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2, 2022
얼마전에 홍세화님이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말씀이 없으시다. 그냥 온라인 활동을 재개하시는 것 같다.
예전에는 트위터로 가끔 메시지를 주고 받곤 했는데, 요새는 나도 트위터를 거의 하지 않는다. 2002년에 2017년에 두 번 만났다. 한번은 민노당 이문옥 선생과 한겨레 신문사 앞에서, 그리고 캐나다 방문했을 때, 선생의 이력서와 발표문을 영어로 번역해드렸다.
난 노회찬님과 홍세화님이 서로 정치적으로 화해하길 바랬고, 예전 당게시판에도 글을 남겼다. 홍선생님이 술 한잔 하고 댓글도 남겼다가 또 지웠다. 뭔가 말하지 못하는 끝내 마음 밑바닥에 남기고 싶은 그런 사연들이 있는 거 같다.
캐나다에서 홍선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길래, 노회찬 대표와 화해를 했냐고 다시 물었다. '왜 자꾸 그러느냐?'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마당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마저 담배만 피우셨다.
나도 노회찬과의 화해를 계속해서 주장하는 게 실례가 될까 대화를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그 다음 해 여름 노회찬의 비보가 날아왔다. 좌익이 고등학교 동문을 따져서 뭐하겠냐마는 노회찬과 홍세화는 같은 고교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보수 우익들, 민주당도 그렇지만, 뉴라이트 인물들의 일상 생활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변석개'이다.
우익과 비교해서, 또 우리네 일상생활과 비교하는 일은 무의미하긴 하다.
각자의 신념의 갈등이니 말이다.
그래도 마음이 무겁다. 전쟁 통에는 적과 아의 구분이 명백하니, 제 3 회색지대는 거의 자리가 없고, 중간 다양성도 없다. 사람들 생각이 100% 동일할 수 없다.
홍과 노, 박정희를 대적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다. 예전에 박정희와 싸운 분들을 만나면 '지사' 같다고 할까? 말을 아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그런 신중함이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된 특질이기도 하다. 또 자기 줏대가 곧고 튼튼하기도 하다.
이들은 1980년대 학생운동가들을 공장으로 농촌으로 끌어들어들인 세대지만, 대중적인 정치적인 영향력은 80년대 세대들, 586들이 대부분 가져갔다. 한쪽은 민주당 쪽으로, 그 남은 10%는 진보정당 쪽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두 세력다 정치적 정당성도 실무적인 능력도 다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진보정당이 없던 시절, 경찰 검찰에 잡혀가지 않으면 다행이던 그 시절보다, 정당을 만들고,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당원들의 당비로 당을 운영하는 게 사람 신경을 더 잡아먹는 것 같다.
생각의 차이들, 서운함, 좌절과 분노의식을 우리들을 탄압하는 압제자에게 느끼는 아니라, 같은 정당을 했던 사람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홍선생과 노회찬의 경우처럼, 화해를 하지 못한 채, 우리도, 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것이 그냥 평범한 인생사이고, '다 그런거지 뭐' 하고 지나갈 수도 있겠다.
난 개인적으로, 좌파나 좌익, 그리고 지난 150년, 200년 정도 계몽주의 운동 연속선상에서 만들어진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은, '공적 우정 public friendship'이라고 생각한다.
만나서 직접 일을 하건, 권력과 혁명을 도모하건, 합법적 개혁을 목표로 하건, 그 만남의 형태들을 다양하겠지만, 자기 것을 늘 바꾸고 수정하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고, 말하게 하고, 그런 '근거'와 '이유'는 반드시 존재한다. 많이들 흐릿해졌다.
공적 우정이라는 건, 매일 매일 새로와지지 않으면 성취하기 힘든 행복감이다.
정치는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다. 공동체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라는 '경계'를 떠나 개인이나 인간적인 자아는 여전히 남고, 스스로 희로애락을 찾아야 하며, 생로병사도 고민할 수 밖에 없다. 후자 주제들에 대한 고민이 적고, 정치만 하는 사람들은 '혁명'을 입에 달고 살았어도, 또 '의리'를 말해도 어느새 자기 변명으로 변색되는 경우도 많았다.
공적 우정이란, 끊임없이 연대하고, 갈등과 차이를 겪고도 '화해의 죽음' 앞에서 다시 서로를 죽이고 화해의 길로 가고, 마치 어린시절 친구들끼리 놀다가 싸우고,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고 내일 아침 다시 친구가 되어 놀듯이, 그런 '화해'의 반복을 통해서 달성된다.
친구도, 동지도, 너무 고인 물에 놀고 있거나, 머물러 있거나, 거기에 만족하고 있거나, 으스대거나, 그러면 과감히 그 친구도 동지도 떠날 필요가 있다. '화해의 죽음'을 실천하지 못한 상태도 있기도 하다.
친구건 동지건 비판하거나 때릴 때는, 자기 허벅지에 칼을 대듯이 살벌하고 날카롭게 때려야 한다. 사실 그게 자기를 때리는 것이니. 이런 인물들이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지난 20년간 이런 문화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잘해도 못해도 '내편 들고, 칭찬과 응원'을 기대한다. 그건 '공적 우정'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 어버이 같은 친족 애정'이다.
화해의 죽음과 화해가 쉬운가? 말처럼 쉬운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도 서로 만나야 하고, 100개 중에 49개, 혹은 51개를 양보하기도 해야 한다.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지금까지 이 어려운 길들을 헤쳐나왔다.
남는 게 서운함이고, 자기 생각, 의지, 뜻대로 타인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많이 알게 되었고, 또 그게 대부분 현실이다.
홍선생님이나 노회찬 대표나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운동가들이 많다. 그들이 살아온 길에 대해 언젠가 다큐멘타리를 만들고, 책도 쓸 예정이다.
어떤 화해의 죽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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