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민주당2017. 1. 1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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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루즈벨트 '뉴딜' 메모 1.


문재인, 이재명 후보는 1945년 이전부터 신탁통치와 남북 분할을 제시한 루즈벨트를 꼭 정치 스승으로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가? 정치적 스승과 본보기를 말할 때는 어떤 경제, 문화, 스포츠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면적인 입장을 고려한 이후에 인물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은가? 


문재인과 이재명 후보가 정치 본보기(롤모델)로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꼽았다. 아마 뉴딜정책 때문일 것이다. 속내는 이해가지만 뭔가 허전하다. 그리고 ‘스승과 모범 역할’을 찾는게 고역이긴 하다.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국제 정치는 한국 대선 후보들이 ‘스승’으로 모범으로 칭송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루즈벨트는 1943년 11월 22일~26일, 장개석 처칠과 함께 카이로에 모여 조선은 미국,영국,중국,소련의 분할 지배 하에 신탁통치 기간을 거친 후에 독립국가로 될 수 있다고 제안한 인물이다. 그리고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 얄타 회담에서는 조선의 신탁통치 기간을 20~30년이라고 제시했다. 


이러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와 조선 분할 제안을 하게된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무엇이었는가? 당시 미국 루즈벨트는 일본을 패퇴시키기 위해 소련 스탈린의 전쟁 참전을 필요로 했다. 소련이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 군대와 싸워준다면, 루즈벨트는 조선(코리아)을 분할해 북쪽을 소련에게 선물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이러한 소련과 거래를 제안한 후에, 8월 일본이 항복선언하기도 전인 4월 12일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잠복했던 소련과 미국간의 경쟁이 '냉전' 형태를 띠고 한국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연장전'으로 비화되었다.


물론 이재명,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가 프랭크 루즈벨트의 대 조선 (코리아) 정책에 찬성해서 그를 정치 모범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루즈벨트 '뉴딜 정책'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미국의 극심했던 불평등을 뉴딜 정책으로 해결하고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은 대통령"이 프랭클린 루즈벨트라고 했다. 반면 이재명 후보는 루즈벨트 뉴딜 정책 핵심은, 문재인 후보가 언급하지 않았던 '법인세' 증액시켜 기본소득 정책을 펼치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정책들이 제시된 게 아니니 우선 평가를 잠시 미루기로 하자.


프랭클린 루즈벨트 '뉴딜' 메모 2.



문재인과 이재명 후보의 '뉴딜 정책' 강조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소득 불균형과 불평등을 개선해서, "상품과 재화를 시장에서 잘 팔고 교환해서" 유효수요를 창출해야만, 지금과 같은 경기침체를 벗어날 수 있다는 가정과 믿음일 것이다. 1929년 대공황 타개책처럼. 


사실 이러한 정부의 시장 개입, 고용 창출, 가처분 소득 증가 목표 등은 지난 85년간 좌우파를 막론하고 양적 질적 차이가 있었음에도 어느 정도 합의된 사항이다. 


뉴딜 정책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들과 과제들이 있다.


첫번째, 전쟁 시기도 아닌 상황에서 어떻게 조세 제도를 개혁하면서 동시에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 보수파들의 저항을 실질적으로 막아낼 방법은 무엇인가? 


최순실-박근혜 조폭 정치 40년 적폐청산은 박정희 '개발독재' 모델의 청산의 다른 말이다. 정경유착은 개혁하고, 계급 계층간 소득 격차, 자산 격차는 줄일 수 있겠는가? 문재인 후보는 "루즈벨트 뉴딜 정책이 소득 불평등을 개선했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소득격차 해소는 미국과 일본이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 후, 1942년 4월에 루즈벨트는 세금 이후 (세전후) 소득이 2만 5천 달러를 넘는 미국인은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는 법을 의회에 제안했다. 보수파 의원들은 당연히 루즈벨트(FDR)의 제안에 콧방귀를 뀌었고 일언지하 거절했다. 


루즈벨트는 물러서지 않고, 2만 5천 달러 이상 소득자에게는 ‘수퍼 세금 supertax’를 매긴다고 발표했다. 의회는 반대했지만, 10월 루즈벨트는 행정명령권을 발동해서 ‘수퍼세’를 관철시켰다. 


프린스턴 대학 보수파 경제학자 할리 루츠(Harley Lutz)는 ‘수퍼세’야말로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소득평등화 정책이라고 맹비난했다. 친부자 의원들은 루즈벨트 행정명령을 취소할 법안을 만들었고, 루즈벨트는 결국 보수파들과 전투에서는 졌지만, 부자 증세라는 전쟁에서는 승리했다. 세계대전 종전 당시  20만 달러 소득자는 소득의 94%까지 소득세를 납부했다. 

  

두번째, 청년 실업 100만, 자영업의 불안정,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 총 노동시간을 나누지 않으면 새로운 일자리는 창출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정부가 공공 서비스 분야에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을 적어도 15만~20만 정도 일자리를 창출해 내야 한다. 과연 문재인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지난 20년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포함) 하지 못한 채,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에 굴복했던 과거 민주당 정부 정책들을 뒤바꿀 수 있겠는가?  


세번째, 2017년은 1929년 미국이나 당시 세계대공황과 같은 상황이 아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서 출발한 미국 금융공황 사례가 보여주듯이, 금융 위기가 산업 전반의 위기를 폭발적으로 부추기는 형국이다. 오바마가 8년간 미국의 '재산업화 re-industrialization'을 외쳤지만, 피부에 와닿을 만큼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 만약 민주당 오바마의 그 산업정책이 성공적이었으면, 도널드 트럼프의 쇄국주의적 고립주의적 '재산업화' 정책이 이번 선거에서 바람을 일으키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만 '뉴딜'을 외칠 일은 아니다.  1930년대 초반 대공황 타개책으로 제시된 정책들이 2017년에도 통용될 지는 더 열린 문제이고 미확정적이다. 


생태학의 입장에서도, 에너지 관리 차원에서도, 루즈벨트 뉴딜정책의 상징으로 꼽혔던 '댐 건설'은 더 이상 실효성은 없다. 


네번째, 문재인이나 이재명 후보의 경우, 아직도 '뉴딜 정책'을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을 보면, 경제 활동 주체들, 노동자, 국가 정부, 자본 (경영) 중에, 정부를 중심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부의 '시혜적 태도'에 갇혀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예비 노동자들 (학생들), 실업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정규직 노동자들,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터와 일터 바깥에서 실제로 어떻게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섯번째, 이미 85년 전 이야기라서, 루즈벨트 '뉴딜'과 케인즈 모델과 뒤섞여 있기도 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케인즈만 알려져 있다. 실제로 민주당 루즈벨트 '뉴딜 정책' 배후에는, 유타 몰몬교도였고 대은행가였던 매리너 에클스가 있었다. 심지어 매리너 에클스는 공화당이었다. 과연 민주당 문재인, 이재명 후보의 '뉴딜 정책(?)'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상상하고, 구상하고, 실측하고, 실효성있는 대기획으로 만들 사람들은 누구인가? 한때 유행처럼 불었던 "스웨덴 모델" "독일 모델" "핀란드 모델"은 다 또 어디로 여행갔는가? 


85년 후 지금 보면, 당시 1930년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루즈벨트 정권 하에서 매리너 에클스 (Marriner Eccles)의 정책은 단순해 보인다. 에클스 당시 미 연방은행장 (FRB)은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부자이자 은행가였는데도, 연방 경제 정책을 쓸 때는, 자신의 도덕적 직관과 통찰을 따랐으며 실제 정책은 케인즈보다 앞섰다.  미 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기조로 공공투자비를 늘리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그 결과 국민들 개개인의 가처분 소득을 증가시키는 방향이었다. 


뉴딜 정책 좋다고 인정해도, 과연 민주당 루즈벨트와 공화당 매리너 에클스 같은, 요새 유행하는 ‘협치’에 해당하는 한국 정치가들은 누구인가? 


참 이렇게 쉬운 일이 왜 지난 20년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하에서 실천되지 못했는가? 진짜 '뉴딜 정책'만 하면 만사형통일까? 아니면 선거 때 내거는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가? 






1945년 2월 얄타 Yalta 회담, 영국 처칠, 미국 루즈벨트, 소련 스탈린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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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t.ly/2jd7fFX   (문재인 인터뷰) 



http://bit.ly/2jd4EMb  (이재명 인터뷰) 




(1926년 플로리다에서 낚시하는, 루즈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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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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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16. 3. 3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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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박근혜 한국 보수파의 외교 실패를 관찰하면서 1945년을 새롭게 다시 해석하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 분단 과정의 교훈  :  외교 철학의 중요성과 국제 정치 능력

 

다른 나라들이 코리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게 중요하다. 코리아는 '일본 점령지'로 해석되었다. 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 (해방일)로 기념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은 국제 정치와 외교에서는 진실의 전체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 영국 등에게는 코리아란 일본 패방 이후 새로 생긴 '전승국의 전리품' 영토였다.  

 

큰 그림을 그리자면,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협조하기도 하고 새로운 경쟁을 시작했다. 그 무대는 유럽이었고 새로운 지도 그리기였다. 발틱, 발칸반도와 독일 (동독과 서독의 불균형 분할: 동독은 서독의 3분의 1 영토 해당) 지역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는 충돌했다. 미국과 소련의 제 2차 라운드 경쟁 공간은 한반도였다. 제 3차 라운드는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 등)이었지만 당시에는 지연되고 있었다. 

 

참고: 아래 글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인민위원회, 남로당 북로당, 이승만, 김일성,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구 등 남한 북한 정치 주체들은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1943년부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까지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은 몇 가지 국제적 사건들과 협상들만을 다뤘다.

 

0.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1945년 2월 얄타회담, 1945년 7월 17일~8월 2일 포츠담 회담,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까지. 누가 코리아 정치를 좌지우지했는가? 왜 루즈벨트는 '한반도 20-30년 신탁통치안'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는가? 

 

(1)  1943년 11월 22~26일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루즈벨트,  중국 장개석,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은 대 독일 일본과의 전투 전략을 수립하면서 코리아(조선) 미래도 논의했다. “코리아는 자유 독립국가가 될 것이다"는 조항을 첨가했다. 그런데 미국 민주당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코리아는 신탁통치 기간을 거쳐서 독립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신탁통치안에 따르면 코리아는 독립국가 수립 이전에 미국, 영국, 중국과 소련의 분할 지배하에 있게 된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중국 장개석,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국 윈스턴 처칠이 참여했다) 

 

 

 

(2) 1945년 2월 4~11일, 크림 반도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담에서 나온 코리아 신탁통치안을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미국 중국 소련 세 나라가 코리아를 20년에서 30년 정도 신탁 통치를 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러한 루즈벨트의 20~30년 신탁통치 제안에 대해서 “신탁통치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응답했다. 무슨 확실한 코리아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채 이러한 신탁통치안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소련에게 코리아를 신탁통치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 이유는 스탈린에게 이러한 코리아 분할 통치 선물을 주면, 소련이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군대와의 참전을 선언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이러한 제안만 해놓고 1945년 4월 12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에서 전승국가들 사이, 특히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리품을 둘러싼 영토 분할 경쟁이 시작되었다. 냉전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극동 아시아와 태평양에서도 소련과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1945년 2월 얄타 Yalta 회담, 영국 처칠, 미국 루즈벨트, 소련 스탈린이 참여했다. 스탈린의 등장이 시작된다) 

 

 

 

 

 

(얄타 회담의 주요 안건은 독일을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승전국들이 어떻게 분할통치하는가 였다 )  

 

 

(3) 독일 포츠담 회담 (1945년 7월 17일~8월 2일) 이후, 38선 분할과 소련군과 미군의 코리아 점령

 

 

포츠담 회담의 주요 의제는 미소의 독일 분할 통치, 베트남의 16도 분할 (북,남 베트남), 폴란드 주권 범위, 그리고 일본 항복을 요구하는 7월 26일 '포츠담 선언' 등이었다. 

 

8월 9일 드디어 스탈린은 만주 일본군과 전쟁을 선포했고 소련 '붉은 군대'는 중국으로 전진했다. 몽골 인민공화국과 연대한 '붉은 군대'는 8월 20일 만주에서 일본을 완전히 패퇴시켰다. 만주에서 승전으로 인해, 소련군은 만주와 경계를 이루는 북한 지역과 남쪽 코리아까지 해방구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대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38도 분할을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이 이에 동의해서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고 미군은 남한을 9월 14일부터 점령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안을 두고 협상을 벌였으나 코리아 내부 좌우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12월 이후 미국과 소련의 공조틀은 깨졌고,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말았다.

 
 

 

(왼쪽은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노동당 출신 수상이다. 7월 5일 선거에서 보수당 윈스턴 처칠이 패배해서 애틀리가 참여했다. 가운데는 해리 트루먼 민주당 대통령이다. 4월 12일 루즈벨트 병사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 사진에서 중요한 인물은, 영국 미국에 비해 재임기간이 가장 긴 소련의 조세프 스탈린이다. 오른쪽 ) 

 

 

 

 

 

 

(1945년 8월 15일 이전 중국, 만주, 한반도, 일본 지도에 따르면,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한반도를 해석했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 소련에게 한반도란 일본 제국의 영토였고, 거기에 전승국으로서 점령 통치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1. 미국과 소련은 조선(코리아)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일본 영토 일부로 간주했다. 애초에 코리아(조선)가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독일과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은 코리아 (조선)를 일본제국 영토의 한 부분이라고 파악했다. 소련 군대 이름은 ‘붉은 군대 the Red Army'였다. 소련군은 일차적으로 만주지대에서 일본을 패퇴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고, 미군은 일본 섬들과 본토 4개 섬들을 점령하는 것이 주된 과제였다. 책의 저자 존 가디스는 1945년 8월 이후 코리아(한반도)는 미국에게 일종의 ‘덤’으로 주어진 영토로 해석했다.

 

일본이 1945년 8월 20일 만주에서 패배하자, 미국과 소련은 정치적 ‘공백’이 된 코리아 한반도를 38도 선을 기준으로 편의적으로 북부 코리아는 소련군이, 남부 코리아는 미군이 점령’ ‘통치’한 것이다.

 

 

 

 

(38선이 그어진 시점, 미국과 소련이 인식하고 있는 영토 개념은 '소련 존'과 '미국 통치존'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조선을 완전 지배하게 되었다는 뉴스. '일본과 코리아가 하나가 되었다'는 제목이 이채롭다) 

 

 

 

 

 

 

(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 미국 소련 영국 등 전승국이 해석한 코리아란 바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코리아'이다. ) 

 

 

 

 

2. 소련군의 북 주둔, 미군의 남한 주둔은 무엇이 문제였는가? 소련군과 미군의 ‘통치’로 인해서 단일정부 수립은 연기되어 버렸고, 소련군과 미군 철수 시한도 정해놓지 않았다. 

 

 

이렇게 소련군과 미군이 동시에 북한과 남한을 분할 점령함으로써, 코리아의 운명은 다시 국제적인 세력관계의 이해관계에 내맡겨지게 된다. 소련군과 미군이 1948년과 1949년 사이 북한과 남한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두 군대 철수가 오히려 코리아 한반도의 위기 등급만 더욱더 올려놓고 말았다. 소련군과 미군은 철수했지만 소련군은 북한 정부를 지지하고, 반대로 미군은 남한 정부를 옹호했다. 

 

이러한 북한과 남한 정부의 수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한국의 최대 과제였던 독립정부 수립의 실패를 의미한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만들어진 38선, 1945년 당시 만들 때만 해도 2016년이 되도록 이 분단이 이어질 지는 몰랐을 것이다. ) 

 

 

 

3.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코리아에 다이나마이트 뇌관을 설치하고 군대를 철수한 셈이다.

 

회고적으로 평가한다면 미군과 소련군이 설치한 이 폭약 뇌관은 그 어느 누군가가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누가 이 폭약 버튼을 누를 것인가?  

 

북한의 김일성 정부와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단순한 미소의 ‘꼭둑각시’는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정부의 정치적 의지와 결정방향, 그리고 그 선택지들을 결정적으로 규정한 것은 미국군과 소련군이었다. 

 

소련군과 미군이 코리아에서 철수한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개의 한국 정부들을 하나로 합치는 ‘경쟁’이다. 그 방법으로 불행하게도 북한 정부와 남한 정부는 ‘전쟁’을 선택했다.

 

 

4. 그렇다면 남한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왜 두 개 정부는 ‘전쟁’ 대신 공존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지 못했는가? 

 

 

북한 김일성 정부와 남한 이승만 정부 간의 이념적 정치 가치관의 차이가 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북한 김일성은 항일무장 투쟁 경험을 내세워 민족해방 이후 사회주의 정부를 한반도에서 수립하고자 했고, 남한 이승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통일정부의 이상형으로 제시하면서 ‘북진 통일 March North'을 주창했다. 

 

 

 

 

(1948년 이승만은 당시 73세였다.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와 중장 존 하지) 

 

1945년 패망 이후 분단된 서독과 동독에서는 통일 전쟁이 발발하지 않고 긴장공존을 유지했다. 그런데 왜 남한과 북한은 이러한 ‘긴장’과 ‘대립’속에서 공존하지 못한 채, 3년 전쟁을 경험했는가? 내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남한 이승만 정부와 북한 김일성 정부가 ‘꼭둑각시’가 아니라 코리아 프로젝트(통일 코리아)가 서로 달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남한 이승만과 북한 김일성 모두 ‘전쟁’ 발발시, 통일전쟁이 일어난다면, 북은 소련군 남은 미군의 원조를 받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세 번째, 동독과 서독의 분단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유럽에서 소련군과 미군은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미국과 소련은 외무부 장관 협의를 통해서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들을 조정 합의 타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 마오 정부의 탄생 이후, 급변하는 제 2의 전선이 된 극동 아시아와 남한과 북한 영토가 미국과 소련이 그 대립을 해소할 정치적 공간이 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유럽이 아닌 제 2의 전선이 형성된 남한과 북한에서 누가 패자가 되느냐를 놓고 한판 격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한 이승만 정부와 북한 김일성 정부 역시 소련군과 미군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내전’을 준비한 셈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소련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 자본주의 진영 사이에 ‘갈등’ 폭발이 발생하기 최적화된 곳이 바로 한반도였다.  

 

 

 

 

(1945년, 33세였던 김일성은 소련의 이반 키스티아코프 장군의 원조 하에 북한의 주요한 정치가로 등장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 집회에 등장한 김일성 ) 

 

 

 

5.  남북한 시민 내전과 미소진영 국제전을 동시에 수행한 한국전쟁

 

 

소련과 미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관철시키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과정과 그 이후에 소련과 미국이 유럽 발틱, 발칸 반도, 독일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냉전’은 시작되었다. 그 냉전의 제 2차 라운드 무대가 바로 한반도가 되었다. 

 

 

역사가 존 가디스는 미국은 군대 철수 이후, 1950년 1월 12일 에치슨 라인을 강조하면서 미국은 ‘트루먼 경계선’, 즉 일본과 오키나와 섬,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을 미국 헤게모니 제한선이라고 했다. 남한과 대만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존 가디스 말대로 미국이 여기에 만족했겠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 제국주의 패망 이후, 일본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 영토를 ‘덤’으로 봤건 실질적인 대륙 전진기지로 봤건 간에, 이 둘 다이건 간에, 대 한반도 이해관계를 분명히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1945년 9월 인천에 들어온 존 하지 중장이 ‘일본 제국이 아니라 미군 군대가 남한을 통치한다’고 말했겠는가? 

 

 

미국의 대 한반도 이해관계는 미국 혼자가 아니라 소련의 이해관계 표출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은 미국의 의도를 보고 대 한반도 전략을 수립했고, 미국은 그 반대로였다. 미국과 소련 가운데 북한 김일성 정부과 남한 이승만 정부가 있었지만, 규정적인 결정적인 힘은 미국과 소련이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행동개시할 정치적 환경과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존 하지 중장과 미군은 남한에서 대중적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던 이승만 세력이 그의 정적이었던 좌익세력을 남한에서 탄압하고 제거하는데 물질적 군사적 토대를 제공했다. 

 

 

 

 

 

 

(1950년 1월에 발표된 미 국무장관 딘 에치슨 Dean Acheson 라인은 대만과 한반도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미국은 직접 개입하게 된다) 

 

 https://www.stratfor.com/image/us-cold-war-containment-strategy

 

 

(당시 미 국무장관 딘 에치슨) 

 

 
참고 : 
 
John M.Swomley,jr, American Empire: The political Ethics of 20th Century Conquest, (MacMillan Company:London), 1970
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 A New History, 2005, Penguin Publisher 
Kees van der Pijl, The Making of An Atlantic Ruling Class,(Verso:London), 1984
Charles W.Kegley,Jr, After the Cold War: Questioning the Morality of Nuclear Deterrence,(Westview:Oxford),1991.
Leslie Defler, An Age of conflict: Reading in 20th Century European History,(Harcourt Brace College: London), 1997
Misha Glenny, the Balkans: Nationalism, war, and the Great Powers, 1804-1999, (Penguin:USA), 1999
Eric Hobsbawm, Age of Extreme:the Short 20th Century 1914-1991, (Michael Joseph:London),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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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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