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조 3항. 개정안.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세번 역임가능)
현행안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
1963년 대선, 4년 후 1967년 대선 승리자는 박정희였다. 중임했으면 1971년 대선에서는 박정희는 출마 자격이 없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9년 헌법을 바꿔, 1971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1969년 박정희의 삼선개헌, 1972년 유신헌법, 1979년 박정희 피격과 전두환 노태우 1212 군사쿠데타, 1980년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 흐름에서 1969년 삼선개헌 폭거는 현대 한국정치를 규정했던 중요한 한 사건이었다.
1967년 대선 승리 이후, 박정희는 경제성장과 북한과 체제경쟁에서 승리를 위해서 자기가 3번째 대통령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박정희 휘하에 있었던 공화당은 꼼수를 낸다. 헌법 69조 3항 개정안을 발표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세번 역임가능)". 현행안이었던 4년 + 4년 = 총 8년 중임제를 바꾸려고 했다.
김대중이 박정희의 대항마로 떠오르게 한 연설이 이때 나왔다. 1969년 7월 19일 만 46세였던 김대중은 효창운동장에서 박정희 개헌 저지 반대 연설자로 나서, 박정희와 공화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지지자들로부터 격정적인 박수를 받았다.
군사작전을 방불케한 공화당 개헌 발의와 통과, 국민투표 실시까지.
1969년 8월 8일. 공화당, 삼선 개헌 위해 국회 발의 시도. 69조 3항. 개정안.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세번 역임가능) 현행안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
1969년 8월 22일 자. 박정희는 공화당에게 삼선개헌을 명령해놓고, 미국 닉슨을 만나러 미국으로 갔다. 박정희는 북한이 한국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창. 닉슨의 지원을 요청하고 돌아옴.
1969년 8월 30일자. 공화당 전당 대회. 삼선 개헌 추진 결의
1969년 9월 1일자. 공화당 72회 정기국회, 개헌안 추진.
1969년 9월 11일. 박정희는 개헌안 국회 통과를 확신한다고 회견. 공화당을 독려함.
1969년 9월 13일. 공화당과 신민당 대결 국면
1969년 9월 14일. 공화당이 개헌안을 변칙 처리.
1969년 9월 19일. 신민당 창당 대회. 원래 신민당 의원 3명이 개헌안에 찬성해, 그 당을 해산하고, 다시 신민당을 창당함. 신민당 결의문,
1969년 9월 20일. 신민당 결의문.
1. 우리는 민주반역의 집단인 공화당국회가 비겁한 절도적 수법으로 헌법을 훼손한 914 사태를 엄중히 규탄한다.
2. 우리는 불법 처리된 위헌적 국민투표를 통한 공화당의 개헌음모를 분쇠하기 위하여 국민전선을 시급을 강화한다. 그리고 원내외에 걸쳐 총력을 기울여 공화당의 음모를 끝까지 규탄 분쇄한다.
3. 조국의 민주보루인 우리들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굳게 단결하여 박(정희) 정권 타도의 당면 목표를 기어이 전취한다.
1969년 9월 26일. 공작 정치의 대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북한 김일성의 남한 침략을 막아내자고 역설.
1969년 10월 17일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 최종 결과. 찬성 67.5% (755만 3655표), 반대 32.5% (363만 6369표) 로 개헌안. 서울은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다. 그리고 투표율 자체도 가장 낮은 60.7%를 보여줘 박정희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보여줬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탓도 있고, 서울 유권자들이 이승만 독재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419 항쟁을 주도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서울에서 1963년 대선, 1967년 대선, 1969년 국민투표, 1971년 대선 모두 패배했다.
1969년 10월 20일 신민당 유진오 총재, 국민투표 무효 투쟁 선언. 국민과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겠다 발표.
1969년 10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 분석. 서울과 광주는 반대가 많았다. 동남고 현상이 발생했다. 63년 대선은 남북 현상, 67년은 동서 현상이 발생했었다.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 경기도 표결 결과. 1969년 10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 전라남도 결과.
박정희와 공화당이 반칙으로 처리한 개헌안의 국민투표 찬성으로, 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와, 신민당 김대중이 격돌하게 되었다.
효창운동장, 김대중 연설. 1969년 7월 19일 ( 만 45세)
https://youtu.be/QaMBgcXihR4
1969년 8월 5일자. 공화당이 애초에 만든 개헌안은 1)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5년으로 늘렸다 2) 4+4년 중임만 가능하게 했던 현행 헌법을 '현직 대통령은 2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식으로 바꿔버렸다.
대통령 탄핵 소추는 "국회의원 50인 이상 발의, 재적 3분의 2 이상"으로 바꿔 제안했다. 당시 헌행 헌법에는 '탄핵 소추는 국회의원 30인 이상의 발의에, 그 재적 과반수의 찬성'이었다.
1969년 8월 8일. 공화당, 삼선 개헌 위해 국회 발의 시도.
69조 3항. 개정안.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세번 역임가능)
현행안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
1969년 8월 22일 자.
박정희는 공화당에게 삼선개헌을 명령해놓고, 미국 닉슨을 만나러 미국으로 갔다.
박정희는 북한이 한국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창.
닉슨의 지원을 요청하고 돌아옴.
1969년 8월 30일자. 공화당 전당 대회. 삼선 개헌 추진 결의
1969년 9월 1일자.
공화당 72회 정기국회, 개헌안 추진.
1969년 9월 11일.
박정희는 개헌안 국회 통과를 확신한다고 회견. 공화당을 독려함.
1969년 9월 13일. 공화당과 신민당 대결 국면
1969년 9월 14일. 공화당이 개헌안을 변칙 처리.
1969년 9월 19일. 신민당 창당 대회.
원래 신민당 의원 3명이 개헌안에 찬성해, 그 당을 해산하고, 다시 신민당을 창당함.
신민당 결의문, 1969년 9월 20일.
1. 우리는 민주반역의 집단인 공화당국회가 비겁한 절도적 수법으로 헌법을 훼손한 914 사태를 엄중히 규탄한다.
2. 우리는 불법 처리된 위헌적 국민투표를 통한 공화당의 개헌음모를 분쇠하기 위하여 국민전선을 시급을 강화한다.
그리고 원내외에 걸쳐 총력을 기울여 공화당의 음모를 끝까지 규탄 분쇄한다.
3. 조국의 민주보루인 우리들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굳게 단결하여 박(정희) 정권 타도의 당면 목표를 기어이 전취한다.
1969년 9월 26일. 공작 정치의 대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북한 김일성의 남한 침략을 막아내자고 역설.
1969년 10월 17일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 최종 결과.
찬성 67.5% (755만 3655표), 반대 32.5% (363만 6369표) 로 개헌안.
서울은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다. 그리고 투표율 자체도 가장 낮은 60.7%를 보여줘 박정희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보여줬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탓도 있고, 서울 유권자들이 이승만 독재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419 항쟁을 주도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서울에서 1963년 대선, 1967년 대선, 1969년 국민투표, 1971년 대선 모두 패배했다.
1969년 10월 20일 신민당 유진오 총재, 국민투표 무효 투쟁 선언. 국민과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겠다 발표.
1969년 10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 분석. 서울과 광주는 반대가 많았다. 동남고 현상이 발생했다.
63년 대선은 남북 현상, 67년은 동서 현상이 발생했었다.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 경기도 표결 결과.
1969년 10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 전라남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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