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앙일보를 비롯한 친-자본 보수 일간지들이나 잡지, TV 선전 등에서 인기몰이를 하는 단어, 마치 삼성의 1등주의 광고처럼, 직장인들에게 성공신화를 강요하면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비교우위이다. 이 말이 단점은 적게 보이고 장점을 키워라는 성공전략처럼 보인다. 포장이 아름다울수록 이론은 도덕적으로 타락할 확률이 높다. 중앙일보식 비교우위론 예찬은 귤화위지이다. 
 
왜 그런가? 비교우위 이론을 아주 좋게 해석해서, 원래 나와 너라는 양자 상호 혜택이라는 이론인데, 돈-숭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이면 된다는 사고방식과 그 논리는, 비교우위를, 절대적 고독,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차단되고 고립된, 고호보다 더 고독한 개인들간의 냉정한 전쟁 논리로 뒤바꿔버린다. 
 
값싼 엘로우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대박터뜨리는 비교우위 이론. 차라리 힘센 사자가 되라. 사슴 승냥이 할 것 없이 다 잡아 처 먹어서, 나만의 발톱을 날카롭게 깎는 고독한 짐승이 되자고 하는 게 솔직하지 않느냐? 비교우위 이론은 또 FTA 를 정당화하는데 아주 주요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비교우위 이론에 포함된 수많은 전제들은 다 빼버리고. 

중앙일보식 비교우위론이 '가치관' '인생관' '삶의 실천 철학'으로 자리잡는 것은 어떠한 정치적 결과를 낳을 것인가? 그것은 한국의 진보정당 정책적 실천적 여지를 축소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젊은 세대들의 정신들을 황금만능, 친자본주의 사상으로 오염시키는 전경련의 시도들이다. 진보적인 철학, 경제학, 정치학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특히나 이러한 지배자 통치 이념(이데올로기)으로 승격되고 있는 비교우위론들의 발전과 분화방식, 즉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해명해야 한다.
 
 아직도 적은 밥그릇이나 자기지위, 내부선거에 민감한 그 가련한 영혼들을, 진정한 적들을 찾아 나서는 하이에나가 되길 바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인가? 


1. 특성: 전경련과 교육인적 자원부가 만어낸 차세대 경제 교과서 

누가 만들었나? 교육인적자원부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얼마 들였나? 각각 5000만 원 투자. 총액 1억 
특성이 뭔가? 케인지안 요소 제거 (시장의 한계와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한 현행 교과서 비판) 적은정부, 시장원리가 사회생활의 주된 규칙으로 되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정치이데올로기 신봉 

2. 박지성도 웃고간다. 

전경련 교과서는 박지성 성공신화를 비교우위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했다고 한다. "남보다 더 잘하는 일이나 분야에 특화해서 일을 할 때 '비교우위'라고 한다." 비교우위 대상도 될 수 없는 축구선수 박지성을 끌어들이는 기괴한 스마트한 책략을 썼다는 것이다. 

비교우위라는 것은 한 사람, 한 국가, 한 지역에 해당하는 이론이 아니라, 두 사람, 두 국가, 두 지역 등이 필요한 이론이다. 애초에 로버츠 토렌스(R.Torrens)가 1815년 경에, 리카르도에 앞서서, 영국이 폴란드와 교역할 때, 영국이 옥수수 생산을 폴란드보다도 더 싸게 생산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공산품을 수출하고 옥수수는 폴란드에서 수입해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서부터 이 비교우위 (상대적으로 유리/이익을 가져다 준다)의 기원이다.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을 특화하고 집중, 전문화하자는 말은, 비교우위가 아닌, 이에 상대되는 말 절대적 우위(absolute advantage)에 더 가깝다. 교육현장에서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고, 이에 기반해서 각자의 장점을 최적화 최대화하자는 말이 [비교우위 comparative advantage] 뜻이 아니다. 오히려 비교우위는 두 사람, 두 국가, 두 지역이 총생산의 결과를 나누어 가질 때, 두 사람, 두 국가, 두 지역이 더 많이 나눠가질 수 있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이 쌀 50단위(unit: 예, 1000 가마) , 신발 50단위 (예, 10,000개)를 생산하고 소비한다고 하고, 남한이 쌀 100단위, 신발50단위를 총생산해서 총소비한다고 가정해 보자. 얼핏보기에 남한은 북한과 교역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남한은 북한 쌀에 비해서 절대적 우위를 지니고, 신발생산 효율성는 남북한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s)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북한에서 쌀 1단위 생산기회비용은 신발 1단위이고, 반대로 신발 1단위 생산기회비용은 쌀1단위이다. 남한의 경우 쌀 1단위 생산기회비용은 신발 0.5단위이고, 신발 1단위 생산기회비용은 쌀 2단위이다.
 
 남한과 북한의 쌀생산 기회비용을 비교하면, 남한이 신발 0.5단위이므로, 북한의 신발1단위에 비해서 그 기회비용이 더 적다. (북한의 50%). 남한과 북한의 신발생산기회 비용도, 남한에 비해서 50% 밖에 안되니까, 남한의 신발생산에 비해서 북한의 신발생산이 비교우위 (상대적으로 유리)를 지닌다. 

남한은 신발생산비용을 쌀 생산에 다 써서, 200단위를 생산하고, 북한은 쌀생산비용을 신발생산에 다 써서, 100단위를 생산해 냈다고 해보자. 이 생산 이후, 북한은 쌀 75단위를 가져가고, 남한은 125단위 (즉 쌀과 신발의 교환비율을 1: 3분의 2)를 가져간다. 북한은 교역 전에 비해서 쌀 (50단위 -> 75단위) 150% 증산을 한 셈이고, 남한의 경우 (100단위-> 125단위) 125% 증산한 셈이 된다. 그래서 교역이후에 총 생산과 총 소비량이 남한, 북한에서 각각 150%, 125%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공산품 생산에 집중) 과 폴란드 (옥수수 생산)의 교역 내용과 방식을 고찰한 다음, 두 나라 모두에게 돌아갈 혜택 (mutual benefits)의 크기를 측정한 것이 '비교 우위론'의 역사적 기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우위론이 2자 이상의 국제 무역관계, 혹은 경제발전, 경제 정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식민들과의 경제 격차 등을 어떻게 다 해결할 수 있겠는가? 특히 비교우위론 범위에 벗어나는 영역일 수 있는 농업 보호, 생태 지향 경제와 생활, 정치적 주권 문제가 대두될 때는 비교우위론은 재고되거나 수정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중앙일보식 비교우위 주장은 당사자들의 역할 분담 이후, 서로에게 돌아갈 혜택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고, 고립된 개인이 어떻게 '절대적' 경쟁력을 높여서, 상대방을 압도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중앙일보식 비교우위 주장은  두 사람이 이상 참여자들이 절대적인 목표, 하나의 승부를 향해 돌진하면서 경쟁해서, 우승자가 되기 위한 '전투론'이 되고 만다.  


우리 인생은 경제보다 더 넓고 총체적이다. 비교우위론은 또한 가치관이나 인생관 자체로 승격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물론 경제 활동이나 사회 생활, 또 우리가 어떤 특정 조직이나 공동체에 속한 경우, 우리 각자 개인은 특정한 지위, 역할을 나눠 가지게 마련이다. 권리를 행사하기도 하고 의무를 부여받기도 한다.  
 
축구를 예로 들어보자. 11명 포지션 (지위나 역할분담)이 있긴 하지만, 각자가 다 공통적으로 길러야 할, 혹은 비교우위론을 벗어나는 '덕목들'과 '재능들'이 요구된다.  박지성 선수가 가끔 머리받기 (헤더)로 골을 넣기도 한다. 그의 키는 175 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첼시의 디디에르 드록바(Drogba)의 키가 188 센티미터인데, 비교(우위)가 되지 않으니까, 그러면 박지성은 헤딩슛 연습은 하지 말고, 그냥 발로만 골 넣는 연습만 하라는 것이 전경련식 주장이다. 비교우위론이 마치 절대적인 경제법칙인양, 혹은 합리적인 가치관인양 과대포장하는 꼴이 된다. 
 
헤딩슛은 드록바만 하라는 것인가? 축구할 때 키 적다고 헤딩슛 하지 말라는 논리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FTA 하면서 한국농업은 비교우위가 없으니까 포기하라는 논리와 똑같지 않은가? 축구를 좋아해라. 골 들어가는 가짓수는 머리, 어깨, 가슴, 발, 허벅지, 심지어 엉덩이로도 골을 넣는다. 온 몸이 다 무기이고,골을 넣는 도구인 것이다. 경제학에서 '법칙'이라는 말 자체도 논란거리이고, 비교우위론 자체도 경험적 조사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박지성 축구 사례처럼 개인이나 사회 또 국가는 하나의 전문영역이 아니라 경제 부문간, 1차, 2차, 3차, 4차 산업들간의 '균형'과 '균형적 심화' 발전도 중요하다. 
 

 

(찰튼 전에서 헤더로 골을 넣는 박지성)  

 

 
3. 남미는 관료가 개입해서 못살고, 미국은 자본가가 자유가 있어서 잘 산다? 
그럼 박정희 찬양해 마지 않는, 막강 파워관료집단과 박정희가 경제개발 5개년해 버린 한국은 왜 경제성장 이뤘나? 박정희는 찬양하고, 박정희식 경제개발은 부정하는 자가당착 주장인 셈이다. 

중앙일보 논리는 다음과 같다 “남미 국가들은 관료 중심의 스페인제도를, 미국은 시장 중심의 영국제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란 199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말이 인용돼 있다. 남미에서는 기업들이 관료의 관심을 얻는 데 자원을 우선 투입했지만 미국 기업은 가장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곳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업은 이윤 추구에 눈먼 조직이라는 기존 교과서의 서술과는 차이가 난다.” 

전경련이 만든 차세대 경제 교과서는 경제와 정치주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역사적으로 자본의 자기이해(싼 원자재와 상품 판매 시장개척을 위해 식민지 쟁탈전쟁을 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 남미가 미국 자본의 앞마당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고, 스페인 제도 때문에 못산다고 우기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공평하지 못하다. 

4. 한국 재벌의 경제 범죄 삭제 
차세대를 위한 경제 교과서는 '반 기업정서'를 부추기는 대목을 완전 삭제했다고 한다. 
기존 교과서가 "재벌은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늘리고, 은행의 돈을 빌려 필요 없는 투자를 많이 함으로써 우리나라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고 기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