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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_리더십/2022 대선

[경향 컬럼] 김택근의 묵언-완패했다, 0.73% 차이로

by 원시 2022. 3. 19.

김택근의 묵언-완패했다, 0.73% 차이로
김택근 시인·작가입력 : 2022.03.18 22:02 



2017년 5월 ‘장미 대선’에 이어 이번에는 ‘매화 대선’을 치렀다. 꽃 이름을 붙이니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도 이런 선거판에 무슨 매화타령이냐고 눈을 흘길 것이다. 승패가 나뉜 지 열흘이 지났건만 아직도 선거판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봄밤이 아플 것이다. 갓 피어난 꽃들도 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접선거는 줄곧 겨울에 치러졌다. 그 무도하고 잔인했던 권력다툼을 기억한다. 혹자는 이번 대선이 가장 혼탁했다고 혀를 차지만 지난 겨울선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선거판에 오물이 가장 많이 묻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최악은 아니라는 말이다. 양김 대결이 펼쳐진 1992년 대선은 음습하고 참혹했다. 여당 후보 김영삼은 민주화 동지인 김대중을 사상이 불순하다고 몰아세웠다. 언론은 지역감정을 자극해서 전라도를 고립시켰다. 김대중은 다시 빨갱이, 과격분자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했다.


퇴로마저 희미해져버린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퇴장하는 뒷모습을 보며 지지자들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언론은 ‘정치 거인’ ‘현대사의 거목’ ‘지조의 정치인’ ‘민주외길 40년’ 등의 찬란한 용어로 김대중의 퇴장을 찬양했다. 하지만 지지자들에게는 그런 찬사가 김대중을 쫓아내려는 주문처럼 들렸다. 구멍 뚫린 가슴에 찬바람이 몰아쳤다. ‘차라리 세상이 동파해버렸으면….’ 선거 다음날 남녘에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누구는 김대중이 웃고 있는 선거벽보에 볼을 비비며 흐느꼈다. 누구는 떨어져나간 포스터를 다시 붙이며 울었다. 전라도에는 밤이 일찍 찾아왔다. 화려한 불빛이 송년을 휘감고 있음에도 서쪽 나라에는 일찍 불이 꺼졌다.


지지자들은 소리 없이 울었다. 아들 모르게, 아내 모르게, 옆집도 모르게 혼자 울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면 나약해 보일까봐, 또 정말로 약해질까봐 울음을 삼켰다. 눈물은 가슴마다에 고였다. 보이지 않는 눈물이 어둠 속에서 강을 이뤘다. 김대중은 그 눈물의 강을 타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그 눈물을 잊지 않았다. 좋은 정치를 하려 최선을 다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가고 있다.


문재인 정권도 광장의 촛불이 모여서 세웠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간절한 기도 속에 출범했다. 하지만 그 촛불로 우리 사회의 불공정, 불평등, 몰상식을 태우지 못했다. 약자의 눈물을 외면했다. 변한 것이 없으니 위대한 비폭력 투쟁을 촛불혁명이라 부를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광장이 아닌 자기들만의 요새로 올라간 정권은 심판을 받았다. 이 엄중한 사태를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여권은 흠결 많은, 자질 미달 후보라며 상대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최약체 후보에게, 개혁의 대상에게, 정치 초보자에게 졌다. 그럼으로 이는 석패가 아니다. 0.73% 차이로 완패했다. 평자들은 진보와 보수세력이 ‘10년씩 번갈아 집권’하는 공식이 깨졌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진보정권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만이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고 해야 정확하다.


지금은 승자의 시간이다. 패자들은 말을 아껴야 한다. 청와대 대변인이 패배가 아쉬워 공식석상에서 흘린 눈물은 현 정권이 나약하다는 징표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배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막연히 분노하지 말고, 예단하여 공격하지 말고, 가정하여 저주하지 마라. 증오는 퍼져나가 다시 돌아온다. 선거는 수(數)싸움이다. 한 사람이 소리치면 두 사람이 떠나간다. 선거의 패배는 선거를 통해서만 설욕할 수 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듯, 민심에 넘어진 자 민심을 얻어야 일어설 수 있다.


0.73% 차이의 완패를 희망으로 여기면 미래가 없다. 지금은 선동의 시간이 아니다. 거울을 볼 시간이다. 거울에 지난 5년간의 먼지가 쌓여있다면 닦아내야 한다. 약자들의 눈물이 보일 때까지, 몸속 어딘가에 붙어있는 ‘내로남불’이 보일 때까지 닦아야 한다. 어제의 내가 한 일이 오늘의 내 모습이다.


우리 조국은 0.73%로 승패가 갈려도 승복하는 품격 있는 나라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봄이 왔다. 봄은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온다. 모레가 춘분, 이산 저산에 꽃이 필 것이다. 이쪽 아닌 저쪽 산그늘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도 이쪽 산 아래 사람들을 떠올리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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