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러니하게 안철수 멘토였다가 이제는 경쟁자가 된 김종인(민주당)의 할아버지가 속한 당 이름이 바로 '국민의당' (1963~64)이었다.
국민의당을 만든 사람들은 김종인의 할아버지인 김병로, 허정, 김도연, 이범석 등이었다. 61년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공화당 후보를 63년 10월 15일 대선에서 이기고 군정을 끝내기 위해서, 민정당 (윤보선), 신정당 (허정), 민우회 (이범석) 등 갈라진 야당들이 하나로 통합하기로 결의하고 만든 당 이름이 바로 국민의당이었다. 국민의당은 1963년 7월 15일에 발족했으나, 후보 문제로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가, 9월 14일에야 비로서 창당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민정당의 윤보선은 불참하게 되고, 신정당과 민우회만 합쳐서 국민의당 을 만든다. 윤보선과 민정당에서 함께 했던 김종인의 할아버지 김병로는 이 때 국민의당으로 오게 된다.
김병로는 허정과 윤보선을 집으로 불러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허정은 윤보선 대통령이 5-16군사쿠데타 당시, 쿠데타를 불법이라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쿠데타를 인정해버렸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허정의 주장은, 윤보선은 군사 쿠데타에 협조하거나 방조했기 때문에 윤보선은 야당 대선후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허정은 만약 김병로가 야당 대선 후보가 되면, 자신은 후보 사퇴를 하겠다고 윤보선에게 제안했다.
(일종의 동반사퇴론이었다)
그러나 윤보선 (민정당 후보)은 이러한 허정의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결국 야당후보 통합은 실패로 돌아가고, 국민의당 (허정 후보), 민정당 (윤보선), 변영태, 송요찬(자유민주당:쿠데타 주역 김재춘이 만든 당)등이 대선 후보로 등록했다.
그러다가 10월 2일 허정이 후보 사퇴를 하면서 민정당 윤보선을 지지한다고 발표했고, 송요찬도 역시 사퇴했다.
그 결과 10월 15일 제 5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공화당 박정희와 민정당 윤보선의 대결로 압축되었던 것이다. 김병로는 64년 1월에 사망하고, 국민의당은 1964년 12월에 민주당으로 흡수통합되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1887~1964]는 민주당에 결합한 김종인의 할아버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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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9월 14일, 국민의당 간판이 들어서다
9월 14일자 경향신문: 야대열 4파로 분산
대통령 후보 허정, 윤보선, 변영태, 송요찬씨로
1963년 9월 14일자 동아일보, <상처뿐인 이름 국민의당>이라고 적다.
야당 통합사 "곡절 60일간을 본다" 특집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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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9월 14일만 해도, 야당이 분열되었으나,
아래 10월 3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국민의당" 대선 후보 허정이 사퇴하고,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민의당"은 흥분과 비창의 쌍주.
민정당은 최고의 고무적인 선물 "위대한 결심" 놀랐다는 간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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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자 경향신문:
윤보선 (민정당) 지원키로; 민정,국민의당, 민주,자민 4개 정당 범야단일 전선 곧 형성:
윤보선씨 당선되면 총리는 타정당서 선출하기로.
기호 5번 민정당 후보 윤보선
.
그러나 대선 결과는 15만표 차이로 박정희가 윤보선을 이기고, 제 5대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은 윤보선과 같은 민정당 소속이었다.
1963년 2월 15일 동아일보,
윤보선, 김병로, 허정
당시 범야세력 총집결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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