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껏 달리기 (1) 살아오면서 등에 땀이 나도록 달린 적을 되돌아보다. 오늘 구월의 따뜻한 비가 내리다. 초가을에 여름 소나기 비처럼 따뜻한 비다. 건즈-앤-로우지스의 '십일월의 비'처럼 싸늘하지 않고 맞아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따스한 물결이다. 이 젖은 비는 과거로 잠시 이끈다. 그 날은 참 열심히도 뛰었다. 채림과 내가 지하철 일호선을 타고 종로 근처에 노니러 갔다. 늦은 점심을 먹을 겸 둘이서 분식점에 들어갔다. 우동이나 짬뽕 같은 탕류 면을 두 그릇을 시켜놓고, 외할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 밥을 둘이서 나눠먹곤 했다. 열여덟 열아홉 데이트 밥상이었다. '림'은 밥을 먹고 난 후에 늘 하던 버릇이 있었다. 식사를 다 한 후에 물 한 모금으로 두 볼이 약간 부풀어오르게 그러나 소리가 안 나게 그렇게 마신 다음에, 한 손으로 앞니를 가리고 이를 자동차 유리 닦듯이 청소를 하곤 했다. 난 '림'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물은 적은 없었다.
둘이 그렇게 밥과 면국물을 다 말아먹은 후, 지갑을 펼쳤다. 순간 오싹해졌다. 지갑에 천원짜리 지폐가 하나도 없었다. '림'에게 황급히 말했다. "림아, 돈을 집에 두고 왔어. 너 혹시 가져왔냐?"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날 따라 림도 지하철 월권 패스만 들고 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분식점 주인을 생각하니 땀이 등 뒤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삐삐도 없던 그 때에 옴싹달싹 못하고 주저앉게 생겼다.
'이를 어쩌나?' 몇 십초가 흘렀다. 생각나는 사람이 떠올랐다. 지하철 3호선 옥수 역에 막내삼촌이 근무하고 계셨다. 여기가 종로니까 잘만 하면 1시간 이내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림아, 여기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가방만 림에게 맡기고 뛰기 시작했다. 지하철 오르막 계단들은 평지가 되고 내리막 계단들은 미끄럼틀이 되었다. 등에서 땀이 흘렀다. 종로에서 3호선 옥수역으로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지. '삼촌이 있어야 할텐데...'
3호선 옥수역 그 강변 바람은 땀으로 범벅된 등에게는 은인이었다. 옥수역 매표소를 찾아갔다. 어린시절 방패연을 신호대로 만들어주시던 막내 삼촌이었다. 그가 그 표파는 투명 유리 안에 있었다. "삼촌, 나 3천원만 주세요. 친구랑 식당에 왔다가 점심 먹었는데, 집에서 돈을 가져오지 않았네이~" 삼촌이 웃으면서 "삼천 원이면 되냐?"그러면서 사천 원을 주셨다. 인사만 하고 다시 부리나케 뛰었다. 혼자 그 분식점을 지키고 있을 '림'에게 일초라도 빨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종로로 다시 돌아왔다. 둘이 먹던 그 분식점으로 들어갔다. '림'의 표정이 가장 관건이었다. 태연자약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삼촌에게서 사천 원을 받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림'이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고 분식점에서 내 가방을 지키며 평온하게 앉아 있어서 그랬을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몇 조각 남은 냅킨 휴지로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한 숨을 몰아쉬었다. "삼촌이 계셔?" '림'이 물었다. "림아, 가자 이제. 오래 기다렸지?" '응 삼촌이 사천 원을 주셨어'라는 말보다 이 말이 먼저 나왔다.
우리가 쓰는 밥값, 아이스크림 값, 차 값 비용이란 몇 천원 이내였다. 내가 늘 다 내는 것도 아니고, 둘이서 용돈 아껴서 나눠 내곤 했다. 내가 다시 그 분식점으로 되돌아 올 때까지, 그 사십분 시간들, '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때는 내가 그걸 묻지 않았다. 분식점으로 되돌아 왔을 때, 림의 뒷모습이 먼저 보였다. 내가 삼촌을 찾아 옥수역으로 떠났을 때 모습이랑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사십분 기다림. 그리고 되돌아 왔을 때, 반갑게 맞아 주던 게 고맙게 느껴졌다.
살면서 또 그렇게 절실하게 일심으로 매진하면서 달릴 날이 또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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