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 이게 나라냐?" 부모의 재산과 사회지위가 아이들의 계급과 계층, 그리고 직업을 결정해버리는 조선시대-자본주의를 타파하라는 그들의 외침이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태민-최순실 일가와 박근혜 동맹체가 벌여온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한 민심은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성난 민심과 유사하다.

3선 개헌해서 종신집권을 획책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그 무능은 박근혜에 해당한다. 정신이 흐릿했던 85세 이승만은 혼자서 자립적으로 연설이나 대화를 하지 못하며 '수첩 공주'로 낙인찍힌 박근혜와 유사하다. 

무능하고 무기력해진 이승만을 앞세워 자유당 권력을 독점했던 이기붕과 그 아내 박마리아 일가는 최태민-최순실 갈취단과  유사하다.

이승만과 이기붕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알고도 거기에 아부하며 국회의원직을 유지했던 자유당은, 최순실 일가의 전횡과 박근혜의 무능을 알고도 박근혜를 앞장세워 '친박' 새누리당과 거의 흡사하다.

1960년 419 혁명 상황과 2016년 11월 상황은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다만 최순실의 딸로 알려진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혐의와 특혜조치, 교수들까지 '아래 것들 하녀'로 부린 정유라-최순실 모녀에 대한 성난 민심 때문에, 중학생 고등학생까지 길거리로 나와, "민주주의 되찾기 운동"에 나섰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몰려가는 시위대를 경찰들이 발포한 이후, 사망자가 속출하자,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이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315 부정선거 이후, 이승만 정권의 총에 맞아 사망한 시위대 숫자는 185명, 부상자는 1500명이 넘었다. 특히 마산에서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군의 시체 발견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타케스샤우 온라인에 실린 박근혜 하야 관련 사진이다.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 대학생들 )


참고.




1960년 419 혁명 당시, 동아일보 기사 요약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부통령 선거) 이후, 부정 선거로 인해 전국적인 시위 발발. 

4월 18일, 경찰들이 "인(사람)의 바리케이트"를 5중으로 치고 시위대를 막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스크람을 짜고 구보로 돌파하였다

"다시 격발된 학생 데모" 서울대, 고대 전교학생 '데모' 참가




. 4월 20일자 동아일보 


경무대 입구에서 경찰들이 총을 시위대를 향해 겨누었다. 사상자 발생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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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지 않는 시위대들.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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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자 동아일보.

미국 국무장관 크리스찬 허터, 한국 언론 집회의 자유 억압당하고 있다고 이승만 정부 비난함으로써, 사실상 이승만 정부를 미국이 지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었다. 미국의 원조를 받던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이승만 지지 철회는 곧 이승만 정권 퇴진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 4월 22일. 이승만 이기붕이 속했던 자유당 내분 폭발 이후, "왜 사람은 죽이느냐 말야" - 자기반성문 쏟아져.

만시지탄의 자유당 반성 수습책 발표.




. 4월 25일자 


이승만 자유당 총재직 사임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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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직 사임 "하야 발표" 

- 대통령 부통령 선거도 다시 하겠다.

- 대통령제가 아닌 내각 책임제 (의원 내각제)를 수용하겠다. 개헌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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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새벽.


315 부정선거 총 지휘자였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일가 자살. 이기붕의 아들 (이승만의 양아들) 이강석이 총으로 부모와 동생을 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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