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이후, 백기완 선생의 별세 소식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백선생이 걸어온 현대 정치사의 길은 어떠했을까? 잠시 신문을 찾아본다.
1955년 (23세)부터 백기완 선생은 일간지에 등장했다.
1975년 2월 긴급조치 구속자 석방까지, 백기완 선생 관련 신문 기사들이다.
195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신흥(新興: 경희대 전신)대 백기완 군 외 31명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주간 강원도 벽촌지방을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 (* 동명이인인지 확인 필요)
1963년 2월 28일자. 백기완 (31세),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 수습안 강연회, 자유대중당을 대표해서 백기완 선생이 발표를 하다.
1965년 8월 14일자. 박정희의 한일 협정 비준안이 통과.
1965년 8월 14일, 함석헌, 백기완 등이 한일협정은 매국적이라고 비판, 즉각 무효화를 주장했다.
1966년11월 7일자. 백기완 (34세) 자유대중당 대표.
1967년 6월 10일자. 7대 총선 참가. 백기완 (민주당) 서울시 영등포 갑 출마. 신민주당 유진산이 1위, 6만 6227표. 백기완은 당시 35세로 당명을 '민주당'으로 짓고, 출마해서 2천 234표를 얻었다.
6대 총선에 비해, 67년 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후퇴하고, 신민주당이 약진했다.
1972년 2월 2일자,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가 백기완의 저서 "항일민족론"을 칭찬하다. 채신머리없이 친일하는 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 선우휘 주필이 '사이다나 맥주를 마신 때 상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칭찬한 점이 흥미롭다.
1974년 1월 16일자. 장준하, 백기완 등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
구속 사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 선전"
1974년 2월 2일. 비상보통 군법회의, 박희동 중장이 장준화, 백기완 피고에 징역 15년 선고.
박희동 중장의 선고 내용. "헌법 개정을 빙자,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위협을 준 사실은 추호도 용서할 수 없다"
1975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관련 일지.
1974년 8월 29일. 대법원은 장준하, 백기완 포고인에 대한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 (15년 징역)
1974년 12월 3일, 장준하씨가 형집행 정지 결정으로 출감. 조광현 내과에 입원.
(박정희가 장준하를 석방하기로 결정함)
1975년 2월 15일 박정희가 인혁당 관련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결정.
1975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당시 43세였던 백기완 선생은, 석방 결정에 대해 '소감옥'에서 '대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 민주주의를 배반한 유신체제 하에서는 감옥 안과 바깥이 구분이 없음을 선언.
유신체제 철폐가 한국 민주주의 당면 과제임을 역설했다.
1975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위반자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긴긴 겨울은 걷히고, 봄은 오는지"라는 제목을 달았던 경향신문.
1975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석방자들에 대한 소식. "백기완씨는 오랜만에 대하는 흰쌀밥, 불고기의 아침상을 대하고 목이 메였다. 백씨는 외출하려다가 '다시는 아빠를 뺏기지 않겠다'며 붙드는 딸들의 강권에 못이겨 눌러앉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돼지고기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석방되고 나서 1개월 후, 1975년 3월 29일자, 중앙정보부는 백기완 선생을 다시 연행했다.
신흥대 백기완군 외 31명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주간 강원도 벽촌지방을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
1963년 2월 28일자. 백기완 (31세),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 수습안 강연회, 자유대중당을 대표해서 백기완 선생이 발표를 하다.
1965년 8월 14일자. 박정희의 한일 협정 비준안 통과.
1965년 8월 14일, 함석헌, 백기완 등이 한일협정은 매국적이라고 비판, 즉각 무효화를 주장했다.
1966년11월 7일자. 백기완 (34세) 자유대중당 대표.
1967년 6-8 총선, 5월 18일자 조선일보 보도.
그 해 6대 대통령 선거 결과, 서울시에서 유일하게 박정희가 윤보선을 앞선 선거구가 영등포 (갑)이었다. 공화당 윤주영 후보와 신민당 유진산, 민주당 백기완 후보 등이 맞섰다.
1967년 6월 10일자. 7대 총선 참가. 백기완 (민주당) 서울시 영등포 갑 출마. 신민주당 유진산이 1위, 6만 6227표. 백기완은 당시 35세로 당명을 '민주당'으로 짓고, 출마해서 2천 234표를 얻었다.
6대 총선에 비해, 67년 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후퇴하고, 신민주당이 약진했다.
1972년 2월 2일자,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가 백기완의 저서 "항일민족론"을 칭찬하다. 채신머리없이 친일하는 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 선우휘 주필이 '사이다나 맥주를 마신 때 상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칭찬한 점이 흥미롭다.
1974년 1월 16일자. 장준하, 백기완 등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
구속 사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 선전"
1974년 2월 2일. 비상보통 군법회의, 박희동 중장이 장준화, 백기완 피고에 징역 15년 선고.
박희동 중장의 선고 내용. "헌법 개정을 빙자,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위협을 준 사실은 추호도 용서할 수 없다"
1975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관련 일지.
1974년 8월 29일. 대법원은 장준하, 백기완 포고인에 대한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 (15년 징역)
1974년 12월 3일, 장준하씨가 형집행 정지 결정으로 출감. 조광현 내과에 입원.
(박정희가 장준하를 석방하기로 결정함)
1975년 2월 15일 박정희가 인혁당 관련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결정.
1975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당시 43세였던 백기완 선생은, 석방 결정에 대해 '소감옥'에서 '대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 민주주의를 배반한 유신체제 하에서는 감옥 안과 바깥이 구분이 없음을 선언.
유신체제 철폐가 한국 민주주의 당면 과제임을 역설했다.
1975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위반자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긴긴 겨울은 걷히고, 봄은 오는지"라는 제목을 달았던 경향신문.
1975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석방자들에 대한 소식. "백기완씨는 오랜만에 대하는 흰쌀밥, 불고기의 아침상을 대하고 목이 메였다. 백씨는 외출하려다가 '다시는 아빠를 뺏기지 않겠다'며 붙드는 딸들의 강권에 못이겨 눌러앉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돼지고기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석방되고 나서 1개월 후, 1975년 3월 29일자, 중앙정보부는 백기완 선생을 다시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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