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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

조선시대. 고종과 순종 사진. 이완용.

by 원시 2022. 2. 14.

Korea, 1904

photographer G.G. Bain

고종 [高宗, 1852 ~ 1919.1.21]

 

 

 

King Kojong and King Sunjong, Seoul, Korea, 1904

photographer Willard Dickerman Straight

Collection: Willard Dickerman Straight and Early U.S.-Korea Diplomatic Relations, Cornell University Library

 

조선 고종과 순종. 

사진사. 윌라드 디커먼 스트레이트.

보관 장소. 코넬 대학교. 초기 미국-조선 외교관계. 

 

 

 

 

덕수궁 [Deoksugung Palace, 德壽宮] Seoul, Korea, 1910

photographer Unidentified

고종(왼쪽)과 영친왕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함께 찍은 사진.

 

 

Seoul, Korea, 1907

 

photographer Unidentified

 

순종과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1894 ~ 1966]

 

본관은 해평(海平).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이다.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 12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당시의 자자한 소문에는 윤택영이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고 한다.

 

순종의 동생 영친왕(英親王)은 고종의 제7자로 황귀비엄씨(皇貴妃嚴氏)의 출생인데, 순종이 즉위하자 엄비와 이토[伊藤博文] 등의 중론에 따라 황태자로 책립하였는데 당시 세론은 형제로 계통(繼統)을 세움이 불가하다 하면서 황태제(皇太弟)라 하였다. 1907년에 여학(女學)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女侍講)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황비가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만년에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낙선재(樂善齋)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純貞孝皇后尹妃 Empress Sunjeong Seoul. Korea.1900's

photographer Unidentified

중앙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며,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純貞孝皇后尹妃 Empress Sunjeong 1900's

photographer Unidentified

창덕궁 어친잠실(御親蠶室) - 서향각(書香閣)에서 침잠식 있던 날

왕비 친잠식날 중앙 윤비, 그 왼편 영친왕비, 흥친왕비, 윤비 뒷편 좌우는 천일성 상궁과 김충연 제조상궁, 오른쪽 끝은 서희순 상궁, 조선 총독부 간부들의 부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김용숙

봄이 되면 임금이 제주가 되어 동대문에서 선농제를 지내고 친정을 하며 농사를 장려하고 성북도 선잠단에서는 누에신인 ‘루조’를 위해 ‘선잠재’를 지내어 양잠의 중요를 기원하였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어친잠실’에서는 임금과 왕비가 백성에게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친히 양잠을 하는 친잠례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친잠례란 임금이 뽕잎을 따고 왕비가 누에를 치는 행사를 말한다. 잠신제에는 술을 쓰지 않고 차를 사용한다고 세종 때 편찬된 ‘사시찬요’에 기록되어 있다.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며,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순종의 비였던 민비가 죽자, 1906년 계비로 간택되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가 된다. 조선의 국권은 일본에 넘어가있던 상태로 윤비를 계비로 앉히려는 친일파 윤덕영, 윤택영등의 계략이었지만 윤비는 대한제국의 황후로써 무단한 노력을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인식때 옥새를 치마속에 숨겨 내놓지 않던 일화는 유명하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하고, 황태자였던 영친왕,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끌려가 정략결혼을 하게 되고, 광복후 한국전쟁시 북한군들이 서울을 점령하여 창덕궁을 쳐들어 왔을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 일갈하여 내쫗았다.

일진인퇴할때 윤비도 상궁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 왔을때 이승만 정부는 받아 주지 않았다. 일국의 국모는 창덕궁 가까운 곳 성북동에 전셋방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따르던 상궁들도 새로운 세상을 만나 뿔뿔이 흩어지고 오로지 세궁녀, 박창복, 김명길, 성옥염만 남았다.

윤비는 국유지로 바뀐 낙선재를 되찾는 끈질긴 싸움 끝에 1960년 마침내 왕비가 아닌 낙선재에 주민등록을 둔 시민으로 거주하게 된다. 윤비가 정착을 하자 낙선재는 대한제국의 왕실 신분이면서 국내에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를 떠돌던 조선왕가의 후손들, 영친왕,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등을 불러들이는 터전이 되었다.

윤비는 끝까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르던 세명의 상궁들에게 '왕조는 망했지만 궁녀로서의 체통과 권위를 치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자신도 1966년 세상을 뜨기전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았다.

 

 

 

Seoul, Korea, 1904

photographer Willard Dickerman Straight

Collection: Willard Dickerman Straight and Early U.S.-Korea Diplomatic Relations, Cornell University Library

 

 

 

Seoul, Korea, 1907

photographer Unidentified

자동차를 타고 있는 영친왕과 다케히토 왕, 이토 히로부미

 

 

 

한복 입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 1841~1909) 1906

Photographer Unidentified

사진 1906년 12월에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970~1928)이 특파대사로 일본 도쿄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

통감 부임후 한복을 입고 사진 찍은 이토. 왼쪽부터 이토의 딸, 내무대신 이지용과 그의 처, 이토 히로부미와 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박의병과 처.

1906년 이후 한국통감으로 재임하면서 유달리 ‘선린’이니 ‘우호’니 하는 구호를 입버릇처럼 앞세웠던 그였다. 그러한 탓일까, 사진 속에 보이는 그는 갓을 쓴 한복 차림으로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행색이다.

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일본으로 특파대사를 보낸 까닭에 대해서는 황현의 <매천야록>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다. 대개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머물러 있기를 청원하는 일과 일본으로 피신한 이준용과 박영효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지용의 처 홍씨는 이름을 고쳐 이홍경으로 일컫고 함께 일본으로 갔다.”

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 스스로의 강청을 못 이겨 한국통감으로 유임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된 고종 황제의 친서를 들고 일본특사로 파견된 이지용은 이미 1904년에도 한 차례 이토 방한에 따른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임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형 되는 흥인군 이최응(興仁君 李最應)의 손자로, 고종 황제와는 5촌지간이다.

하지만 그는 황족이기에 앞서 그 누구보다도 친일 매국의 행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더불어 서둘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서명·체결한 당사자가 바로 외부대신 임시서리였던 그였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 토지를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로써 그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 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도 적극 찬동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친일에 앞장선 공로와 황족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伯爵)’이라는 비교적 높은 작위를 부여받았다.

 

 

 

윤치호 가족사진, Korea, 1902

photographer Unidentified

원산감리로 있을 무렵 짝은 윤치호 가족사진

중국인 부인 마애방과 맏딸 윤봉희, 맏아들 윤영선(왼쪽), 둘째아들 윤광선(오른쪽)

 

 

 

이완용 [李完用,1872(고종 9)∼1926]

photographer Unidentified

젊은 시절 이완용 조선 말기에 찍은 이완용(왼쪽)의 사진. 오른쪽은 이지용으로 추측된다

1907년 2월 2일, 충복이요 비서였던 생질 김명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처음 스물다섯 무렵에 종래 조선 사람들이 목적으로 삼던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류가 점점 요긴했기 때문에, 그런 때에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공부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뒤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인해서 친러파라 일컬어졌다.

그 뒤 러일전쟁이 끝남을 알릴 즈음에 친러파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친일파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무릇 천도에는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것을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에도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을 또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에 때를 따라 변역이 없다면 이것은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는 서양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목하 시세가 또 돌변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이런 기회를 타서 인사의 적의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언행잡록〉, 《일당기사(一堂紀事)》

그는 말을 마치고 “이는 숙질간의 이야기이니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때는 을사조약이 끝난 뒤 러 · 프동맹으로 국제정세가 변하고 있었고,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으로 지목하여 그를 죽이려는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힘의 논리에 따라 처음에는 수구파, 다음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하다가 그 ‘변역’을 보아 다시 변신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니 친일파, 매국노라는 지목은 결과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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