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1822년 콜레라-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2020.02.19 20:54 입력
1821년 8월13일 평안감사 김이교가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평양부의 성 안팎에 지난달 그믐 사이 갑자기 괴질이 유행해 토사(吐瀉)와 관격(關格·급하게 체해 인사불성이 됨)을 앓아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일 동안 무려 1000여명이나 됩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습니다. 목전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
1821~1822년 콜레라
괴질의 정체는 콜레라였다. 본래 인도 벵골 지방 풍토병이던 콜레라가 영국의 식민지배 후 1820~1830년대에 전 세계로 퍼졌다. 주로 영국 선박과 군대가 퍼뜨렸다. 중국 남경, 산동, 북경을 거쳐 중국 전역이 감염되었고 의주를 지나 평안도와 황해도로 콜레라가 들어왔다. 조선 조정은 평안감사의 보고로 ‘괴질’의 확산을 알게 되었다. 당시엔 괴질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로베르트 코흐(1843~1910)가 콜레라균을 관찰한 건 60년 후인 1885년이다.
전파 속도는 놀라웠다. 평안감사 보고가 조정에 도착한 즈음에 콜레라는 이미 서울에 침투했다. 9월 말엔 제주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이 감염되었다. 1822년엔 4월 말 벌써 콜레라가 발생해 9월 말까지 제주도 포함 조선 팔도를 감염시켰다. 제주에서만 2000명 넘게 사망했다.
전염병이 창궐하자 국왕 순조와 대신들은 사악한 기운 때문에 괴질이 발생했고, 국정 최고 수행자로서 자신들의 정치행위에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국가적 재난과 재앙에 대한 조선 위정자들의 기본 자세였다. 조선의 지배이념 유학은 어진 정치(仁政)를 원칙으로 했다. 유행병이 돌면 조선 정부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첫째, 시체를 매장하도록 조치했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많을 경우, 정부는 기한을 놓치지 말고 성 밖으로 실어내어 시신을 묻게 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조치지만 현실에서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퍼져나갈 때 해야 하는 일이다.
둘째, 환자들에게 진휼청에서 쌀과 거적을 지급했다. 질병 때문에 차단당하면 식량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간에 최대한 약재를 공급했다. 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에는 “환자가 가난하여 약을 살 수 없으면 관에서 지급하고 그 밖에는 본읍에서 의약을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순조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콜레라가 급속히 번진다는 소식을 접한 지 이틀 만에, 감옥에 있는 죄수 가운데 죄질이 가벼운 자를 석방했다. 그리고 다시 이틀 후에 도성에서 여제(祭)를 지낼 것을 지시했다. 여제란 역병과 변괴를 부른다고 믿었던 여귀(鬼)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사람들은 역병을 막으려면 여제를 지내야 한다고 믿었다. 조정은 사람들이 믿는 방식대로 민심을 다독였다.
콜레라는 당시 세계적 현상이었다. 유럽인들도 조선 사람들과 똑같이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1830년대 콜레라가 모스크바에 들어갔는데, 감염자 사망률은 50%를 넘었다. 어떤 약도 소용이 없고, 불과 며칠 사이에 탈수를 일으켜 초췌해지면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런데 다수의 하층민 유럽인들은 조선에서는 없었던 또 하나의 공포를 가졌다. 상층민들이 콜레라를 이용해 자신들을 죽이고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영양이나 청결의 차이 때문에 상층민과 하층민은 똑같이 감염되어도 사망률에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런 현상이 빚어낸 인식이었을 것이다.
세균의 존재를 알게 된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전염병이 퍼지는데 제사를 지내는 행위를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전염병이 동반하는 비합리적 공포를 이겨낼 만큼 합리적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더구나 관련 연구자들은 전염병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회가 맞는 진정한 위기는 대개 위기요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잘못된 대응에 의해 가속된다. 질병은 예나 지금이나 개인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문제다. 조선왕조는 재난이 발생하면 사회를 재점검할 기회로 삼았다. 조선이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긴 세월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김신회, ‘1821년 콜레라 창궐과 조선 정부 및 민간의 대응 양상’,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4.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