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서 만나야할 사람이 있는데 이제 만나지 못한다. 서울에서 이메일을 받고도, 뉴스에도 보도되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힘들다. 미국 유타 모압, 여기서 3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어쩌면 김수행 선생님만큼이나 그간 고생하시고, 또 미완의 제자들을 거둬주신 사모님의 충격과 상심은 얼마나 클지 헤아릴 수가 없다.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서 나오는 마르크스는 서슬 시퍼런 인정없는 혁명가였다. 나도 우리도 그렇게 배우고 외우고 시험도 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가르치는 김수행 선생님은 어떤 측면에서는 김제동보다 더 시민들에게 학생들에게 친근한 동네 아저씨같은 분이다. 베트남의 ‘호’ 아저씨, 호치민이 있다면, 김수행 선생님은 학교와 거리의 ‘마경(마르크스 경제학)’ 아저씨이다.
보통 선생 그러면 학생 입장에서는 늘 ‘좋은 면’만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김수행 선생님은 흔치 않게, 좋은 이야기도 나쁜 궂긴 이야기도 콩나물 국밥을 같이 먹으면서 나눌 수 있는 분이다. 제자치고 어디 못난 면을 선생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선생님의 이론은 '깊은‘ 단순함과 명료성이고, 일상은 온갖 궂은 일들 도우미이다. 그야말로 일하는 사람들 삶의 에너지 그 자체이다. 만약 한국 시민들이 피부로 우러나오는 김수행 선생님의 친근함을 알게 된다면, 마르크스에 대한 편견이나, 반공이데올로기는 사라질 것이다.
“자기가 정말 마음 속으로 느껴서, 좋아서 해야한다꼬~오”
유럽,아시아,라틴 아메리카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55년 동안 벌어진 일들이, 한국에서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단 4년 만에 응축적으로 발생했다. 1989년 김수행 선생님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직접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89년 중국 천안문 사건,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91년 소련 해체가 연달아 일어났고, 그 배후로 ‘마르크스’가 지목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영국에서 보낸 김수행 선생님에게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란 어느 정도 이미 예측된 것이었고,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충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강의하시다 말고 이런 말을 하셨다. “소련이 망했다꼬 운동을 그만두거나 전향했다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건 변명이라꼬, ~ 자본주의는 그렇게 쉽게 망하는 게 아니야, ” 그리고 나서 학생들을 쭈욱 둘러보시더니 “운동은, 자기가 정말 마음 속으로 느껴서어~, 좋아서 해야한다꼬, 그래야 오래할 수 있다꼬, 잘들 한번 생각해보라꼬”
잘은 아니지만, 선생 말씀대로 ‘생각’해보고 있는 사이, 그 검던 머리도 백발이 되었고, 이제 대구 억양의 영어도 노래도 들을 수 없게 되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죄송할 따름이다. ‘선생님의 그 부지런함 절반만 따라했어도 지금보다 나았을텐데’ 이런 자책이 든다. 김수행 우산 속에서 몰아치는 폭풍우 비를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 태풍에 그냥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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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검정색이었을 때는, 그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선생과 학생 사이에 벽이 높았을까? 그냥 막 찾아가서 물어봐도 되었을 것을. 당시 우리들의 한계였다. 지적 정치적 행동의 한계. 좁은 시야. 몇 년이 지나서야, 97년 IMF 외환위기를 맞고, 시민내전을 치르고, 사람들이 '자본'의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때, 다시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이 순간 애도하지도 못하는 이 불량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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