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보고 싶어요!
입력 : 2016.05.07 18:57 수정 : 2016.05.07 21:39윤호우 선임기자
새누리 반대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20대 총선서 무산
4월 14일 경기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열린 제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증 교부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며 당선증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총선에서는 두 번 투표를 한다. 첫 번째는 지역구 후보를 뽑는 투표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표시하는 투표다. 이번 20대 총선에서는 첫 번째 투표로 253명의 지역구 의원을 뽑았고, 두 번째 투표로 47명의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했다. 두 번째 투표는 전체 의석인 300석이 기준이 아니라 비례 의석인 47석이 기준이다. 이런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병립형이라고 한다.
소선거구제 선거는 단 한 표라도 더 얻는 후보가 당선되는 승자독식 제도이기 때문에 많은 사표(死票)가 발생한다. 정당득표율이 낮더라도 의석수가 많은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다. 당연히 다수당에 유리하고 소수당에 불리한 제도다. 때문에 득표율과 의석수가 맞지 않는 불비례성을 없애기 위해 소선거구제를 도입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비례대표제를 함께 실시하고 있다. 두 번째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를 선출하면서 표의 등가성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병립형만으로는 소선거구제의 결함이 잘 보완되지 않고, 표의 등가성이 잘 구현되지 않는다는 점이 총선 때마다 지적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비례대표제의 개혁은 늘 선거제도 개혁의 한 과제로 인식된다.
두 번째 투표에서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은 정당득표율을 비례의석수(20대 총선 47석)에만 곱해 의석수를 배분하는 병립형, 정당득표율을 전체 의석수에 곱해 의석수를 배분하는 연동형이 있다. 흔히 병립형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일본식, 연동형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독일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난해 말 여야 정치개혁특위에서는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놓고 논란을 벌였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19대 총선처럼 20대 총선에서도 병립형 비례대표 선출제를 고수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연동형 비례대표 선출제 도입을 주장했다. 야당은 100% 연동형이 되지 않는다면 정개특위 위원장인 이병석 의원(새누리당)이 내놓은 50% 연동형(균형의석제)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 선출방식 협상에서 이병석 안을 마지노선으로 보았다. 정의화 국회의장도 당시 이병석 중재안에 대해 ‘이상적인 안’이라고 추어올렸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여당에 불리한 안이라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20대 총선에서는 결국 19대 총선처럼 병립형 선출제로 비례대표 의석이 배분됐다.
만약 마지막 협상 테이블까지 올랐던 이병석 안대로 20대 총선의 비례대표 의석이 배분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20대 총선 결과를 토대로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정당은 정의당이었다. 50% 연동형을 도입할 경우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의석이 조금 줄어들고, 국민의당은 조금 더 확보하게 된다.
시뮬레이션 결과가 낯선 것처럼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여전히 유권자들에게는 ‘이뤄질 수 없는’ 낯선 제도다. 당초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20대 총선에서 첫선을 보일 것으로 기대됐다. 첫발은 정당이 아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내디뎠다. 선관위가 지난 2월 국회에 제출한 선거제도 개편안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포함됐다.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고 권역 내에서 정당득표율을 기준으로 비례의석을 배분하는 선관위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유사했다. 권역별 전체 의석이 60석이라면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구 의원의 40석을 먼저 채우고, 나머지 비례의석 20석을 정당득표율대로 배분해 나누는 방식이다. 비록 전국 의석인 300석은 아니지만 권역별 전체 의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연동형의 한 형태가 된다.
지난해 선관위가 19대 총선 득표율을 기준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적용해 본 결과 새누리당은 호남권에서 4석을 확보하고, 더민주(당시 민주통합당)는 대구·경북에서 5석, 부산·울산·경남에서 14석(지역구 2석 포함)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호남에서 한 석도 얻지 못한 새누리당과 영남에서 2석만 얻은 더민주가 상대당의 텃밭에서 의미있는 의석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지역주의 완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됐다.
시민단체인 비례대표제포럼은 선관위의 선거제도 개편안에 대해 “선관위의 권역별 연동제 도입 제안이 채택될 경우 선거제도의 득표-의석 간 비례성이 크게 높아지며, 민의를 잘 반영하는 이념과 정책 중심의 온건 다당제가 발전해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비례대표제포럼은 더 나아가 비례대표 의석의 확대와 권역별 득표율이 아닌 전국 득표율 도입을 주장했다. 하지만 선관위의 개편안을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새로운 정치체제의 확립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정초적 개혁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거구 개편안에 대해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은 찬성의 의견을 나타냈다. 정의당은 비록 권역별 비례대표제에서 지역구 대 비례의 비율이 2대 1로 비례대표 의석이 대폭 늘어날지라도 권역별로 나누는 것에는 반대했다. 당시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논평을 통해 선관위의 개편안에 대해 긍정정인 평가를 하면서도 “정당 지지도와 의석 점유율 간 비례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 있음에도 비례대표 의석수를 확대하고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이 제시되는 선에서 그친 것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보고 싶어요!
새누리당은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새누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은 구체적인 자료까지 내놓았다. 선관위가 제시한 지역구 대 비례의 비율인 2대 1에 맞춰 지역구 의석을 246석, 비례 의석을 123석이라는 조건을 대입한 결과 19대 총선에서 전체 370석(초과의석 1석 포함)에서 새누리당이 170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반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산·울산·경남 권역에서는 새누리당이 정당득표율보다 더 높은 지역구 의석을 확보해 초과의석이 발생함으로써 전체 의석수가 한 석 더 늘어났다.
19대 총선 시뮬레이션에서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은 전체 370석 중 143석, 통합진보당은 40석, 자유선진당은 14석, 무소속 3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의도연구원 보고서는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 시뮬레이션’과 ‘그들은 왜 독일식 선거법을 주창하는가’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새누리당으로서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을 허물 수 있는 만큼 ‘독일식’이라는 용어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냈다. 정개특위와 관련된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당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새누리당에서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권역별에 대입한 선관위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새누리당의 반대로 국회의 협상 초기 때부터 논의의 대상에서 밀려났다. <민중의 소리>에서 20대 총선 결과를 선관위의 개편안에 제시된 권역별 비례대표제에 따라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새누리당은 105석, 더불어민주당은 101석, 국민의당은 83석, 정의당은 26석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엄청난 수혜를 받게 되는 셈이었다.
향후 선거제도 개혁에서 비례대표제 선출방식은 계속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비례대표제의 개혁은 비례대표 의석의 확대와 정당명부제 도입으로 단순화할 수 있다.
19대 총선 때 53석이던 비례대표 의석은 20대 총선에서 47석으로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비례대표 의석 확대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의석이 늘어나면서 군소 정당이 제대로 모습을 나타냈다”면서 “일단 비례대표 의석 자체를 늘리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이 가장 적극적으로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윤재설 정의당 정책연구위원은 “비례대표 의석 확대와 연동형 도입이 정의당으로서는 19대 국회에서 이루지 못한 과제였다”고 말했다.
비례 선출 방식으로는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이 개혁의 첫 번째 과제로 인식된다.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 선거제도가 개편되지 않는 한 ‘소선거구제+독일식 정당명부제(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바람직한 개혁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다만 권역별 비례대표제 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의 세부적인 방식의 장·단점이 언급되고 있다. 이미 20대 총선을 앞두고 권역별 비례대표제뿐만 아니라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 50% 연동형 비례대표제(균형의석제) 등이 한 차례 검증 과정을 거쳤다.
총선이 끝나고 난 뒤인 4월 17일 국민의당 유성엽 의원(당시 원내수석부대표)은 “국민의당은 이미 총선 공약으로 중·대선거구제 또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의 변경 추진을 내건 바 있다”며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레대표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국민의당 이상돈 당선인은 개인적 의견을 전제로 “중·대선거구제로 바뀐다면 비례대표가 필요없다고 볼 수 있지만 현행 소선거구제에서는 권역별 비례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보다 더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당선인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해야 유권자들이 선택하는 비례대표의 대표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선호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윤 연구위원은 “중·대선거구제는 계파 간 나눠먹기로 전락할 우려가 있고, 비례성이 떨어지므로 폐해가 있다”면서 “소선거구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조합이 바람직한 개혁 방향”이라고 말했다.
윤 연구위원은 “이번 총선은 정책이 실종된 선거”라면서 “연동형을 하게 되면 두 번째 투표의 정당득표율에 따라 전체 의석이 결정되기 때문에 정당이 서로 정책 대결을 하게 되므로 정당정치가 강화된다”고 말했다. 김윤철 교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보다는 연동형 비례대표가 더 낫다”면서 “50%로 하더라도 연동형 제도의 도입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야당인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선택이 21대 총선의 새로운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의 반대가 예상되지만 다수를 차지한 야당의 선택이 주목된다. 윤 연구위원은 “20대 총선 전 여야 협상을 보면 총선 직전에 정개특위를 구성하고 총선이 가까워지면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서둘렀다”면서 비례대표제와 관련해 “이번에 20대 국회가 구성되면 바로 정치개혁 논의기구를 발족시켜 정개특위를 상설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두 번째 투표함의 힘’을 강조했다. 윤 연구위원은 “지금 제도로는 두 번째 투표함이 너무 작다”면서 “내 표의 힘을 확인하려면 두 번째 투표함인 정당득표율의 힘이 커지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철 교수는 “비례대표제 개혁에 있어서 정당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의 비례성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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