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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기다리다

by 원시 2017. 11. 8.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나에게 '조건없는 육친의 정' '사랑'이 뭔지 보여주신 분이다. 다섯살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매년 할머니 집에서 짧게는 1개월 길게는 2개월씩 살았다. 


할머니 이름은 송기순.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별칭은 '잠들(댁)' 거기 사람들은 잠들떡이라고 불렀다. 꼬마시절 고흥에 가면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손지요~'하고 나를 소개시켰다. '누구라고?' 동네 사람들이 한번 더 물으면 '이잉 큰아들내미 둘째 아들이요' 그러셨다. 


할머니는 문맹이다. 글자도 모르고 전화번호 숫자도 모르신다. 그래도 동강장이나 유명한 벌교장에서 물건 거래는 잘 하신다. 


5일마다 열리는 벌교장은 1일, 6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동강장이나 벌교장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할머니가 '니 목아치 (몫)다' 하면서 사들고오신 하얀 엿가락 때문이다. 


공책 페이지를 뜯어서 만든 종이 안에 밀가루가 분칠해져서 온 흰 엿이었다. 장 날에 가는 날이면 아침 일찍 갔다가 해 지기 전에 돌아오시는데, 그 날은 동네아이들과 놀다가 두세번 집을 들려보곤 했다. 혹시나 할머니가 장에서 엿을 사오셨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를 그렇게 반나절 하루종일 기다리는 건 좋은 일이다.  내가 살면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던가? 


내가 우리 할머니로부터 배운 문장,말소리 "금메 말이시~ " 이 '금메 말이시'는 쓰임새가 여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동감을 나타낼 때도 쓰이고, 또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나서 내 의견을 말할 때도 쓸 수도 있다. 


우리 할머니는 샘터에서 설거지를 하실 때 "쉬이 쉬이" 하고 소리를 내면서 그릇을 닦고 씻으셨다.


"할머니 쉬이 쉬이 소리를 내믄 밥그릇이 더 깨끗해지능가? "

이렇게 내가 물으면 할머니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나중에 고등학교 학생이 되어서도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직도 쉬이 쉬이 소리를 내시요이?"

그러니까 할머니는 부엌일을 할 때면 나름대로 '노동 리듬'을 타면서 일을 하셨고, 그 소리를 내곤 했다. 


꼬마시절에는 할머니가 그릇이랑 대화하는 줄 알았다. 


설날이 좋았던 이유는 조청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떡을 찍어먹을 수 있는 조청을 직접 만드셨다.

부엌 큰 솥에서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불을 때곤 하셨다.


"할머니 다 되얐는가?"

"아즉 멀어~ (고흥 사투리 )...... 동곽 한바퀴 하고 와라" 


그러면 또 동네 동곽에 한번 더 나가서 아이들과 놀다가, 집으로 달려오곤했다.


"다 되얐는가?"

"벌써 된다냐?" 


결국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조청을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동강장을 가기 위해 때론 4 킬로미터 넘게 걸으셨고, 운이 좋아 경운기를 얻어 타고 가시기도 했다.

그 동네에 버스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직접 걸어다니시기도 했는데,

어린 손자의 흰 엿은 잊지 않으셨다.


송기순 여사, 잠들댁, 할머니의 건강을 빌면서,


201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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