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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김영삼_1993-1997

1997년 12월 대선 '짝짓기 연합 대선'. 김대중과 김종필은 내각제로 개헌 합의. 이회창 (신한국당)-조순 (민주당) 연합, 이인제 (국민신당- 김영삼 뒷배) 등 짝짓기 대선 과정. 가

by 원시 2022. 1. 12.

뒤돌아본 1997년 12월 대선 특질 - 국제적으로는 가장 반동적인 시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 제도화에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일까? IMF 긴축 독재 통치의 그림자가 '노동자 해고자유'와 '탈규제' '국가 복지 삭감'의 그림자를 대선 전에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꿈에도 몰랐던 IMF 독재체제의 도래, 그 이전에 보수파 신한국당의 분열은 한국 정치제도를 바꿀 수 있는 호조건들을 만들었다.  

 

 

1) 내각제 개헌을, 김대중-김종필 연합 후보가 내세웠다. 1960년 419 항쟁 이후 채택된 '내각제'의 부활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6공화국 헌법을 조각했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 '결선투표제'를 누락시켰고, 1988년 총선 제도를 '소선거구제' 1등 독식제도로 만드는 바람에, 지역투표를 강화시켜버렸다. 오류였다. 

따라서 내각제 개헌 제시는 대통령제의 단점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일진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김종필이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여론'의 토론 없이, 두 사람간 밀실 합의로 밀어부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2) 소수세력이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의 토대가 된 국민승리21이 권영길 후보를 대선에 출전시켰다.

 

3) 1990년 3당 합당의 산물 민자당(신한국당)이 해체되고, 새로운 '짝짓기' 대선이 되었다. 

김대중-김종필 연합팀,  이회창(신한국당)과 조순(민주당) 연합팀, 과거 통일민주당의 부활을 꿈꿨던 이인제 (국민신당+김영삼의 정신적 후원)팀으로 나뉘어졌다. 

 

 

 

1. 김대중-김종필의 연합 성립 배경

 

 

 

 

1997년 10월 30일. 이인제 국민신당 광고

 

 

 

 

 

 

 

 

 

10.27. 1997. 이회창 지지율 급락 (신한국당)  당 내분으로 10.6%까지 떨어져.

김대중 34.3%, 이인제 21.9% 

 

 

 

 

 

 

1997. 10.27. 김대중 대통령, 총리 김종필 진용 발표. 99년내 내각제 개헌 완료 합의. 독일식 순수 내각제. 내각제 개헌 후 연정 구성 합의

 

 

 

 

 

 

10.27.1997. 후보 지지율. 김대중 34.3, 이인제,21.9, 이회창 10.6, 조순 4.7, 김종필 2.9 

 

 

조순이 어디로 가느냐. (조순 + 이인제), (조순 + 이회창) 연합이냐?  

 

 

1997.10.30. 검찰, 김대중-김종필 연대 법률 검토.

관련법률. 후보자에 대한 매수 및 이해 유도죄 이해여부를 검토함. (사실상 넌센스라고 보여지지만, 왜냐하면 정치세력간 연합 문제는 정당의 자유권한이고, 각 이해관계 당사자 정당 내부 당원들의 민주적인 합의와 결정과정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1일자. 여론조사가 흥미롭다. 김대중-김종필의 연대 소식 이후에 행해진 여론조사임. 

바람직한 권력구조를 묻는 질문에, '대통령제' 37.6%, 내각제 33.8%이다. 

 

[메모] 

21세기에 들어와서, 내각제에 대한 한국유권자의 인식이 1980년대와 비교해서 많이 바뀌었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네덜란드, 캐나다 등 대부분 서유럽 국가들과 영연방 국가들이 '내각제 (총선 승리 정당이 수상이 되어 행정부를 조직하는 체제)'를 취하고 있다. 

 

한국 정치권에서 내각제가 부정적인 '낙인'을 받은 원인들은 몇 가지 있다. 첫번째,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이민우가 김대중-김영삼의 상의없이, 전두환과 '내각제' 협상안을 발표해버렸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민우의 '야합'이라고 강력반발했고, 결국 이민우와 결별해버렸다. 

 

두번째는, 1990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민정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이 3당 합당을 했을 당시부터 김종필은 '내각제'로 개헌을 주장했다. 내각제는 충청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김종필의 개인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를 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세번째는, 국민들 역시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전두환 군사독재를 무너뜨리면서 쟁취했기 때문에, '대통령제'를 '민주화운동'의 성과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서유럽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와 같이 총선 이후 정당간 연립정부 구성이나 속칭 '협치'보다는, 민주화세력 대 반민주세력 이원화 구도가 한국 역대 대선, 87년, 92년, 97년, 2002년 까지도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메모 2] 1997년 대선 승리 이후, 김대중과 김종필의 내각제로 개헌 약속은 파기됨.   

 

김대중-김종필의 연합정치는 집권 이후, 김종필이 총리를 지냈으나, 내각제 개헌이 현실화되지 못하자, 두 세력은 다시 분리되었다. 1987년 6공 헌법에 기초한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바꾸는데 김대중과 김종필이 선거 전에 임시변통으로 합의하고 나서, 97년 대선 승리 이후에  정치적 이해관계 득실에 따라 김대중과 민주당은 '내각제'를 채택하지 않았다. 

 

[메모 3]  2005년.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자, 즉흥적인 '연정' 발언으로, 내각제 개헌 가능성을 제도적르로 추진하는 동력을 잃었다. 

 

노무현이 2005년 8월 25일, 당시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했고, 심지어 권력을 통째로 줄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함.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노무현이 이에 대응하면서 약간 즉흥적으로 내놓은 '대연정 발언'이었다.

 

[메모 4] 2017년 대선 이후, 연정과 연합정치의 기회 상실.

 

2016년 11월~12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 정치세력들은, 유승민 등을 포함한 일부 새누리당 보수파들이 있었다.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에도, 박지원, 조국 교수, 문재인 등은 '탄핵이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국회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 시위가 계속되자, 이러한 '탄핵 불가론'과 '국무총리 수습안' 깃발은 내려졌다. 

 

박근혜 탄핵에 찬성했던, 현재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유승민 등 보수당 혁신파 (바른정당), 안철수 박지원 김한길 등 중도우파, 민주당 세력 등이 '연합정치'를 할 정치적 조건들이 최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문재인(민주당)이 당선된 이후, 박근혜 탄핵에 참가한 연합세력들의 '행정부'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런데다 문재인의 개혁, 최저임금 1만원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실패하다가, 서울 등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문재인 선거공약'은 거의 준수되지 못했다. 

 

 

 

 

 

1997년 11월 1일자. 진보정당의 태동기. 김대중 민주당과 김영삼 신한국당과 전혀 다른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현실화되었다. 분야별로 통일, 외교안보, 정치, 경제, 사회 노동, 역사, 사회복지, 교육 등 소위원회를 만들어 진보적인 교수들과 협업을 시작했다. 

 

 

 

1997.11.02. 

김대중은 당시 신한국당 김윤환과도 '내각제'로 개헌을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1997.11.04. 내각제 논쟁이 벌어졌다.

 

김대중-김종필 연합에 대해 당시 이회찬 (신한국당)과 이인제 (국민신당)은 헌정파괴라고 맞섰다.

흥미로운 사실은 권영길을 내세운 국민승리21도 당시 내각제를 반대했는데, 김대중-김종필의 선거연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인 것이지, 실제 서유럽형 '내각제'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아무튼 당시 진보정당 추진세력은 1987년 6공 헌법의 한계나 대통령제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1997년. 11월 5일. 이인제가 국민신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던 이만섭이 가세했다.

 

 

 

 

1997년 11월 7일.

 

민주당의 조순과 신한국당 이회창이 '합당' 발표를 했다. 1997년 대선은 그야말로 '연합' '짝짓기' 선거였다.

 

 

 

 

 

 

 

 

 

1997. 11. 10.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 간에는 상당한 갈등이 존재했다. 김영삼이 국민신당 이인제를 지원한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인제가 1988년 총선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계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1997년 11.10. 여론조사 무응답층 생각. 이인제 18.6, 이회창 10.3, 김대중 5.5로 순으로 나타났다. 

 

 

 

 

1997.11.10. 

김대중과 김영삼으로부터 독립적인 '국민통합추진위(통추)' 소속,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제정구' 등이 분리되었다. 노무현, 김원기 등은 김대중 국민회의로 가고, 제정구는 신한국당으로 갔다.

 

 

 

1997.11.11. 대선이 다가오는데, 한국 경제 위기도 현실화되었고, 환율이 1달러 당 1000원을 넘어섰다. 

 

 

 

 

 

 

 

1997.11. 11. 경제관료들이 경제학 교수들이 경제현실을 모른다고 무시하고, 비판적인 견제세력들의 의견도 무시했다.

 

 

 

 

 

1997.11.14.  김대중이 국제정치 질서의 급변에 따라, 우경화하겠다고 선언. 중도우파당이라고 발표했다.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기 때문에 우파이고,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중도다. (김대중)"

그러나 임기를 마치고, 김대중은 IMF 긴축통치 (노동자 해고 자유, 초국적 자본 이동의 자유, 탈규제, 정부역할 축소, 복지 삭감 등)안으로 빈부격차를 벌여놓은 것을 자신의 뼈아픈 실수라고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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