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되자. 손잡고. 노태우 장례식 추모곡을 보고서. 역사적 반동세력들이 합법적으로 활개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다.
--------
의무감으로 했었다. 내심 제사 집회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수위 아저씨랑 실랑이 벌이고, 그 제문 밤 새워쓰고, 그림 잘 그리는 후배 집에도 못가게 묶어두고, 인쇄소 아저씨는 자다가 속옷 바람으로 프린트하곤 했었다.
대학 뒷산은 제사방 병풍이고, 아크로는 주례, 월례 '제사'였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기억남은 것은, 같이 제사 지낸 사람들 같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많이 흐릿하다. 그러나 인생도 영화이니, 영화 페이드 아웃은 자연스런 종결이니 그것도 다 받아들인지 오래다.
제 명에 살지 못한 사람들 제사지내다가 학교를 떠났다. 때론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전두환-노태우 파쇼와는 한 하늘에 살 수 없다고 '비타협적' 투쟁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로 떠나기도 했고, 공장에서 쇠를 깎다가 산재로 주검으로 학교로 돌아와 돌비석이 되기도 했다.
20대에 죽어서, 그 부모님은 대부분 50대가 많았다. 그들을 제사 단상으로 초대해, 그 애미 아비가 자녀를 잃은 상심을 들어야 했다. 어떤 어머니는 농사짓다 말고 한복을 차려입고 단상에 올라 오시기도 했고, 어떤 어머니는 장례식 검정 옷을 입은 채 죄인마냥 제문을 읽기도 했다.
부끄럽다. 그 정치적 제사와 한국 민주주의 속성이라도 발표한 적도 없고, 늘 뒤로 미루기만 해왔다.
노태우가 지병이 있었다 했지만, 제 명에 죽었다. 이제 다 안다. 정치는 '선과 악' 두 개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직장이고 자아실현이고 자녀도 교육시켜야 한다. 그야말로 끼인 세대, 인생의 부담감이 많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게 만든 장본인들 중 한 명인 노태우가 죽었고, 제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노태우는 국가장의 자격까지 얻었고, 문재인 정부는 그렇게 격상시켰다.
동지의 관을 들고 '학우여 양심의 종을 난타하라, 역사의 진실을 보라' 그렇게 울부짖고 제사지냈던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장례식을 '강제적으로' '합법적으로' 지내주고 있다.
정치 정당은 "뜻"으로 "정치적 이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야 한다. 그런데 정당이 하나의 '직장'이니, 꼭 그럴 필요도 없는가 보다.
이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적당히, 또 눈치껏, 알맞게 부르면서 가는 것 아니겠냐 싶다.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 되고, 손에 손잡고." 좀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것은 20대,30대에 맡기고 말이다.
-----------
故노태우 아들 “파란 많은 생···대통령으로 공·과 있지만 최고의 아버지였다”
조문희 기자입력 : 2021.10.31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변호사가 지난 27일 부친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변호사가 31일 “이제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과 가족을 뒤로 하시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편하게 쉬시기를 바란다”며 부친을 떠나보낸 심경을 밝혔다.
노 변호사는 이날 추모의 글을 통해 “이제 아버지를 보내드린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암과 함께 살아오신 인생, 굴곡 많은 인생을 마감하셨다”며 이같이 말했다. 노 변호사는 “(부친은) 군인, 정치인, 대통령을 거쳐 일반시민으로 돌아오자마자 무거운 사법의 심판으로 영어의 몸이 될 수밖에 없었다”며 “그 후 큰 병을 얻어 긴 시간 병석에 누워 고통스럽게 지냈고, 결국 영광과 상처가 뒤섞인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것 또한 본인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셨다”라고 했다.
노 변호사는 “대통령 퇴임 후 큰 수모를 당하실 때조차 당신이 다 짊어지고 가겠다고 말씀했다”며 “원망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국민과 역사에 대한 무한 책임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셨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희생과 상처를 가슴 아파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자 했다”며 “대통령 재임시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학생·시민·노동자·경찰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희생에 안타까워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과오는 모두 (노 전 대통령) 당신이 짊어지고 갈 테니 미래세대는 우리 역사를 따뜻한 눈으로 봐주기를 간절히 원하셨다”라고 썼다.
그는 선친이 늘 강조한 신조가 ‘비굴하지 말아라’, ‘민족 자존심을 지켜라’였다면서 “6·29 선언을 결단하고 북방정책이라는 자주외교를 펼치게 된 것은 이 신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는 “특히 6·29 선언은 한국 정치는 물론 아버지 개인의 정치 인생의 대전환점이었다”며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본인부터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은 우리 가족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했다.
노 변호사는 “아버지는 평생 자신과 가족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한 분은 아니었다. 허물도 있고 과오도 있으셨다”면서도 “하지만 자신을 숨기거나 속이지 않으셨다. 거짓말 하는것을 가장 싫어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으로서는 공과 과가 있지만 가족에게는 최고의 아버지였다. 단지 많은 시간을 함께 못나눈 아쉬움이 클 뿐이다”라며 “이제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과 가족을 뒤로 하시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편하게 쉬시기를 바란다”고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다. 평소 앓던 지병과 합병증, 노화가 사망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5일장으로 정해진 장례는 전날인 30일 열린 영결식으로 마무리됐다.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politics/assembly/article/202110311158001#csidxaa0cdfe1de0a6369bf9461e88ffddb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