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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3공화국

1964년 경산 하양 무학농장 설립, 1964년 새마을 운동 이전, 스코틀랜드 영거 수산나 메리(Younger Susannah Mary)

by 원시 2023. 10. 11.

영거 수산나 메리. 스코트랜드 태생, 1959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한국으로  경북 경산 하앙 지역에 정착함.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수산나 여사는 이임춘 카톨릭 신부님과 같이 무학 농장을 건립하고, 가난했던 지역 주민들을 고용해  옥수수 감자 사료 식물을 심고, 우유를 생산함. 

 

그러나 한 우유업체가 깡패와 결탁해 무학농장 운영을  훼방 놓아, 결국 수산나는 무학농장을 매각하게 되었고, 그 자금으로 무학 중학교를 설립함.

 

(수난사 여사가 말한 무학 농장 폐쇄 이유.  “하지만 애석하게도 언덕 위 농장은 실패했는데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입하도록 도와 준 젖소들이 새로운 목장과 경쟁에 휘말렸고, 새 목장 사람들은 깡패들을 동원해 대구 가게들이 우리 우유를 못 사게 만들었다.”)

 

수산나의 무학농장 건립은 1964년이면 박정희 유신독재의 산물인 새마을 운동보다 훨씬 더 앞선 자발적 시민운동에 가깝다. 

 

수산나 이후 활동. 1973년부터 2004년까지 프랑스 루르드 옥실리움 문화양성센터에서 세계 여성지도자 교육을 위해 프랑스에 체류.

 

은퇴 이후, 한국에 거주.

 

2020년 5월 20일, 제13회 세계인의 날에 올해의 이민자상(대통령 표창)을 수상.

 

 

 

 

 

영거 수산나 메리 (한국이름 양수산나)에 대한 소개글.

 

세상읽기…영국인 양 수산나 여사와 무학농장
발행일 2023-03-08 09:50:10 


김준식

JS소아청소년과 원장·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김준식

하양읍에서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나라얼 연구소의 상엿집에 오르다 보면, 폐쇄돼 방치된 무학 농장을 볼 수 있고, 푸른 색 문에 돌로 쌓여진 축사가 외롭게 서 있다. 그 곳에서 바라보는 금호강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무학농장을 세웠던 수산나 메리 영거 여사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갖고 있을 듯 하다. 1950년대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양 수산나(우리나라 이름) 여사는 1959년, 23세의 나이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 노동당 의원, 외무부 차관 등을 지냈고, 외삼촌과 사촌오빠 2명이 6.25전쟁에 참전해 전쟁 후 가난과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고 이들을 위해 사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구두닦이, 넝마주이,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삼덕동에 세 칸 한옥을 얻어 가톨릭 근로소년원이 시작됐고, 여자 아이들에게 양재와 미용 등의 기술을 가르쳐 자립의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가톨릭여자기술학원을 열었고, 마침내 무학농장을 개척했다. 영국의 구호단체인 옥스팜과 경북도지사의 도움을 받고, 가톨릭국제개발조직의 후원과 지원을 받아 소, 닭, 돼지 등의 가축을 키우는 초현대식 농장과 30만 평에 달하는 농장을 일구었으나 가난한 아이들에게 우유와 계란을 무상으로 나눠주자, 위기감을 느낀 우유업체의 위협과 방해로 무학농장은 결국 매각되고 무학 중학교의 개교 자금으로 사용됐다. 

 

무학농장과 무학중학교는 하양 주민에게 큰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발달 단계에서 대상영속성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대상들이 독립적인 실체로 그 대상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장소에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생후 6개월이 되면 아이가 흥미있어 하는 물건을 손수건으로 가리면 손으로 치우는 행동을 하게되고, 10개월이 넘으면 흥미있는 물건이 책상에서 떨어지면 찾으려고 관심을 표하게 된다. 엄마가 보이지 않더라도 어디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분리 불안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탐색과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성장하게된다.

하지만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른에게 새 친구에 관해 이야기 하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나이는. 형제는. 그 애 아버지는 얼마나 버니.”라고 묻는다. “목소리는 어떻니.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 등의 말은 묻지 않는다. 그건 어른들이 숫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판단 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숫자’라는 척도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세상이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탓인지 사람의 내면은 보려 하지 않고 가시적인 것을 중요시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 하다 보니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적인 것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양 수산나 여사는 1973년부터 2004년까지 프랑스 루르드 옥실리움 문화양성센터에서 세계 여성지도자 교육을 위해 프랑스에 체류하다가 틈틈히 한국을 방문했으며, 은퇴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된장찌개인 양 수산나 할머니는 영국은 친정집이고, 한국은 시집이며, 프랑스는 직장이라며 “사람을 위한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남을 위해 실천할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양 수산나 할머니는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소중한 것을 깨우치게 하는, 우리가 어릴 때 깨우쳤던 대상영속성을 회상하게 하는 소중한 경상도 할머니이다.

 

 

 

양수산나 여사, ‘올해의 이민자상’ 수상


대구·경북에서 평생을 어렵고 상처받은 사람 위해 헌신... 하양 무학농장 설립·운영


2020-05-21 오전 9:40:15


▲ 영거 수산나 메리(Younger Susannah Mary)여사, 한국명 양수산나

 



하양 무학농장 설립·운영과 무학중학교 지원 등으로 60년대 낙후된 우리 지역의 자립기반 마련과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 영거 수산나 메리(Younger Susannah Mary, 한국명 양수산나) 여사가 20일, 제13회 세계인의 날에 올해의 이민자상(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세계인의 날은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지정한 법정기념일로 지난 2008년부터 매년 5월 20일에 기념해오고 있다.

 

법무부는 20일 제13주년 세계인의 날 기념식을 ‘코로나19’ 확산 예방과 생활 속 거리 두기 실천을 위해 외빈초청 및 공연행사를 취소하고, 대회의실에서 유공자 포상식 행사로 행사규모를 축소하여 개최했다.

 이날 양수산나 여사에 대한 대통령표창 등 총 17명의 유공자에 대한 정부포상이 수여됐다.
 
올해의 이민자상을 수상한 양수산나 여사(84세)는 지난 1959년 옥스퍼드대학을 갓 졸업한 23세의 나이로 한국에 와 대구·경북 지역에서 여성과 청소년 자립을 위해 힘썼다. 

 

그녀는 1960년 대구 효성여대 영어교수를 시작으로 대구가톨릭여자기술원(현 가톨릭푸름터) 설립·운영 등 사회복지시설 건립, 미혼모 지원 및 청소년 교육 등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수산나 여사는 지난 2011년에 대구시 명예시민으로 인정됐다.
 


▲ 최근 거주하는 시설에서의 모습

특히, 1964년부터 무학중·고등학교 설립자인 고 이임춘 펠릭스 신부님과 함께 무학농장을 설립·운영하고, 무학중학교 운영을 지원함으로써 당시 하양지역의 빈민구휼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제는 84세의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이날 포상도 가톨릭푸름터 이윤숙 원장이 대리 수상했다.

 


▲ 지난해 영남대에서

 
이번 수상자 공적에서 그녀는 한국에 온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벌써 60년도 더 된 일이다. 그 배가 부산항에 도착했던 날이..... 외삼촌과 사촌오빠 2명이 6.25 전쟁에 참전해 이미 한국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으나 직접 두 눈으로 전쟁의 잔해로 남은 가난한 땅을 보며 어렵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나 자신의 소명임을 알았다.” 라고...


그녀는 영국 명문가 귀족으로 옥스퍼드를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우리 지역의 소외된 여성과 청소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해 일생을 낮은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기쁘고 유쾌하게 사셨다.

 

 

 

 

 

 

 

 

 

 

 

 

 

 

 

 

 

 

 

 

 

 

 

 

 

 

 

 

 

 

 

 

 

 

 

 

 

지역 정서, 한국 정서와 맞지 않아서...라는 말은, 다른 기사들에 따르면, 무학농장에서 생산된 우유와 달걀을 무상으로 학생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지역 우유업체와 갈등을 겪었다고 함.

 

 

 

 

 

 

 

 

 

 

수산나 영거, 이임춘 신부 

 

 

 

 

 

 

 

 

 

 

2019년 보도 자료.

 

 

 

 

 

 

 

 

 

 

https://youtu.be/YO-w6WT1cTk?si=SmJsjehs7EwomszF 

 

유투브 자료. https://youtu.be/f9uDDqNIabE?si=VOJLFmxUbe3-rAgW 

 

 

유투브 자료.

 

https://youtu.be/hvd0j9Dq__4?si=Aq3iaxzGeChkaLIJ 

 

 

인터넷 자료.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구대교구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다진 양 수산나 여사
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다


취재 김선자 수산나 기자



지난 8월 하양무학로교회 조원경 목사가 1960년대에 양 수산나(Younger Susannah Mary) 여사가 설립한 무학산 무학농장 근처 부지 200평을 교구에 기증해 교구에서는 그 뜻을 기리려 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양 수산나 여사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한국에 감사하고 대구대교구에 감사하다.”며 “하양이 개발되기 전에 당시 하양본당의 이임춘(펠릭스) 신부님이 무학산 위 땅을 사서 그곳에 목장을 해 그 지역 농부들의 가계에 보탬이 되는 수입원을 마련하고 싶어서였다.”고 소회했다.

 

 

 또한 “하양 농부들은 농장에서 일해 수입이 생겼으나 자녀들을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기에는 여전히 가난했고 신부님은 농부들이 하양에도 대구만큼 좋은 학교가 있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무학중학교를 시작했고 

 

나중에 고등학교까지 설립해 명문학교로 키웠다.”면서

 

 “하지만 애석하게도 언덕 위 농장은 실패했는데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입하도록 도와 준 젖소들이 새로운 목장과 경쟁에 휘말렸고, 새 목장 사람들은 깡패들을 동원해 대구 가게들이 우리 우유를 못 사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감사한 시간’이라고 밝힌 수산나 여사는 평신도 선교사로서 대구•경북지역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공헌했다.

 

 1959년 제7대 대구대교구장 고(故) 서정길(요한) 대주교의 초청으로 대구땅을 밟은 양 수산나 여사는 세상의 끝까지 선교하겠다는 열망으로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나라 한국땅에 왔다.

대구에 도착해 처음 효성여자대학교에서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며 경북대학교에도 출강해 영어를 가르쳤던 양 수산나 여사는 “서정길 대주교님을 찾아 뵙고 작은 집을 하나 얻어 고아원에서 나와 거리를 헤매는 불쌍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와서 보살피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며 살고 싶다.”고 간청을 드렸다. 

 

그렇게 시작된 가톨릭여자기술학원(1962)이 현재 가톨릭푸름터의 전신으로 수산나 여사는 초대 원장을 지냈다.



성공회 가정에서 자란 그녀가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성경을 펼쳐 읽으면서부터였다. 

 

수산나 여사는 “마태오 복음을 시작으로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까지 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순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감쌌고, 대학 3학년 때 비로 소가톨릭에 입교했다.”고 고백했다.



양 수산나 여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복지사의 자격을 얻기 위해 런던 경제학교(L.S.E.)에서 1년 동안 공부했다.

 

 또한 1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선교에 관심있는 젊은이들과 매주 집에서 모임을 가졌던 그녀에게 프랑스에서 열리는 여름 캠프에 참석 할 기회가 주어졌다. 

 

캠프에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천주교회사’에 관한 내용의 특강을 들은 수산나 여사는 “한국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놀라운 신앙으로 한국의 초기 교회사가 엄청난 빛의 폭발이었다.”며 

 

“숱한 박해에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한국 순교성인들의 모습과 신자들 스스로 모여서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키워가는 모습 등 특강을 듣는 내내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수산나 여사는 기도 중에 한국을 기억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한국과 관련된 이들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은퇴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영어회화를 지도하며 그 자녀들과는 성극을 준비해 공연을 하는 등 일상의 즐거움을 이웃과 나누며 살았던 양 수산나 여사는 현재 건강상의 이유로 교구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나이가 드니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고 기력도 쇠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수산나 여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며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남을 위해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와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편에서 봉사하며 순명의 삶을 산 양 수산나 여사는 I960년대 우리나라에 사회복지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에 가장 불쌍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위해 살며 온전히 평등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살리는 일에 투신하며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마지막으로 양 수산나 여사는 “돌이켜보면 이 모든 일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이와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면서 “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https://bit.ly/3RTZPrE

 

월간 빛

지난 8월 하양무학로교회 조원경 목사가 1960년대에 양 수산나(Younger Susannah Mary) 여사가 설립한 무학산 무학농장 근처 부지 200평을 교구에 기증해 교구에서는 그 뜻을 기리려 하고 있다. 이 소식

www.lightzine.co.kr

 

 

대구대교구, 양 수산나 여사 기념공간 조성

청소년·여성 자립에 큰 공헌
개신교 목사가 토지 200평 기증
옛 무학농장 인근에 사업 추진

발행일 | 2022-08-21 [제3307호, 3면]
        

양 수산나 여사.


대구대교구가 한국에서 60년 이상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아온 양 수산나(수산나 메리 영거·Susannah Mary Younger·86) 여사를 기억하는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예정 장소는 경북 경산시 하양읍의 옛 무학농장 부지 인근이다. 하양무학로교회 조원경 담임목사가 8월 4일 토지 200평을 교구에 기증하면서 기념사업에 탄력을 받고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양 수산나 여사는 하느님 뜻을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겠다는 소명으로 23세이던 1959년 한국에 왔다. 

 

여사는 1962년 가톨릭여자기술원(현 가톨릭푸름터)를 설립하면서 소외된 청소년과 여성들이 자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964년에는 가난한 하양 지역 주민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무학산 중턱 100만㎡를 개간해 유럽식 목장인 무학농장을 조성했다. 무학농장은 몇 년 뒤 문을 닫아야 했지만, 매각대금은 무학중학교 설립자금으로 쓰였다.


하양무학로교회 조원경 담임목사(오른쪽)가 8월 4일 대구 남산동 대구대교구청에서 토지 기증서류에 서명한 뒤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 제공


교구는 조 목사의 토지 기증을 계기로 양 수산나 여사의 업적을 기리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토지를 기증한 조원경 목사는 “그 어려운 시기에 영국에서 오신 분이 한국인을 위해 희생하셨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큰 부끄러움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며 “저도 평소 여사님을 존경해왔지만, 그분의 뜻을 기리는 일은 개신교 목사인 저보다는 가톨릭교회가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어 기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조 목사가 토지 기증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 안상호 신부(요셉·대구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는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여사의 삶과 영성을 알리고, 조용히 삶을 돌아보는 자리로 조성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감리교회 목사님께서 기증하신 부지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 화해와 일치의 의미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세민 기자 semin@catimes.kr

 

 

 

언론보도 자료.

 

'푸른 눈 천사' 영국 명문가 출신 수산나 메리 영거 씨

김진만 기자 factk@imaeil.com
매일신문 입력 2019-11-13 11:30:18 


청소년·여성 복지에 평생 헌신…경산 (사)나라얼연구소 기념사업 추진


1959년 한국 찾아 독신서약 봉사활동

60년을 한국의 소외된 여성과 청소년 등을 위한 복지와 교육에 헌신해 온 수산나 메리 영거 씨. 사진작가 견석기 제공

 


영국 스코틀랜드 명문가 출신으로 23세 꽃다운 나이에 하느님의 뜻을 전도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소명으로 한국땅을 밟아 이를 실천하며 평생을 바친 수산나 메리 영거(Susannah Mary Younger·83. 한국명 양수산나) 씨.

그가 한국에 온 지 다음달 8일이면 만 60년이 된다. 그를 최근 달성군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생기 넘치고 쾌활했다. 간혹 기억이 깜빡할때도 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가 영국 국회의원과 외무부차관을, 남동생은 BBC 월드서비스 라디오 담당을 역임했다. 

 

자신도 옥스포드대학교에서 PPE(철학· 정치· 경제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다.그의 외삼촌과 사촌오빠 2명이 한국전쟁이 참전해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 모임에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에서 가톨릭 역사, 즉 많은 사람들이 온갖 박해 속에서도 가톨릭 신앙을 키워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참 인상적이었지요. 마침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이던 서정길 대주교가 한국에서 신앙을 전파할 평신도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어요."

그는 23살 때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음악과에 줄 피아노 7대를 화물선에 싣고 5주간의 항해끝에 1959년 12월 부산에 도착했다. 독신 서약을 하고 사회안에서 선교활동 등 교구의 목적에 따라 교회에 봉사하는 사도직 협조자(아욱실리스타)로서 삶을 한국에서 시작했다.

그는 대구로 올라와 소외된 청소년과 여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을 돌봐 주었다. 1962년 가톨릭여자기술원(현 가톨릭푸름터)를 설립한 뒤 여성들에게 미용 편물 등 기술을 가르쳐 이들을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립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대구의 사회복지, 특히 여성복지의 효시인 셈이다.


60년을 한국의 소외된 여성과 청소년 등을 위한 사회복지와 교육에 헌신해 온 수산나 메리 영거 씨. 사진작가 견석기 제공
수산나 씨는 1964년 가난한 하양 주민들을 위해 먹거리와 일자리를 만들려고 무학산 중턱을 개간해 농장을 조성하려던 하양성당 이임춘 주임신부를 만나 이 일을 함께했다.

그는 영국의 구호단체인 옥스팜 등을 통해 후원금 받아 농장 조성 자금을 조달하고, 하양주민들이 이 농장에서 일하고 품값 대신 받는 옥수수가루 등 구호물품을 지원받아 무학농장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농장에는 옥수수와 감자 사료 작물을 심고, 유럽식 축사도 지어 가축들을 사육하는 등 하양주민들의 일터가 되었다.

"무학농장이 몇년 후 깡패와 결탁한 우유업체의 방해로 결국 문을 닫았지만 이 농장이 가난한 주민들의 생계유지를 했고, 매각자금이 무학중학교 운영과 무학고교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이 역시 하느님의 역사를 인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73년 프랑스 루르드 '옥실리움 문화양성센터'로 파견돼 봉사를 하면서도 중간 중간 한국을 왕래했다. 2004년 은퇴 후에는 한국에서 여생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에 정착했고, 특강과 영어회화 등 봉사활동을 하다 이제는 쉬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을 후회해 본 적 없습니다. 한국이 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렇게 빨리 외국에 원조를 하는 나라로, 해외에 봉사자를 파견할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할 줄을 몰랐습니다. "

수산나 씨는 소외계층과 청소년 여성 복지에 일생을 바친 공로로 2011년 대구명예시민증을 받았다. 경산에서는 (사)나라얼연구소와 경산도시재생위원회가 공동으로 무학농장 조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하는데 기여한 수산나 여사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는 공간 마련과 무학농장을 등록문화재로 등록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임춘 카톡릭 신부 관련 글. https://bit.ly/3trRWiW

 

[강서뉴스] 하양성당과 이임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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