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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1997년 11월 19일. 사회과학포럼 발족. 2021년, 지금 더 절실히 필요하다. '접촉 contact'의 의미.

by 원시 2021. 11. 19.

1997년 11월 19일. 사회과학포럼 발족. 2021년, 지금 더 절실히 필요하다.  '접촉 contact'의 의미.

'접촉 contact'는 신체적 접촉의 오감, 그리고 두뇌끼리 접촉, 마음의 접촉도 있으니까.

접촉이야말로, '현실 reality'를 설명하는 '인식론'의 출발점이다. 

 

Hee Yeon Joe

2021.11.18.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페이스북.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아침 일찍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여의도고등학교를 찾았습니다. 올해는 학생과 교사들이 백신 접종을 한 상태에서 수능을 치르기 때문에 그래도 좀 안심하고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는 학생들에게 '화이팅'하라고 두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응원해주고 왔습니다. 
수능 한파 없이 날씨가 드물게 따뜻해서인지 학생들 옷차림도 가벼웠는데요. 날씨도 수험생들을 배려했는지, 8시20분쯤 시험장 문이 닫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저도 부모인지라, 학생들이 결과보다는 그동안 최선을 대했다고 자부하길 바랍니다. 수능은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수능이 끝나면 안심하는 학생도 있고, 좌절하는 학생도 있을텐데, 결과가 좋으면 좋은대로 결과가 나쁘면 나쁜대로 한단계 도약을 위한 징검다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담담하게 결과를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3년동안 긴 인내의 시간, 긴 도전의 시간, 인고의 긴 시간을 갖은 학생들을 교육감으로서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동안의 노력을 최선을 다해서 발휘하고 수능이 갖는 중압감에 무너지지 말고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응대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수능 출제자분들, 교육지원청 수능담당자들, 수험생 가족들, 경찰관분들, 수험장을 준비해주신 선생님들, 오늘 하루종일 고생해주실 시험감독관 선생님들 또, 오늘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997년 11월 19일. 사회과학포럼 발족. 2021년, 지금 더 절실히 필요하다.  '접촉 contact'의 의미.

'접촉 contact'는 신체적 접촉의 오감, 그리고 두뇌끼리 접촉, 마음의 접촉도 있으니까.

접촉이야말로, '현실 reality'를 설명하는 '인식론'의 출발점이다. 

 

 

1.동아시아 경제발전과 한국사회. 우리 시대 진보란 무엇인가?. 한국 자본주의의 현황과 과제. 국가와 사회운동. 계급과 이데올로기 등 세계화 시대의 한국을 점검할 수 있는 5개의 대주제를 선정했다.

 

11월 15일 첫 발표에서 조희연은 '한국 사회의 탈식민화적 인식과 보편적 독해를 향하여'라는 주제발표에서 사고의 식민지성, 종속성을 극복해야만, 우리 현실에 대한 '보편적 독해'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원시 논평] (*그런데 '보편적' universal 한 독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고, 무의미한 말이다. 한국 사회 현실 reality 를 설명하는 단어, 문장, 인식론, 느낌적 느낌을 스스로 판단해서 선정하고, 그것들을 기초로 '설명'하고 '해석'하라는 말을 조희연 교수가 하고 싶은 것임. 

 

한국은 적은 사회가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규모에 해당하고, 그런 한국 현실 (reality)을 설명하는 인식론 (epitemology)는 연구자 스스로 채택해서, 그것들을 정당화하고 교정하면서, 5천만으로 확산시키고 여과를 통해서 사회적 합의로 될 때, 비로서 어떤 '이데올로기' 자격이 주어진다. 이념(이데올로기) 이 형성되는 과정은 이 단어 자체가 '집단적 인식틀'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혼자 쓴다고 해서 그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치적 의지, 실천 활동'을 통해서 정교하게 만들어진다. 

 

2. 조희연 "식민지성, 주변성을 극복하자. 이런 지적 궁핍함 대문에 외국의 한국 연구자들이 한국에 대해서 더  잘 아는 듯이 말하고, 또 (미국, 유럽 등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학생들이 외국 이론을 수입해서 한국의 상황을 분석하는 '기성품'이 쏟아지고 있다." 

 

[원시 논평] 난 해외 여행, 해외 유학 자체를 비난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다. 병자호란 이후 고립된 지배계급 유학자들이 조선지배층에 만족해, 자기 소유권과 권력에 안주해, 1910년 조선을 일본제국주의에 강탈당한 역사를 고려했을 때, 한국인들은 모두 다 해외 여행 경험과 아시아를 포함 다른 나라들에 가서 견문을 넓혀야 한다. 

 

그러나 지난 100년간 한국 지식인들은 대부분 미국 중심 (유럽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지극히 협소한 지역)에 길들여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운전면허'를 발급하는 해주는 곳이 중요하듯이, 교수나 강사 자격증을 발급하는 그 해당 나라의 '인식론'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표준화' 자격이라는 국제적인-지적인 힘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정부가 사용하는 정책 입안자들 (관료와 교수들의 대부분이 미국 학위자들이다)이 주로 미국 '표준'를 가져다 쓰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 발달 수준에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1997년 이후부터 발생했다. (*미국도 학교와 교수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말하는 것은 주의해야겠지만, 대다수 주류 흐름만 지적함) 

 

특히 노골적인 노동자 해고의 자유를 외치는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정책' 기조부터 '적은 정부 지향', 자본주의 소유권을 옹호하는 케인지안 정책조차도 '좌파'로 비난해왔던 미국식 정책기조를 1997년 김대중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동일하게 그 기조를 유지했다. 

 

국내파 대 해외파 대립구도는 잘못 되었다. 그러나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외 유학파들 중에 '관료'와 '교수' 입장은 아메리컨 리틀 보이 리틀 걸에 지나지 않는다. 지적 권위와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방식 자체도 폭력적이고 전대근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997년 조희연 교수가 '식민성' '주변부성' 문제제기는 지금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외파건 국내파건 자기 이익 동맹체로 변질된 지난 25년 신자유주의 시대상을 볼 때, 단순히 '국내파'는 '식민성' '주변부성'을 극복한 독립적인 연구자이고, 해외파는 모조리 다 '사대주의자'로 파악하는 것도 오류다. 안타깝게도 국내파와 해외파가 보는 책,논문,논거가 거의 비슷하고 심지어 동일하기 때문이다. 

 

문제 핵심은, 한국 사회의 현실 (reality)을 설명하거나 비판할 때, 사용하는 '이론적 탐침' = 인식론적 틀 (theory-laden observation/interpretation, 관찰이든, 해석이든)을 한 연구자라도, 또 집단적으로라도 갈고 닦아야 한다. 어딘가엔 이런 노력을 하는 연구자들도 있을 것이고, 언론이나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곳에서,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오롯한 연구자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연구자 자신이 한 공동체 구성원, 마을 동네 사람, 시민이나 읍민 면민의 자격으로서 '일상생활 (life-world)'에서 느끼는 것을 '현실' 이해의 기초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적 지식이야 기본이고, 이를 위해서는 유럽 언어들 뿐만 아니라,우리말, 아시아 언어, 역사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3. 조희연 "주체적 학문" 단어에 대해서. 

 

[원시 논평] 사실 주체적 학문이라는 것은 현실 학계나 공론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한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주장하고 서로 비판하고 서로 검증하고, '진리'를 향한 집합적인 노력이 있을 뿐이다. 

 

'주체'라는 것은, 주인과 노예의 상관관계에서, 주인의 권력에 대항해 노예의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등장했다. 예속과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알아서 사람다움'을 형성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프리덤( freedom )을 의미하는 이 자유는, 집단이 주체면, 어떤 마을, 공동체, 민족, 국가의 해방과 독립을 뜻하기도 한다. 그 주체의 대상은 한 개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주인-노예의 종속관계가 완전히 철폐된 이후에도 '주체적인 학문'이나 '주체적인 삶의 태도'가 중요한가? 여전히 중요하다. 그리고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매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지를 발휘해야만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학문이란, 고립을 뜻하지 않는다. 주체적인 정치란, 외교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 수준에서는 타인의 교섭과 소통의 양과 질이 높을수록 오히려 '그 자유 영역'은 확대될 수도 있다. 공동체나 국가단위에서 교섭과 소통의 양과 질이 높을수록 오히려 경제와 정치,문화,인성의 자유가 확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확대는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자신의 '자유'개념을 상대화시킬 능력이 있을 때만이 새로운 자유 개념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논쟁 부재와 빈곤한 문화 풍토" 언급에 대해서.

 

해외 유학파의 경우, 인문,사회과학 분야로 한정시키면, '박사학위'를 주는 제도기관이 외국 대학이고, 외국인 교수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한국 지식인들의 경우, 대부분 국내에서 타인의 지적,비판,평가를 듣지 않거나 대략 무시한다.

 

그 사람의 개인 윤리의식이 잘못되어서라기 보다는, '자격증'을 준 사람이 외국인인데, 그 외국인을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어찌 하리" 가사가 현실이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지적 권위를 서로 부여하지 않을 절호의 기회를 가진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교수 마이클과 외국인 교수 잭슨이 논쟁하면,그 때는 사태는 야구 9회말 투아웃 주자 만루 상황이 된다. 긴장이 좀 흐른다. 

 

어떻게 논쟁이 활발해지겠는가?  프로야구처럼, 자체 리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국 지식인들은 좀 불행한 인생을 산다.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하는데, 자칭 석사출신 진중권보다도 대중노출 수준이 낮으니, '이게 얼마나 허망한가? 이게 정의냐 ? fairness is gone with wind' 

 

한국 지식인들은 대중들에게 권위를 가진 존재이자, 대중들로부터 가장 소외된 존재이기도 하다. 
'논쟁 부재'를 극복하려면, 한국 연구자들끼리 서로 지적 권위를 인정해주고, 자기 '자격증'과는 좀 색깔이 다르더라도,다양한 '패러다임'을 '토론 프로야구 리그'에 참가시켜, 많은 팬들이 입장하도록 해야 한다. 

 

아 물론, 학문 중에는, 떨어지는 단풍잎 하나에 자기 시를 파 넣어 바람에 휘날려 보내는 그런 '절대 고독'와 '절대 행복'의 소유자들도 있긴 하다. 굳이 '팬'이 필요없는 연구자도 있긴 하다. 그리고 이런 문화도 장려하긴 해야 한다.

 

다 친구는 '등잔 밑' 가까운데 있을 수도 있는데, 멀리 떨어져 수만 킬로를 비행기 타고 오다가다 정신없이 살다보니,

'등잔 밑이 어두워졌을' 뿐이다. 

 

'논쟁 부재'를 극보갛고, '풍성한' 문화 풍토를 건설하는 일은, 다른 것이 없다. 옆에 사람과의 '수다'를 복권하면 될 일이다. 그게 소크라테스 정신이고, dialectics (둘이서 대화하면서 논리를 따지면서 학문하는 방법, 다이-어렉틱스)가 아니겠는가?  인구가 줄어들어도, 학생과 교사의 비율을 늘리고, 학생과 학생, 교사와 학생 사이 대화시간을 많이 늘리면 된다.

 

'접촉 contact'는 신체적 접촉의 오감, 그리고 두뇌끼리 접촉, 마음의 접촉도 있으니까.

접촉이야말로, '현실 reality'를 설명하는 '인식론'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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