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철학

1955 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 프로이트에 대한 철학적 탐구

by 원시 2020. 8. 7.

제목: 에로스와 문명 - 프로이트에 대한 철학적 탐구 

(* 에로스 사전적 의미 : 에로스란 생명을 보존하려는 모든 본능을 의미한다. 이는 기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추진력으로 표출된다.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고 보호하려는 승화된 추진력과 충동이다. )


저자:  Herbert Marcuse (1898-1979) 마르쿠제 

번역: 원시. 

원제:  Eros and Civilization -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Freud 

출판 시기: 1955 


 소피 마르쿠제 (1901-1955)를 기념하며 


서설


‘인류 문명이 인간 본능을 끊임없이 억압하면서 건설되었다’는 프로이트 명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문명 건설과정에서 개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이 고통이 그 문명의 혜택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가라는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그렇게 심각한 고려대상은 아니었다. 


프로이트 자신조차도 이러한 문명 건설과정이 불가피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들은 그의 문제제기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인간의 본능적 필요를 개인이 자유롭게 충족시키는 것은 문명사회와 양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본능 충족을 거부하고 그것을 뒤로 미루는 지연 행위야말로 문명 진보의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행복이란 결코 문화적 가치가 아니다.”  행복이란 ‘정규 직업으로서 노동’의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고, 일부일처제의 ‘통제와 처벌’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고, 법과 질서의 기득권 체제에 종속되어야 한다. 리비도에 대한 체계적인 희생, 리비도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과 표현에 강압적으로 굴절시킨 것이 바로 ‘문화 (문명)’이다. 


(*리비도: 사전적 의미- 리비도란 성적 쾌락이나 자기 생명 보존을 위해 원시적 생물학적 충동에서 발생한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에너지임.)



그런데 이런 희생의 대가로 인해 되돌아오는 혜택은 상당히 컸다. 인간의 자연 정복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 영역들에서 완결되었고, 이로 인해 인류 역사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의 기계화와 표준화, 정신의 빈곤화, 현재 진보의 점진적인 파괴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구유럽 문명과정을 지배해온 원칙들을 반성하고 문제로 삼을 만한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했다. 생산성의 지속적인 증가는 끊임없이 더욱더 현실적인 ‘모두를 위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부자유와 구속의 강도는 더 거세어질 것으로 보인다.  산업화 문명의 세계를 거치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범위는 더 넓어졌고, 그 지배 효율성의 강도는 훨씬 더 커졌다. 이런 경향은 진보를 향한 여정에서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퇴행이 결코 아니다. 


강제 수용소, 대량 학살, 세계 대전, 핵폭탄 투하는 야만주의 (barbarism)라는 잘못된 습관으로 다시 한번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기술, 정치권력 행사의 성공을 전 사회영역에 제어장치 없이 전일적으로 적용시킨 것이다. 


인류의 물질적이고 지적인 성과물들이 이제 막 진정한 자유 세계를 창출할 때,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종속과 파괴는 이런 문명의 정점에서 발생하고 말았다. 우리의 현재 문화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들은 기성제도들의 낡음과 시대착오성을 잘 보여주고, 새로운 형태의 문명의 출현을 의미한다. 


아마도 ‘억압’이 가장 강력하게 유지되면 될수록, 그것은 점점 더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억압’이 문명의 본질에 속해야 한다면, 문명에 대한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 이외에 별 다른 대안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은 ‘문명’과 ‘억압’이 동일하다는 생각을 폐기할 근거들을 제공해준다. 프로이트의 이론적 성과를 고려해 본다면,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은 다시 열려야 한다. ‘자유’와 ‘억압’, 생산성과 파괴, 지배와 진보의 상호관계는 필수 불가결한 문명의 원칙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러한 관계는 단지 인류의 특정한 역사적 조직화의 결과일 뿐인가? 


프로이트 용어를 쓰자면,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 사이 갈등은 서로 화해 불가능해서, 그 갈등이 인간의 본능 구조 자체를 억압적으로 탈바꿈시켜야만 했는가? 이게 아니라면, 이 둘 간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다른 삶과 존재양식의 체험,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식의 관계 기초 위에서 건설된 ‘비 억압적’ 문명 개념을 새롭게 가능케 하는가? 


나는 ‘비억압적 문명’ 개념을 토론할 때, 그것을 한갓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론화 작업으로만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주제 토론은 두 가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근거 위에서 정당화될 것이다. 



첫번째, 프로이트는 ‘비 억압적 문명’의 역사적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부정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론적 개념은 오히려 프로이트의 이러한 부정을 논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억압적 문명의 성과 그 자체가 억압의 점진적 폐지의 선결조건들을 창출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근거들을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적 개념들을 그것의 사회-역사적인 맥락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재해석할 것이다.



 이러한 재해석 절차는 수정주의적 신-프로이트 학파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정주의자와 대조적으로, 나는 프로이트 이론 자체가 “사회역사적”이라고 해석하고, 이러한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떠한 새로운 문화적 혹은 사회학적 나침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알고보면,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 (biologism:인간을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해석함”는 심층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 이론이다. 그런데 신-프로이트 학파는 이런 해석을 지속적으로 애써 거부해왔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생물학적인 요소에서 문화적 요소로 강조점을 변환시킴으로써, 신 프로이트 학파는 오히려 인간의 본능 안에 자리잡은 사회의 뿌리들을 잘라내 버렸다. 



그 대신 개인을 설명할 때, 그 개인이란 사회가 이미 만들어놓은 ‘환경’이라고 간주해버렸고, 사회와 개인을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사회를 위치 지운다. 신 프로이트 학파는 이렇게 개인과 사회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사회의 기원과 정당성을 따져 묻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 대한 신 프로이트 학파의 분석은 사회적 관계의 신비화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굴종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 역시 아주 보호벽으로 잘 둘러싸인 기성제도의 영역 안에서만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신 프로이트 학파의 비판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성 체제 바깥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개념적 토대를 제공하지 않았고, 그 비판적 생각과 가치 대부분은 그 체제 안에서 제공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 도덕과 종교는 그들의 부활을 축하한다. 도덕과 종교의 주장을 ‘병든 것’이라고 애초부터 반박했던 바로 그 심리학의 용어들로 이 도덕과 종교가 치장을 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실은 이상주의적 도덕과 종교가 바로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수용되고 선전된 태도들과 동일한데도, 그것들이 이 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문명의 역사적 구조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통찰은 그 수정주의자들이 거부했던 바로 그 개념들 안에 들어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프로이트의 메타 심리학, 그의 후기 본능 이론, 인류의 이전-역사의 재구성이 이러한 ‘개념들’에 속한다. 



그런데 정작 프로이트 자신은 이러한 개념들을 단지 ‘연구 가정들 working hypotheses’으로만 간주해버렸다. 이러한 가정들의 기능이란 불분명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분리된 통찰들 사이에 임시 가교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그러한 통찰은 물론 늘 교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들이 더 이상 심리분석적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그것들은 폐기될 운명에 처한다. 



프로이트 이후 심리분석의 발달 과정에서 이러한 메타 심리학은 거의 다 절멸되었다. 심리분석이 사회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에 존경을 받게되자, 어떤 사건의 원인들에 대한 추측들(이론화 :speculations)을 서로 맞춰보고 타협하는 작업으로부터 심리분석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러한 추측들의 조율과 타협의 의미는 한 가지 이상이었다. 그 추측들은 임상 관찰 영역과 치료적 유용함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추측들의 인간 해석에 따르면, 인간이 프로이트 초기 “범 성욕주의” 보다 사회적 금기 (taboo)에 대해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초기 “범 성욕주의”는 문명의 폭발적이고 강력한 토대로 밝혀졌다. 



향후 진행될 토론은 심리분석의 금기시된 통찰을 문명의 기본적인 변화 발달 과정을 해석하는데 적용시켜보도록 할 것이다. (심리 분석 그 자체에서도 금기시된 통찰) 이번 에세이의 목적은 심리분석의 철학에 기여하는 것이지, 심리 분석 그 자체에 기여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 책은 이론 영역 안에만 머무를 것이다. 또한 심리 분석이 발달해서 점차 기술적인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는데, 이 책은 그런 기술적인 분과 과학 영역 바깥에 머무를 것이다. 



프로이트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이론, 즉 “심리(정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이론으로써, 프로이트는 그 자신의 위치를 철학의 위대한 전통 위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기준들에 부합한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프로이트 개념들의 해석을 올바로 가다듬거나 향상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개념들이 보유하고 있는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데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철학과 그의 과학을 구별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신 프로이트 학파는 프로이트의 철학을 대부분 부정해버렸다. 치료라는 이유로, 그러한 부정은 완벽하게 정당화되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치료적인 논거도 이론적 구성의 발달을 막아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론적 구성의 목표는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지 않고, 일반적인 신체 이상이나 병을 진단하는데 있다. 





보충: 


몇 가지 용어들에 대한 예비 설명 문명 (civilization) 은 ‘문화 culture’와 교환가능한 의미이다.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에서 처럼. 


억압 repression, 그리고 억압적 repressive 는 비-기술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자제, 구속, ( restraint ) 통제, 제약 (constraint), 진압, 억제 (suppression)을 뜻한다. 


본능 (instinct)은 프로이트의 ‘본능,충동:트리프Trieb’ 개념에 따라, 인간 생명체 (organism) 의 기본적인 “욕구 drive, 추동력”을 지시한다. 이러한 욕구들은 역사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욕구들은 정신적인 상징과 육체적인 상징 (대변)을 알아나간다. 






참고 기사:



김인환 선생 번역 출판


당시 동아일보 신간 소개가 흥미롭다.


김인환 역. 에로스와 문명 (왕문사 256면. 550원. 60년대 구미 젊은이들에게 현대문명의 저항의 원리를 제공한 후기 마르쿠제의 대표작으로 국내 초역. 문명 과잉이 제기하는 억압의 사회를 극복, 에로스적인 노동에 의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회로 변혁할 것을 역설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