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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transzendental 번역어 논쟁의 의미. 김상봉, 백종현, 전대호 외

by 원시 2019. 1. 8.

칸트 학회 회원들과 백종현 (전대호) 사이에 벌어진  transzendental 번역어 논쟁의 의미.  

 

언론보도. 2018년 한겨레.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등록 :2018-06-07 19:55수정 :2018-06-09 14:37

 

 

한국칸트학회 기획 칸트 전집 출간

번역어 통일·초역·가독성 성과

짧은 번역기간에 완성도 우려

미번역 서신·강의록·유고 아쉬워

 

비판기 이전 저작 Ⅱ(1755~1763)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상봉 이남원 김상현 옮김/한길사·3만5000원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김재호 옮김/한길사·3만2000원

도덕형이상학

이충진 김수배 옮김/한길사·3만5000원

 

석정 이정직이 1905년 펴낸 <강씨(칸트)철학설대약>으로 이마누엘 칸트가 국내에 소개된 지 113년. 우리는 언제쯤이면 우리말로 번역해 완결된 칸트의 전집을 가질 수 있을까? 이번에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해 번역해내는 칸트 전집으로 ‘완간된 칸트 전집’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한국칸트학회가 주도해 천차만별이었던 번역어를 통일하고, 상당수 저작이 초역이며, 가독성을 개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에 걸맞지 않게 급박하게 진행된 번역은 한국 학술번역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했다.

 

칸트 전집은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하고 한길사가 최근 1차분 3권을 출간해, 내년 가을까지 모두 16권을 완간하는 대기획이다. 학회 소속 학자 34명이 대거 번역에 참여해 5~6년 동안 번역과 두 차례에 걸친 심사, 해제·역주 작업을 거쳐 순차적으로 결과물이 나오고 있다. <비판기 이전 저작>(전 3권)은 95% 이상,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논리학>, <서한집>, <윤리학 강의>는 모두 국내 초역이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충진 한국칸트학회 회장(한성대 교양학부 교수)은 “이번 전집은 한국칸트학회에서 공인하는 번역서다. 앞으로 나올 다른 번역들은 이 전집을 기준으로 해서 더 잘된 것인지 못된 것인지 평가받을 것”이라며 전집 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전집 작업은 학회가 중심이 돼서 번역 원칙과 번역어를 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학회에선 지난 2014~2015년 모두 네 차례의 학술대회를 열어 번역 원칙과 용어를 통일했다. 특히 칸트 철학의 기본 용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는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각각 ‘선험적’, ‘선천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과 ‘선험론적’, ‘선험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서, 결정을 내리기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용어만 두고 두 차례의 학술대회에서 발표와 토론을 벌이고, 용어조정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조정 작업을 거쳤다. 결국 각각을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번역하기로 결론 내렸다. 칸트 전집 5권을 번역한 김재호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는 “칸트 철학에서 사용한 ‘transzendental’ 같은 용어는 이후 헤겔, 셸링, 후설, 하이데거가 이어받아 사용했는데, 번역어가 통일되지 않아 그동안 다른 학회에서도 혼란이 많았다. 한국칸트학회에서 번역어를 정함으로써 통일된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칸트 전집 1차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번역에 참여한 칸트학회 회원 학자들이 전집 발간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가독성이 떨어졌던 이전 번역본들의 문제점도 상당 부분 개선했다. 이충진 회장은 “(많이 읽히는) 백종현 서울대 교수 번역본은 가독성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칸트 연구자들은 모두가 하는 이야기다. 이번 전집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였다”라고 말했다.

 

 

반면, 이번 전집을 ‘결정판’으로 부르기엔 주저되는 면도 없지 않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출간한 15권짜리 칸트 전집은 출간연도로만 따져도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최소 20년에 걸쳐 발간됐다.

 

 

이에 비춰 기획부터 출간까지 6년 만에 모두 마친 한국의 칸트 전집이 완성도를 담보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핵심 저작인 <순수이성비판>은 4명, <판단력비판>은 3명이 나눠서 번역하는 등 학문적 깊이가 다른 번역자 34명이 나눠 맡은 번역의 질이 과연 일정하게 유지되었는지를 두고도 학계에선 의문을 표시한다.

 

또한 ‘칸트 생전에 출간된 저작을 모두 번역한다’는 점에서 전집 번역이라고 명명했지만, 이 기준에 해당하는 <자연지리학>은 시간 내에 마땅한 번역자를 찾지 못해 출간하지 못했다.

 

한국칸트학회 학술대회에서도 중요성을 강조한 편지와 강의 필기록은 3분의 1 정도만 선별적으로 번역됐고, 유고는 모두 빠졌다. 이에 전집 간행 사업 책임연구자인 최소인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앞으로 <자연지리학>과 중요한 강의록과 유고들은 번역해서 전집에 포함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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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가 살았던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세워진 이마누엘 칸트의 동상. 출처 위키미디어

 

 

학회가 이처럼 급박하게 번역을 진행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정부가 사업 기간을 못 박았기 때문이다. 한국연구재단이 토대연구지원 사업으로 선정해 6억원을 지원하는 대신 3년 안에 번역을 마치고, 사업 종료 2년 이내에 출간하라는 기간을 정해놨다. 이 기간을 넘기면 전임·공동연구자 6명은 연구재단의 다른 사업에 지원하지 못하는 일종의 ‘제재’를 받기 때문에, 일단 1차분 발간으로 겨우 일정을 맞춘 것이다.

 

 

지난해 11월부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으로 일하는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정부가 번역만이 아니라 연구 과제 등 모든 재단 사업에서 기간을 제한하고 이에 맞추지 못하면 제약을 주는 것은 관료주의적 발상 때문이다.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료들은 일정 기간 내에 결과가 나와야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재단 쪽에서 중간평가로도 번역과 연구의 질을 담보할 수 있다고 사업 기간을 늘리자고 제안해오고 있지만 잘 먹히질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박 본부장은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학계가 칸트 전집을 완벽하게 번역을 해낼 정도의 연구자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정부와 대학이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온전한 번역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무리”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바로잡습니다.

최초 보도한 기사에서 한길사에서 밝힌 바에 따라 “석정 이정직이 1905년 펴낸 <강씨(칸트)철학설대약>으로 이마누엘 칸트가 국내에 소개된 지 113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된 칸트 전집이 나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사 보도 이후 아카넷 출판사에서 대우고전총서로 2002년부터 출간한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칸트 주요 번역서를 확대해 2014년부터 ‘한국어 칸트전집’을 출간해오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에 바로잡습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8174.html#csidx0d59111f617121683c5d9ece8746389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한국칸트학회 기획 칸트 전집 출간 번역어 통일·초역·가독성 성과 짧은 번역기간에 완성도 우려 미번역 서신·강의록·유고 아쉬워

www.hani.co.kr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등록 :2018-06-10 13:31수정 :2018-06-10 22:02

 

 

칸트 전집 번역 먼저 시작한 백종현 교수 

한국칸트학회의 번역어와 번역주체 맹비판

“학회가 전집 번역한 나라 없어”

“번역어는 반드시 한국어로 번역해야”

 

 

지난해 4월 <한겨레>와 만나 포스트휴먼학회 활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진 강성만 기자

 

 

한국의 대표적인 칸트 번역자인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철학과)가 한국칸트학회에서 번역해 내는 ‘칸트 전집’ 작업을 비판하고 나섰다. 학회와 출판사에서 ‘공인’과 ‘정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통일해 사용하는 번역어를 두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학계에선 그동안 전집 번역과 번역어를 둘러싸고 공개적으로 치열하게 논쟁했던 사례가 많지 않아, 이번 논쟁이 이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백 교수는 지난 8일 210여명의 한국칸트학회 회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앞서 지난 4일 한국칸트학회가 한길사 출판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1차분 3권을 공개하고, 칸트 전집 출간의 취지를 설명한 것에 대한 반박 형식의 글이었다.

 

 

200자 원고지 28매 분량의 이 글에서, 그는 먼저 한국칸트학회가 칸트 전집을 번역하면서 ‘a priori’라는 개념의 번역어를 우리말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음차한 ‘아프리오리’로 통일하기로 한 대목을 비판했다.

 

“번역 작업이 의미가 있는 것은, 누구든 결국 사고와 이해는 모국어로 하는 것이므로, 기존의 낱말 가운데 그래도 가까운 말을 택해 새로운 뜻을 추가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신조어를 사용해서라도 모국어를 키워감으로써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이해의 폭이 깊고 넓어지기 때문이다. (…) 번역, 특히 철학 고전의 번역에서는 한 낱말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기는 노고를 기울이는 것이 번역자의 책무이다.”

 

 

이어 그는 칸트 철학의 핵심 용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의 번역어로는 각각 ‘초월적·초월론적’과 ‘선차적’(先次的)이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학회에선 이 두 용어를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통일해 번역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백 교수는 “(‘transzendental’는) 칸트가 당대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스콜라 철학자들과의 사상적 대결 중에 스콜라철학에서 차용하여,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그 의미를 전도시켜 사용했다”면서 자신이 사용해온 ‘초월적·초월론적’이란 번역어를 옹호했다.

 

이에 한국칸트학회 회장인 이충진 한성대 교수는 “번역어가 반드시 우리말이어야 한다는 건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여러 사람의 오랜 논의 끝에 차선책을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학회에선 지난 2014~15년 모두 네 차례의 학술대회를 열어 번역 원칙과 용어를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특히 칸트 철학의 기본 용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는 학회 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각각 ‘선험적’, ‘선천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과 ‘선험론적’, ‘선험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서, 결정을 내리기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용어만 두고 두 차례의 학술대회에서 발표와 토론을 벌이고, 용어조정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조정 작업을 거쳤다.

 

결국 각각을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번역하기로 결론 내렸다. 이 회장은 “가장 중요한 ‘transzendental’의 번역어를 먼저 정하니, ‘a priori’의 번역어로 마땅한 것이 없어 결국 발음을 그대로 옮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로 백 교수가 문제 삼은 것은 한국칸트학회가 번역의 주체를 맡았다는 점 자체였다. 백 교수는 글에서 “독일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칸트 전집이 원전으로든 번역서로든 편찬되어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문명국가에서는 ‘학회’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칸트학회’를 제외하고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번역에는 불가피하게 원전에 대한 해석이 수반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학설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백 교수는 “‘학회’가 아니라, 임의의 연구자나 의견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의 모임, 또는 특정 출판사나 뜻 있는 연구소가 주체가 되어 ‘전집’을 펴내야만, 그 ‘전집’에 대해서 학회 회원 누구나 등거리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학회에서 학자들끼리 나눠서 전집을 번역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용어를 통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전집 안에서 같은 용어가 다르게 번역될 수는 없지 않나. 그마저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필수 용어는 몇 개만 정해놓았고, 정 따르지 못하겠다는 경우엔 역주를 붙여서 설명하도록 했다. 앞으로 다른 칸트 번역서에서 학회 전집에서 사용한 번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강제할 수도 없고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칸트학회의 전집을 출간한 한길사 쪽에서 ‘정본’, 한국칸트학회에서는 ‘공인’이란 표현을 써서 논란을 키운 면이 있다. 백 교수는 글에서 “‘정본’이라는 것은 번역서가 아닌 ‘원저’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말이다. 번역은 일종의 복제품인데, 복제품 중 하나가 ‘정본’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백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공인’이라는 말을 쓰면 공인받은 것은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인정을 못 받은 것이라는 말인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또 있겠나. 게다가 인정이라는 것은 제3자가 해주는 일인데, 자기가 한 번역을 자기가 인정하겠다는 것도 우스운 꼴이지 않나. 이런 표현들은 순전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쓴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공적인 학회에서 기획해서 번역도 모두 했다는 의미에서 공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지 다른 번역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번 논쟁이 촉발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칸트학회에서 백 교수의 번역본을 두고 ‘가독성’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4일 기자회견에서 이충진 회장은 “(많이 읽히는) 백종현 서울대 교수 번역본은 가독성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칸트 연구자들은 모두가 하는 이야기다.

 

이번 전집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앞서 백 교수는 지난 2002년부터 아카넷 출판사에서 칸트의 3대 비판서 등 10종 11권을 번역해오고 있고, 지난 2014년에는 이를 칸트 전집 번역 작업으로 확대한 바 있다.

 

백 교수는 학회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5명가량의 후배 학자들과 함께 전체 24권 분량으로 향후 10년간 전집을 완간한다는 계획이다. 백 교수는 통화에서 “내 번역의 핵심은 원전의 글과 얼마나 부합하냐이다. 내 번역은 완전 직역이다. 대역본을 보듯이 완전하게 대조가 되게끔 독일어의 어문구조와 한국말의 어문구조가 다르지만 원문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백 교수님 번역본이 가독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번역본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독성에 문제가 있다고 학문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결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한국칸트학회의 칸트 전집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번역에 참가한 학회 회원들이 전집 번역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한길사 제공

 

 

이번엔 백 교수가 학회 번역의 질을 문제 삼으며 반격에 나섰다. 한국칸트학회의 칸트 전집은 사업 시작부터 종료까지 5~6년이 걸렸지만, 번역단 구성과 번역어 조정 작업, 해제와 역주 작업 등으로 인해 순수하게 번역에 들어간 기간은 평균적으로 3년에 그친다.

 

백 교수는 통화에서 “학술번역이 통역이 아닌 한에 전집 번역은 3년 안에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번역한 책의 논문도 한 편 안 써본 학자가 참여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의구심을 표했다.

 

또한 “학회 전집에는 34명이나 되는 사람이 번역에 참여해서 책마다 번역자가 다르고, 한 책을 서너명이 나눠 번역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번역자 중엔 중량감이 100㎏인 사람과 5㎏인 사람이 섞여 있어 실력이 들쭉날쭉한데 어떻게 제대로 된 전집이라고 할 수 있겠나.

 

국외에선 그 저작을 가장 정통으로 연구를 한 사람에게 번역을 맡기기 때문에, 영국 케임브리지판 같은 경우 완간에 20년이 넘게 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5년 전에 내가 혼자 번역했던 텍스트를 이번에 다시 번역하면서 20년이나 어린 젊은 학자와 법철학을 전공한 법학자에게 검토를 받았다. 여러 사람이 같이 번역을 하고 서로의 번역을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많이 배웠고, 번역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백종현 교수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외국(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칸트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0년 한국칸트학회 결성 당시 주도적 역할과 함께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도 학회 고문으로 있다.

 

그는 통화에서 “내가 학회 고문인데도 학회에선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회원들을 불러서 설명하고 평가를 구하는 과정을 거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학회에서 어떻게 공인한다는 말을 쓰나”라고 말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학계에서 논쟁이 많이 벌어지는 것이 좋다.

 

예전에 이기상 교수가 ‘우리말로 철학하기’란 시도를 해왔는데 요즘 철학계에선 기운이 빠져 있어서 그런 중요한 작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성균관대 대학원에 다닐 때 백 교수의 수업을 듣고 칸트로 전공을 바꾼 사람이다. 백 교수는 사실 제 마음속의 은사와 같은 분이다. 백 교수는 전례를 찾기 힘든 작업을 해온 분으로 존경한다. 같이 번역을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8413.html#csidx0fac19395f1874c8fe9856d317f28f0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칸트 전집 번역 먼저 시작한 백종현 교수 한국칸트학회의 번역어와 번역주체 맹비판 “학회가 전집 번역한 나라 없어” “번역어는 반드시 한국어로 번역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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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을 접하며

 

 

등록 :2018-06-19 17:13수정 :2018-06-28 11:02

 

 

 

 

한국칸트학회판 칸트 전집 논쟁 두고

국내 대표적 후설 학자 이종훈 비판글

“문제 발생 원인 백종현 교수에 있어”

“백교수의 ‘학회 기획’ 문구 삭제 요구 부당”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해 번역해내고 있는 칸트 전집을 두고 또 다른 전집 번역자인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의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저작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번역한 이종훈 춘천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가 백 교수를 비판하는 글을 <한겨레>에 보내와 전문을 싣는다. 공론인만큼 애초 기고문에서 존칭과 경어체는 생략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①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②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③ [기고]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 이종훈

④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⑤ [기고]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 김상봉

⑥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 전대호

⑦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⑧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 김상봉

 

 

한국칸트학회(이하 ‘학회’)가 기획해 출간하기 시작한 칸트 전집에 관한 <한겨레> 기사를 읽고, 무척 망설였지만, 논의가 생산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어, 몇 가지 의견을 간략하게나마 밝힌다. 이 전집에 대해 ‘최초’ ‘정본’ ‘공인’ 등과 같은 표현은 학회나 해당 출판사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인정해 수정할 것이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백종현 교수는 학회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학회가 번역의 주체를 맡은 일은 (…) 적어도 문명국가에서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번역에는 불가피하게 원전에 대한 해석이 따르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학설이 나오기 때문”이며 “임의의 연구자나 의견을 함께하는 연구자들 모임, 특정 출판사나 뜻있는 연구소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칸트 전집을 번역하면서 핵심 용어인 ‘a priori’를 번역하지 않고 발음 그대로 ‘아프리오리’로 표기한 것은 (…) 기존의 말에 새로운 뜻을 추가하거나 신조어를 사용해서라도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겨야 번역자의 책무”라며 “‘a priori’는 ‘선차적’(先次的), ‘transzendental’(트란젠덴탈)은 ‘초월적/초월론적’이 가장 적합하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의 주체나 용어의 번역에서 백 교수가 제기한 문제는 그 문제가 발생한 원인도, 이 문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어갈 실마리도 전적으로 백 교수 본인에게 있다고 본다.

 

그 이유를 우선 용어 문제에서 살펴보자.

 

백 교수는 번역한 책들에서 ‘a priori’를 ‘선험적’, ‘transzendental’을 ‘초월적(아주 드물게 초험적/초월론적)’, ‘transzendent’를 ‘초험적’이라 정리한 바 있다. 그렇다면 ① ‘a priori’는 ‘선험적’인지 ‘선차적’인지(약 10여년이 흐르면서 이처럼 변화된 견해를 언제 어디에서 밝히셨는지 모르지만), ② ‘초험적’이 ‘transzendental’의 번역어도 ‘transzendent’의 번역어도 될 수 있다는 것인지, ③ ‘transzendental’은 어느 때 ‘초월적’이며 어느 때 ‘초월론적’인지 상당히 애매하다. 특히 ‘론’이 붙을 때도 있고 안 붙을 때도 있는데, 이것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적’(ontisch)과 ‘존재론적’(ontologisch) 같은 차이가 있는지 정말 혼란스럽다.

 

 

더구나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이라는 것은 궁색한 억지로 들린다. ‘현대’와 ‘근대’를 아우르는 ‘Modern’에다 ‘계승한다’와 ‘벗어난다’는 뜻을 함께 지닌 ‘post’라는 용어가 합성된 ‘Post-Modern(-ity)’를 ‘탈현대’로 번역해도, 그 의미를 살려 ‘해체주의’라 해도 적절치 않기 때문에 ‘포스트 모던(모더니즘)’이라고 써도 이것을 ‘번역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예는 ‘딜레마’(Dilemma), ‘에피스테메’(episteme), ‘헬레니즘’(Hellenism) 등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철학뿐만 아니라 도덕교육 분야에서도 오래전부터 ‘Moral’이나 ‘Sitte’는 ‘도덕’으로 ‘Ethik’은 ‘윤리’로 사용해 왔는데, <도덕(Sitte)형이상학>으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왔던 동일한 칸트의 저술을 백 교수가 왜 굳이 <윤리형이상학>이라는 명칭으로 출판하셨는지 지극히 궁금하다.

 

 

우리 사회가 격심한 변화를 겪은 1980년을 기점으로 이전 시대의 원로 학자들, 특히 칸트 관련 책들을 저술하고 번역하신 최재희 교수뿐 아니라 칸트와 밀접한 사상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transzendental’을 ‘선험적’(일부는 ‘정험적’)으로 ‘아 프리오리’는 ‘선천적’ 또는 ‘아 프리오리’로 약속해 번역했다. 그들이 이들 용어의 역사적 맥락과 정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마다 다른 용어를 씀으로써 공부하는 이들에게 혼란만 가중시켰기 때문이다(가령 한국현상학회에서는 현상학의 창시자인 ‘E. Husserl’도 ‘훗설’ ‘후싸르’ ‘후셀’ 등으로 제각기 표기했었는데, 그 혼란을 막고자 학회 차원에서 ‘후설’로 쓰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백 교수는 이 용어들을 다르게 표기하기 시작했고, 10여 년이 지나자 “‘초월적’, ‘초월철학’이라는 중심 용어의 새 번역어는 처음의 생소함을 벗어나서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순수이성비판> 제1권, 7쪽)고 자평한다. 어떤 학술 용어를 바꾸는 기준이 정확성인지 적합성인지 익숙함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학회에 공식적 논의와 검토를 거치지 않고 어느 개인이 일방적으로 감행하면, 그것은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사유혁명’도 아니고, 은사나 선배들의 업적 모두를 일거에 낡은 유물로 낙인찍게 되어, 마치 다른 모든 것은 외면한 채 정권의 탈취에만 급급한 쿠데타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

 

그다음 번역의 주체 부분을 살펴보자.

 

백 교수가 “(전집 번역은) 학회가 아니라 임의의 연구자나 의견을 함께 나누는 연구자들의 모임, 특정 출판사나 연구소가 주체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곧 현실적으로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의견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의 모임’과 ‘학회’가 무엇이 다른지 전혀 알 수 없으며, 우리나라의 빈약한 독서 환경에서는 어떤 출판사도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 교수는 서울대학교에 오래 봉직했는데,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그런 연구소를 일찍부터 운영해왔다면, 또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주로 새로운 저술보다 이미 번역된 저술을 새롭게 번역할 때 처음부터 ‘학회’나 ‘뜻있는 연구소’를 통해 함께 작업을 했다면, 이러한 논쟁 자체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 기사 끝에는 백 교수가 “2002년부터 대우고전총서로 번역해왔던 저술들을 확대해 2014년부터 ‘한국어 칸트 전집’을 출간해오고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이에 바로잡습니다”라는 추신이 있다. 무엇을 바로 잡았는지 다시 읽어보아도 결국 ‘최초의 칸트 전집’이라는 점을 선점하려는 뜻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심성이 삐뚤어졌기 때문일까? 학회가 칸트 전집을 기획한 것에는 백 교수가 일방적으로 혼란시킨 용어를 다시 정비하려는 의도도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은 어느 쪽을 편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기사에는, 잘 알려져 있듯이 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백 교수가 그 회원들에게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으나) 항의성 이메일을 보냈으며, ‘한국칸트학회 기획’이라는 문구를 삭제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요구가 왜 정당한지, 또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도 백 교수와 칸트학회가 이 문제를 칸트의 냉철한 합리성에 입각해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학문적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주기 바란다.

 

결국 백 교수의 번역과 학회의 번역은 나름대로 다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본다. 어떤 책을 선택할지는 소비자의 권리이며, 그 평가는 후학들이나 미래세대의 몫일 것이다. 그래도 ‘상대방의 의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곧 (그와 마찬가지로 틀렸을 경우도 있을 텐데) 자신의 견해가 올바름을 입증한 것이라는 소피스트의 궤변을 우리 사회가 성숙하게 극복하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아 씁쓸하다.

 

 

※이종훈 교수는 서양철학(현상학)을 전공하고, 2011~12년 한국현상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현대의 위기와 생활세계>, <후설현상학으로 돌아가기> 등이, 번역서로는 에드문트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전 3권), <시간의식>, <데카르트적 성찰>,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현상학적 심리학>, <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경험과 판단>, <논리연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9741.html#csidxc95ca92f2441bd3a2dd46aaa7eec023 

 

[기고]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을 접하며

한국칸트학회판 칸트 전집 논쟁 두고 국내 대표적 후설 학자 이종훈 비판글 “문제 발생 원인 백종현 교수에 있어” “백교수의 ‘학회 기획’ 문구 삭제 요구 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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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등록 :2018-06-21 19:42수정 :2018-06-21 21:26

 

 

논쟁 불거진 한국칸트학회 칸트 전집

 

 

대표적 칸트 학자 김상봉 교수 반론

“방대한 칸트 전집, 공동번역이 나아”

백종현 교수 학회에 법적 대응 경고

 

지난해 2월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달 초 발간을 시작한 ‘한국칸트학회(학회) 기획 칸트 전집’을 두고 논쟁이 뜨겁다. 정부 지원사업의 특성상 짧은 번역 기간으로 인한 사소한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동안 축적돼 온 전문성 속에서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인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의미 있는 전집이라는 것이 칸트 학계 안팎의 평가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칸트 학자이자 학회 번역에도 참여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한겨레>와 통화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학회에서 전집을 번역하기로 한 원인은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을 ‘초월적’이라고 심각하게 왜곡해 번역한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철학과)가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칸트는 그 이전의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존재자들에 대한 사변을 파괴하고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다. 하지만 칸트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트란스첸덴탈’을 현세적 차원과 내재적 지평을 뛰어넘는다는 뜻이 담긴 ‘초월적’으로 번역을 하니, 대다수 칸트 학자들은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어 새로운 전집 번역으로 바로잡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학회는 4차례의 학술대회와 용어조정위원회의 논의 끝에 ‘트란스첸덴탈’을 ‘선험적’으로 통일해 전집을 번역한 바 있다.

 

 

이어 김 교수는 “플라톤이나 니체와는 다르게 칸트 철학은 주제와 논의의 폭이 너무나 넓다. 한 사람이 칸트의 모든 저작을 다 번역하는 것보다는 각 저작의 전문 연구자들이 나눠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모두 11권의 칸트 주요 저작을 번역해 아카넷 출판사에서 출간했고, 지난 2014년에 이를 ‘한국어 칸트전집’으로 확대해 향후 10년간 4명의 후학과 함께 전 24권으로 낸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번 달에 1차분 3권을 낸 한국칸트학회는 한길사에서 내년까지 모두 15권의 전집을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학회에서 ‘트란스첸덴탈’에 버금가는 핵심 용어인 ‘a priori’를 ‘선천적’, ‘선험적’, ‘선차적’이 아니라 ‘아프리오리’라고 번역한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정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독일의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저작을 10여종 넘게 번역한 이종훈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윤리교육과)는 지난 19일 <한겨레>에 보내온 글에서 “백 교수가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이라고 비판한 것은 궁색한 억지로 들린다.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적절치 않은 용어를 음차해) 번역한 예는 ‘포스트모더니즘’, ‘딜레마’, ‘에피스테메’, ‘헬레니즘’ 등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독일어 문장 구조를 그대로 살린 백종현 전집에 비해 최대한 우리말에 가깝게 문장을 다듬은 학회 전집이 비전공자들도 칸트에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을 크게 낮춘 의미가 적지 않다는 평도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백 교수 전집은 완전 직역으로 독일어 원전을 같이 읽을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칸트를 읽어보려는 다른 학문 연구자나 일반인들은 학회 전집을 보는 것이 도움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논쟁이 법적 소송으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백종현 교수는 지난 13일 학회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홍보문에서 ‘정본’ 표현을 거두라 △‘한국칸트학회 공인 칸트 전집’이라고 표현하지 말라 △‘한길사 판’ 또는 ‘학회 회원 34인 번역 칸트 전집’으로 호칭하라 △학회 학술지 등에 ‘한길사 판 칸트 전집’에서 사용한 용어를 강요하지 말라 △가독성 운운하지 말라 등 5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이후 백 교수는 추가로 이충진 회장 쪽에 ‘기자간담회에 나가서 한 발언으로 학회 회원 간에 반목을 일으킨 이 회장과 책임연구자 최소인 영남대 교수 등 5명은 오는 23일까지 이번 일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학회를 탈퇴하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회원들에게 문제 해결을 호소할 것이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한 상황이다.

 

한국칸트학회는 지난 16일 이사회를 열어 가까운 시일 내에 긴급 총회를 열어서 회원 전체의 의견을 모아 백 교수의 요구에 답하기로 했다. 이충진 회장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아직 이사회에서 총회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학기 일정도 있고 전국에서 회원들이 모여야 해서 백 교수가 요구한 시한에 맞춰서 총회를 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상봉 교수는 “전집 출판을 두고 일어나는 마찰은 학회 안에서 서로 선의로 조율하고, 학회 쪽에서도 백 교수의 정당한 요구는 받아들일 생각이다. 하지만 백 교수의 현재 요구는 너무도 과도하고 비상식적이다.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50134.html#csidxa23b09e1a747393ad5dfbb4ba8f14ce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논쟁 불거진 한국칸트학회 칸트 전집 대표적 칸트 학자 김상봉 교수 반론 “방대한 칸트 전집, 공동번역이 나아” 백종현 교수 학회에 법적 대응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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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상봉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등록 :2018-06-21 21:06수정 :2018-06-28 11:04

 

 

 

 

대표적 칸트 학자이자 학회 전집 번역자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반론

“방대한 주제 칸트 전집, 공동번역이 맞아”

“백종현 교수 법적 대응 경고, 이해 안돼”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을 두고 또다른 전집 번역자이자 학회 고문인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칸트 연구자이자, 칸트 철학을 양분 삼아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해온 드문 철학자이며, 한국칸트학회의 전집 번역에도 참여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백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인터뷰를 자청해왔다. 아래는 통화한 내용을 토대로 김 교수가 작성한 글이다. 공론인만큼 애초 기고문에서 존칭과 경어체는 생략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①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②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③ [기고]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 이종훈

④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⑤ [기고]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 김상봉

⑥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 전대호

⑦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⑧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 김상봉

 

 

나는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 중에서 칸트가 라틴어로 쓴 세 편의 학위 논문과 교수 취임 논문의 번역을 맡았다. 이 저작들은 언어가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인데다 <불에 관하여>나 <물리적 단자론>의 경우에는 제목에서 보듯이 물리·화학적인 내용이어서 번역이 쉽지 않았다. 이 저작들을 대학원 강의에서 학생들과 같이 읽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만약 칸트학회에서 기획한 번역 사업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회 일이라고 하니 나도 동참하는 의미에서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을 법한 저작을 번역하자’고 생각하고 일부러 라틴어 저작들을 떠맡았다. 사실 이번에 출판된 라틴어 저작 세 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비판기의 칸트와 사뭇 다르고 내용도 까다로운 편에 속해서 이를 번역한 나라는 일본과 영국 등 극소수의 나라를 제외하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 전집으로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도 이번의 학회 번역 사업의 기여라면 기여라고 할 수 있다.

 

한길사에서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 출간 보도자료에 사용한 “정본”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좋은 학술적 작업을 알리려다 보니 과도한 열정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백 교수가 정본이나 공인이란 말이 정말 문제라고 한다면, 그 지적을 받아들여 표현을 철회할 수 있다.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학회 회원으로서 또 공동번역자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이미 학회에서 한길사에 보도자료와 광고에서 ‘정본’, ‘최초’, ‘공인’이란 표현은 삭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학회에서 번역했다는 사실 자체를 철회하라는 백 교수의 요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부터가 이번 번역 사업이 칸트학회가 기획하고 주도한 일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번역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34명이 아니라 340명이 참여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임의의 개인들의 모임이고 학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안되고 기획된 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참여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칸트의 몇몇 주요 저작에 대한 번역을 진행 중이고, 번역 외에 나름의 출판 일정도 빠듯하다. 공동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집단적으로 일정을 조율해야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번역에 참여한 까닭은 칸트학회 차원에서 번역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칸트 학자들이 그동안 논란이 되어 온 칸트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 문제를 같이 토론하고 가능한 합의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전과 달리 칸트의 저작 각각을 연구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전문가들이 많이 생겼기에 이런 분들이 맡아 번역을 한다면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백 교수가 학회에서 모여서 번역해내는 것이 “문명국가에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니 도무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회 회원들이 같이 모여 한국의 칸트 연구를 한 단계 격상시키기 위해 필요한 토론을 거쳐 칸트의 저작들을 전문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번역하자는 소박하고 순수한 선의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나. 문명국가의 학회에서 모여서 번역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편에서 생각하면, 문제의 핵심은 학회의 이름으로 회원들이 공동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그건 당연히 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한 사람이 칸트의 모든 저작들을 다 번역하는 것이 더 좋으냐 아니면 각각의 저작에 관해 그 저작의 전문 연구자들이 따로 번역하는 것이 좋으냐 하는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후자가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라면 서양에서 한 사람이 거의 모든 저작을 번역한 경우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경우에도 혼자 모든 저작을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주제와 논의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순수 물리학적 저술에서부터 형이상학과 윤리학 그리고 법철학과 미학과 종교철학까지 다루는 주제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한 까닭에 한 사람이 그걸 전문적으로 연구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경우 의도치 않은 오류나 불충분함이 없을 수 없다.

일본의 경우 이와나미쇼텐 출판사에서 칸트 전집이 스물두 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경우에도 여러 사람이 나눠서 번역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각 저작의 전문 연구자들이 자기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저작을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나도 가능하면 삼 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는 내 손으로 번역하려고 생각하고 부분적으로 번역을 끝낸 책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 번역서들이 여러 가지로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일종의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뿐이다. 학문의 전문성을 생각하면 각각의 책을 평생 연구한 학자들이 따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학문의 전문성에 대해서도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전남대 대학원에서 칸트를 전공하는 제자들을 많이 두었고, 그들이 칸트의 저작 가운데서 다양하게 주제를 선정해서 논문을 쓰는 까닭에 대부분의 저작을 공부하고 또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모든 주제에 전문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에 전문가가 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칸트 저작을 혼자 다 번역한다 해서 전문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번역한 책의 내용도 돌아서면 기억나지 않는데, 하물며 그 책이 다루는 주제 자체에 대해 전문가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교수가 혼자서 거의 모든 저작을 번역하고 번역할 계획인 것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분의 열성이 후학들에게 자극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도리어 칭찬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칸트 학회에서 한편에서는 전체적으로 용어를 통일하고, 각 저작의 전문가들에게 번역을 위촉하고, 번역된 원고를 다른 전문가의 비판적인 검토를 거쳐 전집을 번역하는 것 역시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학회에서 기본 용어를 통일한 것은 한 전집 안에서 서로 다른 용어를 쓰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통일이 필수인 용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머지 용어들은 ‘제안 용어’들로 번역자가 자신의 용어를 고집할 경우 전집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선택한 용어를 쓸 수 있도록 했다.

 

용어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나도 학회에서 “나도 내가 쓰는 용어가 있지만, 나부터 내려놓겠다”며 “열린 마음으로 토론하되 다수의 뜻에 따라 결정된 사항은 같이 따르자”고 제안했다. 다들 칸트 철학을 하시는 분들답게 온화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자기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양보를 해서 용어를 통일했다. 사실 나부터 내가 쓰던 번역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양보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뜻을 모은 것이지 학회에서 특정한 누군가의 학문적 입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킨 것이 아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번역서가 나왔든지 간에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번역자들은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면 되지 않나. 백 교수 번역이 있고, 학회 차원의 번역이 있고, 나도 따로 번역할 수 있고, 후배들이 또 새로운 번역을 해나갈 것이다. 내가 번역하는 칸트 저작에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번역어(‘트란스첸덴탈’=‘선험론적’, ‘아프리오리’=‘선험적’)를 사용한다. 경우에 따라 칸트학회의 번역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그 모두가 열려 있다. 학회 차원의 번역이 “특정 번역어와 학설을 회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백 교수가 생각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학회에서 번역을 한 것은 따지고 보면 백 교수가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언론에 언급된 가독성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훨씬 더 전문적이고 심각한 학문적인 용어 선택의 문제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백 교수가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이란 용어를 ‘초월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출발한다.

 

그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트란스젠덴탈’과 ‘아프리오리’를 각각 ‘선험적’, ‘선천적’이라고 번역해왔다. 하지만 30년 전에 백 교수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논란이 시작됐다.

 

‘트란스첸덴탈’은 칸트가 자기 철학을 명명하는 데 쓰는, 가장 중요한 용어다. 하지만 이걸 ‘초월적’이라고 번역하는 건 심각한 왜곡이다. ‘트란스첸덴탈’이라는 라틴어의 원래 뜻이 초월적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서 ‘이데아’가 ‘형상’의 의미라 해서 로크의 ‘아이디어’(idea)도 ‘관념’이 아니라 ‘형상’이라 번역해야

하고, 헤겔의 ‘이데’(Idee)도 ‘이념’이 아니라 ‘형상’이라 번역해야 하나?

 

‘페르소나’(Persona)가 중세 철학에서 신의 삼위일체 위격을 뜻하니까, 칸트에게서도 ‘페르손’(Person)을 인격이 아니라 위격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철학 용어의 사전적인 뜻이나 이전 시대에 통용되던 의미를 무차별하게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동료 학자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아집일 뿐이다. 왜냐하면 같은 용어가 시대와 철학자에 따라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일이 철학사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트란스첸덴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평균적인 한국인에게 ‘초월적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냐’고 물어본다 하자. 뭔가 현세적 차원이나 내재적인 지평을 뛰어넘는 의미라고 답하지 않겠나. 플라톤의 이데아를 가리켜 초월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이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존재자들에 대한 사변인 데 비해, 칸트는 그런 것을 파괴하고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다. 그런데 백 교수는 ‘칸트 철학은 초월철학’이라니, 대다수 칸트 학자들은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칸트 저작을 가장 많이 번역한 서울대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니 그게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쓰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칸트가 서양 철학에서 워낙 중요한 사람이다보니 칸트 학자가 아니라도 더 나아가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 연구자들도 칸트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글을 쓰면서 같은 페이지 내에서 한번은 초월적이란 말을 칸트의 ‘트란스첸덴탈’을 의미하는 말로 썼다가, 그 몇 줄 아래서는 우리말의 일상언어에서 의미하는 초월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해, 급기야 초월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사례가 이것 하나가 아니다. 백 교수는 지난주에 칸트 학회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의사’라고 번역한 ‘빌퀴어’(Willkür)를 학회가 ‘자의’(恣意)라고 번역한 것을 비판했다. ‘빌퀴어’는 영어론 arbitrariness, 즉 ‘엄격한 도덕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의사’를 말한다. ‘내 맘대로’, ‘자유분방한 의지’ 같은 의미다. 이걸 백 교수가 ‘의사’라고 번역하니 그 의미가 전달될 수 있겠나.

 

번역어에 관해 백 교수가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하니까 칸트 전문가들 사이에서 우려가 커졌다. 칸트 학회에서 ‘차라리 용어를 통일해서 공동으로 번역하자’고 나선 까닭이 그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번에 이 일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에 번역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논쟁은 이미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었다. 다만 이번 번역작업으로 대다수 칸트 학자들의 상식적인 판단이 결집된 형태로 표현된 것뿐이다.

 

용어 통일과 번역 사업을 주도한 학자들은 지난 200년간 칸트 철학 연구의 본거지인 독일로 유학을 가서 칸트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들에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이들이다.

 

독일 트리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엽 청주대 교수와 김수배 충남대 교수, 마인츠대 박사인 최소인 영남대 교수, 마르부르크대 박사인 이충진 한성대 교수 등 칸트학회 전·현직 회장들은 물론이고, 김재호, 김상현, 이남원 교수 모두 훌륭한 칸트 전문가들이다.

 

번역에 참여한 번역자 중에 상대적으로 실력이 넘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다소 부족한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번역과는 차별화된 전문성이 있다고 자부한다.

 

생각하면, 각자 칸트를 공부할 만큼 공부한 전문가들이 자기 자존심 내려놓고 동료 학자의 엄격한 검토와 신랄한 비판을 거쳐서 번역을 한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내 경우에도 누가 검토를 했는지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심사한 걸 보내왔다. 빨간펜으로 수정된 교정지를 받아 드는 그 순간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검토를 받는 과정에서 많이 배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성의 있게 꼼꼼히 검토해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최근엔 칸트학회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축에 속하진 않는다. 하지만 평생 칸트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칸트를 연구하는 동료학자들에 대해 조금씩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됐다.

 

그 까닭은 같은 철학이라도 칸트를 공부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윤리적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칸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특별히 과격하지 않으면서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엄격함 같은 것을 보여주는 분들이 많다.

 

대개 칸트학자들은 자기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거울을 마음 속에 하나씩 가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이 칸트 철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선량한 분들이 칸트 저작의 공동번역이라고 하는 어려운 일을 한국 학계를 위해 소박한 선의를 가지고 해나가고 있다. 그것이 칭찬을 받지는 못할망정 비난을 받는 것은 옳은가. 책이 나오고 출판사 마케팅 차원에서 다소 과장된 언사가 있었다 해서 번역에 참여한 학자들과 학회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비방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 백 교수가 당시 기자회견에 나온 이충진 회장과 최소인·김수배·김재호·김화성 교수에게 “학회를 탈퇴하라”고 요구한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회장이 잘못한 일이 있을 때 회원들이 회장을 탄핵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 백 교수가 그분들에게 탈퇴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칸트 전집 번역 출판에 관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마찰에 대해서는 서로 선의로 조율하고, 또 그 과정에서 백교수의 정당한 요구는 학회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학회 임원들도 대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러나 백 교수의 앞의 요구는 너무도 과도하고 비상식적이어서 결국은 대다수 학회 회원들의 반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왜 이렇게 나오시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대개 한국의 칸트 학자들은 유독 연구에 몰두하느라 신문에 칼럼 하나 쓰지 않는 조용한 학자들이다. 그나마 언론에 몇 번 나선 적이 있는 내가 그분들을 옹호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인터뷰를 자청하게 됐다. 내 말은 칸트 학회의 공식적인 견해는 아니지만, 나도 평생 칸트를 연구하고 가르쳐 온 학회 회원이자 이 사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번역자로서 학회의 번역 사업이 악의적으로 매도되는 상황을 무관심하게 보고 있을 수 없어 나름의 입장을 분명히 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2월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김상봉은 부산에서 태어나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문헌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고 이마누엘 칸트의 <최후 유작>(Opus postumum)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그리스도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나 해직되었다. 그 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를 만든 산파였으며 이사장을 지냈다. 또한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공동의장과 ‘5.18기념재단’ 이사를 지냈다.

 

저서로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한길사, 1998), <호모 에티쿠스: 윤리적 인간의 탄생>(한길사, 1999), <나르시스의 꿈: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한길사, 2002),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철학이야기>(한길사, 2003), <학벌사회: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한길사, 2004), <도덕교육의 파시즘: 노예도덕을 넘어서>(도서출판 길, 2005), <서로주체성의 이념: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도서출판 길, 2007), <만남: 서경식 김상봉 대담>(공저, 돌베개, 2007), <5.18 그리고 역사: 그들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의 나라로>(공저, 도서출판 길, 2008), <다음 국가를 말하다: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공저, 웅진지식하우스, 2011),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꾸리에, 2012), <철학의 헌정: 5.18을 생각함>(도서출판 길, 2015), <만남의 철학: 김상봉 고명섭 철학 대담>(공저, 도서출판 길, 2015)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50160.html#csidxb98a84f2b0d2c36940eb16c0d7a4590 

 

[기고] 김상봉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대표적 칸트 학자이자 학회 전집 번역자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반론 “방대한 주제 칸트 전집, 공동번역이 맞아” “백종현 교수 법적 대응 경고, 이해 안돼”

www.hani.co.kr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등록 :2018-06-22 17:19수정 :2018-06-28 11:04

 

번역가·철학자 전대호, 김상봉의 ‘백종현 비판’에 반론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을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과 독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전대호 번역가가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이라고 번역한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판한 김상봉 전남대 교수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공론인만큼 애초 기고문에서 존칭과 경어체는 생략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①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②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③ [기고]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 이종훈

④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⑤ [기고]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 김상봉

⑥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 전대호

⑦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⑧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 김상봉

 

 

1.

칸트 전집 번역을 놓고 최근 칸트학회와 백종현이 벌이는 논쟁을 그리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지켜보던 차에 며칠 전 한겨레 온라인판에 게재된 김상봉의 기고문을 읽었다.

 

학문적 논쟁은 늘 기대해온 바며 뜨겁게 달아오를수록 더욱 환영한다. 그러나 양편의 논쟁은 철학의 본령과는 무관하게 번역서와 특정 번역어 몇 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위의 힘겨루기로 보여 생산적일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transzendental(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옮기는 백종현의 번역을 김상봉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필자도 끼어들어 한마디 보태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안만큼은 충분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문용어의 번역과 관련해서 필자는 백종현의 편이며 김상봉의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다른 한편, 필자는 번역서가 많아질수록 좋다고 보고 학회가 주도한 번역서도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점에서 김상봉과 뜻을 같이하는데, 이 부분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상봉도 인정하듯이, ‘transzendental’의 뜻은 ‘초월적’이다.

 

그는 굳이 라틴어를 들먹이면서 “‘트란스첸텐탈’이라는 라틴어의 원래 뜻이 초월적이라는 건” 자신도 안다고 하지만, 라틴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어에서도 그렇다. 독일어 ‘transzendental’은 칸트의 시대에나 지금에나 ‘초월적’을 뜻한다. 혹시 김상봉이 이 엄연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꼴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철학적 해석을 바탕에 깔지 않는다면,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옮기는 것이 도리어 심각한 왜곡이다.

 

기고문에서 김상봉은 과거 라틴어의 뜻이 ‘초월적’이라고 해서 칸트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옮겨야 한다면,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유래한 영어 ‘idea’, 독일어 ‘Idee’도 ‘형상’으로 번역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음으로 그는 ‘트란스첸덴탈’을 칸트철학의 취지에 맞게 ‘선험적’으로 옮기자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한다.

 

 

그러나 궁색한 논리다. 번역에서 아무 탈도 일으키지 않는 ‘idea’와 ‘Idee’를 왜 끌어들이나? 로크의 ‘idea’와 헤겔의 ‘Idee’는 당대 영어와 독일어의 일반적 어법에 따라서 ‘관념’과 ‘이념’으로 번역되고, 이것은 나무랄 데 없는 번역이다.

 

이 단어들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관련이 있으니까 ‘형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들을 번역할 때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를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로크와 헤겔은 당대 언어환경에 어울리게 그 단어들을 사용했고, 우리는 라틴어니 희랍어니 들먹일 필요 없이 그 언어환경에 맞게 그 단어들을 번역하면 된다.

 

하지만 칸트가 사용하는 ‘transzendental’에서는 확실히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이 단어를 당대와 현재의 독일어 환경에서 통용되는 뜻과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험적’이라는 번역어를 옹호하는 분들이 잘 지적하듯이, 칸트의 ‘transzendental’은 일반적인 독일어 ‘transzendental’과 뜻이 다르다.

 

그러니 그냥 ‘초월적’으로 번역하면 안 되고, 자상한 해석이 가미된 번역어인 ‘선험적’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그분들의 견해다.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반발한다. 칸트의 ‘transzendental’이 독특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일반적 번역어 ‘초월적’을 버리고 칸트 맞춤형 번역어 ‘선험적’을 택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 번역어를 택하고 칸트의 독특한 어법을 그 독특함과 함께 음미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김상봉은 말한다.

“칸트 이전의 철학이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존재자들에 대한 사변인 데 비해, 칸트는 그런 것을 파괴하고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다. 그런데 백 교수는 ‘칸트 철학은 초월철학’이라니, 대다수 칸트 학자들은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라는 김상봉의 해석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한다. 왜냐하면 칸트는 신과 영혼 등에 관한 전통적 논의를 시대의 요구에 맞게 재구성한 철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파괴는 일방적인 파괴가 아니라 재건이기도 하다. 칸트의 위대함이 거기에 있다.

 

김상봉은 “대다수 칸트 학자들”을 들먹이는데, 덕분에 필자는 대다수에서 벗어난 예외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런 예외가 적지 않다. ‘칸트라는 그릇이 과거 형이상학의 논의를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큰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렇다’라고 답할 칸트 전문가들은 수두룩하다. 그들은 “칸트 철학은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다”라는, 칸트 본인에게서 유래한 말을 그 어법의 독특함까지 충분히 음미하면서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칸트철학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니, 이 정도로 줄이자. 문제는 번역어 선택이다.

 

필자의 논지는 간단명료하다.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썼다. 그러니 우리는 ‘초월적’으로 번역하자! 칸트는 자신의 어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래서 그 어법을 자상하게 설명했다. 그러니 우리도 칸트의 독특한 어법을 그대로 살리면서 칸트처럼 설명을 덧붙이자!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번역하면, 칸트의 독특한 어법은 완전히 은폐된다. ‘선험적’을 옹호하는 분들은 그렇게 번역해야 칸트의 취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칸트의 입을 막고 자기가 대신 말함으로써 칸트의 취지를 전달할 권리는 없다.

 

비유하건대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등산로 입구에 커다란 안내판을 설치하여 산을 가려버리는 것과 같다. 왜 그런 도발을 할까? 칸트의 산을 보는 것보다 번역자 본인의 안내판을 보는 편이 더 유익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일까?

 

굳이 따지자면, ‘선험적’이라는 번역어가 칸트가 사용하는 ‘transzendental’의 의미를 충실히 받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 의미는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초월철학이란 ‘경험의 가능 조건을 다루는 철학’이다.

 

과연 ‘선험적(경험에 앞서는)’이라는 단어가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라는 뜻을 충실히 표현할까? ‘앞선다’는 말과 ‘가능성의 조건이다’라는 말이 맥이 닿기는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앞선다’는 것은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를 말한다는 설명이 보충되어야 한다.

 

요컨대 ‘선험적’이라는 번역어는 칸트가 ‘transzendental’을 사용할 때의 취지, 곧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라는 뜻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물론 모든 번역어는 나름의 방식으로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등산로 안내판이 산보다 불완전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안내판을 설치하여 산을 가려버리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할 것이다.

 

칸트의 취지에 맞게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필자가 보기에 ‘칸트 맞춤형 번역’을 옹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무릇 맞춤형 번역에 반대한다. 왜 저자의 독특한 언어 사용을 은폐하려 하는가? 왜 독자들의 소화 능력을 불신하는가?

 

김상봉은 “평균적인 한국인”이 ‘초월적’이라는 번역어를 “뭔가 현세적 차원이나 내재적인 지평을 뛰어넘는 의미”로 이해하여 칸트철학을 오해할 것을 우려한다. 그렇다. 그런 오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확실히 해두자. 애당초 그런 오해를 유발한 장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칸트 자신이다. 어쩌면 칸트는 ‘평균적인 독일인’이 자신의 철학에 접근하면서 일단 그 오해를 품었다가 이내 자신의 설명을 읽으면서 깨기를 바랐을 것이다. 김상봉이 우려하는 오해도 칸트가 의도한 바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칸트의 진정한 의도는 독자들이 그렇게 오해를 품고 깨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이야기되어온 ‘초월’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 해석이 옳다면, 번역자는 한국어 사용자들 역시 그렇게 오해를 품고 깨는 과정을 거치도록 유도해야 마땅하다. 물론 이 해석이 그릇되다면, 바꿔 말해 칸트의 독특한 어법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실수여서 교정해야 마땅하다면, 번역자는 칸트 맞춤형 번역어로 ‘선험적’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해석이 옳은지는 따져 봐야 할 일일뿐더러, 엄연한 저자의 어법을 해석자가 나서서 근본적으로 교정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끝내 의문스럽다.

 

2008년에 필자는 셸링의 <초월적 관념론 체계>(System des transzendentalen Idealismus)를 번역 출판하면서 주석에서 ‘transzendental’의 번역에 관하여 꽤 길게 언급했다. 그 언급을 2절로 덧붙인다. 요점은 ‘칸트 맞춤형 번역’, 나아가 무릇 ‘맞춤형 번역’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땅의 독자들도 칸트의 독특한 어법을 스스로 알아서 소화할 수 있지 않은가! 서양문물을 처음 접한 극소수 엘리트가 어설프게 이해한 칸트철학을 잘게 부수고 맞춤형으로 요리하여 우매한 민중에게 떠먹이던 시절은 벌써 옛날에 지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2.

(2절은 셸링, 전대호 역, <초월적 관념론 체계> 2008 이제이북스, 332~333쪽에서 인용)

 

 

초월철학은 ‘Transzendental-Philosophie’의 번역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독일어를 ‘선험철학’으로 옮긴다. 어느 번역어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마치 제사상에 대추를 더 오른쪽에 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감을 더 오른쪽에 놓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처럼 비생산적이기 십상이라서 피해야 할 것이나, 생산적일 수도 있을 만한 제안은 던져도 좋을 것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transzendental’이 ‘초월적’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얄궂게도 거의 고유명사화한 ‘Trnaszendental-Philosophie’의 원조 칸트는 ‘transzendental’을 독특한 의미로 썼다. 그러면서 자신의 언어 사용이 독특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상히 설명했다. 그에게 ‘transzendental’이라는 술어는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라는 의미라고 말이다.

 

일부 학자들이 선호하는 ‘선험철학’이라는 번역어는 분명 이 뜻풀이에 의거할 것이다. 요컨대 꽤 오래전에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정착시킨 선배 철학자들은 아주 자상한 번역을 한 셈이다.

 

칸트의 ‘Transzendental-Philosophie’를 직역하여 “초월철학”이라고 부른다면 의미상으로 칸트의 뜻에 반하여 혼란만 더 가중될 테니 그의 뜻에 맞게 ‘선험철학’이라고 번역하자, 하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맞춤형 번역의 기저에는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는 것 같다. 독일어나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인구가 극히 드물었던 시절에는 그게 옳았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transzendental’도 모르고 ‘a priori’도 모르고 ‘초월적’도 모르고 ‘선험적’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원래 transzendental은 초월적이라는 뜻인데, 특이하게 칸트는 a priori 즉 선험적이라는 뜻으로 썼으므로 Transzendental-Philosophie를 선험철학으로 번역하겠습니다, 라고 설명한다면, 누가 알아먹겠는가! 그냥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입니다”하고 단박에 가르치는 게 옳았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땅의 평균적인 지식인도 ‘transzendental’과 ‘a priori’와 ‘초월적’과 ‘선험적’을 함께 생각할 능력을 갖췄다. 이제는 위의 장황한 설명을 충분히 알아먹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transzendental’을 ‘초월적’이라는 원래 위치에 갖다놓아도 되지 않을까? 칸트의 철학을 칸트처럼 ‘초월철학’이라고 부르고 칸트처럼 위의 설명을 덧붙인다면, 옛 선배들이 우려한 혼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왜 칸트는 무리해서 그런 독특한 언어 사용을 강행했을까?”라는 매우 생산적인 질문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칸트는, 경험의 가능 조건을 향한 도약은 또 하나의 초월이며, 그 새로운 초월로 과거에 논의된 모든 철학적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생각을 펼친다면, 성 토마스의 초월과 칸트의 초월을 비교하려는 욕구도 생기고 심지어 우리의 초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 장한 마음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자상한 선배들의 맞춤형 번역인 ‘선험철학’은 이 모든 흥미로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선험철학’으로 부르든 ‘초월철학’으로 부르든, 중요한 것은 흥미로운 가능성들을 열어나가는 마음가짐이다.

 

 

3.

칸트 맞춤형 번역, 나아가 무릇 저자 맞춤형 번역은 바람직할까? 번역은 기본적으로 당대의 일반적인 어법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음악에서 연주자가 그러하듯이 번역자는 저자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자의 독특한 어법과 거기에 담겼을 가능성이 있는 암묵적 의도를 번역자가 나서서 원천적으로 도려내는 것은 너무 심한 해석, 사실상 왜곡이 아닐까? 필자는 일제시대 이래로 이 땅에서 통용되어온 칸트 번역, 곧 칸트의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옮기는 번역이 그런 심한 해석이며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이라고 본다.

 

김상봉의 지적대로 그 오랜 관행에 반기를 든 것은 백종현이다. 백종현의 번역 방법론과 칸트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칸트의 ‘transzendental’ 번역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취지와 상관없이, 한 명의 번역가로서 또한 철학자로서 필자는 이제껏 설명한 나름의 이유에서 백종현의 선택을 옹호한다.

 

30년 전에 백종현이 과감히 제안한 번역어 ‘초월적’을 다시 ‘선험적’으로 되돌리는 것은 명백히 퇴행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 철학계의 실상이라면,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밖에. 그러나 최소한 퇴행인 줄 알면서 퇴행하자. 반드시 필요한 퇴행인지, 혹시 일제시대 이래로 극소수 엘리트 지식인의 입에 붙어 대물림된 ‘선험적’이라는 번역어가 지금도 그저 익숙하고 편해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따져보면서 퇴행하자.

 

 

※전대호는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칸트의 공간론에 관한 논문으로 같은 대학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쾰른에서 주로 헤겔 철학을 공부한 뒤, 다시 서울대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대 초반에 신춘문예로 등단해 두 권의 시집을 냈으며, 다른 저서로는 <철학은 뿔이다>(2016)가 있다.

 

현재는 주로 과학과 철학 분야의 영어 및 독일어 책 번역에 주력하고 있으며, <위대한 설계>, <로지코믹스>, <기억을 찾아서>, <경이의 시대>, <생명이란 무엇인가>, <초월적 관념론 체계>, <아인슈타인의 베일>, <푸앵카레의 추측>, <데미안>, <미하엘 콜하스의 민란>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50254.html#csidxa23360d0e2134d4be3be7b73d39a84a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번역가·철학자 전대호, 김상봉의 ‘백종현 비판’에 반론

www.hani.co.kr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등록 :2018-06-23 16:46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을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11권의 칸트 저작을 번역해왔고, 2014년부터 칸트 전집 발간으로 확대한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철학)가 한국칸트학회와 그 전집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①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②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③ [기고]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 이종훈

④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⑤ [기고]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 김상봉

⑥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 전대호

⑦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⑧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 김상봉

 

 

 

학회 내 다수 회원이 협력하여 발간을 시작한 ‘칸트전집’ 1차분을 받아들고 함께 기뻐하고, 그로부터 무엇이라도 더 익혀 공부를 더 깊게 하는 것이 마땅한 학회의 원로 회원으로서 분란에 휩싸이게 되니 부끄럽고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학회가 학문권력의 본거지가 되는 것이야말로 학계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니만큼, 학회가 그렇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 또한 회원의 책무라 생각한다.

 

<한길사 칸트전집> 출간과 함께 불거진 분란은 번역어 이견이나 칸트철학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문제―이것은 순전히 학술적인 것으로 학계 내에서 논저를 통해 쟁론할 일이지, 언론 매체를 통해 토막말을 주고받으며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학회 집행부를 장악하고 학회를 권력기구로 만들어, 그를 이용해 자신들과 다른 해석을 말살하려는 일부 사이비 회원들의 비학문적인 기획 의도와 이러한 불순한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전집에 학회 이름을 내세워 거짓 권위를 얹히고 불법적 광고를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누가 “백종현 번역어[를] 바로잡으려 전집[을] 내”(김상봉. <한겨레>, 2018년 6월21일)고자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는 사람들이 모여 백종현과 다른 번역어로 책을 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학자의 권리이며, 만약 자기 생각에 학계에 그릇된 것이 확산되면 그것을 막는 것은 학자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은 모두 자신의 이름이나 예외 없이 동일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 이름으로 해야 한다. 한국칸트학회에는 백종현의 번역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회원들이 충분히 많이 있다. 설령 백종현과 생각을 같이 하는 회원이 상대적으로 소수라 하더라도, 학회가 그러한 견해를 학회 이름으로 막으려 한다면, 그것은 학회가 이미 ‘학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독일 칸트협회의 학술지 <칸트연구>가 “칸트 연구의 다양한 방향에 대해 입구를 막지 않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천명하고 있듯이, 공식적인 학술 기구는 한 때의 일부 회원의 생각을 ‘기준’으로 정해 회원들의 생각을 일원화하고, 이전의 학자와 이후의 학자의 사념을 재단하려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런 짓이야말로 학자가 하는 가장 나쁜 짓이다.

 

문제의 발단

 

백종현은 2002년 처음으로 <실천이성비판>(아카넷) 연구 번역서를 펴낸 이래 2014년에 이 같은 칸트 연구번역서가 10권에 이르자, 이를 바탕으로 동료학자 4인과 함께 <한국어 칸트전집>(전24권)을 기획하여 2018년 1월 현재 전집 중 11권이 출간되어 있으며, 그 취지가 연구 번역에 있기 때문에 완간 시기는 미정이다.

 

 

아카넷 칸트전집은 학술 연구 번역서를 지향하므로, 상세한 해제와 함께 칸트 해당 원전의 각종 판본을 비교하여 서로 다른 점을 낱낱이 표시하고 각주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곳마다 대표적인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서와 비교 해설하고 있다. 이에 더해 부록으로 국내외의 이전 번역서 목록, 국내외 연구 논저 목록, 번역어 대조표, 상세한 찾아보기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번 분란은 한길사가 <칸트 전집>(전16권)을 2019년 말까지 완간할 예정이라면서 ‘한국칸트학회 기획’이라 표시된 1차분 3권을 2018년 5월에 출간하고, 이것의 홍보를 위한 기자회견을 2018년 6월 4일 ‘한길사 칸트전집’ 기획 대표자를 앞세워 하는 자리에서 기존의 책들을 비방하고 자사의 책을 허위로 과장 광고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 기자회견장에서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언행의 내용이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아래와 같이 기사화되어 사실인 양 유포되고 있다.

 

이충진: “고 최재희 교수, 백종현 교수(서울대)의 번역본이 주로 읽혀왔지만, 원전 번역이 아니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 특히 “백종현 서울대 교수 번역본은 가독성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칸트 연구자들은 모두가 하는 이야기다.”

최소인: 우리 번역서는 “정본 번역서”로서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이충진: “이번 전집이 학회가 공인한 번역서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전에 나온 번역서는 물론이고 미래에 나올 번역서도 모두 [이] <칸트 전집>을 기준으로 평가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최소인: 이 전집을 통해 “칸트학회가 칸트 용어를 통일하면 헤겔, 하이데거, 후설 연구자들도 동일한 용어를 쓰게 될 것”이다.

 

문제 인식

이러한 기사를 접한 백종현은 특히

 

1) 최재희 교수(한국 칸트학 태두, 1955년에 신태양사에서 최초로 칸트, <순수이성비판(상)>을 출간)나 백종현의 번역서가 원전 번역이 아니고, 백종현의 번역서는 “칸트 연구자들은 모두가” 가독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말한 점과

2) 한길사 전집은 ‘정본’ 번역으로 학회가 ‘공인’한 것이니, 과거의 번역서뿐만 아니라(그러니까 최재희 교수와 백종현 것을 포함해서) 장래의(그러니까 후학의) 번역서도 이 전집을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 1차로 당일 기자회견장에 참석했던 한길사 칸트전집 번역자 대표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응분의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

1)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야 할 것이되, 결국 사실이 아니므로 중상모략이다. 이는 학회 내 타 회원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켜 회원 간 불화와 반목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칸트학회 회칙(제2조)을 심하게 위반한 것이다.

2)는 한길사 칸트전집이 ‘정본’일 수도 없고, 어떠한 ‘공인’ 절차를 밟은 바도 없으니, 한길사 칸트전집에 거짓 권위를 입혀 번역에 따른 원문 해석과 번역서에 포함되어 있는 칸트 주요 철학용어 사용을 일반에게도 강제하고자 하는 기만적 술책이다. 이는 학자라면 누구나 원문을 자유롭게 해석하고 자기 해석에 알맞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학문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칸트철학의 주요 용어 사용 선택은 학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를 ‘학회’라는 이름으로 획일화하려는 것은 ‘국정 국사교과서’ 발간과 똑같은 기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과 2)를 합하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기존의 번역서를 공연히 폄하 비방하고 자신들의 신간 전집을 허위로 과장 광고함으로써 독자(소비자)를 오도한 것으로, 상거래 일반 법규에 저촉되는 범법 행위에 해당하며, 학술토론회 장도 아니고, 학술지 지면도 아닌, 자신들의 신상품 출시 기자회견장에서 일방적으로 전혀 사실과 다르게 “원전 번역이 아니”라느니, 또 과장되게 “칸트 연구자들 모두가” 가독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느니 하여, 이미 출간되어 있는 책에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는 것은 학술적 비판이 아니라 동료 학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고, ‘경쟁 상품’에 대한 비방이자 소비자(독자)를 속이는 짓이다. 이는 신제품 출시 설명회에서 A사가 근거 없이 B사의 경쟁 상품을 비방하고 자사 제품의 우수성을 거짓으로 과장 광고하여 소비자를 기만하고, 공연히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형사상의 범죄적 행위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종현의 대응

 

설령 한국칸트학회가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칸트전집’을 기획했다 하더라도, 이 연구비의 성과물은 학술 문헌 연구 일반이 그러하듯이 최소인 ‘칸트전집’ 간행사업단 책임연구자와 사업 동참자 33인(합계 34인)에게 귀속한다.

 

 

그리고 이들이 학회 내 타 회원의 의사나 학술적 견해와 상관없이 사업을 주체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수행했으므로―그들은 ‘칸트 용어 토론 카페’에 백종현이 가입 신청한 것조차 승인하지 않았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 공과를 전적으로 감당해야 하고, 발표도 그들의 이름으로 해야 함이 마땅하다.

 

 

문헌 번역은 번역진 34인의 칸트 해석과 자체 지침에 따라 해놓고서, 엄연히 칸트를 다르게 해석하는 다른 회원들이 다수 공존하는 학회의 이름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정본’이니 ‘공인’이니 하는 표시를 붙이는 것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학설을 강제적으로 유포하고 학계를 전제하려는 폭거이다.

 

 

이에 백종현은

6월 12일에 번역자 일동에게

“1. 홍보문에서 내용상으로 전혀 맞지 않은 ‘정본(定本)’이라는 표현을 거둘 것,

2. 절차상 부당하고 반문명적인 ‘한국칸트학회 공인 칸트전집’이라는 표현을 거둘 것,

3. 앞으로는 ‘한길사 판 칸트전집’ 등으로 호칭하고, 이를 한국칸트학회를 대표하는 역서인 양 표출하지 말 것,

4. 혹시라도 한국칸트학회의 학술토론회나 공식 학술지에서 ‘한길사 판 칸트전집’에서 사용한 용어만 사용해야 한다는 등 마치 ‘국정교과서’ 사용 지침 같은 것을 시행하려 하지 말 것,

5. ‘가독성’ 운운하면서 ‘한길사 판 칸트전집’ 역자 외 다른 학회 회원의 역서에 대해 독자를 오도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다시 6월 20일에

6. 지난 6월 4일 한길사 기자회견장에 참석하여 망언과 불법적 행위를 한 번역자 대표들은 학회 회원 간에 불화를 야기하고, 과장 광고에 앞장서 학회의 명예 또한 실추시켰으므로 2018년 6월 30일까지 전 회원에게 공개 사과하고, 학회를 스스로 탈퇴하라고 추가로 요구하였다.

 

이제 이에 더하여

 

7. 한길사와 전집 주도자들은 지난 6월 4일과 동일한 규모의 기자회견장을 6월 30일까지 마련하여 당일의 반윤리적, 불법적 언사를 공개적으로 취소하고, 백종현과 독자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요구사항 1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 전집의 각 권이 정말 ‘정본’이라면 출간되는 순간부터 (설령 오탈자가 발견되어도) 일점일획도 수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전집을 주도한 ‘학자’라는 사람들도 출판인도 ‘정본’이라는 낱말 뜻도 모르고 사용하고 있다.

 

요구사항 2는 학회에서 공인 절차를 공시한 적도 밟은 적도 없으니, 불법적인 언사이기 때문이다. ― 이들은 이 전집이 학회의 활동 회원 다수인 34인이 모여 함께 한 작업이니 이로써 ‘공인’ 받은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서로 교차 검토 작업한 것을 두고, 이 전집이 ‘집단지성’의 산물이라 말한다. 그런데 권권에 역자의 개인 이름이 박혀 있다. 집단지성의 산물이라면 개인의 몫으로 분할될 수 없는 것이 상례인데(집단지성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영어나 독일어 위키피디아 항목 서술을 보라!), 이를 버젓이 사유화하고 있다. 이 역시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대충 사용하고 있는 사례로, 이는 번역에 종사하겠다고 나선 이들의 어휘 감각과 능력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화를 위해 동원하여 이렇게 부정확하게 사용한 말들도 모두 거둬들여야 한다.

 

요구사항 3은 학회 내에 이 전집의 내용과 사용된 번역어의 보편적 사용에 반대하는 회원이 다수 있는데, 이를 학회의 이름으로 내는 것은 부당하고, ‘학회 공인’의 전집은 회원이 장차 자유롭게 다른 칸트 역서를 출간하는 데 족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가 있어서, 문명국 어느 칸트학회도 이러한 무모한 짓을 하지 않는다.

 

요구사항 4는 학회장의 기자회견 장에서의 호언으로 미루어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라 미리 학회 집행부의 명시적인 응답이 필요한 사항이다.

요구사항 5는 ‘가독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어는 자칫 어떤 번역서의 흠을 지적하는 것으로 악용될 수 있고, 실제로 기자회견장에서 그렇게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요구사항 6은 기자회견장 참석자들의 언행은 학회 회칙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고, 더하여 타인의 명예훼손, 비방, 과장 광고 등은 학문 윤리 상, 사회 법규 상 용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도 인격이요 끝도 인격인 칸트철학의 진흥을 위해 설립된 학회의 정신에 배치되는 것인 만큼 그 같은 거짓 회원은 학회를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구사항 7은 지난 한 달 동안의 비방으로 백종현 번역서는 읽을 수 없는 나쁜 책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졌으며, 허위 과장 광고를 통해 한길사 칸트전집은 근사한 것이라고 독자를 충분히 속였으니, 피해자 측의 최소한의 요구이다.

 

 

현재까지 한길사와 번역진의 반응

 

출판사 한길사는 지난 5월 예약 광고 개시 이래 내건 “칸트전집 정본 전격 출간”이라는 광고문을 6월 21일 자로 “칸트전집 전격 출간”으로 고쳐, ‘정본’이라는 터무니없는 낱말을 삭제했다.(그러나 6월 23일 현재까지도 예스24의 광고문에는 여전히 ‘정본’이란 말이 남아 있다.) 그리고 ‘공인’이니 ‘최초’니 하는 수식어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누구도 명확히 말한 바 없으며, 여타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해당자들이 묵묵부답인 상태이다.

 

한길사 칸트전집의 불행한 탄생과 동참자들의 윤리의식 부재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김상봉이 기고문(<한겨레>, 2018년 6월21일)에서 부끄러움을 모른 채 밝혔듯이, 이 전집이 당초부터 (몇몇 회원들이 좁은 견식과 습관적인 낱말 사용으로 인해 둔해진 언어감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느낀 번역어를 포함하고 있는) “서울대 교수 백종현”의 칸트 번역서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도를 가진 전집 기획을 학회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공적 기구를 사욕의 도구로 삼은 것으로서, 비윤리적인 학자들이 모여서 학회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위이다. 정상적인 학회는 오히려 학회 내에 서로 다른 칸트 해석 등장을 장려하고 회원 간에 학설의 쟁론이 활성화하게끔 해야 한다.

 

누가 백종현과 다른 칸트 해석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또는 그들은 자신의 논문이나 저술 또는 번역서를 내서 논박하는 것이 학문의 정도이다. 백종현은 1988년 제1회 전국철학자 대회(광주)에서 기존 칸트 번역어에 대한 재고를 제안한 이래, 계속적으로 다수의 논문과 저술을 통해 이를 사용해보고, 2010년 회원들의 심사를 거쳐 학회지 <칸트연구>(제25집)에 논문 ‘칸트철학에서 ‘선험적’과 ‘초월적’ 개념 그리고 번역어 문제’(별첨 논문 파일 참조)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몇몇 회원이 그에 대해 촌평을 했을 뿐 어느 한 사람 이 논문을 반박하는 논문을 제출한 적이 없다.

 

철학자가 학술어 선택을 누가 제안한 것이니 반대한다는 감정으로 해서는 안 되고, 원전에 대한 자기 해석과 충분한 사례 검토 그리고 역사적인 연관성 등을 고려하여 하되,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면 우선 논문이나 해설문 등을 제출하여 공론에 부쳐야 한다.

 

 

이번 한길사 칸트전집에서 사용되는 칸트 용어는 34인의 번역진에 의해서 토의되고 그들의 독단으로 이 전집의 추진을 위해 사용 결정된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김상봉의 기고문에 따르면, 번역 참여자들이 서로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여 번역어 합의안이 마련되었는데, 이 전집의 자기 할당 분 문헌 번역에서는 이 합의안대로 하지만, “내가 번역하는 칸트 저작에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번역어(‘트란스첸덴탈’=‘선험론적’, ‘아프리오리’=‘선험적’)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전집의 홍보 장에 등장한 이들은 이 전집으로써 칸트철학의 주요 용어는 통일되었으며, ‘기준’이 된 이 용어들을 칸트학계는 물론이고, 인접학계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 호언한다. (동참 번역자들도 자기의 저술에서는 저 전집 번역 시의 합의와는 달리 자기 식으로 쓰겠다고 마음먹고, 그것을 언론 매체를 통해 당당히 밝히고 있는데… 이들은 어쨌든 합세하여 백종현의 번역서에 맞설 전집을 내고, 백종현 번역서의 확산이 주춤해지면, 그때는 각자 하던 대로 하자는 내심을 가진 것이나 아니었는지를 의심해볼만한 사례이다.)

 

중요 용어 사용은 각자의 칸트 해석을 포함하고 있어 이미 학설 차원의 일인데, 동일한 ‘학자’가 전집에서는 이렇게, 자기 저작에서는 저렇게 한다면, 대체 그의 칸트 해석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 어쨌거나 한길사 칸트전집은 공동번역자도 그대로 인용하지 않는 번역서 묶음일 것 같다.

 

 

또한 아마도 한길사 칸트전집은 <아카넷 한국어 칸트전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몇몇 주도자들의 전략적 제휴의 산물인 것 같다. 한길사 칸트전집은 몇몇 주도자들이 나라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내, 그것으로 다수의 회원을 자기들의 사업에 끌어들여 학회 내 활동 회원들의 다수를 형성하고, 그를 기반으로 학회 집행부를 장악한 후, 학회의 이름으로 사업을 수행, 그 결과물을 학회의 이름으로 발간하여 권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거기에 ‘정본’이니 ‘공인’이니 하는 헛된 수식어를 덧붙여 불가침의 것처럼 외양을 갖춰서, 그것으로 백종현의 번역서 확산을 막자는 심산에 의해 나온 참으로 비윤리적인 기획 의도에 의한, 불행한 칸트전집이 되고 말았다. ? 학계의 축하 속에서 널리 읽혀야 할 ‘칸트전집’에 이러한 불순한 동기를 집어넣은 이들은 다시 한 번 학문의 정도, 인문학 정신을 성찰하고 관련자들에게 사죄하기 바란다.

 

 

 

칸트철학에서 ‘선험적’과 ‘초월적’ 개념 그리고 번역어 문제. (▶누르면 논문을 PDF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예고된 대로 2019년 말까지 다수의 칸트 논저의 한국어 초역이 포함된 한길사 칸트전집이 완간되면, 이미 그로써 한국의 칸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고, 주위의 칭송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불안하여, ‘한길사 칸트전집’, ‘누구 등 34역 칸트전집’, 어느 네티즌(닉네임: 밤의 등대)의 충고대로 전원 같은 의사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칸트번역연구회’의 ‘칸트전집’으로 칭하면 될 것을, 그 번역어 사용을 백종현처럼 분명하게 반대하는 회원을 무시한 채, ‘한국칸트학회 기획 칸트전집’의 이름을 고집하는지… 번역자 자신들의 이름을 내거는 것에 그토록 자신이 없으면서, 왜 함께 모여 이런 책을 만들었는지…

 

백종현은 그 자신이 설립을 주창하여 세운 한국칸트학회의 회원이 아닌 것인지… 도대체가 여러 학설이 있는데, 다수결에 의해 그중 하나를 ‘정설’로 결정하고, 나머지 ‘이설’들은 이 ‘정설’로 통일할 것을 선포하는 지금의 한국칸트학회의 집행부 같은 것이 세상 어느 학계에 또 있을 것인지…

 

기자회견장에서 동료 회원의 작품을 거짓말로 비방하고, 자기들의 작품은 과대 포장하는, 사회 법규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여 학회의 설립 정신을 명백하게 위반했음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김상봉) 이들에게 부당하게 학회를 떠나라 한다고 대드는 이의 윤리의식과 사회 법규 인식의 수준을 어떻게 납득할 것인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학계와 학회의 자정 능력에 의해 모두 신속하게 해결 해소되기 바란다.

 

그러나 관련자들이 공개 사과도 하지 않고, 실추된 백종현의 신뢰도에 대한 회복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실을 사회 법규에 의해 바로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학문 활동임을 위장하여 학계에서 비루하고 책략적인 언동을 서슴지 않는 이들을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칸트학회 내에.

 

 

※ 백종현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석사 과정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하대·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소장,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원장, 한국칸트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철학』 편집인·철학용어정비위원장·회장 겸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한국포스트휴먼학회 회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Phenomenologische Untersuchung zum Gegenstandsbegriff i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Frankfurt/M. & New York, 1985),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1998/증보판 2000), <존재와 진리―칸트 <순수이성비판>의 근본 문제>(2000/2003/전정판 2008), <서양근대철학>(2001/증보판 2003), <현대한국사회의 철학적 문제: 윤리 개념의 형성>(2003), <현대한국사회의 철학적 문제: 사회 운영 원리>(2004), <철학의 개념과 주요 문제>(2007), <시대와의 대화: 칸트와 헤겔의 철학>(2010), <칸트 이성철학 9서5제>(2012), <동아시아의 칸트철학>(편저, 2014), <한국 칸트철학 소사전>(2015), <포스트휴먼 시대의 휴먼>(공저, 2016), <이성의 역사>(2017), <제4차 산업혁명과 새로운 사회 윤리>(공저, 2017) 등이 있고, 역서로는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F. 카울바하, 1992), <실천이성비판>(칸트, 2002/개정판 2009), <윤리형이상학 정초>(칸트, 2005/개정판 2014), <순수이성비판 1·2>(칸트, 2006), <판단력비판>(칸트, 2009),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칸트, 2011), <윤리형이상학>(칸트, 2012), <형이상학 서설>(칸트, 2012), <영원한 평화>(칸트, 2013),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칸트, 2014), <교육학>(칸트, 2018)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50338.html#csidxb7a14c12faef46cac7b43505a31d665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을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11권의 칸트 저작을 번역해왔고,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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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김상봉

 

 

등록 :2018-06-27 18:22수정 :2018-06-27 22:42

 

 

 

 

‘트랜스첸덴탈’ 용례의 맥락적 의미 중요

칸트는 ‘경험적’ 아닌 ‘선험적’ 개념 탐구

“백종현 번역 ‘초월(성)’은 하이데거의 말” 

칸트는 그런 단어 사용한 적 없어

 

시인과 철학자는 모국어 가꾸는 정원사

번역 가독성은 직역 아닌 전문성 문제

 

최근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을 두고 또다른 전집 번역자이자 학회 고문인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칸트 연구자이자, 칸트 철학을 양분 삼아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해온 드문 철학자이며 한국칸트학회의 전집 번역에도 참여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백 교수를 재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공론인만큼 애초 기고문에서 존칭과 경어체는 생략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①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②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③ [기고]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인가 / 이종훈

④ “백종현 번역어 바로잡으려 전집 내”

⑤ [기고]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 김상봉

⑥ [기고]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 전대호

⑦ [기고] ‘한길사 판 칸트전집’ 문제는 불순한 기획과 불법적 홍보다 / 백종현

 

 

1. 백종현과 독일어 분철법 및 발음의 문제

 

백 교수가 쓴 글을 읽고 이런 종류의 글에 무슨 답을 해야 하나 난감해 하면서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침에 백 교수 자신이 자기 글 가운데 한 구절을 스스로 철회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겨레신문 누리집에 들어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문제의 구절이 삭제되어 있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김상봉이 ‘트란첸덴탈’이라고 해야 할 것을 ‘트란스첸덴탈’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보면, 독일어 낱말 ‘transzendental’을 ‘tran·szen·den·tal’로 분철해서 읽고 써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또 누구는 칸트 윤리학의 핵심어로 칸트가 사용하는 낱말 ‘Sitten’(윤리)을 줄곧 ‘Sitte’(관습)라고 적는다. 칸트철학의 핵심어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취급하는 조심성이 이런 정도임을 미루어 번역진의 한국어 능력이나 독일어 어휘 능력 수준, 그리고 고전 번역의 자세를 가늠할 수 있겠다.”

 

이게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바둑 시합이었다면 백 교수가 한 수 물린 것이니 그걸로 게임을 끝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한 번 퍼진 정보는 원한다고 다 삭제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미 김상봉이 독일어 분철법도 모르는 위인이라는 명예 훼손적 발언은 퍼질 대로 퍼져 되물릴 수 없게 되었다. 나도 백 교수에게 그가 칸트학회에 묻겠다는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웃고 넘어가야 할까? 일단 사사로운 일은 사사로운 일로 남겨두고 이 자리에서는 먼저 독자들을 위해 백 교수 스스로 철회한 구절에서 무엇이 진짜 문제였던지를 차분히 설명하려 한다.

 

내 편에서 저 구절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까닭은 백 교수가 ‘트란첸덴탈’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트란스첸덴탈’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분철의 문제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분철이 문제라면 인터넷 두덴(Duden) 사전은 “모든 분철가능성”이라는 항목에서 ‘S’ 앞뒤로 세로줄을 그어 트란스-첸덴탈과 트란-스첸덴탈이 모두 가능함을 명시하고 있다.(“Alle Trennmoeglichkeiten: tran|s|zen|den|tal”) 그러니까 책을 조판할 때 줄의 끝에서 긴 낱말을 끊어주어야 할 때 tran-에서 끊고 다음 줄로 넘어가든 trans에서 끊고 넘어가든 상관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된 건 2006년 독일에서 정서법 또는 철자법(Rechtschreibug)의 규칙이 개정된 뒤의 일이다. 그 전에는 저 낱말의 어원에 따라 백 교수가 말했듯이 ‘tran·szen·den·tal’이라고 분철하는 게 원칙이었다. 1989년 판 두덴 사전에는 이 낱말 항목이 tran|szendental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자음이 세 개나 겹쳐 나오는 부분(nsz)에서 잘못 분철하지 말라고 두 낱말이 합성된 자리를 정확히 표시해 준 것이다.

 

(여기서 라틴어 선생 티를 내자면, 이 독일어 형용사는 그냥 라틴어의 trans·scen·den·ta·lis를 어미만 버리고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원래 라틴어에서 이 낱말은 전치사로도 쓰이는 트란스(trans)를 전철로 삼아 동사인 스칸도(scando, 영어로는 climb, pass, cross 등의 뜻)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트란-스첸도(tran-scendo)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두 낱말이 결합하면 트란스-스칸도(trans-scando)가 되어야 하겠으나, 카피오(capio, take)가 레(re)와 결합하면 레-치피오(re-cipio, receive)가 되듯, 대개 라틴어에서는 동사가 전철과 결합하여 복합동사가 될 경우 동사의 어간모음이 변한다.

 

 

그래서 스칸도(scando) 역시 트란스(trans)와 결합하면 스첸도(scendo)로 바뀌어 트란스-스첸도(trans-scendo)가 된다. 그런데 전철과 원래의 동사가 결합하는 부분에서 S가 두 번 반복되는 경우에는 둘 중 하나를 생략하는데, 뒤의 동사가 아니라 앞의 전철 마지막 S를 생략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최종적으로 트란-스첸도(tran-scendo)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동사의 현재분사(tran-scendens)로부터 최종적으로 트란-스첸덴탈리스(tran-scendentalis)라는 형용사가 만들어졌다. 이 낱말의 내력이 이러하므로 라틴어에서는 분철할 때 트란스-첸덴탈리스라고 하면 안 되고 트란-스첸덴탈리스라고 해야 한다. (첸도cendo라는 동사는 없다.) 독일어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 역시 라틴어 낱말에서 어미 -is를 떼고 가운데 C를 Z로 바꾼 것 말고는 차이가 없으므로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분철에 관한 한 백 교수 말에서 틀린 것은 없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의 논란이 없기 바란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느닷없이 나한테 분철도 못하는 위인이라고 모욕하는가? 내가 ‘트란스첸덴탈’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분철이 아니라 독일어 발음과 그에 따른 한글 표기의 문제가 아닌가? 그건 독일어 transzendental을 백 교수처럼 트란첸덴탈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저 낱말의 원래 발음에 가까운지 아니면 트란스첸덴탈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 가까운지가 문제이지, 저 낱말을 어떻게 분철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백 교수는 transzendental을 트란첸덴탈이라고 발음하는 건가? 사실 나는 2010년에 그가 <칸트 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초지일관 ‘트란첸덴탈’이라고 표기하는 걸 처음 봤을 때, 설마 고명한 백 교수께서 독일어 발음도 못하랴 생각하고 그냥 오타거나 아니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무의식적 오류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트란스첸덴탈’이라고 표기하는 걸 정색을 하고 준엄하게 꾸짖는 걸 보고 그의 무지와 아집이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임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보적 문제는 사전을 찾아보면 그만이다. 그러면 transzendental의 발음은[transtsεndεn'taːl]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첸(tsεn)이 아니라 스첸(s-tsεn)으로 읽는 것이 옳다. 요즘 인터넷 사전에서는 발음을 들을 수도 있게 되어 있으니 백교수는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한다. 분철과 발음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려 한다.

그분이 한국칸트학회의 번역 사업을 두고 ‘불법’ 운운 한 것에 대해서는 대꾸할 가치도 없거니와, 칸트학회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낼 것이므로 내가 굳이 나설 일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2. 전대호의 반론에 대하여

 

나는 전대호 선생이 셸링의 책 이름을 ‘초월철학’이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 셸링은 칸트가 거부했던 초월적 형이상학의 체계를 다시 세우려 했던 사람이므로 그렇게 번역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칸트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저 유명한 금언을 기억하고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권하고 싶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일단 무시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습성이다. 나도 라틴어를 몰랐더라면 볼프(C. Wolff)의 <존재론>(Ontologia)을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고, 칸트가 평생 교과서로 사용한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의 <형이상학>(Metaphysica)도, 아헨발(Achenwall)의 <자연법>(Ius Naturae ad Usum Auditorum)도 읽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라이프니츠가 대여섯 살 어린 나이에 소설처럼 읽었다고 자랑했던 수아레즈(F. Suarez)의 방대한 <형이상학 토론>(Disputationes Metaphysicae) 같은 책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책들과 칸트 철학의 상관성은 애써 외면하면서 심오한 철학적 해석에 몰입했을 것이다. 철학적 해석이 문제라면 수학 문제처럼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적당히 말해도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알고 나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또 사람이다. ‘트란스첸덴탈’도 마찬가지이다. 이 라틴어 낱말은 보통의 라틴어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트란스첸덴탈이란 낱말의 어원이나 내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아마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질문할 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했던 낱말 아닌가?’ 미안하지만 아니다. 정확하게 답하자면 낱말이 달랐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근대인들이 transcendentalia라고 표기했던 것을 transcendentia라고 표기했던 것이다.(둘 사이의 차이에 대한 문법적 설명은 생략한다.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트란스첸덴탈리스’(transcendentalis)라는 형용사가 학술 용어로 광범위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의 철학자 프란치스코 수아레즈가 1600년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상지로 유명한 독일 마인츠에서 <형이상학 토론> 제2판을 출판한 뒤부터였다.(Jan A. Aertsen, Medieval Philosophy as Transcendental Thought, 13쪽 아래 참고).

 

그 후 다른 나라가 아니라 유독 독일에서 ‘트란스첸덴탈리스’란 용어는 철학의 핵심 용어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칸트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이 그 중심이었다. (M. Sgarbi, “The Historical Genesis of the Kantian Concept of >>Transcendental<<” II절과 “At the Origin of the Connection between Logic and Ontology. The Impact of Suarez’s Metaphysics in Koenigsberg” 참고)

 

수아레즈는 트란스첸덴탈리스(transcendentalis)를 스콜라 철학자들의 트란스첸덴스(transcendens)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했다.(Aertsen, 같은 책 참고) 그러니까 수아레즈의 경우라면 저 낱말을 ‘초월적’이라는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맞다. 백여 년이 지난 뒤에 ‘필로소피아 트란스첸덴탈리스’(philosophia transcendentalis)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까운 로스토크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아에피누스(F. A. Aepinus)였는데, 그는 1714년 출판한 모두 4부로 이루어진 <철학입문>(Introductio in philosophiam) 시리즈의 제2부에 해당하는 책의 제목을 “초월 철학 또는 형이상학”(philosophia transcendentalis sive metaphysica)이라고 붙였다.

 

 

그런데 칸트에게 큰 영향을 끼친 테텐스(J. N. Tetens)는 ‘필로소피아 트란스첸덴탈리스’라는 라틴어 이름에서 트란스첸덴탈리스라는 형용사가 트란스첸덴스와 딱히 의미가 다를 것도 없는데 무슨 특별한 새로운 뜻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용되는 것이 영 마뜩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원래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돌아가되 그것을 다만 독일어로 바꾸어 자신의 철학을 ‘트란스첸덴테 필로조피’(Transcendente Philosophie)라고 표현했다.

 

 

(독일어 트란스첸덴트transzendent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범주를 초월하는 초월자를 가리킬 때 썼던 라틴어 트란스첸덴스transcendens, -ntis에 대응하는 독일어 표현이다.) 이 말 역시 초월철학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이다. (나는 2006년 <칸트연구> 제18집에 발표한 ‘선험론적 철학의 탄생: 볼프와 테텐스 그리고 칸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테텐스의 초월철학을 소개했다. 당시 내가 찾아본 바로는 한국에서 테텐스를 논문에서 다룬 것은 처음이었다.) 테텐스에게 자극받았기 때문일까, 이번 칸트학회 판 전집에서 내가 번역한 1756년 <물리적 단자론>(Monadologia Physica)에서 아에피누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로 ‘필로소피아 트란스첸덴탈리스’(philosophia transcendentalis)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칸트는 1781년 <순수이성비판>에서 테텐스의 초월 철학과 구별하여 처음으로 ‘트란스첸덴탈-필로조피’(Transscendental-Philosophie)라는 독일어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독일어에서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이란 형용사는 칸트의 이름과 함께 기억된다.

 

3. 백종현과 번역의 문제

 

 

내가 칸트에 대한 논쟁에서 라틴어 얘기를 꺼낸 건 부질없이 아는 체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까닭은 단 하나, 수아레즈가 <형이상학 토론>에서 “초월적 진리”(veritas transcendentalis)를 논한 1600년에서 시작해 1714년 아에피누스가 <형이상학 입문>에서 “초월적 철학”(philosophia transcendentalis)을 말한 다음 테텐스가 <보편적 사변 철학에 대하여>(Ueber die allgemeine speculative Philosophie)라는 책에서 새로운 “보편적 초월 철학”(allgemeine transcendente Philosophie)을 말했던 1775년까지, 이른바 초월적 진리 또는 초월 철학은 독일의 강단 철학계를 지배한 주요한 형이상학적 화두였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저작들이 대부분 라틴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백 교수가 ‘트란스첸덴탈’을 선험적이 아니라 초월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만약 그가 칸트 이전 초월 철학(philosophia transcendentalis)의 역사에 대해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동료 학자들을 설득하려 했더라면 사정은 조금 달랐을 것이다. 그런 경우였더라면 그는 개인적으로 존경받았을 것이고 그의 주장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지 간에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그로부터 그리고 서로 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유감이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의 주장과 글 어디에서도 그는 칸트 이전의 초월철학의 역사에 대해 진지한 공부를 한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부를 하려는 의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관적인 해석에만 의지하여 그 때까지 선험철학이라고 부르던 것을 초월철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6년 <칸트연구> 제17집에서 칸트 학자라면 모두가 아는 노르베르트 힌스케(Norbert Hinske)의 제자 김창원 박사가 ‘볼프의 ‘트란스첸덴탈’ 개념’이라는 탁월한 논문을 발표해 칸트 이해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에 뒤이어 나 역시 앞서 말한 대로, 같은 해 <칸트연구> 제18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테텐스의 초월 철학을 소개했는데, 이는 테텐스의 초월 철학과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칸트 철학을 초월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백 교수는 그런 논문들이 나온 뒤 2010년에 쓴 ‘칸트철학에서 ‘선험적’과 ‘초월적’의 개념 그리고 번역어 문제’라는 논문에서 그리고 같은 글을 여기 저기 비슷하게 옮겨 실으면서 태연하게 동일한 주장을 반복한다. 그러고서는 지금 와서 학문적인 반론이 없었다고 불평한다.

 

 

생각하면, 반론이 없었다는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의 주장을 정면으로 학술 논문 형태로 반박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했듯이 어떤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진리인지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트란스첸덴탈’ 개념의 정확한 이해와 그에 따른 번역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백 교수의 주장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칸트와 당대의 독일 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의 구체적 맥락과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건 정말로 엄청난 공부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런 까닭에 이 문제가 계속 안에서 곪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피차간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있을 만큼 우리 모두 성숙했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논의가 새로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이 글에서 너무 어려운 지경까지 독자들을 끌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백 교수가 불러일으킨 평지풍파와 관련해 많은 칸트 학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긴 것은 그가 칸트 이전의 독일 강단 철학에 어두워 칸트가 쓰는 개념들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트란스첸덴탈’의 개념에 대하여 칸트 자신이 명확하게 규정했고 그에 따라 칸트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표준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고 끊임없이 잘못된 주장을 한다는 데 있다.

 

 

그럼 독자들은 트란스첸덴탈의 표준적 의미가 뭐냐고 물을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수 백 번 넘게 이 낱말을 쓰면서도 단정하게 이 용어의 뜻을 정의하는 형식으로 규정한 것은 몇 번 없다. 그리고 그 외의 수백 번의 경우에 언제나 같은 뜻으로 그 낱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자신이 정의한 의미와는 다른, 낡은 방식으로 그 낱말을 사용했다.(이것 역시 당대 독일 강단 철학의 흔적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용어의 상이한 적용 사례들을 세심하게 분류하고 그로부터 이 용어의 다양한 의미의 갈래들을 정돈하여 상이한 의미들의 같고 다름을 엄격한 문헌학적 근거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성실한 칸트 학자의 임무이다.

 

 

하지만 백 교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해 그는 여러 곳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쳤는데, 이 책 저 책 뒤에 붙인 비슷한 글들의 저본이 된 글이 위에 소개한 2010년 백 교수의 논문 ‘칸트철학에서 ‘선험적’과 ‘초월적’의 개념 그리고 번역어 문제’이다.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이 논문을 이번에 처음 꼼꼼히 읽었는데, 정말로 오래간만에 남의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이 논문에서 백 교수는 ‘아 프리오리’와 ‘트란스첸덴탈’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아 프리오리’를 ‘선험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반대할 생각이 없으므로 논외로 하고 ‘트란스첸덴탈’에 대해서만 그의 주장을 살펴보려 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칸트 자신의 말이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므로 그것부터 독자들에게 소개하자면: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a priori) 개념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선험론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이런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론-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라 부를 수 있겠다.”(<순수이성비판>, A 11 아래)

 

 

여기서 ‘아프리오리’와 ‘트란스첸덴탈’은 일단 내 방식대로 ‘선험적’, ‘선험론적’으로 번역했다. (동시에 내가 마인츠에서 같은 지도교수에게 배웠던 선배, 동국대 최인숙 교수의 방식이기도 하다.) 칸트가 어렵다고 불평들이 많지만 위의 인용문은 찬찬히 읽으면 이해 못할 말도 아니다. 칸트는 먼저 “대상들이 아니라”라는 말로 대상들에 대한 탐구가 자기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대상 자체 또는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ens qua ens)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은 모두 과거 초월적 형이상학의 관심사이다. 그 대신 칸트는 내재적 형이상학의 길 또는 내면적 형이상학의 길을 걷는다. 그것을 그는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 개념들”을 탐구하겠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것도 아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와 로크에게서부터 근대 철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관념이나 개념의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고유한 면모는 그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선험적 개념들”을 탐구하려 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칸트의 선험적 개념이 지니고 있는 심오하고도 새로운 의미를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 제1장에서 이 문제를 주제삼아 다루었으니, 필요한 사람은 찾아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굳이 어렵게 파고들지 않아도 무방하다. ‘선험적’이란 경험에 앞선다는 말이므로 한국인이 이해 못할 말은 아닌데,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개념의 구체적 내용은 열 두 개의 범주 같은 것 또는 개념은 아니지만 시간이나 공간 표상 같은 것이다. 시간이나 공간의 표상 또는 범주는 경험에서 유래한 개념이나 표상이 아니고 선험적인 것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선험적인 개념이나 표상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선험론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칸트의 설명이다.

 

 

이런 인식은 이름이 어떻든 자동적으로 철학적 인식일 수밖에 없다. 개념이 경험적이냐 선험적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철학적 탐구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험론적’이라는 형용사가 처음으로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결합되는 명사가 철학이다. 같은 인용문 둘째 문장에서 칸트는 “이런 <선험적>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론-철학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로크나 흄처럼 특정한 개념의 경험적 기원과 생성을 탐구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론적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가능한 모든 대상 일반에 대한 순수 개념이나 표상의 선험적 기원 및 생성을 탐구하는 체계적 인식이 바로 선험론-철학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문장에서 독자들이 선험적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적 개념들의 총합’ 또는 ‘모든 선험적 개념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칸트를 오해하게 된다. 그 때는 한데 모인 선험적 개념들 자신이 선험론적인 철학 자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가 고착되면 특정한 선험적 개념이나 표상들이 선험론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경고한 것이 바로 그런 오해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앞으로의 모든 고찰에 대하여 그 효력이 미치고 또 사람들이 염두에 잘 새겨두어야만 할 주의사항을 제시하거니와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낱낱의 선험적 인식을 가리켜 선험론적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오로지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개념이나 직관) 표상이 순전히 선험적으로 적용되거나 또는 선험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과 어떻게 해서 그러한지를 인식하게 해주는 그런 인식만을 선험론적이라고 (…) 불러야 한다. 그러므로 공간 <자체>도, 그리고 공간의 어떤 기하학적인 선험적 규정도 하나의 선험론적 표상이라 부르면 안 된다. 도리어 이런 <선험적> 표상들이 경험적 기원을 갖지 않는다는 인식, 또한 그러면서도 그런 표상들이 경험의 대상들과 어떻게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지, 그 가능성만을 선험론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A56=B80 아래.)

 

 

유감스럽게도 백 교수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주의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칸트가 이 인용문에서 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던 일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러니까 초월적[=선험론적] 인식은 그 자체가 대상 인식이 아니라,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정초적 인식, 곧 표상이나 개념 또는 원리를 말한다.”(백종현, 같은 논문, 12쪽)

 

여기서 백 교수는 선험적인 ‘표상’이나 ‘개념’을 가리켜 초월적[=선험론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가 말하는 표상이나 개념이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들은 다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당초에 인간 의식의 요소들인, 다시 말해 주관적인 것들인 공간·시간 표상이, 순수 지성개념들이, 생산적 상상력이, 의식 일반으로서의 통각이 그 주관성을 넘어 객관으로 초월하며, 그런 의미에서 ‘초월성’을 갖고 ‘초월적’이다.”(백종현, 같은 논문, 13쪽)

 

여기서 그는 공간 표상이 ‘초월적[=선험론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여기서 우연히 한 번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고 같은 논문에서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이는 위에서 우리가 인용했던 대로 공간을 선험론적 표상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칸트의 경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이다.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가 번역한 것도 돌아서면 다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다른 건 잊어버려도 공간을 선험론적(백 교수 식으로는 초월적) 표상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경고 같은 건 잊어버리면 안 된다. 이렇게 잊어버려도 될 것과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 글쎄, 당신이 선생이라면 이런 학생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백 교수가 사용하는 표현들, ‘객관으로 초월한다’거나 ‘초월성’ 같은 표현은 칸트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표현이다.(궁금한 사람은 하이데거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이선일 옮김)를 보라.) 칸트는 ‘주관이 객관으로 초월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백 교수가 애호하는 ‘초월하다’(transzendieren)는 동사나 ‘초월’(Transzendenz)이라는 명사는 칸트가 쓴 적이 없는 낱말들이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언어이지 칸트의 언어가 아니다. 물론 백 교수도 나도 칸트를 해석하면서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려올 수는 있다. 그러나 해석을 빙자해서 칸트가 하지 말라는 일까지 해서는 안 된다.

 

 

4. 번역어와 모국어가 충돌할 때

 

 

백 교수 일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의문에 답할 것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앞서 밝힌 대로 나는 위에서 ‘아프리오리’와 ‘트란스첸덴탈’을 칸트학회 번역어가 아니라 전 칸트학회 회장, 최인숙 교수의 번역어를 따랐다.(물론 내가 그분과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고 합의한 것은 아니다.) 칸트학회 번역이었다면, 아프리오리는 그대로 두고 ‘트란스첸덴탈’은 선험적이라고 번역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처음 인용문은 다음과 같아졌을 것이다.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아프리오리한 개념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이런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철학이라 부를 수 있겠다.”(<순수이성비판>, A 11 아래)

 

 

어느 쪽이 나은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나는 용어 결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던지라 정확한 과정이나 결정의 근거를 알지는 못한다. 좀 더 알뜰하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나 자신을 칸트 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칸트를 읽고, 칸트를 철저히 극복하기 위해 그만큼 철저히 칸트를 읽는다. 비판의 깊이는 이해의 철저성에 비례하니까. 그런 까닭에 학회에서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질 때 그런 일에까지 굳이 매번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번역에 참여하면서도 가능하면 ‘트란스첸덴탈’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 저작을 선택하려고 초기 라틴어 학위논문들을 선택했다.(물론 거기서도 그 용어를 아주 피할 수는 없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아마도 내 번역어가 다수 의견으로 채택되지 않으리라고 막연하게 예단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문제의 개념쌍 가운데 하나는 ‘아프리오리’로 그대로 표기하고 다른 하나는 ‘선험적’이라는 번역용어를 택했다는 것도 책이 나온 뒤에야 알았다. 지금에 와서 보면 내 의견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받아들일 만 하다고 생각한다. ‘경험론 철학’은 이상하지 않은데, ‘선험론(적) 철학’은 사람들이 아직 어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

 

 

다만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칸트 철학에 ‘초월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지난번에 말했으니 길게 말하지는 않겠으나, 이 문제에 관해 한 가지는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시인과 철학자는 모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정원사들이다. 언어를 가능한 한 아름답게, 가능한 한 정확하게, 가능한 한 풍부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깊이 있게 가꾸고 다듬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와 시인의 으뜸가는 사명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한 민족의 언어가 완전히 개화하지 않은 단계에서 번역은 언어의 확장과 성숙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매개이다. 서양의 민족어의 형성에서 성서 번역의 의의나 고전 번역의 의의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언어가 일상적 의사소통의 수단에서 고상한 아름다움과 숭고한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변모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칸트 철학의 한글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이 위대한 철학자의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우리말이 칸트의 정신을 넉넉히 품을 만큼 넓어져야 하고 깊어져야 하고 또 엄밀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모국어의 질서가 교란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서양 언어의 수동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서양 언어에서 비일비재한 복합문을 어떤 식으로든 우리말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도 괴롭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긍정적 성장에 수반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번역을 핑계로 모국어의 질서와 의미 체계를 임의로 교란시키는 일은 삼가야 한다.

 

하지만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 번역어가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은 백 교수도 인정하는 것 같다.

 

 

“독일어 트란첸덴탈의 이러한 의미 전환 내지 확장은 사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표현되는 칸트적 세계인식으로 인한 것인 만큼, 우리가 칸트철학을 한국어로 옮기고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한국어 ‘초월(적)’이 재래의 관용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경우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칸트 철학을 철학사적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 할 것이다. 기실 한국어 ‘초월(적)’의 일상적 의미는 철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는 상식 실재론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초월철학은 바로 그 상식 실재론을 전복시키는 것이니, 무엇보다도 용어 ‘초월’부터 전복시켜 읽고 사용하지 않으면 ‘초월철학’은 제대로 표현될 수도 없다.”(백종현, 같은 논문, 21쪽 아래)

 

 

여기서 백 교수는 “칸트철학을 한국어로 옮기고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한국어 ‘초월(적)’이 재래의 관용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경우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 칸트 철학을 철학사적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사적 맥락을 위해서라면 멀쩡한 한국어의 관용적 의미를 건드리기보다는 라틴어를 보다 열심히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 ‘초월(적)’의 일상적 의미가 상식 실재론에 기반했다는 학설도 기발하지만, 일상어가 상식 실재론에 기초하고 있으니 그 의미를 좀 바꾸어야겠다는 것도 상식을 초월하는 만용이다. 내가 아는 한 ‘트란스첸덴탈’이란 낱말은 독일어에서는 일상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 순수 학술 용어이다. 그러니까 칸트는 자기 방식대로 의미를 부여해 쓸 수 있었다. 그건 학자들끼리 사용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초월(적)’이란 낱말은 한국어에서는 학술 용어이기 이전에 아주 일상적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그의 무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말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Seine Unwissenheit transzendiert unsere Vorstellungskraft.라고 표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므로 한국어에서는 백 교수가 생각하듯이 이 낱말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초월이나 초월적이라는 낱말을 학술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독일관념론을 개관하면서, ‘내재적 형이상학에서 애써 머물렀던 칸트와 달리 셸링은 다시 초월적 형이상학의 길로 나아갔다’고 말한다면, 아무리 초보자라도 두 철학자의 차이를 직감적으로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 교수처럼 칸트의 “초월철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한국어 ‘초월’부터 전복시켜 다른 뜻으로 읽어야 한다면 초월 말고 다른 낱말을 번역어로 쓰는 것이 옳지, ‘초월(적)’이라는 한국어를 전복시켜 다른 뜻으로 읽으라는 것은 합당한 요구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칸트학회에서는 오랜 숙의 끝에 트란스첸덴탈의 번역어로서 “선험적”이라는 과거의 관행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학회에서 ‘초월적’이란 번역어를 처음부터 독단적으로 배제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회원들 가운데는 ‘초월 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던 분들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론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그건 먼저 배제되었고, ‘a priori’와 ‘transzendental’이라는 개념쌍을 ‘선천적-선험적’이라고 번역할지, ‘선험적-선험론적’이라고 번역할지를 두고 끝까지 토론한 끝에 앞의 것은 절충한 것이 ‘아프리오리-선험적’이라는 대안이었다는 것은 나도 책이 나오고 나서야 번역의 총괄 책임을 맡은 최소인 교수의 전집 발간사에서 읽고 알았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었으면, 그만 그렇게 해도 되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백 교수의 칸트 번역이 전문가를 위한 직역이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고 백 교수 자신은 대역(對譯)을 하듯이 번역했다고 자부한다는 말도 들었으나, 그다지 정확한 진단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역을 하든 아니면 현대어 번역문만으로 번역서를 만들든, 그것 때문에 번역의 방식이나 수준이 달라질 일은 없다. 그리고 직역을 한다 해서 가독성이 떨어지고, 의역을 한다 해서 가독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양 언어와 한국어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가독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낱말 하나하나의 뜻이나 뉘앙스가 번역 불가능할 정도로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순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 번역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1:1 직역을 하되 독일어 어순을 우리말에 맞게 적절히 조율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이번 칸트학회 전집에서 내가 맡은 번역에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한 라틴어 낱말과 한국어 낱말을 1:1로 대응시켜 번역하려고 애썼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직역을 한 셈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가독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번역자로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내용 자체에 대한 이해부족, 곧 전문성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잘못 알고 잘못 옮긴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만약 누구라도 나의 번역에서 그런 오류를 발견한 독자께서는 기탄없이 지적해주시기를 바란다.

 

 

백 교수의 번역의 경우에도 가독성에 대한 지적이 계속 나오는 까닭은 직역-오역의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전문성 때문이다. 전문가가 번역하면 문외한의 번역보다 더 좋은 번역이 나올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전문가가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번역을 열심히 한다고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지속적으로 다른 책을 이어서 번역하다보면 정작 연구할 시간은 줄어든다. 하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평등하다. 그래서 칸트 학회에서는 (내가 번역한 저작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가능하면 각 저작들마다 그 저작들로 학위논문을 쓴 전문가들에게 번역을 의뢰했던 것이다.

 

 

5. 감사의 말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디. 이 글을 쓰면서 많은 분들께 도움을 받았다. 전남대 독문과의 조자경 교수께서는 독일어 분철법에 관해 최신 정보를 알려주셨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의 양현혜 교수께서는 트란스첸덴탈의 일본어 표기(トランスツェンデンタ―ル)를 찾아 주셨는데, 본문에서 썼다가 지웠지만, 일본어에서도 우리 식으로 말해 ‘트란스첸덴탈’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한다는 것은 밝혀두려 한다.

 

내 학생들은 한국어 자료들은 물론이거니와 수아레즈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독일 강단철학에서 초월자 및 초월 철학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을 내게 보내주었다.

 

그 가운데는 이탈리아어 논문과 책도 있었는데, 모자란 내 머리로 이걸 언제 다 읽나 걱정이긴 하지만, 고맙고 대견하다. 더불어 제자들은 선생이 행여 실수라도 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에 걸쳐 이 글의 초고를 다 읽고 논문지도 하듯이 글에서 고칠 것을 세심하게 지적해 주었다. 그 지적에 따라 잘못된 것은 고치고, 보태야 할 것은 보태고, 과격한 표현은 순화시켰다. 모든 분들께 고맙게 생각한다. 물론 독일어 문제부터 다른 모든 내용에 이르기까지 아직 있을 수도 있는 오류는 모두 내 책임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50905.html#csidx8390ecf6a8281cab2ef45356ab6a924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김상봉

‘트랜스첸덴탈’ 용례의 맥락적 의미 중요 칸트는 ‘경험적’ 아닌 ‘선험적’ 개념 탐구 “백종현 번역 ‘초월(성)’은 하이데거의 말” 칸트는 그런 단어 사용한 적 없어 시인과 철학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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