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2021.nov.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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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박완서가 서울 여자라고 생각했으나, 서울 여자가 아니었다. 박완서는 극성 치맛바람 엄마따라 개성 근처 (개풍군)에서 서울 현저동으로 이사를 왔다.
참 아래 사진은 1977년 송파대로 확장공사라고 함. 44년 전 서울이다. 저 때는 '없는데서 뭐가 생겨나고' 그런 재미로 한국인들이 살 때다. 가난하건 부유했건. 물론 내막이야, 공무원,가진자들의 뇌물수수가 노골적으로 벌어진 건설현장이었지만.
2021년 허허벌판에서 건설한 서울에, '내 것 지키느라' 괴로운 시대가 되었다. 77년 이전에는 '없어서' 허전했고, 2021년에는 '가진 것이라도 안갓 힘을 써서 지켜야 하고, 1만원이라도 손해보지 않아야' 허전하지 않게 되었다. 지는 노을이야 그 때도 지금도 허탈하긴 마찬가지다.
나의 여자연구, 박완서 편에 대해서.
이왕 썼으니, 한 대목을 쓰자면, 박완서의 어머니가 완서를 데리고 살았던 동네가 '현저동'인데, 지금 무악동, 독립문 근처다. 당시 현저동은 성 외곽지대다. 박완서 어린이는 '매동'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는데, 원래 현저동 학군이 아니다.
그래서 박완서는 매일 한양 성바깥에서 성 안으로 드나들며, 학교 매동 초등학교는 '성 안', 집은 '성 바깥' 살이를 했다.
박완서의 어머니는 '내가 비록 성바깥 현저동에 살지만, 현저동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당신들과는 격이 달라'라고 말하며, 일종의 '우월의식'을 가졌다. 박완서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1945년 해방전, 당시 경성으로 온 박완서에게 '서울'이란 무엇일까? 교육열이 강했던, 박완서의 엄마는 완서보다 10살인가 많은 오빠를 경성으로 중학교 보내고, 완서도 '매동'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 박완서의 오빠는 집안의 기둥이었으며, 일제시대 생각있던 청년들이 그랬듯이,'좌익'이었고 한국전쟁 당시 부상으로 사망했다.
- 박완서가 개성 옆 개풍에서 서울로 초등학교 다니려고 온 게 1938년 즈음일테니, 1977년 이면 40년 후, 지금은 이 후로 40년 후.....
초등학생 박완서가 현저동에서 매동 초등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학교를 갔다.
1955~56 박완서와 딸
박완서가 아이들을 낳고 돌보다가 만 39세 나이로 소설가로 데뷔했다.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대목이다.
1970년. 10월. 8일. 박완서 첫 소설, '나목'이 여성동아 공모 소설부문에 당선됨.
1980년 6월 4일. 박완서
기존 여성관에 대한 도전과 새 여성 창조.
1989년. 5월 25일. 한겨레 논단 기고자. 박완서.
친아들의 죽음과 80년 광주 518에 대해.
1988년 9월 1일. 소비 문화에 대한 비판. 여성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었다.
1988년 TV 드라마. 박완서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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