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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

1987년 10월 26일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당 경선협상에 실패, 각자 대선 후보로 출마하기로. 6공화국 헌법과 법률에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를 누락했고, 정당 이념과 정책 중심이 아니라, ..

by 원시 2021. 10. 26.

1. 역사에서 가정.

 

박정희가 1963년 대선, 1967년 재선 이후, 1969년에 삼선개헌을 하지 않고, 1971년에 대통령에서 물러났다면, 김대중-김영삼은 각각 2번 임기 (총 8년)을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채웠다고 해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더 이상 출마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 하지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반란과 군사독재의 폐해는 고스란히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계로 이어졌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의 자질이 떨어진 이유는, 김영삼 김대중도 정당의 이념과 정책노선을 내세워 정치를 한 게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총통 개념의 독재자)는 아니지만, 권력을 독점했었다. 

 

당내 민주주의나 절차는 부차시 되었고, 당 권력 상층 몇몇 인물들이나 파벌세력이 정당을 대표하게 되었다. 당 이름도 총선, 지선, 대선을 앞두고 상시적으로 바뀐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에서 논의가 나오고 있지만, 한국의 경제 정치 문화적 발달 수준을 고려했을 때, 대통령제보다는 서유럽 대다수 국가가 채택하는 '의원내각제 (Parliament Government)'와 '수상 (Prime Minister)' 제도가 더 바람직하다. 

 

2. 독일, 네덜란드,스웨덴 등과 같은 의회중심 정부제도 (의원내각제, 수상 제도 도입)가 아니라면,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만들어, 민주당과 국민의힘 이외의 정당들이 제 3, 4, 5의 대안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두 정당에 도전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박정희가 헌법을 다음과 같이 세번 파괴했다. 61년 516 쿠데타, 1969년 삼선개헌, 1972년 총통 유신헌법 등을 통해의 삼선 개헌 (1969년) , 유신독재 (1972년~1979년)와 종신집권 야욕. 박정희의 헌법 파괴로인해, 한국의 정당정치는 퇴행하고 말았다. 

 

3. 1987년 6월 전두환 퇴진 이후에도, 김영삼-김대중, 김종필 등은 '정당 정치'보다는 인물위주 정치에 몰입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대통령 간선제 '호헌조치'를 발표한 후,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가 김대중-김영삼 및 학생운동권의 대다수 구호가 되었고, 실제 이러한 대중적 슬로건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29선언에 대해서 전혀 예기치 못했고, 전두환-노태우의 저강도 전술에 대비하지도 못했다. 

 

실제 많은 6월 항쟁 참여 시민들이나 학생들도 1971년 이후 16년만에 되찾은 '대통령 직선제'에 만족했고, 집으로 돌아갔다. 7~8월 '우리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용노조 타도, 민주노조 쟁취' 구호를 외친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터져나왔다. 대중교통 운전수 파업으로 정말 도심에서 시내버스, 시외버스가 멈춰버렸다. 

 

2021년 민주당, 정의당 등 대다수 정당은 당 내부 후보 경선, 당대표 선거에서  '결선 투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 신민주당 김대중,김영삼,이철승 후보는 결선투표제 하에서 경쟁했다. 1차 선거에서 김영삼이 1위를 했지만, 2차에서 이철승 지지표가 김대중 지지표로 흡수되며,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역전했다.

 

대의원 과반수 443표였다. 대의원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은 421표 (47.6%),  김대중 후보는 382표(43.2%)였다. 김영삼이 443표를 얻지 못해, 2차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이 458표를 얻어 과반을 넘어 신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당시 당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김영삼은 '이번 신민주당 대선 후보는 따온당상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가 이철승계열 대의원 표의 반란으로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게 졌다. 김대중 선본은 이철승 계열 대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김상현 등이 그들이 자고 있는 여관까지 다녔다고 한다. 

 

4. 629 선언 이후, 결선투표제 누락시킨 헌법 개정은, 전두환의 공범 노태우가 김영삼,김대중, 김종필을 대선에서 이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나는 아직도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629선언 이후, 10월 27일 '제 6공화국 헌법' 국민투표까지 과정에서, 특히 헌법 개정을 할 때, 한국 대통령제가 가장 참고를 많이 했던 프랑스식 대통령제가 채택하고 있는 '결선 투표제'를 누락시키고 말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미 1971년 신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결선 투표제'를 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 29일 이후, 전두환-노태우가 직선제를 하더라도, 만약 야당 후보들, 특히 김영삼, 김대중이 분열되어 2명의 후보가 나오고, 김종필이 충청도에서 선전한다면,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대선에서 1위로 당선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두환-노태우 5공 세력이 안기부, 경찰, 군대, 공무원 조직들을 다 총동원해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을 조장했다. 

이런 야당 분열 작전은 너무 빤하게 다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결선투표제'라는 제도적인 개혁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를 '인물' 위주, 마치 조선시대 '왕'처럼 간주하는 낙후된 정치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독재타도 이후에도 한국정치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1987년 10월 29일에 국민투표로 통과된 '새 헌법 (현재 6공화국 헌법)'에 서명하고 있는 게 이채롭다.

 

 

 

 

 

 

1970년 9월 29일자. 김대중, 김영삼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결선투표. 결과.

 

 

 

 

 

 

 

조선일보. 1970년. 9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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