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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국제정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원인. 팔레스타인의 내부 분열, 하마스와 파타의 갈등. 팔레스타인 하마스 76석, 2006년 1월 총선, '파타' 43석 를 누르고 총선 승리.

by 원시 2023. 10. 22.

2005년 팔레스타인 대통령 선거.

 

2005년 1월 9일.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대선 실시.

2004년 11월 11일 아라파트 사망 이후, 마무드 압바스(Mahmoud Abbas)가 대통령에 당선됨.

대선 실시의 의미 1) 이스라엘의 공격과 방해에도 선거 실시함

2) 아라파트 사후 권력 공백을 메우고, 팔레스타인 내부 분열 우려를 희석시키는 역할.

3) 국제 사회의 감시 하에 대선을 치러, 팔레스타인들의 자치 능력과 민주적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줌.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는 대선 불참.

 

대선 후보자, 파타 후보는 마무드 압바스였다. 그러나 마르완 바르구티(Marwan Barghouti)가 옥중 출마를 선언했지만, 파타 지지 유권자의 표 분산을 우려해 2004년 12월 불출마를 선언했다.

공정 선거를 위해 800명의 국제 선거 감시단과 국내 2만 2천명의 감시단을 배치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선거운동은 철저히 이스라엘 당국의 통제 하에서 진행되었다.

선거 운동에 필요한 예루살렘 시내 ‘이동’도 이스라엘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동예루살렘에서는 1만 2천명 중, 6천명만이 투표권을 부여받았고, 투표소 역시 6개 우체국만에서만 할 수 있어서, 투표율은 낮을 수 밖에 없었다.

 

 

 

 

하마스의 입장과 대응.

 

가자 지구 하마스 대표는 “이번 대선은 불법이다”고 선언했다. 하마스는 여전히 팔레스타인 선거의 기초가 된 93년 오슬로 협정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 보이코트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PLO 최대 정파 파타(Fatah)는 여전히 지지율 1위를 달렸지만, 과거에 비해 지지율은 떨어졌다. 가자 지구에서는 하마스의 지지율이 ‘파타’보다 더 높았다.

 

그런데다 아라파트 사후, 파타 내부 ‘알-악사 순교 여단 al-Aqsa Martyrs Brigades’ 정파는 투옥 중인 마르완 바르구티를 대선 후보로 내세워, 파타 내부 권력 경쟁구도가 발생했다.

 

‘알-악사 순교 여단’은 2004년 11월 16일, 북 서안지구에다 ‘혁명 법원’을 세워서, 아라파트 정부 정치인들과 파타 고위인사들의 부정부패를 재판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정부패 증거가 법원에서 입증되면, 대중들 앞에서 죄인들을 시내 광장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는 ‘공개 편지’가 PLO의장 압바스, 국회의장 살림 알-자(Salim Al-Za), 임시 팔레스타인 정부 의장 루히 파투(Rouhi Fattouh)에게 전달되었다.

 

압바스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대표들을 만나, 대선을 앞두고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공격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마스 대표 이스마일 하니예(Ismail Haniyeh)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정전’은 고려치 않고 있다면서, 압바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하마스의 요구 사항은, 전국 통일 지도부를 형성하는 것이다.

 

파타 압바스는 팔레스타인의 영토 회복은 이스라엘과 협상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이에 비해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영토 반환은 이스라엘과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대선 결과.

 

 

7명 주요 후보들 중, 파타 후보 압바스가 62.5%로 1위, 독립 후보 무스타파 바르구티(Mustafa Barghouti)가 19.48%로 2위로, 압바스가 쉽게 당선되었다. 무스타파 바르구티는 2007년 통일정부에서 정보부 장관이 되었다.

 

1996년 최초 대선에서 아라파트가 88.2%를 얻어 압도적인 1위로 당선된 것과 2006년 대선을 비교하면, 지난 10년 사이 팔레스타인 내부에 많은 정당들이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파타 무마드 압바스 앞에 놓인 3가지 도전들.

 

1) 거의 소멸해 가는 ‘오슬로 협정’과 관련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협정을 되살려야 함

2) 다양해진 팔레스타인들의 정치적 관점들을 존중해야 함

3) 부정부패로 통치정당성을 잠식당한 파타 주도 정부의 능력을 보여줘야 함. (좋은 정부 수립)

 

 

2006년 1월 25일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 (총선).

 

하마스는 132석 중 76석을 차지했고, 줄곧 집권당이었던 파타는 43석 획득에 그쳤다.

 

하마스와 파타의 경쟁 주제는,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하면, 누가 ‘집권당’이 되느냐였다.

 

압바스와 파타는 총선을 2006년 여름까지 연기하려고 했으나, 하마스는 예정대로 2006년 1월에 실시하자고 했다.

 

 

2005년 12월 중순, 지방 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하기 시작했다.

라말라 (Ramallah)에 인접한 알 비레(al-Bireh), 그리고 대부분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가 승리했다.

하마스는 6개 주제에 집중했다. 부정부패, 이스라엘과 협상, 폭력 사용, 예루살렘(지위), 난민, 국경.

 

 

하마스 선거 전술 (변화와 개혁 Change and Reform)

 

1) 하마스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 변화. 이스라엘과 종전 선언 (후드나 hudnah-truce).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에 대한 공격을 중단한다면 하마스도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겠다.

 

2) 선거 캠페인 내용은 주로 팔레스타인들에게 요구되는 일상 생활과 관련된 주제들, 특히 실업, 안전 (국방, 치안), 부정부패를 주요 선거 캠페인 내용으로 내걸었다.

 

3) 하마스는 나쉬앗 악타쉬(Nashat Aqtash)를 미디어 담당자로 임명해, 하마스를 ‘군사 조직’이 아니라 ‘정치가’의 이미지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이스라엘을 파괴하자. 자살폭탄 작전을 수행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파타의 선거 전술.

 

파타 역시 아라파트 정부 하에서 ‘부정부패’에 대한 이미지를 척결하고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파타의 총선 1번 후보로 옥중에 있으면서도 팔레스타인들의 대중적 신망을 얻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넬슨 만델라’로 호칭되는 마르완 바르구티 (Marwan Barghouti)를 내세우는 전술을 사용했다.

파타는 알-자지라와 알-아라비아 TV에 요청해서, 감옥에 있는 바르구티를 인터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파타 선거를 지원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파타에게 선거운동 비용 200만 달러를 제공했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동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10만 명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파타와 하마스 이외에 다른 팔레스타인 정당 및 후보들

 

독립 팔레스타인 (Independent Palestine) – 무스타파 바르구티 (Mustafa Barghouti)

대안 (Alaternative) – “인민 정당 People’s party” 연합

팔레스타인 민주연합 (Palestinian Democratic Union)

제 3의 길 (Third Way) – 살마마 페야드(Salama Fayyad)-전 재무장관

정의와 민주를 위한 전국 연합 “National Coalition for justice and Democracy) 에야드 엘-사라즈 (Dyad El-Sarraj)

 

여론 예상. 파타 63석, 하마스 58석을 예상했으나, 하마스는 76석을 얻어 파타를 물리치고 1당으로 발돋움했다. 총선 패배 이유들 중에, 아라파트를 대신할 대중적 인기를 얻는 파타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선거 캠페인.

 

특기 사항. 총선 후보자들은 3천명 지지를 받아서 후보 등록을 하고, 6천 달러를 선거 참가비를 내고, 당선되면 반환 받는다.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다.

 

1996년 총선 이후, 제 1기 의원의 임기를 연장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공격과 안전 문제 때문에 2000년에 총선을 실시할 수 없다는 팔레스타인 정부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타 내부 기득권자들이 선거를 연기하는 이유는, 파타 내부 마르완 바르구티를 추종하는 청년층과 하마스의 도전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대중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 12얼, 2005년 1월 지방의회 선거에서, 하마스는 서안 지구에서 35%를, 가자 지구에서는 118석 중에 77석을 차지했다.

 

선거 제도의 변화. 혼합형 제도(지역구 66명 +비례대표 66명-정당명부 ) 로 바꾸고, 의원 숫자도 88명에서 132명으로 확대되었다.

 

 

파타의 내분.

 

총선을 앞두고 열린, 2005년 하반기 파타 프라이머리에서 옥중 지도자 마르완 바르구티는 ‘파타’ 총선 후보 명부를 단독으로 작성했다. 이러한 파타 분열이 하마스에게 유리할 것을 우려해, 파타는 2005년 겨울 ‘단일 명부’를 제출하기로 합의해, 내부 분열을 무마시켰다.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유권자들의 총선 참여권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갈등.

파타의 요구로, 6천명 동예루살렘 거주 팔레스타인은 투표가 가능했음. 그리고 나머지 10만명의 경우, 다른 투표장까지 가서 투표할 수 있게끔 했다.

 

총선 최종 결과.

 

 

하마스의 총선 승리 이유들

 

1) 2000년 9월부터 5년간 지속된 제 2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이후, 하마스는 대중적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대중들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대항하는데 자살폭탄이 정당한 수단이라고 봤기 때문에, 하마스의 ‘자살폭탄 전술’을 지지했다.

 

2) 아라파트에 이어 팔레스타인 정부 대통령에 당선된 압바스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다.

평화협상 진전이 없고, 팔레스타인들의 경제가 진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압박과 공격은 ‘오슬로 협정’ 이후 더 커졌다. PLO의장 아라파트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대중들의 열정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하마스에게로 이동했다.

 

3) 기존 ‘파타’ 지지자들이 파타 대신 하마스를 선택하는 ‘저항 투표’ 숫자도 늘어났다.

  

  

팔레스타인 내부 이중 권력 탄생.

 

 ‘파타’ 압바스 대통령의 군사 지휘권, 헌법재판소장 임명권(국회 승인 불필요함),

의회는 하마스가 다수당. 하마스는 압바스의 권한 강화를 비난.

 

하마스와 파타 간의 혈투 발생

그리고 이러한 팔레스타인 내부 집안 혈투를 더욱더 악화시킨 것은 이스라엘 동맹국가들의 모호한 대 팔레스타인 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출처.

 

책: 팔레스타인의 두번째 분리 :  하마스와 파타의 권력투쟁 (2022)

 제 4장 하마스와 파타의 권력 투쟁. 후반부 (pp.113-pp.125) 

THE SECOND PARTITION OF PALESTINE

Hamas–Fatah Struggle for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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