 윤리적 요청들과 관련된 주제들을 많이 계발하고, 풍부하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 춤, 책, 영화, 스포츠, 정치, 가족, 연인, 음식, 옷, 가구 등 모든 소재들과 우리 활동 공간에서 만나는 것들에서 말이다. 그렇지 않고, '윤리'만 강조해버리면, '나는 진실한데, 너는 진실성이 떨어진다. 나는 옳은데, 너는 그르다'는 식 대화밖에는 할 수 없다. 보는 관중들 물병 던지고 그라운드로 난입한다. 이런 식 대화나 글쓰기는 물질적으로도 심리적으로 뭐 하나 얻어가는 게 없다. 

(5) 좌파가 정치 컨텐츠를 드러내고 발굴하는 '접점'은 어디인가? 

한가지 사례만을 들어보자.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이나 노조건설 (삼성 회사)이 바로 일종의 사회적 화해이다. 이는 마치 예수의 화해의 죽음(Versoehnungstod 독일어 화해+죽음 = 예수 십자가에 못받혀 죽음) 과 비슷한 것이다. 칼라tv에 나온 뉴라이트들과 우익 청년들의 좌파 이해는 "예수의 죽음, 화해의 죽음"과는 다르다. 이들은 마치 좌파는 계급의식를 고양하고 인간을 분열적 존재로 파악하는 쌈박질 좋아하는 인간들로 치부해버린다. 더러운 그림이다. 예수죽음에 대한 좌파적 해석은 바로 그 죽음이 사회정의를 이루는 한 방식라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고 그 해법이 드라마처럼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좌파의 글쓰기는 이러한 예수의 '화해의 죽음 (인간과 신의 분열, 인간과 인간의 분열을 극복하는 화해의 죽음)'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적 기독인들의 '고정불변'의 예수해석에 그쳐서는 안되고, 늘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현실을 담아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보이지 않는, 칼라tv가 조명하지 못하는, 수많은 '화해의 죽음들'이 귀신이 되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마치며: 그나저나 왜 인터넷 여론장에서 대화가 잘 안되는가 ?  목표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대화의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