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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

광주 항쟁 이후 2019년까지 피해자들 중 46명 자살. 전두환 일당은 감옥에서 죽었어야 했다.

by 원시 2021. 11. 24.

한참 잊고 살았던 주제다. 잊혀진다는 것은 이렇게 무섭다. 지난 40년 동안 광주 518 피해자들 중, 46명이 자살했다.

피해자들의 정신적 건강이 위험하고, 그들의 일상이 힘겹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다.

이런 정신적 피해를 돈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김대중과 김영삼은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해주는 오류를 범했다. 전두환 노태우 1212 반란자 일당들이 광주 518 당시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해마다 와서 사죄를 해도, 이들의 심리적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정치란 무엇인가?  눈 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의를 용인하고, 전두환 일당의 사기만 북돋아준 김대중 김영삼의 정치적 잘못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전두환 일당은 감옥에서 죽었어야 했다. 

 

 

이광영 (68세) 광주 항쟁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에 맞고 쓰러진 시민 5~6명을 병원으로 옮기던 중, 계엄군의 총에 이광영씨가 맞음. 척추 관통으로 걸을 수 없게 됨.  전두환이 사망한 날, 11월 23일 오후 이광영씨가 자기 고향에서 자살했다. 자살의 이유들은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수없이 많을 것이다. 

 

 김명희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2020년 5·18 40주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5·18 자살의 계보학: 치유되지 않은 5·18>에서 “2019년 11월까지 알려진 자살 피해자가 46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전두환 사망 날 숨진 채 발견된 5·18 피해자…80년 이후 최소 46명 ‘자살’
글·사진 강현석 기자입력 : 2021.11.24 11:48 

 


“5·18 다 묻고 간다” 유서 남긴 채 떠나
 계엄군 총에 맞아 평생 휠체어 생활
 5·18부상자회 회장 “피해자 고통 계속”

 

 


24일 광주광역시의 한 장례식장에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돼 평생 고통을 겪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고 이광영씨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강현석 기자

 



5·18민주화운동 학살의 최고 책임자로 꼽힌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사망한 날 5·18 당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평생을 고통 받았던 피해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5·18을 다 묻고 간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1980년 5·18 이후 뒤틀린 삶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는 최소 46명에 이른다.


2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3일 오후 4시쯤 전남 강진군의 한 저수지에서 5·18부상자인 이광영씨(68)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씨가 발견된 곳은 그의 고향 마을이었다.


경찰은 지난 22일 “전북 익산에서 홀로 요양을 하고 있던 이씨가 유서를 남기고 연락이 두절됐다”는 가족들의 신고를 받고 고향 마을을 수색하고 있었다. 경찰 조사결과 이씨는 이날 오후 11시30분 쯤 혼자 차량을 운전해 고향에 도착했다.
이씨가 숨진 곳 인근에는 그가 태어난 집과 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경찰은 그가 이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A4용지에 가족들에게 유서를 남겼다”고 말했다. 유서에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함을 전하는 말과 함께 “5·18에 원한도 없고 작은 서운한 것들은 다 묻고 간다”고 적혀 있었다.


이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쏜 총탄이 척추를 관통해 평생 휠체어를 타고 생활해 왔다. 최근 통증이 더욱 심해진 그는 25일 광주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로 예약한 상태였다.


1980년 당시 스님이었던 이씨는 ‘부처님오신 날(5월21일)’ 행사를 돕기 위해 광주의 한 사찰을 찾았다가 5·18과 맞닥뜨렸다. 행사 준비를 위해 광주 도심 시장을 찾았던 이씨는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만행을 목격했다.


이씨는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21일 숨지거나 다친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활동을 했다. 이날 오후 광주 남구 월산동 인근을 지나다 계엄군의 헬리콥터에서 지나가던 학생에게 총을 쏘는 것을 목격하고 이 학생을 병원으로 옮기기도 했다.


금남로 인근에서 부상당한 채 쓰러진 시민 5∼6명을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던 이씨는 자신도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았다. 총탄은 이씨의 척추를 관통했고 그는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됐다.


이씨는 1982년 5·18당시 부상자 18명과 함께 ‘부상자회’를 만들었고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 때에는 증인으로 출석해 계엄군의 만행을 증언하기도 했다. 

 

이씨는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씨의 재판에도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씨는 2019년 5월13일 3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서 자신이 목격한 헬기사격을 증언했다.


이씨의 갑작스런 죽음에 5·18피해자들은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또다른 5·18 부상자인 강상원씨는 “이씨가 최근 통증이 갈수록 심해져 힘들어 했다”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다.”고 전했다.


5·18 이후 이씨처럼 고통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는 최소 46명에 이른다.

 

 김명희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2020년 5·18 40주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5·18 자살의 계보학: 치유되지 않은 5·18>에서 “2019년 11월까지 알려진 자살 피해자가 46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1980년대 25명, 1990년대 4명, 2000년대 1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5·18 직후 10년간 높은 자살률을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또 2004년 한 해에만 7명이 자살하는 등 2000년대 이후 다시 자살빈도가 높아졌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5·18 생존자들의 자살피해는 국가폭력으로 인한 사회구조적 자살이라고 판단한다”면서 “더욱 심각한 것은 5·18 자살자들이 삶의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이 2세대와 유가족의 피해로까지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박갑술 5·18부상자회 회장은 “이씨가 얼마 전까지도 사무실을 찾아와 5·18 손해배상 문제를 논의했는데 참담하다”면서 “전두환은 사죄도 않고 사망했지만 많은 5·18피해자들은 트라우마로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local/local-general/article/202111241148001#csidxf6f4fd96ec4a2db9347f0b21d159b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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