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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정의당

기본소득 반대의 기본적 이유들 BASIC REASONS TO OPPOSE BASIC INCOME (존 클라크 John Clarke)

by 원시 2020. 5. 11.

기본소득 반대의 기본적 이유들

 

캐나타 온타리오주 반빈곤 운동가 존 클라크의 문제의식

 

(원시)    2020년 05월 06일 03:27 오후

 

 

 

캐나다 온타리오주, 빈곤추방운동가

존 클라크가 기본소득에 비판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캐나다 복지체제에서 기본소득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착취와 복지삭감 긴축정책을 유지 강화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해 오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

 

존 클라크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30년 넘게 도시빈곤추방운동을 펼치며, 홈리스 보호,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비판, 빈집 점거운동, 공공임대주택자 권리 운동을 조직해 오고 있고, 대학에서도 초빙강사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존 클라크의 문제의식과 논의 주제는 실천가로 평생 살아온 그답게 명료하다. “정부 지원금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도입되었고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이다. 그는 사회복지국가 황금기(1945-1975)에 형성된 잉글랜드 사회복지체제를 몸소 체험했고, 영연방의 하나인 캐나다의 복지제도의 명암을 잘 알고 있다. 필자는 존 클라크와 함께 토론토 시립 공공임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조사하고 이를 시청에 접수시킨 적이 있다.

 

특히 캐나다는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금, 실업보험, 장애인복지, 공공교육, 노조권 등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신자유주의 이전 시기에는 훨씬 더 나았고, 그 이후에도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존 클라크를 비롯한 토론토 좌파들뿐만 아니라 나이 든 시민들은 1990년대 이후 캐나다에도 신자유주의 폭풍이 몰아쳐서, 특히 교육-의료-공공주택 제도가 과거와 비교해 엄청나게 퇴락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진단에 대해, ‘아직 한국은 캐나다나 과거 잉글랜드에 비해 사회복지 제도가 뒤처진 편이니까, 한국과 캐나다는 상황이 다르다’는 식으로 배타적으로 접근하는 것 대신, 왜 존 클라크는 캐나다 복지국가 상황 속에서 우파건 좌파건 ‘기본소득’에 대해 비판적인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쟁점]

 

▲ 존 클라크는 신자유주의 공격을 꺾을 수 있다고 믿는 기본소득 주창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도덕적 해이이고 방향타를 상실한 대응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좌파의 기본소득이 실현되었다 해도 현 체제에 경제 정치적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존 클라크 진단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쟁점이 될 것이다.

 

▲ 캐나다 온타리오의 경우, 우파 정당인 ‘진보적 보수당 PC’ 정치가들 중에서도 기본소득을 제안해오고 있다. 존 클라크가 보기에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 심지어 강화되면서, 동시에 ‘현금=기본소득’만 나눠주는 정책은 현 체제와 양립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가 ‘기본소득’ 대신 제안하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내용인 노동자권리, 생활임금, 소득지원을 포함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강화와 ‘기본소득’은 서로 보완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것도 쟁점 토론 주제이다.

 

▲ 존 클라크는 기본소득 재원인 ‘세금’이 결국 노동자들의 세금에서 나온 것인데, 그 세금의 운용과 개혁은 기득권의 대규모 양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조세제도의 개혁과정 역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존 클라크 생각이다. 결국 재분배와 분배를 둘러싼 정치투쟁 영역들의 다변화가 필요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투쟁과정 속에서 사회복지정책 제도와 법이 노동자들에게 양적으로도 충분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이 될 것인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존 클라크의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 그 주장의 역사적 배경과 전제:

 

잉글랜드 빈민법 탄생 배경, 농촌의 붕괴로 도시 노동자 탄생했다.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주고, 노동조건이 열악했는데, 이를 개선하는 데는 미흡했다. 왜냐하면 빈민법 자체가 저임금 기반 사회적 구조를 바꾸는 게 목표가 아니라,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복지국가 소득지원 정책도 본질적으로는 잉글랜드 빈민법과 다르지 않다고 존 클라크는 주장한다. <번역자>

 

 

 

 

존 클라크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기본적 이유들

 

(원문 링크)

http://johnclarkeblog.com/node/37

 

1. 소득 지원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고찰해보자.

 

기본소득을 비롯한 소득지원 정책들을 다시 유행시키자는 제안들을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봉건제 타도로부터 생겨났다. 잉글랜드 농민들은 자기 토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나가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산업예비군인 실업자들이 늘어났고 이로 인해 사회적 저항들이 발생했다. 잉글랜드 빈민법들(the English Poor Laws)은 그러한 사회적 분노 표출을 제어 관리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잉글랜드 민중들에게 절대적 생존에 필요한 정도 그 이상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다 잉글랜드 빈민법은 그 수혜 대상과 지원 대상 숫자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했고 지원 조건들도 의도적으로 처벌적 성격이었고, 수혜자들의 자존감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빈민법은 충분한 사회적 지원을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굉장히 낮은 임금을 받고 최악의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산출하는 그 체제는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현재 복지국가의 소득지원 체제도 항상 잉글랜드 빈민법의 본질적 원리와 발상 위에서 형성되고 있다.

 

2. 1970년대 신자유주의 도래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목표는 노동자의 착취를 강화시켜 과거 초창기 자본주의 시대처럼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임금인상 억제와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의 엄청난 증가를 통해 소득지원제도를 체계적으로 점점 더 퇴락시켰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목표를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로 내 몰린 노동자들로부터 고용주들과의 단체협상 권한을 부여해줄 수 있는 어떤 다른 소득 자원들을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질서 체제가 더 공격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도 사회복지 체제를 억압하려는 세력들이 늘어났다.

 

3. 사회적 힘의 균형 문제

 

기본소득 제안자들은 이러한 (노동자 임금 억제, 불안정 일자리 증가, 노조 약화) 신자유주의 공세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현재 소득지원 방식은 양적으로 불충분하고 질적으로도 처벌적 성격을 띠고 있는 사실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신념에 기초하고 있는 명제’일 뿐이다.

 

사회정책 설계 차원에서 결함이 있어서 이것을 수정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자본주의 이윤 창출이라는 토대 위에서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정치적 아젠다가 현실에서 잘 실현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소득지원 제도의 퇴락은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에 우리가 경험한 정치적 패배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불리한 사회적 권력 균형 때문에 이러한 신자유주의 흐름을 막아내지 못했고, 이것은 우리의 정치적 무능력이었다.

 

당신이 소득지원 체제의 ‘등록상표’ 라벨을 바꾼다고 해도, 이러한 생각해 볼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듣기에는 기분 나쁠 순 있지만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아젠다의 전략적인 명령을 에둘러 돌아갈 수 있는 어떠한 사회(복지) 정책도 있을 수 없다.

 

4. 신자유주의 함정이다.

 

기본소득이 실패한 노력보다 더 나쁘다. 더욱이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의 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도 있다. 우파들이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불안정 노동력, (자본 이윤창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쉽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하는 노동력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본소득 정책이 갖는 의미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보충해주는 것은 일반 세금 재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저소득 노동자의 임금의 원천은 다른 노동자들이 납세한 세금이 되는 것이다. 자본가와 고용주는 정부 보조금을 받게 되고, 이는 다시 노동자들의 저임금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런 방식은 노동자의 생활임금 투쟁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을 인상해달라고 요구해도 정부는 그 요구를 반드시 수용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복지예산 삭감과 사유화(privatization 민영화)와 관련된 현안들에 대해서도 공적 서비스, 사회적 자원들은 화폐로 교환되는 상품 대상으로 되어버린다.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공공 서비스는 현금과 교환될 것이다.

 

진보적 기본소득 옹호론자는 이러한 우파식 기본소득이 현실에 존재하지만 진보적 입장은 ‘우파적’ 기본소득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권력관계, 우파와 진보파의 힘 관계를 고려해보자. 기본소득이 어떠한 구체적인 형태로 현실에 자리 잡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 균형이다.

 

노동자를 절망시키고 저임금 노동자를 증가시키는 소득체제를 유지하는 목표는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고, 기본소득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우회로라는 개념에도 발견된다.

 

5. 그런데 왜 좌파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는가?

 

필자 역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좌파의 논거들을 경청했고, 자료들을 공부했다. 좌파가 반동적인 구상(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뒤덮어보려는 시도이긴 한데, 도덕적 해이이고 방향을 상실한 방식이다.

 

생활임금 확보와 공공서비스 향상을 위한 투쟁에 대한 우리 자신감이 점점 더 떨어졌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역풍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체제를 수용하면서, 조세로부터 임금을 어느 정도 원하는 선까지 채워주자는 기본소득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공공서비스는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 정부의 현금지불(기본소득)이라는 구상이 나온 것이다.

 

슬프게도, 이것이 합리화된다고 해도,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 체제와 화평하게 지내자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슬픔의 크기만큼, 또 기본소득은 별 소용없는 정치적 노력이다. 왜냐하면 글로벌 자본주의는 타협할 의사와 관심도 없이 자기 갈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은 노동자 권리, 생활 임금, 소득 지원을 포함한 강력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이것은 힘든 투쟁이다. 우리가 이상적인 상황에 놓여있지 않고 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적들의 이해관계를 돕는 사회정책 (기본소득)에 희망을 거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