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에 대해서, 우파들의 "기술입국"에 대해서, 과연 정치적 진보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기술입국"에 대해서,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시대를 선도한다"는 그런 논리, 즉 박정희와 김대중의 동일성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필요해 보입니다.
원시
98
부제: 황우석 마이크 오작동을 보면서/ 기술의 빈곤인가 기술철학의 빈곤인가?
황우석 기자회견장에서, 왜 그 마이크는 작동되지 않았는가?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몇개의 마이크를 새로 갈아 넣고서야 기자회견은 시작되었고, 중간에 삑삑거리는 소리 때문에,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도 있다. 황우석 당사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이크를 톡톡치기도 했다. 마이크들, 인간기술의 결과물들이 인간의 말을 잘 듣지 않음을, 마이크들의 저항을 우리는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거창하게 말해서 기술철학의 부재.
이번 황우석 사건은 과학과 기술에 종사하는, 그리고 그와 연관된 의학, 법, 윤리, 철학, 정치, 국제정치, 종교, 사회관행, 여성의 몸 등에 대해서 우리 모두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조금 인위적인 분류이지만, 과학과 기술의 구별
사람들이 분과 학문을 만들면서, 과학이 추구하는 참과 거짓의 대상과 그 인식방법을 반성해보는 과학철학, 기술이 목표로 하는 인간의 효용성 혹은 유용성의 대상과 그 인식방법등에 대해서 연구하는 기술철학 등을 새로운 분야로 독립시키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과학과 기술을 분리시켜서 사고하지는 않지만, 보통 자연세계의 참과 거짓,즉 진리발견, 자연의 법칙적 파악, 자연현상의 필연성 탐구, 사실들의 원인과 결과 등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과학의 영역 (보통 우리가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학 등으로 분류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과학의 분류나 체계보다 훨씬 더 오래된 기술(art, techne)은, 우리가 살아가는 필요한 유용한 도구들이나 필수품들과 연관되어 있고, 기술의 목표는 한마디로 우리 인간에게 유용성/효험을 주는 것이다.
근데, 왜 황우석 마이크를 이야기하는가?
기술의 속성과 연관되어 있다. 기술에 대한 낙관론/비관론보다 우선 기술 자체가 가지는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황우석이 기자회견을 할 때,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 우리 모두가 답답하고 신경이 곤두섰다. 마이크는 인간의 자연적 목소리 그 파장의 크기 (소리단위)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기 저항(매질)을 뚫지 못하고, 멀리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마이크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 목소리의 소리 단위를 증폭시켜서, 공기 저항을 이겨내고, 멀리까지 운동하게끔 해서, 강당 저 뒤에 있는 사람들도 황우석의 기자회견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들을 수 있게끔 해준다.
기술의 속성 1: 확장 - 시공간의 축소기능
마이크라는 기술의 결과물은 이렇게 공기저항을 가능케하는 공간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예를들면, 삼성전자나 LG 가 자랑하는 셀폰 (전화의 기능 등 여러가지 기능들)으로, 연인들끼리 통화를 한다고 하자. 24시간 붙어있지 않아도, 그리고 같은 장소에 있지 않아도, 이 두 연인은 애인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서 의사소통과 사랑의 깊이를 더한다고 가정하자. 이 전화기라는 기술발달의 결과물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시 말해서 시공간을 단축해 주는 (또는 압축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기술이 가지고 있는 시공간의을 압축,단축,축소시켜준다. 이것을 기술의 확장 기능(시공간의 초월기능)이라고 한다.
기술의 속성 2 - 환원
하지만, 진정한, 예리한 사랑이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내 애인이나 친한 친구의 목소리는 자연적인 목소리가 아닌 전화기, 즉 기계음이다. 진짜 예민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일단 이렇게 가정해보자, 진정한 사랑의 교감은 자연적인 목소리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에게는 전화기의 기계음은, 자연적인 목소리를 변형, 왜곡시킨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다보면, 자연적인 목소리와 기계적인 음성의 구별이 불가능하며, 맹신과 추종을 낳기도 하지만.우선 우리가 우리들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 사리분별을 아는 사람이라고 전제를 해보고 말을 이어보자. 전화기는, 사람의 음성과는 실제로 다른 기계음, 즉 전화선을 통해서 변조되는 음성, 다른 주파수의 소리단위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이런 기술의 속성을 환원 (시공간의 축소가 아닌, 인간 목소리를 기계음으로 환원,축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기술의 확장기능과 환원 기능의 분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쟁도 가능하겠다.황우석씨가 기자회견을 하고자 했을 때, 마이크가 작동되지 않은 것은, 기술의 확장 혹은 환원 기능이라기 보다는 오작동에 가깝다.
기술의 오작동 사례를 논외를 치더라도 (너무 비관적으로 흐를테니까), 기술의 환원기능 (인간 목소리들의 축소, 인간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소리들의 구성요소들을 전화기선은 다 전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몇가지들만을 전달해준다)에 대해서, 상당히 낙관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술에 대한 낙관론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언젠가는, 전화기가 인간의 목소리들을 거의 자연 목소리에 가깝게 ‘복사,복제’,즉 재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우리 집 형 전화목소리와 내 목소리를 구별못하고, 내 친구들이 “야 원시냐?” 이렇게 우리 형에게 묻는 전화나, “야, 콩이냐?”하고 우리 형 친구들이 나에게 전화로 말하는 사례들을 너무나 많이 접한 나로서는, 기술이 완벽하게 인간의 자연성을 재현할 수 있다고 너무나 너무나 소박하게 못믿겠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계속되게 내버려두자. 인간의 호기심과 도전은 계속 될테니까.
황우석 사건을 보면서, 기술이 가지는 속성을 간략하게나 살펴볼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물론 황우석 등이 시도하고 있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나,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통해서 척추병이나 당뇨병등이 치료되는 것에 대한 기술적 회의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는 여러가지 가능성들이 남아있고, 이에 대해서는 별개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다. 다만, 기술이 인간에게 분명히 유용함을 가져다 주고, ‘된장 기술’ ‘고추장 담그는 기술’ ‘비행기 만드는 기술’ 등이 우리들에게 필수적인 것이고,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는 것이지만,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실은 된장 담그는 기술도 진행형이지 않은가?
황우석 줄기세포 기술의 자기 역설과 소외
황우석 인간 배아 줄기 세포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기술이 가지고 있는 확장과 환원이라는 두가지 성격, 그리고 생명체를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생명기술이 가지는 위험성들 역시 뒤돌아 보는 게, 한국의 정치 사회 기술 발달 수준에 맞는 게 아닌가? 어떻게 된 것이, 학계나 언론계, 종교계 너나 나나 온통, 기술 찬양으로 가득차 있게 되었는가? 이런 기술 맹신주의 앞에서는, 기술 자체가 돈,자본과 연결되고, 사회 권력으로까지 급조되어도, 기술 자체가 가지는 속성을 뒤돌아보자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도덕선생같이 들릴 것 같다.
진보정당에서는, 기술에 대한 막연한 낙관론, 비관론을 넘어서, 기술과 정치, 사회권력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보다 많은 토론을 전개했으면 한다. 아주 단순하게 보일 지 모르지만, 황우석 교수는 의료기술, 동물복제 기술 등이 가지고 있는 ‘확장’ 속성만 너무나 너무나 정치적으로 ‘마이크대고 크게 외쳤다.’ 이러한 기술에 대한 확장에 대한 맹신은 난치병을 고칠 수 있다는 윤리적 확신을 낳고, 그리고 국가이익이라는 애국주의와 접합되어서, 그 기술의 확장이라는 마이크 소리가 황우석의 고막을 찢어서, 여론도 양심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켰다.
어처구니없게도, 인간의 기술 발달이, 결국 그 기술을 발달시킨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기술발달의 역설과 소외, 그 기본적인 이야기가, 황우석 의료기술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황우석을 둘러싼 사회, 정치적 배경을 내버려두더라도, 의료기술과 연관된 부분만을 논해도, 기술에 대한 역설이다. 황우석의 맞춤형 줄기세포가 엄청난 유용성을 가져다 줄 지, 아니면, 어제 기자회견장의 마이크처럼 오작동할 지, 또 테라토라의 어원인 괴물로 될 지, 적어도, 최소한 우리가 논리적으로라도 토론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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