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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소셜 코리아] 노동,소득,사회복지,고용,청년간병,노조탄압,노동3권,

by 원시 2022.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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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08 07:24최종 업데이트 21.12.08 10:53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오징어 게임'은 바로 대한민국이 직면한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 셔터스톡


기뻐서 춤이라도 춰야 하는 것 아닐까? 요즘처럼 내가 살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진국'은 영원히 우리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유토피아'처럼 여겨졌다. 선진국은 1876년 개항 이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인이 모든 불합리한 일들을 인내하고 허리끈을 졸라매면서 다다라야 할 궁극의 목적지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진국이 어느새 우리의 삶 속에 공기처럼 들어와 있었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한국을 고소득 국가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7월 유엔무역개발기구(UNCTAD)는 개발도상국을 선진국으로 변경하는 역사적 결정을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내렸다. 1964년 기구를 설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역사의 주인공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한국이었다.

정치적으로도 한국은 1987년 이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소수의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반복적으로 오가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불리는 미국과 프랑스가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분류된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놀라움 그 자체이다.

어디 이것뿐인가. 한국의 대중문화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의 행동과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한국 대중문화는 구래의 악습과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의 무기가 된 지 오래다. 케이팝 팬들은 미국에서는 반 트럼프 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졌으며, 태국, 홍콩, 칠레, 알제리 등에서는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중심에 서 있었고, 호주에서는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주체였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BTS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중문화는 지난 40년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심각한 불평등을 드러내면서 전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1인당 GDP의 상대적 변화(%), 1946~2018(1946년 기준). 비교를 위해 다음 자료를 재구성한 것이다. Bolt, J. and van Zanden, J. 2020. “Maddison style estimated of the evolution of the world economy: A new 2020 update.” Our World in Data. ⓒ 소셜 코리아


그런데 이상하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이 경제, 정치, 문화 거의 모든 곳에서 일어났는데도 나는 신이 나지도, 춤을 출 수도 없다. 세계인이 공감하며 찬탄했던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직면한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적 성공은 자신의 처참한 고통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소름 돋는 성장제일주의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통마저 상품화

2018년 기준으로 '선진국' 한국의 (상대) 빈곤율은 개발도상국인 터키, 멕시코, 칠레보다 높았다. 66세 이상의 노인 빈곤율은 43.4%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압도적 1위였다. 중위소득을 소득 하위 10%의 소득으로 나눈 불평등 지수(P50/P10)는 미국에 이어 4번째로 높았다. 

한 사회의 불안정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인 자살률 또한 세계 1위이다. 지난 30년 동안(1987~2017) 대부분의 OECD 회원국에서 자살률이 감소한 것과는 반대로 한국의 자살률은 무려 153.6%나 증가했다.

합계출산율은 인구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던 0.8대(2020년)를 기록했고 더 낮아질 것이라고 한다. 인구 10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17.0명으로 영국의 1.62명의 10배에 이른다. 서울대 입학생 중 가구 소득이 상위 10%인 비율은 2017년 43.4%에서 불과 3년 만인 2020년 62.9%로 급증했다. 더 참담한 현실은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응답한 국민의 비율이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았다.

기적처럼 선진국이 되었지만, 그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오징어 게임에서처럼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한국은 개발도상국 중 유일하게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도 안고 있다. ⓒ 게티 이미지 뱅크

 
그렇다고 공적 복지를 늘리려는 정부의 노력이 후퇴한 것도 아니다. 보수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 가릴 것 없이 민주화 이후 복지지출을 꾸준히 늘렸다. GDP 대비 사회지출은 지난 1990년 2.6%에서 2019년 12.2%로 30여 년 만에 4.7배나 증가했다. 복지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도 적지 않다. 2022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유력 대선후보들은 기본소득, 상병수당, 사회서비스 확대 등 다양한 복지정책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한국 경제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건실한 성과를 거두었다. 삼성, 현대, LG, SK 등 재벌 대기업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심지어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인원 1700만 명이 평화적 집회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21세기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으로 불리기도 했다.

모순

그런데 우리가 직면한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지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꿈꿔왔던 선진국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이상하다는 말밖에는 한국인이 직면한 이 모순적인 현실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사람들은 부모 찬스를 사용하는 특권에 분노하고 치솟는 아파트 가격에 피가 거꾸로 도는 울분을 느끼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지지하는 것을 주저한다. 불평등과 비정규직이 심각한 문제라고 이야기 하지만, 인천국제공항공사와 서울교통공사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고 하자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는 불평등한 한국 사회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했다. 

결국 한국인이 분노한 것은 성장제일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불평등한 결과가 아니었다. 한국인이 분노한 것은, 이웃의 안정적인 삶이 내 기회를 가로챈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사회가 유지되지 못할 정도로 출산율이 떨어지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스스로 죽거나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도, 청년의 미래가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고,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불가항력으로 자영업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생계를 접어도, 한국 사회는 그것이 치열한 경쟁의 결과라면 눈도 깜짝하지 않을 사회가 된 것이다.

연대가 없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며 세금을 내고 국민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지난 30년 동안 복지 지출이 늘어난 것도 사회적 연대의 결과가 아니었다. GDP 대비 사회 지출이 급증했지만 그 대부분은 가입자가 보험료를 내는 사회보험 급여였다. 북서 유럽에서 사회보험은 사회적 연대를 상징하는 제도이지만 한국에서 사회보험은 안정적 고용을 보장받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을 가르는 특권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2020년 8월 현재 정규직의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가입률은 94.2%와 84.8%에 이르는 데 반해,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35.5%와 43.1%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사회보험은 내가 낸 것을 내가 돌려받는, 국가가 운영하는 또 하나의 보험 상품일 뿐이다.
 

 성장을 위해 영혼까지 팔아치운 우리의 노력은 연대 없는 사회를 만들고 성공의 덫에 갇혀버렸다. ⓒ 게티 이미지 뱅크

 
우리가 실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쩌면 헬조선이 된 선진국 대한민국의 모습은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성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장을 위해 영혼까지 팔아치운 우리의 노력이 기적 같은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 기적 같은 성공을 위해 우리는 '나와 내 가족'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연대 없는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성공의 덫'에 갇혀 버렸다. 어떻게 해야 이런 성공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공적 복지를 늘리면 되는 것일까? 새로운 혁신기업을 육성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닐 것 같다. 만약 성공이 우리가 직면한 헬조선의 원인이라면,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그 성공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조금 느리게 갈 수도 조금 빠르게 갈 수도 있을 뿐이다. 

재벌 대기업이 숙련 노동자의 일자리를 자동화 기계로 대체하고, 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하기보다는 손쉽게 국외에서 부품, 소재, 장비를 수입·조립해 수출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경제구조에서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생존경쟁은 지금보다도 더 치열해질 것이다.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연대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100년 전의 상상

많은 전문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오랫동안 대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각각의 대안이 실현된다고 우리가 성공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저출산 현상을 중요한 사회문제로 인식했을 때 나를 포함해 많은 전문가들은 여성이 일과 돌봄을 양립하지 못하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은 지난 2019년 현재 한국의 0~2세 아동 보육률(해당 연령 아동 중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있는 아동의 비율)은 62.7%로 스웨덴의 46.3%보다 1.35배나 높다. 그러나 성 평등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출산율은 더 낮아졌다. 

그렇다고 보육정책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출산이라는 삶의 문제는 일과 돌봄의 조화만의 문제도, 성 평등만의 문제도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총체적 삶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경제, 정치, 문화라는 한국인의 총체적 삶의 조건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의 성공이 만들어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2022년 대선이 우리의 삶의 조건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마이뉴스

 
2022년 대선이 우리의 삶의 조건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불가능하다고 현실성이 없다고? 그렇다. 경제구조를 바꾸고, 정치구조를 바꾸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을 총체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조선인들이 일제의 강점에 신음하고 있을 때, 앞으로 100년 후 조선이 독립된 국가로 세계의 문화를 주도하는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100년 전의 그 말도 안 되는 상상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성공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작은 언덕을 오르는 번거로움일지도 모른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협력해야 성장할 수 있고 사람들이 서로 연대해야 더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낸다면, 현명한 한국인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또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정치가 예술인 이유는 바로 이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대선이 기대와 좌절이 반복되는 또 다른 5년이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춤을 추고 싶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기쁨의 춤을 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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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이 글을 쓴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편집·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영역은 복지국가를 정치, 경제, 복지의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사회정책학회장(전), 시민사회에선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전)을 역임했고, 주요 저서로는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3, <이상한 성공> 등이 있습니다.
 

 윤홍식 / 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장(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윤홍식

 

 

 

프리미엄 소셜 코리아 ㅣ 2화
한국 사회가 불평등한 이유... 5가지가 없다
[소셜 코리아] 낙수효과라는 거짓말, 대안은 무엇인가
경제신광영(soko)
21.12.15 18:45ㅣ최종 업데이트 21.12.17 10:44글씨 크게보기인쇄본문듣기원고료로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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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세계 각국의 불평등은 심화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서울 성동구 응봉산에서 바라본 강남구 청담동 일대 아파트 단지의 모습. ⓒ 연합뉴스

 
21세기는 혼란스럽게 시작되었다. 20세기 후반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운 신자유주의 공세는 전후에 형성된 복지국가와 노사관계 제도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1979년 영국의 마거릿 대처와 1980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혁명은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989~1992년 소련과 동유럽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 이념이 되었다.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지구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각국 시장의 개방과 규제 완화를 추구하는 조직이었다. 20세기 후반, 명실공히 자본, 노동,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글로벌 시장이 형성되었다.

낙수효과의 종언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통합되면서, 신자유주의 이념에 뿌리를 둔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물이 차면 흘러넘치듯이 경제가 성장하면 소득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낙수효과'가 주술처럼 받아들여졌다.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고, 경제성장을 위해서 경쟁과 경쟁력 강화가 유일한 해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시기 미국에서 불평등이 대공황 수준으로 심화했다. 영국과 미국은 1970년대 말부터 불평등 심화를 보여주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 일본에서도 1980년대 중반부터 불평등이 심화하기 시작했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와 그의 연구진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2000년대 미국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 수준에 이를 정도로 상층으로 소득과 부가 집중됐다. 2018년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20% 이상을 점유했고, 하위 50%는 13% 정도를 차지하는 데 불과했다. 미국은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미국 내에 제1세계와 제3세계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 시기 세계 각국에서도 소득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빈곤층이 더 확대되었다. 불평등이 극단적인 수준이었던 남미에서만 약간 약화하였을 뿐, 다른 모든 지역에서 불평등이 심화했다. 세계 경제변화의 심장이 된 동아시아에서도 급속하게 불평등이 심화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소득 양극화와 불안정 노동의 증가로 불평등이 전대미문의 수준에 이르렀다. 

불평등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빈곤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불평등과 빈곤 두 가지를 결합하여 보면 현존하는 사회체제 유형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아래 도표 참고).
 


▲ 불평등과 빈곤율 2가지 지표를 결합하면 사회체제는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빈곤율 : 중위소득 50% 이하의 소득을 얻는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 ⓒ OECD Stat.

 

 


 
▲불평등 정도도 매우 낮고(지니계수 0.25 내외) 또한 빈곤율(5~9%)도 매우 낮은 북유럽형,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평등이 대단히 심하고(지니계수 0.4 내외) 빈곤율(18% 이상)도 대단히 높은 아메리카형 ▲불평등 정도가 약간 낮은 정도(지니계수 0.3 내외)이고 빈곤율(10% 내외)도 상대적으로 낮은 유럽 대륙형 ▲불평등이 상당히 심하고(0.35 내외) 빈곤율(16% 내외)도 높은 수준인 동아시아형이 그것이다. (지니계수가 높을수록 불평등하다.)

 

 

 


한국은 어디에

네 가지 사회체제 유형은 각기 다른 시장경제와 복지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에스핑-앤더슨(Gøsta Esping-Andersen)은 북유럽형을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아메리카형을 자유주의 복지국가, 유럽 대륙형을 조합주의 복지국가, 동아시아형을 후발 혼합복지국가로 분류한다.
 

ⓒ 신광영

 
이들 사회체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17~2019년 OECD 통계를 기준으로 북유럽형에 속하는 덴마크는 지니계수 0.269, 빈곤율 6.5%로 분배가 가장 양호했다. 아메리카형의 멕시코는 지니계수 0.404, 빈곤율 17.2%로 분배가 열악한 수준이었다. 유럽 대륙형의 독일은 지니계수 0.28, 빈곤율 9.3%로 분배에 있어서 아메리카형보다는 양호했지만 북유럽형보다는 열악한 수준을 보였다. 동아시아아형의 일본은 지니계수 0.339, 빈곤율 15.7%를 보여, 불평등 정도는 아메리카형보다는 낮았지만, 빈곤율은 아메리카형과 큰 차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여기서 아메리카형은 미국, 멕시코와 중남미 아메리카(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니카라구아, 쿠바 등)를 포함한다. 미국의 지니계수는 0.39, 빈곤율은 17.8%로 멕시코와 거의 비슷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아메리카형의 미국은 분배와 관련하여 산업화를 먼저 한 나라들 가운데 질이 낮은 시장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미국은 스타트업이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혁신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경제성장의 성과는 상층으로 집중되고 절대 다수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소득분배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에 속한다.

한국의 가구소득 지니계수는 2019년 0.345, 빈곤율은 16.7%로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빈곤율은 매우 높아 아메리카형에 가깝지만, 불평등 정도는 유럽 대륙형과 아메리카형의 중간 정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형이 아메리카형으로 바뀔 것인지, 유럽대륙형으로 바뀔 것인지, 아니면 북유럽형으로 바뀔 것인지는 향후 한국과 일본에서 어떤 정책이 실시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재분배 효과

부의 분배는 제1차 분배와 제2차 분배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차 분배는 경제활동을 통해서 얻는 소득(근로소득, 사업소득, 재산소득)의 분배를 지칭한다. 즉, 개인이나 기업이 임금이나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활동을 통해서 발생하는 소득의 분배이다. 제1차 분배는 자본시장 구조(독점), 노동시장(분절), 산업분포, 수출의존도, 경기변동 등에 영향을 받는다. 2차 분배는 국가의 조세와 사회정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처분 가능한 소득(공적 이전소득)의 분배를 지칭한다.

북유럽은 1차 분배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을 국가의 조세와 복지를 통해서 크게 완화시키는 제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면, 아메리카형은 1차 분배에서 나타나는 높은 불평등이 국가의 정책적 개입을 통해서도 크게 완화되지 않는 특징을 보여준다.
 

▲ 1차 분배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은 2차 분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완화할 수 있다. ⓒ 셔터스톡


조세와 복지정책을 통한 불평등 완화 정도는 조세의 대상, 조세의 누진성 정도, 공적 이전의 크기와 대상 범위 등에 따라서 그 효과가 달라진다. 북유럽형은 높은 담세율을 기초로 하고,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높은 공적 이전과 높은 공적 복지서비스를 결합하여 1차 분배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을 크게 완화한다. 반면, 아메리카형은 공적 이전 수준이 낮고, 공적 이전의 누진성도 낮은 것이 특징이다.

유럽대륙형은 연금을 토대로 하는 공적 이전이 대규모로 이루어지지만, 개인 소득에 대한 세금의 누진성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동아시아는 세금의 누진성이 약하고, 공적 이전도 낮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OECD 국가 평균은 조세와 공적 이전 이후 지니계수는 25% 정도 줄어들고, 빈곤율은 55% 정도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조세효과보다 공적 이전 효과가 더 커서 대체로 1:3의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의 경우 조세와 복지정책의 효과로 불평등 정도가 2019년 16.1% 감소했고, 빈곤율은 21.6% 감소했다. 조세와 복지제도가 불평등 약화에 미치는 효과가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개입에 의한 불평등과 빈곤 감소율은 OECD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다섯 가지 대안

불평등 완화와 빈곤 해소는 특정 부처의 과제가 아니다. 국가 전체의 과제라는 점에서 정부 전체의 대응이 요구된다. 가능한 몇 가지 대응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차 분배에서 불평등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용을 고려하는 기술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노동력을 줄이기 위한 기술혁신은 특정 기업의 성장에는 기여할지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양극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 기술혁신이 환경과 사회발전을 바탕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공공투자 사업의 경우 '고용과 불평등 영향평가제'를 도입한다. 고용과 불평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형 사업은 평가를 통해서 보류시키거나 수정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환경영향 평가제'가 토목사업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조사하고 예측한 후에 평가하여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하거나 낮추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제1차 분배가 이루어지는 한국 노동시장의 특징은 평균 연령이 채 50세가 되기 전에 주요 일자리에서 떠나고, 평균 63세 정도에 완전한 퇴직에 이른다는 점이다. 노동시장 조기 이탈은 노인 빈곤의 주된 요인이다.

이미 한국의 기대수명은 80.3세로 미국보다 4.4세, 독일보다 3.3세, 스웨덴보다 0.2세 더 길고, 기대수명이 매년 0.47년 정도씩 늘고 있지만, 주요 일자리에서 너무 일찍 떠나고 있다. 생애과정과 노동시장 체제의 불일치가 더욱 심화하고 있는 것이 한국 노인빈곤의 주된 원인이다.
 

▲ 한국의 기대수명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너무 일찍 주요 일자리에서 떠나고 있다. ⓒ 셔터스톡

 
둘째, 장기적으로 제1차 분배에 참여자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자녀의 출산, 보육, 탁아 및 교육으로 인한 부담을 없애는 획기적인 가족복지정책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영유아보육과 초등학교 교육을 연계시키는 '교육-보육 연계 프로그램(educare)'을 도입하고 무상 교육과 보육을 도입하여,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한다.

셋째, 제2차 분배와 관련하여 가족과 개인 단위를 나눠 지원한다. 일단 개인 단위로는 미취업 청년, 실업자와 저임금 노동자에게 고용지원금을 제공한다. 가족 단위로는 일정 수준의 생활 수준을 보장한다. 중위소득 60% 수준을 최저 가구소득으로 보장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넷째, 가입자에 한정되어 혜택이 주어지는 현행 국민연금 대신에 매년 세금을 통해서 재원을 마련하여 새로운 연금기금을 조성한다. 새 연기금은 국내외에 투자하여 운영하고 기금의 수익이 노령연금의 형태로 전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정 집단으로 집중되는 것을 막고, 낙수효과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책을 위해서 재정 확보를 위한 조세개혁이 요구된다. 현재 한국의 복지지출 비중은 OECD 최하위 수준이며, 남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한국의 복지 수준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OECD 평균 수준에 이르기 위한 로드맵을 정부가 제시할 필요가 있다.

복지확대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세율을 높이고, 개인 소득세와 사회보험의 누진성을 강화한다. 동시에 새로운 경제활동 영역인 인터넷 포털과 플랫폼 기업에 대한 과세와 금융자본을 대상으로 한 토빈세를 제도화하여 경제변화에 따른 세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토빈세는 노벨 경제학 수상자 제임스 토빈이 단기적인 투기적 자본의 이동으로 인한 시장 불안정을 막기 위해 1978년 처음 제안한 조세제도이다. 당시에는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목을 받기 시작해서 이후 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와 최근 미국의 바이든 정부가 토빈세 도입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는 데 늘 외국에서 시행중인 정책을 벤치마킹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한국의 독특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정책적 상상력도 필요하다.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은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생소하고 복합적인 것들이 많다. 현재 많은 외국의 정책들도 이전에는 없었던 정책들을 과감하게 도입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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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는 <소셜 코리아>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회장과 한국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아시아사회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주요 연구 영역은 사회 불평등과 비교사회체제입니다. 저서로는 <한국 사회 불평등 연구>,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노동, 복지와 정치> 등이 있습니다.

 

 

 

소득을 보장하라... 대통령 선거전의 세 가지 흐름
[소셜 코리아] 기본소득? 소득기반 보편적 사회보험이 답이다
사회장지연(soko)
21.12.22 07:41ㅣ최종 업데이트 21.12.22 07:41글씨 크게보기인쇄본문듣기원고료로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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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후세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혼돈과 격변의 시대라고 일컬을 것이다.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산업 영역은 이미 요동을 치고 있음이 틀림없다. 피터 디아만디스(Peter H. Diamandis)는 인공지능(AI)의 의미를 다루는 콘퍼런스에서 기조 발제를 통해 "다음 10년 안에 우리는 지구 상의 모든 산업을 재창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디지털 전환의 속도가 빨라졌을 뿐 아니라 피해 갈 여지가 없는 거대한 물결임을 확인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으로 일자리가 감소할지는 불확실하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을 대체하겠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산성 제고와 신규 시장 창출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일자리는 지금보다 불안정해지고 일자리의 양극화가 진행될 것이라는 예측에는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격변의 시대, 확실한 한 가지

일자리가 불안정해지는 현상은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나 플랫폼 노동자의 증가 현상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기업은 가능한 한 노동자를 적게 고용하려고 한다. 노동 과정을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고도 결과물의 질을 담보할 수 있다면 기업은 그 과업을 회사가 고용한 근로자에게 부여하지 않고 외주화 한다. 내부 노동시장은 부품을 시장에서 조달하는 것보다 기업 내에서 노동자를 위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지만, 이제 그 필요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용어가 대두되기 이전, 정보화와 전자상거래의 확산만으로도 레미콘 기사와 화물운송, 방문판매, 학습지 교사 같은 일자리가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약어로 특고)라는 이름으로 외부화 되었다. 

특고는 개인사업자의 자격으로 도급계약을 하기 때문에 임금노동자에 비해서 노동과정의 자율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특정 회사와 집중적으로 거래하는 특징이 있다. 하나의 회사가 지급하는 금액이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 회사가 일감을 주지 않으면 실업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회사와의 관계에서 결코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용보장은 물론이고 최저임금, 근로시간, 작업환경 안전과 같은 근로조건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디지털 기술이 더욱 발전하다 보니,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자의 증가가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이다. 플랫폼 노동은 온라인 웹이나 앱을 통해 일거리를 구하는 노동이다. 웹이나 앱을 통해 공급자와 수요자를 한데 모아 거래가 이뤄지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 디지털 전환으로 인해 플랫폼 노동자가 급증하고 있다. 이들 일자리의 불안정성은 어느 형태보다 높지만 기존 사회보장 제도의 보호 밖에 놓여있다. ⓒ 셔터스톡

 
플랫폼에 접속하는 행위 자체는 매우 쉽다. 그래서 부업으로 일하는 사람, 초단기로 일하는 사람,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N잡러가 많아진다. 일을 얼마만큼 할지 내가 선택할 수 있고 특정 회사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사례도 드물다. 다만,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시장이기 때문에 보수의 단가가 낮게 형성된다. 일하는 시간과 일의 양을 일하는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자기 착취의 기제가 작동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플랫폼 노동은 특고보다 불안정성이 더 높은 일자리다.

계약직이나 일용노동자에 더하여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와 플랫폼 노동자까지 새로운 유형의 노동이 확대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자리의 불안정성과 사회보장제도의 보호 밖에 놓이기 쉽다는 점이다. 디지털 전환은 이런 유형의 노동을 더욱 늘려나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전환을 멈추거나 지체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과 부의 소득세가 대안?

일자리 불안정은 곧 소득 불안정이고, 나아가 소득격차의 확대를 의미한다. 과도한 소득격차는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국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소득보장제도를 발전시켜왔다. 국가권력의 향배를 결정짓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소득보장제도 개혁에 관해 백가쟁명이 이뤄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세 가지 흐름이 눈에 띈다.

첫째, 기존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 일부 논자들은 '부(負)의 소득세'라는 오래된 개념을 복원시켰다. 

둘째,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불안정성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 일자리 소멸까지 우려하게 되면 '보편적 기본소득'이 대안이 된다. 

셋째, 사회보험의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하는 개혁안으로 '전국민 고용보험'이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라는 계기를 통해 대두되었다.

이것저것 할 수 있는 대로 모두 추진해보자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위의 세 가지 흐름은 각각 공공부조, 데모그란트(demogrant), 사회보험이라는 소득보장 원리를 대표하는데, 각각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최대치를 표방한다. 복지국가는 이 세 가지 소득보장 원리를 각국의 처지에 맞게 혼합하여 구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모든 제도를 각각 최대치로 가져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다.

'부의 소득세제'는 소득이 전혀 없는 경우는 일정 수준의 최저소득을 보장하고, 기준소득 이하이면 일정 비율로 급여를 지급한다. 기존 공공부조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빈곤 인구를 모두 포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보충급여 방식이라서 근로의욕을 낮추고 탈수급률이 낮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현행 제도 역시 근로장려금제도(EITC)를 보완적으로 운영함으로써 근로 인센티브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근로장려금제도는 미국에서 1960년대에 '부의 소득세'를 여러 경로로 실험한 끝에 선택한 제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각지대 문제는 주로 부양의무자제도와 자산을 소득으로 환산하여 적용하는 데서 발생한다. 부양의무자제도는 폐지 수순을 밟고 있으니 논란거리가 아니다. 
 

▲ 코로나19로 인해 자영업자의 불안정한 소득 문제가 더 불거졌고 그 대안으로 보편적 사회보험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사진은 지난 12월 16일 오후 경남도청 맞은편 도로에서 열린 '코로나19 피해 실질 보상 촉구, 정부·여당 규탄대회'

 
소득지원제도에서 자산을 고려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요즘처럼 자산 격차가 사회문제가 되는 시기에는 더욱 어렵다. '소득은 있으나 자산은 없는' 계층으로부터 '소득은 없으나 자산은 있는' 계층으로 소득 이전이 발생한다면 제도의 사회적 수용성이 낮아질 수 있다. 

필자가 계산해 본 바에 따르면, 가구 단위 '부의 소득세'와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 근로장려금제도'는 단위 사회지출액 당 재분배 효과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자 한다. 국내에서는 수혜대상을 전체 인구의 절반까지 확대하는 부의 소득세가 검토되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확대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인지 의문스러울 뿐 아니라, 소득을 은폐하거나 축소신고하는 폐단 역시 극대화될 것이 우려된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예산제약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면 언제나 해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현실에서 정책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다. '모든 이에게 실질적인 자유'를 주는 것보다 급한 일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의료, 교육, 돌봄을 받게 해주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보편적인 서비스가 우선하는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사각지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현금급여제도라는 것을 잘 알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국가권력이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재원을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회보험 개혁의 방향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고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의 경계가 희미해져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자리 소멸의 시대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상황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과제는 사회보험제도의 개혁이다. 우리는 이미 상당히 발전된 사회보험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운영 원리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체계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 문제다. 자영업자는 보호범위가 좁고 스스로 부담해야 할 보험료가 크다.

임금노동자 자격으로 사회보험 적용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고용주가 자신을 피용인이라고 선언해주는 '신고' 절차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순수자영업자뿐 아니라 특고나 플랫폼 노동자 같은 중간지대 노동자도 보호 범위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용자의 의무를 회피하는 고용주를 만나거나 여력이 없는 영세사업주를 만난 근로자들도 결과적으로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거나 초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는 경우도 사회보험 적용대상에서 누락되기 쉽다.
 

▲ 우리는 이미 상당히 발전된 사회보험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운영 원리가 임금노동자와 자영자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체계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 문제다. ⓒ 셔터스톡

 
사회보험 개혁의 핵심은 임금근로와 자영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며, 위에 말한 '신고' 절차를 폐지하는 것이다. 사회보험원리를 적용하여 보호하고자 하는 소득은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이다. 따라서 보험료는 모든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에 일정 비율로 부과한다. 

보험료의 징수는 현재 건강보험공단, 근로복지공단 등에서 국세청으로 일원화하면 효율적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발생한 소득은 그것을 준 사람에게는 비용이기 때문에 국세청에 신고할 유인이 된다. 이런 관계를 이용하면 국세청의 소득파악 기능이 강화된다. 소득파악 주기를 단축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이런 행정 인프라 투자는 필요하지만 제도운영의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어떤 이가 고용센터에 실업급여를 신청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국세청 기록으로 근로이력과 실업 이전의 소득수준이 확인되므로 수급자격 여부와 급여액이 결정된다. 취업알선이나 직업훈련 같은 고용서비스와 함께 실업급여가 지급된다. 덴마크나 프랑스의 개혁사례를 참고할만하다. 

근로연령대에 사회보험을 통한 소득보장제도가 적용되어야 하는 경우는 ▲실업 ▲출산·육아 ▲산업재해 ▲질병·부상으로 인한 소득 단절 위험이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을 특고, 프리랜서 자영업자를 모두 포함하는 전체 취업자로 확대하고, 건강보험에는 상병으로 인한 소득단절에 대응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요컨대, 모든 취업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회보험제도란 종사상 지위와는 무관하게 모든 취업자가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이 발생할 때 국세청에 세금 내듯이 보험료를 납부하고, 이것이 소득활동의 증빙자료가 되어 소득이 단절되는 경우가 발생하면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고용주 신고 시스템의 한계

어떤 이는 특고나 프리랜서에까지 확대적용할 제도를 만들기 전에 이미 있는 제도라도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장 종사자에게 잘 적용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용주가 근로계약이 성립했다는 사실을 사회보험공단에 신고하는 것으로 노동자에 대한 보호가 시작되는 현행 시스템은 한계에 도달했다. 

새롭게 제안하는 취업자 사회보험은 초단기로 일하면서 여러 사업장을 돌아다니는 노동자나 사회보험료 부담의 책임을 회피하는 나쁜 고용주를 만난 근로자에게도 현실적인 보호막이 된다.

언젠가 일자리 소멸이 가시화되는 시점에는 '보편적 기본소득'이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이라면 '보편적 사회보험'을 우선적으로 시행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공공부조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근로장려세제의 미세조정 과정은 필요하겠으나 '부의 소득세'라는 급진적인 실험을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장지연은 미국 메디슨 소재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소득불평등, 복지국가, 일·생활 균형, 여성노동시장이다.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의 확산, 사회보험제도의 개선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함께 펴낸 저서와 연구보고서로 <글로벌화와 아시아 여성>(2007), <노동시장구조와 사회적보호체계의 정합성>(2011), <다중격차 1, 2>(2016, 2017), <디지털 시대의 고용안전망>(2020)이 있다.
 

▲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당신의 어린 자녀가 간병인이 될 수 있습니다
[소셜 코리아] 돌봄 청년의 비극,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사회조기현(soko)
21.12.29 06:05ㅣ최종 업데이트 21.12.29 06:05글씨 크게보기인쇄본문듣기원고료로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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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 빠른 속도로 이뤄지는 한국의 인구 변화는 기존의 보편적 생애 규범을 벗어난 영 케어러가 더 많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된다. ⓒ 게티이미지뱅크

 
아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어떤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를까? 대개는 중장년 여성이 노인을 돌보는 모습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상적인 돌봄자'로 중장년 여성을 상정해왔기 때문이다. 가족 돌봄은 그렇게 성별 분업에 의해 사적 영역에 가둬지며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가정 내에서 이상적인 돌봄자가 부재하다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가 일을 하거나, 아프거나, 이혼 후 함께 살지 않는다면 돌봄은 누가 맡게 될까? 청소년이나 청년인 자녀가 그 역할을 맡게 될 수 있다. 이제까지 이들은 사회적으로 효자, 효녀 등으로 불려왔다. 사회는 이들이 짊어진 짐을 함께 나눠지기보다 가족의 당연한 책임으로 여겨왔다. 


최근 들어 이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논의되며 영 케어러(Young Carer)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영 케어러는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코올, 약물 의존 등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 또는 청년을 가리킨다.

영 케어러는 학업이나 진로 이행을 수행하면서 가족 돌봄을 하고, 더 나아가 생계까지 책임져야 할 때도 있다. 아직 경제적 자립이 요원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영 케어러가 담당하는 가정 내 돌봄은 아픈 가족의 신체적인 돌봄뿐 아니라 정서적 돌봄, 집안 일, 어린 형제 돌봄 등 누군가 아파서 생기는 가정 내 역할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일들까지 포괄한다. 

누군가를 보살피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거나 진로 이행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미래의 격차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아픈 가족을 돌보느라 숙제나 학습 부진에 시달리던 이들이 '등교 거부'를 하는 문제도 벌어졌다.

이런 이야기가 예외적인 청소년과 청년의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규정하는 보편적 생애 규범에 청소년과 청년이 누군가 돌볼 수 있다는 전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청소년기는 가정에서 지원을 받는 시기이고, 청년기는 원가정에서 독립을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이뤄지는 한국의 인구 변화는 기존의 보편적 생애 규범을 벗어난 영 케어러가 더 많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점점 혼인 연령이 늦어지는 만혼화 현상 때문에 그 자녀들은 돌봄 상황을 일찍 마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령화로 인해 돌봄과 부양의 부담이 가중되고, 저출생 때문에 돌봄과 부양을 함께 나눠질 수 있는 형제가 줄어든다. 한부모 가정의 증가로 부모가 아플 때 돌볼 사람이 아이밖에 없는 상황이 늘어난다.

영 케어러 실태조사조차 없다
 

▲ 자신이 벌 수 있는 수입보다 간병인 비용이 더 크니 학업, 일, 진로 이행을 뒷전으로 미뤄두고 직접 간병을 하는 영 케어러가 적지 않다. ⓒ 오마이뉴스 고정미

 
최근 아픈 아버지를 굶겨 죽음에 이르게 한 22세 청년 강도영(가명)의 이야기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청년이 돌봄을 맡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청소년, 청년의 가족 돌봄에 대한 통계는 거의 없다. 보건복지부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만 25세 미만 기초생활 수급자를 집계해 파악한 3만~4만 명 정도가 전부다. 기초생활 수급자가 아닌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실태조사를 약속하며, 올해는 영 케어러에 대한 기초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실태가 나오지 않았고, 사회적 지원에 대한 논의도 미미한 실정이다.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경험적 근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나는 20살 때부터 아픈 아버지를 돌본 당사자이고, 아픈 가족을 돌보는 당사자들의 자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기, 청년기에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들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 케어러 문제의 쟁점을 짚어보고, 대안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그에 앞서 외국의 영 케어러에 대한 대응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자. 이들 국가는 영 케어러에 대한 대응이 활발하다는 점에서 참조해볼 만하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올해 영 케어러에 대한 전국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NHK 보도(2021. 6. 1.)에 따르면 일본 총무성, 후생노동성, 문부과학성이 공동으로 조사한 '전국 중고등학생 영 케어러 실태조사' 결과 '돌보는 가족이 있다'고 답한 청소년 비율이 중학생은 17명당 1명, 고등학생은 24명당 1명으로 집계됐다.

이들은 하루 평균 4시간 이상 가사노동을 수행한다. 7시간인 학생도 10%에 달했다. 고등학생 중 40.8%는 '공부나 숙제를 할 시간이 없다'라고 대답했고, 12.2%는 '집안 사정상 진로를 변경했다'고 밝혔다. 가족 돌봄이 학습 부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아시아 투데이, 2021. 5. 17). 일본 정부는 기존의 복지 정책만으로 이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파악하고 영 케어러 맞춤 정책을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김령희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에 따르면 영국과 호주는 이미 각각 영 케어러를 만 18세 이하와 만 25세 이하로 규정하며 사회적 지원을 하고 있다. 영국의 영 케어러는 2011년 기준 49만1천 명에 이른다. 영국은 이들에게 용처 제한이 없는 보조금을 연간 약 48만 원 정도 지급한다. 영 케어러들이 또래가 누리는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호주는 올해 23만 5500명의 영 케어러들이 돌봄 상황에서도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연간 약 255만 원 정도의 학비보조금을 지급한다.

준비 없이 시작된 돌봄
 

▲ 영 케어러가 지고 있는 돌봄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을 넘어 미뤘던 학업이나 일, 진로 이행 등 생애 과업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 오마이뉴스 고정미

 
돌봄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지병이 악화하거나 쓰러질지 예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 보호자'로 병원에 불려가게 된다. 

영 케어러는 대부분 준비 없이 마주한 돌봄 상황 앞에서 혼란을 느낀다. 누군가 아프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교육을 받거나 정보를 제공받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군가 아플 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께 의논할 어른이나 형제가 없다면 치료 방향이나 수술 동의 같은 중대한 사안을 혼자서 결정해야 한다. 누군가 아픈 상황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책임을 지고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하는 압박감도 상당하다. 거기에 신청할 수 있는 복지 정보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빠르게 신청해볼 수 있는 긴급복지 의료지원이나 재난적 의료비 지원도 몰라서 신청 못 했다는 경우가 많다.

치료가 길어지면 어쩔 수 없이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거나, 풀타임 근무를 하는 직장을 그만 두기도 한다. 특히 간호간병 통합서비스가 시행되지 않는 병원에서 일반병실로 옮겼을 때나, 환자가 중증일 때는 간병문제를 따로 해결해야 한다. 간병인 고용 비용은 하루 10만 원 안팎에 이르고, 최근에는 13만 5천 원까지도 올라갔다. 자신이 벌 수 있는 수입보다 간병인 비용이 더 크니 학업, 일, 진로 이행을 뒷전으로 미뤄두고 직접 간병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경향신문, 2021. 11. 25).

돈 없으면 복지도 없는 아이러니
 

▲ 영 케어러는 자신이 겪는 일을 문제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힘든 와중에도 도움을 청하거나 복지를 신청하기보다 혼자 묵묵히 감내하려는 이들이 많다. ⓒ 셔터스톡

 
긴급 치료가 끝난 이후에는 정기적인 치료와 장기적인 돌봄이 필요한 단계에 진입하기도 한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동행하거나 돌발상황에 대비해 대기하기도 한다. 돌봄과 생계를 병행하려니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풀타임 근무도 할 수 없다. 현재 내가 진행하는 영 케어러 자조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 모두가 아르바이트, 파트타임, 프리랜서 등 불안정 노동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속되는 돌봄 과정에서 영 케어러들은 기초생활 수급이나 노인 장기요양보험 요양등급 등을 신청해본다. 무엇보다 아픈 이가 부모라면 '아직' 65세 미만이라는 점에서 몇 가지 절차를 더 거쳐야 한다.

기초생활 수급을 신청하려면 '근로능력 평가'를 통해 근로 능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아야 하고, 노인 장기요양보험 요양등급은 노인성 질환에 대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 당장에 돈이 없어서 찾아간 공공기관이지만 구체적인 진단명을 받기 위해 여러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 복지 신청을 하려고 해도 돈이 필요해진다. 간병을 하다가 아버지를 굶겨 죽음에 이르게 한 강도영 또한 2심 공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주민센터에) 전화로 한 번 물어봤습니다. 도움 받으려면 장애진단서 있어야 한다고 해서, 병원에 문의했더니... 장애진단서 받을 때도 돈이 든다는 걸 알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것도 포기했습니다. (셜록, 2021. 12. 1)

노인 장기요양보험의 요양등급을 받는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집에 요양보호사가 방문하는 방문요양은 신체적 의존도가 가장 높은 요양등급 1, 2등급일 경우 하루 최대 4시간 이용이 가능하다. 서비스 일수는 1등급 27일, 2등급 24일로 서비스의 공백이 생긴다. 3, 4등급은 하루 최대 3시간에 각각 월 최대 26.9일, 24.7일이며, 5등급은 2~3시간, 월 최대 21.2일이다. 그 아래 등급인 인지지원 등급은 주야간보호센터만 이용 가능하다. 

주야간보호센터 이용 또한 하루 8시간, 월 15회 가능하기에 여전히 서비스 공백이 존재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의 목적이 "가족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있는 만큼, 이는 서비스 외 나머지 시간을 가족이 담당할 것이라는 통념에 바탕을 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돌봄 서비스 양으로는 가족 돌봄자나 영 케어러가 아무런 걱정 없이 8시간 근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출·퇴근하거나 여가를 즐길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정부는 2019년부터 '지역사회 통합돌봄' 선도사업을 시작했지만,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돌봄 서비스의 양이 적기에 돌봄자 입장에서는 시설 입소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가족과 함께 사는 노인이 혼자 사는 노인보다 요양시설에 가는 비율이 최대 3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한국일보 2018. 1. 16). 이는 가족이 돌봄 당사자의 의사를 배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한편, 돌봄 서비스의 양 부족 때문에 가족들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지금 바로 논의해야 하는 대안

영 케어러가 처한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논의해야 할까.

첫째는 복지 정책의 접근성 문제다. 영 케어러는 위기 상황에서 협력할 가족이 없고, 또래 관계 안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앞으로 가족 규모가 축소되면 영 케어러 뿐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혼자서 돌봄 위기를 겪어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돌봄으로 인한 위기 상황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상시적인 상담 창구가 필요하다. 상담 창구는 다른 복지 정책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 보건복지부는 보건복지 상담센터 129를 통해 보건복지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상담사들의 열악한 처우와 과도한 업무량으로 단시간에 단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아예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 신고 및 상담전화와 같은 형태로 돌봄 위기 맞춤형 핫라인도 고민해볼 수 있다. 이런 핫라인을 응급실, 중환자실, 병원 로비, 학교 게시판 등에 홍보한다면 가족 돌봄자 및 영 케어러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영 케어러가 가족 보호자로 병원에 불려간 시점부터 상담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병원마다 의료사회복지사를 의무적으로 배치하는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다. 학교는 매일매일 학생의 상태를 체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 케어러를 찾아내 상담을 논의하는 데 빼놓아선 안 되는 곳이다. 

영 케어러 실태조사를 실시한 일본은 비슷한 문제의식을 정책에 담았다. 영 케어러 조기 파악을 위해 교육·의료·돌봄·복지 관계자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정책을 계획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 준비물을 가져오지 못하거나, 숙제를 하지 않는 등의 문제 행동이 있으면 가족을 돌보는 상황일 수 있으니 확인을 하는 식이다.

일본 정부는 영 케어러 가운데 60% 이상이 상담한 적이 없다는 실태조사 결과를 관련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2022년부터 대면 상담뿐 아니라 온라인 상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핵심은 주민센터뿐 아니라, 곳곳에 다양한 상담 채널이 있어야 복지를 신청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개인에게 닥친 위기 상황과 공공의 안전망 간의 연결을 공백으로 두어선 안 된다.

영 케어러는 스스로 자신이 겪는 일을 문제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힘든 와중에도 도움을 청하거나 복지를 신청하기보다 혼자 묵묵히 감내하려는 이들이 많다. 또래 중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드물기에 자신이 겪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스스로 자신이 문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복지 신청을 할 수 있도록 이들을 사회적으로 호명하는 캠페인이 필요하다. 구태여 영 케어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가족 돌봄 청년', '부양 청년' 등으로 불러 스스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아챌 수 있도록 사회가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돌봄 서비스 양이다. 현재 지역사회 통합돌봄으로 돌봄 서비스가 시설이나 병원을 벗어나 지역사회로 재편되고 있다. 하지만 가족 돌봄자 입장에서는 아픈 가족을 집에서 돌보며 일, 더 나아가 자신의 일상을 병행하기에는 실질적인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2019년 장기요양 실태조사에 따르면, 집에서 돌보는 이들이 가장 불만족스러운 것은 '불충분한 이용시간'(47.4%)이고, 그다음은 '필요한 시간에 이용 어려움'(18.7%)이다. 가족 돌봄자가 일, 일상, 돌봄을 병행할 수 있도록 노인 장기요양보험의 방문요양 시간과 주간보호센터의 이용 시간을 늘려야 한다. 무엇보다 돌봄 서비스 외 시간을 담당하는 가족이 있다는 전제가 아니라, 한 개인에게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적절한 서비스 시간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더라도 월 최대 서비스 일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픈 가족에게 돌봄 서비스를 충분하게 보장한다는 것은 영 케어러가 학업이나 일, 진로 이행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돌봄 상황에 함께 고민하고 협력해줄 '케어 매니저' 도입도 적극적으로 고려해봐야 한다. 

병원비·간병비 해결 없이 변화 없다 

세 번째는 경제적 부담이 큰 병원비와 간병비 문제다. 영 케어러들이 학업이나 일, 진로 이행을 포기하게 되는 요인으로 병원비와 간병비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병원비 걱정 없는 든든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2022년까지 건강보험 보장률 70% 달성을 공약했지만, 간병비 부담은 여전하다. 

현재 취약계층 의료보장을 위해 기초생활보장 의료급여, 차상위 본인부담 경감, 긴급의료지원, 재난적 의료비 지원, 본인부담 상한제 등이 시행 중이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과 간병비에는 이들 정책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 다만 경기도만이 긴급복지 의료비 지원제도에 간병비를 포함하고 있다. 현재 보호자 없는 병동을 표방했던 간호간병 통합서비스가 시행되고 있지만, 이마저도 모든 병원에서 시행되지 않을 뿐더러, 경중증 환자 중심으로 서비스가 제공되기에 중증 환자는 이용할 수 없다.

최근 대선 후보들은 강도영 사건을 두고 병원비와 간병비를 줄이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실시 의료기관을 확대하고 서비스 대상에 중증 환자를 포함시키는 방안 ▲현재 3천만 원인 재난적 의료비 지원을 5천만 원까지 증액하고 간병비를 포함시키는 방안 ▲일정 금액 이상 병원비를 쓰면 다음 해에 되돌려주는 현행 본인부담 상한제를 바꿔 퇴원 전에 정산하는 방안 ▲본인부담 상한제를 100만 원으로 제한하고 비급여와 간병비를 포함하는 방안 ▲병원비를 국가가 대납해주고 장기 분할상환하도록 하는 방안 등이 공약으로 제시됐다. 

네 번째는 청년기 생애 과업에 대한 문제다. 얼마 전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는 '영 케어러 케어링'이라는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19세 이상에서 39세 이하의 서울에 사는 청년을 대상으로 위기지원금을 약 130만 원까지 지급한다. 이는 생계비, 의료비, 교육비, 심리정서 지원비, 문화 지원비 등으로 사용 가능하다. 생활 안정뿐 아니라 진로 이행, 여가 등 다양한 용처의 현금 지원이 어떤 효과를 낼지 향후 지켜볼 만하다. 내년에는 현금 지원뿐 아니라 더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영 케어러가 지고 있는 돌봄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을 넘어 미뤘던 생애 과업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영 케어러가 학업이나 일, 진로 이행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돌봄에 대해 시야를 넓히고 스스로 긍정적인 가치 평가를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자체 청년센터 등에서 영 케어러 모임을 운영하며 돌봄에 대해 말하고 듣는 기회를 만들어볼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심리정서 지원, 진로탐색 지원, 취업 지원 등을 통해 돌봄으로 인해 떨어진 의욕을 끌어올리고, 다시 무언가 해볼 수 있도록 독려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런 지원책들은 가족이기에 당연하게 돌봄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아니라, 돌봄이 시민의 역할임을 인정하는 전제로 구성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며 돌봄의 사회화와 돌봄의 재가족화를 오가고 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관점은 가족과 사회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시민과 사회가 협력해서 돌봄 안전망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이다. 

돌봄자에 대한 지원이 가족에게 돌봄을 떠맡기는 양상이 되지 않으려면 '돌봄을 선택할 자유' 또한 함께 고민해야 한다. 돌봄을 선택할 자유를 위한 충분한 돌봄 서비스와 돌봄자에 대한 지원을 함께 논의할 때, 우리는 돌봄을 짐이나 불행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돌봄을 삶의 예외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다. 영 케어러에 대한 논의가 우리 모두가 '돌봄 시민'이라는 논의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조기현은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썼고,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를 찍었습니다. 무언가 읽고 보고, 누군가 돌보는 시간이 삶의 동력이 됐습니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 모임 'N인분'을 운영하며 세대와 성별을 넘어 모두가 잘 돌보고 돌봄 받는 시민 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 조기현 작가 ⓒ 조기현

 
덧붙이는 글 <소셜 코리아> 연재글

 

 

 

블라블라 그만, 대통령 후보들은 답을 내놔라
[소셜 코리아] 생태 위기에 맞서는 복합처방 '녹색복지국가'
정치이창곤(soko)
22.01.06 06:13ㅣ최종 업데이트 22.01.06 09:43글씨 크게보기인쇄본문듣기원고료로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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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2022년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를 맞았다. 새해는 바야흐로 '정치의 해'다. 오는 3월 9일 20대 대통령을 뽑는다. 6월 1일엔 지방자치단체장 등을 뽑는다. 대선과 지방선거가 이렇듯 한 해에 동시에 치러지는 것은 2012년 이래 10년 만이다. 

이 '정치의 시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선거, 특히 대선은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책임지는 권력을 창출하는 정치 이벤트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에 그칠 수 없다. 모름지기 시민의 더 나은 삶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공론장이어야 한다. 


요체는 질문과 답의 상호작용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사회적 위험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더 나은 삶, 더 안전한 공동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각 대선 후보와 정치세력은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숱한 질문을 파악하고 그에 답해야 한다. 공동체의 미래와 시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대안을 내놓고 평가받아야 한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건 투표 참여와 함께 이런 열린 공론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작금의 상황은 문제다. 의혹의 말은 넘쳐나고 질문은 무성하나 질문다운 질문이 없다. 질문이 없으니 토론도, 답변다운 답변도 있을 리 없다. 요란한 빈 수레처럼 그저 소란스러울 뿐이다.

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

역사에는 에누리가 없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거 우리의 행위, 그 결과다. 미래 또한 오늘 우리의 행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되짚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많은 난제와 질문이 떠오르지만, 응축하면 어떻게 시민의 더 나은 삶, 더 안전한 삶을 보장할 것인가다. 기실 우리 사회 다수 구성원의 삶은 안전하지 않다. 안녕하지 못하다. 숱한 사회적 위험이 놓여 있어 숱한 이들의 삶이 위태롭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줄 사회적 안전장치는 충분히 작동하지 못한다.

위험은 꽤 묵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온존하며 위협한다. 더 큰 걱정은 엄청나고 센 위험이 빠르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 위험이 궁핍이었다. 극단의 가난은 실업, 질병, 노령, 사망 등에 따른 소득중단에서 온 것이다.

사회적 위험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변형되거나 새롭게 창출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 경제사회 구조와 인구 구조가 급변하면서 새 위험이 대두됐다. 노동 빈곤, 한부모 가정, 일과 가정생활의 부조화 및 돌봄 부재 등 '신사회적 위험'이다. 이전과 다른 사회적 위험이었다. 이들 위험은 특히 저소득층이나 노동빈곤층 그리고 청년, 여성, 소수 인종 등을 더 깊은 삶의 불안정과 고통 속으로 밀어붙였다.

21세기, 기존과 차원이 다른 대형 위험이 다가왔다. 메가톤급 대형 위험이 동시다발적으로 노도처럼 밀려왔다. 이름하여 디지털 쇼크와 생태 위기다. 디지털 경제의 전환과 자동화의 확산은 노동 시장의 큰 변화를 강제한다. 한마디로 일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위험은 생태 위기다. 기후 위기와 생물다양성 상실이란 이중의 위기를 가리킨다. 이들 위험은 매우 크고 복합적이란 면에서 기존의 것과 질이 다르다. 지질학자들은 '인류세'라는 개념을 통해 이 위기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의미하는 인류세는 생태 위기의 원인이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에 따른 개념이다.

그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현상이 기후 변화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미국 캘리포니아의 초대형 산불, 독일 등 유럽의 홍수 등 잇따른 기상 재난은 기후 변화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다. 이는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에너지 체제인 탄소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다.

기후 변화는 기상 재난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감염병, 범죄, 전쟁, 아동발달, 농어업, 경제 등 인간사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며 장차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기후학자들은 이미 지구 환경이 비상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 기후변화는 감염병, 범죄, 전쟁, 아동발달, 농어업, 경제 등 인간사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며 장차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 셔터스톡

 
기온이 1.5도 오르면 식량 공급이 불안정해지고, 2도 이상 상승하면 찜질방 지구를 떠올리면 되는데 사망률이 전 세계적으로 급증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환경부가 2020년 7월 발표한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 2020'를 보면 이런 지구적 현상을 한반도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880~2012년 지구의 평균 지표 온도는 0.8도 올랐지만, 1912~2017년 한국에선 약 1.8도 올랐다. 한반도의 기온 상승 속도가 지구 전체보다 훨씬 가파르다. 이대로라면 21세기 말에는 한반도의 연중 폭염 일수가 현재 10.1일에서 3.5배 늘어난 35.5일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기후 변화는 자연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를 낳는다. 생태 위기의 피해는 이상 기후로 다가오지만 현실에선 특히 더 어렵고 취약한 이들에게 더 큰 피해를 일으키는 재난의 불평등을 낳는다.

낡은 주택에 사는 사람, 해안이나 산사태 위험 지역에 사는 사람, 화훼 농민, 임업인, 양식 어민 그리고 노인과 임산부, 기초생활수급자 등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큰 타격을 주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 피해는 회복 불가능할 지경으로 파괴적이다. 이 점에서도 생태 위기는 여타 위험과 질적으로 다른 층위의 위험이다.

생태와 복지의 새로운 재구성

문제는 대응이다. 어떻게 이 복합 위험에 맞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낼 것인가다. 2022년 각 대선후보와 정치세력은 응당 이 물음에 답을 제시하고 갑론을박해야 한다. 목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블라블라'다(블라블라는 청소년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청소년 기후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허튼소리만 계속해왔다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유행어가 된 말이다). 혹은 표를 얻기 위한 임시방편의 코스프레로 보인다. 왜일까?

선거를 맞아 각 진영은 기후 위기 대응, 탄소 중립, 에너지 전환을 말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수단을 언급하지 않는다. 원전 감소, 탈 원전 등 엇갈린 메시지를 아무렇지 않게 제시하기도 한다. 생태 위기를 말하면서 여전히 GDP 성장만을 앞세운다. 기후 위기 대응 과정에서 나타나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구체적인 생태사회정책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기실 생태 위기는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제도적 장치, 즉 복지국가 시스템의 큰 전환을 요구한다. 복지와 사회정책, 나아가 복지국가 개념의 전면적인 재구성을 강제한다. 위험이 전면적이면 대응도 전방위적이어야 한다.

생태 위기의 주범은 중국을 빼고선 대체로 선진국이다. 이들은 복지에 돈을 많이 쓴다. 그러나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해온 기후악당 국가들이기도 하다. 복지에 나라 돈을 많이 쓴다고 해서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낮은 건 아니란 얘기다.
 

▲ 더는 기존 시스템으로 인류 공동체와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기 어렵다. 생태위기 시대의 복합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복지국가 또는 다른 방식의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 ⓒ 게티이미지뱅크

 
기존 복지국가 시스템의 난맥상은 더는 기존 시스템으로 인류 공동체와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기 어렵다는 데 있다. 충분히 보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생태위기 시대의 복합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복지국가 또는 다른 방식의 정책적 대응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대형 복합 위험에 대처할 재구조화한 새 복지국가(Neo-Welfare State)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 새로운 복지국가를 '녹색복지국가'라고 지칭한다. 녹색복지국가는 "기후위기를 발생시키는 경제에 의존하는 복지국가가 아니라 지구 생태를 복원하고 지킬 수 있는 경제와 함께 하는 국가"다.(윤홍식, <이상한 성공>)

녹색복지국가는 지구 고온화의 주범인 화석연료가 아닌 태양열,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전환을 이끌어내는 국가다. 목표는 녹색 전환이다. 급변하는 경제사회질서 속에서 국민들의 기초적인 삶을 보장하는 한편, 소수의 성장보다는 모두의 번영을 이룩하고 인류는 물론 지구촌에 삶의 터를 둔 뭇 생명이 함께 누리는 이른바 글로벌 공존을 지향하는 국가다.

녹색복지국가는 한마디로 생태위기 시대의 새 복지(국가) 비전이다. 복지가 지향해온 기본적 가치를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 복지국가의 지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복지국가의 초기 지도 원리는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국민생활 최저선(National Minimum) 확보였다.

오늘날에는 이 가치의 실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기본권, 특히 사회권을 폭넓고 보편적으로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녹색복지국가는 사회권을 보장하는 보편적 복지국가다. 배제(사각지대)와 불충분(낮은 보장), 역진적 선별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복지체제는 이 점에서 복지국가의 재구조화가 시급하다.

녹색복지국가는 "사회적 자원이 경제적 능력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정도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평등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복지국가가 추구해온 이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생태위기 시대의 복지비전인 녹색복지국가는 그 가치가 오직 인간만을 향해 있지 않다. 기존 복지국가가 추구해온 기본 가치의 보장에 더해, 존엄성은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도 있다는 생각에서 인간과 뭇 생명의 호혜적 공존을 지향한다.

복지국가는 그 자체로 역사적 진전이었지만 한계도 있었다. 그동안의 복지와 복지국가 발전은 인간의 물질적 안정과 풍요를 가져오는 데 나름의 구실을 했으나 때로는 자연을 파괴한 "생태적 착취의 결과"(홍성태, <생태복지국가를 향하여>)이기도 했다.

하여 녹색복지국가는 "사회 기술적 변화로 추동되는 좁은 의미의 전이(translation)"를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기초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의 전환"이어야 한다. 기존 복지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의 성격을 넘어서 생태위기의 뚜렷한 해결책이어야 한다. "인간-자연 관계에 조응하는 생존의 정치, 인간종의 범위를 넘어서 더 포괄적인 다종 집합체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프로젝트"로서 녹색전환의 길(최병두, <인류세와 코로나 팬데믹>)을 지향하며, 탄소 사회의 종말을 지향한다. 탈탄소사회가 궁극적 도달점인 것이다.

"인간의 생존을 존중하면서 자연과의 상생관계 속에서 지키고자 하는 생태적 가치, 즉 생명가치"를 바탕으로 사회보장제도를 재구성하는 체제이며, "건강한 자연은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복지"란 인식에 기초한다. 그렇기에 탄소중립을 부분적으로 실행한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무늬만 그린뉴딜' 전개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목표다. 사회경제체제의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변화를 추구할 때 현실성의 궤도에 오를 수 있다.
  

▲ 생태위기의 주범은 중국을 빼고선 대체로 선진국이다. 이들은 복지에 돈을 많이 쓴다. 그러나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해온 기후악당 국가들이기도 하다. 복지에 나라 돈을 많이 쓴다고 해서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낮은 건 아니란 얘기다. ⓒ 게티이미지뱅크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변화 요구

무릇 어떠한 비전이나 구상도 '선언'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 현실의 실체로서 녹색복지국가는 과거 복지국가 발전이 그랬듯 필연적으로 경제사회 개혁을 동반해야 한다. 이는 녹색복지국가 실현 과정 앞에 엄청난 장벽이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녹색복지국가 비전 현실화를 논할 때 '슬기롭고 다층적인 전략'이 강조되는 이유다.

핵심은 사회정책의 새롭고도 전면적인 재구성에 있다. 분절적이고 파편적인 기존 정책으로는 이룰 수 없음이 자명하다. 지금과 같은 차별적이고 배제적인 사회정책을 획기적으로 현대화하지 않고선 가능하지 않다. 시민의 삶을 질적으로 크게 드높이는 사회정책이 녹색복지국가 전략의 1차적 요건이다.

그러나 현대화하고 보편적인 사회정책 전개만으로는 생태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 생태위기를 직접 겨냥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권리와 시민 삶의 질을 신장하는 한편, 인간과 자연의 호혜적 공존이란 생태적 가치를 동시에 또렷이 담은 사회정책이어야 한다. 일러 '생태사회정책'이다.

녹색복지국가로 전환하기의 주요 요건은 이렇듯 생태사회정책의 뚜렷한 전개에 있다. 영국 사회정책학자인 이안 고프 배스 대학(University of Bath) 교수는 생태사회정책을 두고서 복지와 지속가능성 모두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 안전한 기후와 더 나은 복지의 시너지를 꾀하는 정책이라고 풀이한다.

생태사회정책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정책 꾸러미'(Policy Package), '정책 매트릭스'(Policy Matrix)일 것이다. 일례로 정의로운 전환, 보편적 사회서비스, 녹색기본소득 등 친환경 범주형 기본소득 등이 제기되고 있다.

녹색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소득보장 등 사회보험이나 사회서비스 제도의 변화만이 아니다. 기후 관계 장관회의나 기후보호부 등 정부조직 개편과 시민참여형 거버넌스 구축 등도 거론된다. 녹색세제 개혁, 녹색금융의 역할 강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여러 정책 안도 함께 제시된다.

시민 스스로 소비에 대한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소비의 재구성을 말하는 이도 적잖다. 궁극에는 이들 정책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평가해 실행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녹색정치가 활발히 작동해야 함은 물론이다.
 

▲ 녹색복지국가는 지구촌 공동체가 함께 추구해야 하는 길이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경로와 전략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 셔터스톡

 
하나하나 결코 쉽지 않은 과제며 개혁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성큼 도약도 필요하다. 국내만이 아니라 지구촌 차원의 협력과 연대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우물에서 숭늉을 찾지 말아야 한다.

녹색복지국가는 지구촌 공동체가 함께 추구해야 하는 길이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경로와 전략은 나라마다 처한 경제사회적 상황과 정치적 행위자와 시민사회 등의 역량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을 둔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생태사회정책 꾸러미와 로드맵 마련이 중요하다.

가끔 생태위기를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하는 이들이 적잖다. 아니다. 이미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의, 나아가 지구촌의 지금 여기의 일이며 나의 일이다. 녹색복지국가의 현실화는 그래서 먼 미래의 지향이 아니라 지금 여기, 당대의 시급하고도 중요한 비전이며, 절박한 과제다.

* 필자 소개: 이 글을 쓴 이창곤 <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이자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우리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정책과 정책 담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한겨레신문사에서 기자로서, 때로는 연구기관의 책임자로서 복지와 노동 등 사회정책과 복지국가 의제를 두루 살폈다.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등 복지국가와 관련한 여러 책을 펴냈다. 최근에는 생태위기 시대의 새로운 복지국가 비전으로서 `녹색복지국가'와 생태사회정책을 주창한다.
 

▲ 이창곤 <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한겨레신문 선임기자)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단언컨대 '괴롭히려고' 낸 소송입니다
[소셜 코리아] 노조 파괴하는 무차별 손배소… 쟁의행위 범위 넓혀야
사회윤지영(soko)
22.01.12 06:10ㅣ최종 업데이트 22.01.12 06:10글씨 크게보기인쇄본문듣기원고료로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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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 쌍용자동차 국가피해자와 국가손배대응모임 회원들이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파업 당시 경찰과 쌍용자동차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발생한 47억 원과 매년 불어나는 지연 이자로 인햔 고통을 호소하며 대법원의 정의로운 판결과 손해배상가압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19.12.19 ⓒ 이희훈

 
노동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가압류신청, 일명 '손배가압류'를 막아보자며 만든 시민단체가 있다. 바로 '손잡고'다. 손잡고는 매달 노동 현장 간담회를 진행한다. 쌍용자동차, 아사히글라스, CJ대한통운, KEC 노조원들과 기아차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손잡고 현장 간담회에 참여한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적게는 몇 억, 많게는 몇 백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피고라는 것. 재산에 가압류를 당한 사람도 있고, 이미 손해배상 판결이 확정되어 월급 중 상당액을 회사에 자동 납부 당하는 사람도 있다. 노조 파괴 사업장으로 유명한 유성기업, 갑을오토텍 노동자들도 이 모임에서 만났다. 


간담회 때마다 현장에서 투쟁해야 할 노동자들의 입에서 '소가'니, '조정'이니, '감정'이니 하는 법률용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쩌다 이들은 소송의 굴레에 갇히게 되었을까.

손해를 입혀 청구한 게 아니냐고? 

손잡고가 조사한 2020년 11월 기준, 양대 노총 소속 노동조합 및 조합원 개인에게 청구된 손해배상 청구금액은 658억 원을 웃돈다. 제보되지 않았거나 양대 노총에 소속되지 않아 누락된 사례까지 감안하면 실제 손해배상 청구금액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2017년 6월 말 기준 손해배상 청구금액이 약 1867억 원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금액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청구 이유는 다양해졌다. 파업 등 쟁의행위로 인해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청구한 건 외에도 모욕, 명예훼손으로 청구한 것도 12건에 이른다. 청구 대상도 특수고용 근로자, 노조 없는 노동자 등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까지 확대되고 있다(2020 노동권과 손배가압류-소송기록 분석 자료집2020. 11. 30. 손잡고).
 

 


▲ 연도별 사업장 손해배상 청구액(2020 노동권과 손배가압류-소송기록 분석 자료집) ⓒ 손잡고

 
손해를 입혔으니까 회사가 노조와 조합원들을 상대로 손배가압류를 하는 것 아니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언컨대 손배가압류는 노조를 탄압하고 노동자들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다. 

삼성그룹의 2012년 노사전략 문건에는 "고액의 손해배상 및 가처분 신청 등을 통해 경제적 압박을 가중시켜 활동을 차단하고 식물노조를 만든 뒤 노조해산 유도"라고 적혀 있었다. 2011년 10월 유성기업이 만든 '유성노조 가입확대 전략' 문건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징계책임을 묻는 징계절차의 진행과 동시에 수천만 원의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면 소송의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일반 조합원들의 압박감이 더욱 커질 것으로 판단됨. (유성노조 가입확대 전략 문건)

우리의 소송 구조에서 돈이 있는 자는 소송을 하기가 쉽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소가(소송을 제기해 얻으려는 경제적 이익)는 마음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손해액은 중요하지 않다. 소송비용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부르는 게 값이다. 이 소가를 기준으로 여러 소송 비용이 결정된다. 기업은 피고를 마음대로 정할 수도 있다. 실제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 중 일부만 특정해서 피고로 세울 수 있다. 

손해배상의 책임 구조도 기업에 유리하다. 공교롭게도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은 부진정 연대책임(각자가 손해배상액의 전액을 책임지는 구조)이라는 것이 판례와 통설이기 때문에 피고가 된 각자가 청구액 전액에 대한 배상 부담을 지게 된다. 쉽게 얘기하면 회사가 지목한 몇몇 개인들만 손해배상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는 노동자 중 일부를 특정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손배가압류는 노조를 위축시키고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주요 수단이 된다.

구체적인 실행 과정을 보자. 노조가 파업 등의 쟁의행위를 하면 회사는 노조와 조합원들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의 소를 제기한다. 그리고 조합원들의 재산을 가압류한다. 가압류는 가압류를 당하게 되는 사람 모르게 신청인과 법원의 판단만으로 이뤄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재산이 없는 사람에게 가압류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피소는 그 자체로 두렵고 번거로운 일이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소송에 휘말리게 되고 수임료 등의 각종 지출이 생긴다. 가압류를 당하면 당장 생활에 지장이 생긴다. 통장 가압류를 당하면 사실상 금융생활이 불가능하고, 전세권에 가압류를 당하면 이사하는 게 불가능하다. 

회사는 불안감에 휩싸인 조합원들에게 접근해서 '소를 취하해 줄 테니 노조를 탈퇴하라'는 요구를 한다. 노조를 탈퇴하는 조건으로 피고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몫은 남은 피고들에게 가중된다.

한 사업장의 경우 쟁의행위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100여 명이었는데, 이후 회사는 노조에 남은 30여 명만을 상대로 손배가압류를 실행했다. 이후 7명의 조합원이 노조를 탈퇴하자 그들에 대해서는 소를 취하하고 가압류를 해제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담보 재산이 많을수록 회사에 유리한 건데, 노조 탈퇴 직원에게 소 취하와 가압류 해제로 담보 재산을 스스로 줄인다. 이 정도면 소권(訴權) 남용 아닌가.

정리해고 반대 파업도 불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노조와 조합원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배소송 중 기각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백이면 백 법원은 회사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왜 회사 손을 들어주는 것일까? 간단하게 설명하면 노조가 파업을 했고, 그로 인해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였으니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쟁의행위는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행위"(노동조합법 제2조)이고, 우리 헌법은 이러한 업무 저해 행위를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다. 헌법이 단체행동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취지는 단체행동권 행사의 당연한 결과로 발생하는 사용자의 손해, 업무 방해에 대해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노조법 제3조가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도 헌법에 연유한다. 민법상 법익 침해는 불법행위가 되지만 대등한 노사 관계를 위해 불법행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 노동3권, 노조법 제3조의 취지다. 

그러나 법원은 노조법 제3조의 "이 법에 의한 쟁의행위"를 정당한 쟁의행위로 축소 해석하고, 노동조건과 무관한 파업(판결에 따르면 정리해고 반대 파업도 여기에 속한다)을 불법파업으로 간주하며, 불법파업에 대해서는 회사에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 대법원이 노동조합법상 쟁의행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고 있어서 지나친 손배가압류가 남발되고 노동3권이 무력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 셔터스톡

 
이런 이유로 손잡고는 노조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개정안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노조법상 노동쟁의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현행 노조법은 노동쟁의를 "임금·근로시간·복지·해고 기타 대우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로 인하여 발생한 분쟁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를 좁게 해석하여 경영권에 대한 노동쟁의는 노동쟁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정리해고나 아웃소싱 반대 파업을 경영권에 대한 노동쟁의로 보기 때문에 그 파업은 불법행위이고 회사에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지위 변동을 수반하는 경영권의 행사는 노동조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 외의 경영권 행사도 근로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이번 개정안은 노동조건뿐만 아니라 경영권 행사를 포함한 노사관계 전반에 관한 분쟁도 노동쟁의에 포함했다.

둘째, 손해배상의 면책범위를 확대했다. 쟁의행위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되도록 했다. 예컨대 노동조합이 회사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는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면제하는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폭력이나 파괴를 주되게 동반한 경우에는 노동조합이 배상책임을 지도록 했다.

셋째, 개별 노동자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했다.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주체다. 또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하여 쟁의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쟁의행위는 집단적인 행위다. 이는 쟁의행위가 보통 노동조합의 결의와 지시에 따라 통일적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실태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쟁의행위나 노동조합 활동으로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그 책임은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부담하는 것이 맞다. 단체의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다만 노동조합의 통제에서 일탈한 개별 행위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의 책임이 인정되도록 했다.

그 외에도 노조법 개정안에는 △ 신원보증인에 대한 손해배상 금지 △ 영국 법령처럼 노동조합 규모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금액의 상한 설정 △ 쟁의행위 원인과 경위나 배상의무자의 경제적 상태에 따른 손해배상액 감면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이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 임종성 의원이 대표발의하여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발의된 개정법안 감감무소식

노조법 개정안과 별도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국가 등의 괴롭힘소송에 관한 특례법안'을 발의했다. 집회나 파업과 같은 시민들의 공적 참여를 위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소송이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전략적 봉쇄소송'(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 SLAPP)은 재판청구권을 남용하여 시민의 청원권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목적과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또는 근로자의 기본권을 행사한 개인, 노동조합 또는 비영리단체를 피고로 하여 기본권 행사를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진 민사소송"을 "괴롭힘소송"으로 정의한다. 법원은 괴롭힘소송으로 판단하면 각하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두 법안 모두 감감무소식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문위원은 사용자의 재산권 보호와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 법리를 근거로 노조법 개정안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기존의 법리나 법 해석은 악의적인 손배가압류를 막기는커녕 부추기는 효과만 낳았기 때문에 법 개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에 조그마한 위법이라도 있을 경우 사용자는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고, 법원은 그 청구를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로 인해 노동3권은 헌법 속의 장식물로 전락하고 있고, 노동자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쟁의행위를 이유로 사측이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바람에 근로자와 그 가족들이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고, 가족의 해체와 신용불량, 파산 더 나아가 심리적 불안으로 인한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은 조합비 고갈로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ILO, UN "파업권 제한하는 손배소 악용 막아야" 

현재 우리나라 법체제에서는 손해배상 청구 및 가압류 신청 취하를 대가로 노동조합 및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용자의 재산권 보호에 치우쳐, 근로자가 노동3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자의 정당한 노동3권의 행사를 제한하지 않되 사용자의 재산권 침해를 방지하는 새로운 손해배상 청구 및 가압류 제한 법리가 필요하다.
 

▲ 유성기업이 손배가압류를 악용해 노조를 파괴하려고 했던 사실이 내부 문건을 통해 드러났다. 2019년 1월 4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들. ⓒ 오마이뉴스

 
2017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 보고서는 "파업은 본질적으로 업무에 지장을 주고 손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손배·가압류가 파업을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2017년 10월 유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규약 위원회는 "손해배상 청구는 쟁의행위 참가 근로자를 상대로 한 보복 조치"라며 "파업권이 효과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파업권 침해에 이르게 되는 행위를 자제하고, 쟁의행위 참가 근로자에 대해 이루어진 보복 조치에 대한 독립조사를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ILO 29호, 87호, 98호 핵심협약에 대한 비준동의안이 의결된 지금 시점에서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노사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윤지영 변호사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영역은 노동, 그 중에서도 불안정 노동, 노동 탄압입니다. 시민단체 '손잡고', '직장갑질119'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지금 다시 헌법>(공저), <모두를 위한 노동교과서>(공저) 등이 있습니다.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 ⓒ 윤지영

 
덧붙이는 글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url.kr/jikh9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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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오건호(s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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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 우리나라는 이미 소득보장의 3대 영역인 사회부조, 사회보험, 사회수당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사각지대가 크다는 지적이 많다. ⓒ 셔터스톡

 
불평등의 시대다. 불평등은 자산과 소득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산 불평등의 핵심은 부동산이다. 과도한 부동산 집중과 불로차익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유세 강화가 중요하다. 최근 유력 대선 후보들이 '억강부약'(이재명), '약자와의 동행'(윤석열)을 말하면서도 집부자 세금 깎기 경쟁에 나서고 있어 마음이 무겁다.

소득 영역에서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1차 분배와 국가를 통한 2차 분배, 양 축으로 대응해야 한다. 1차 분배에서는 변화하는 노동시장 구조에서 노동자, 자영업자의 시장 교섭력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시장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는 불안정 취업자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제도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모든 시민을 위한 노동법', '자영업자 집단교섭권' 등 노동권의 확장이 필요하다.

배제되거나 불충분하거나

국가를 통한 2차 분배는 보통 복지, 즉 '소득보장'으로 불린다. 이 글이 다루는 주제다. 우리나라는 이미 소득보장의 3대 영역인 사회부조, 사회보험, 사회수당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 역할을 하고 있지는 못 하다. 바로 사각지대 문제다. 사각지대는 소득 지원이 절실함에도 제외되는 '배제' 그리고 설령 지원을 받더라도 급여 수준이 낮은 '불충분'으로 집약된다.


우선 사회부조에서 많은 빈곤층이 급여에서 배제되거나 낮은 급여를 받고 있다. 생계급여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돼도 2021년 기준으로 수급자는 약 153만 명, 전체 인구의 3%에 그친다. 금액도 1인가구 생계급여 최대액이 월 55만 원이다. 서울에서 이 금액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사회보험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다수가 아예 제도 밖에 있다. 2021년 비정규직 노동자 중 직장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사람은 37%, 건강보험은 48%, 고용보험은 50%에 그친다. 사회수당은 아동수당과 기초연금 등 특정 연령대에 한정되어 있다. 

이에 사회부조는 저소득층 다수를 포괄하며 적정 급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 사회보험은 현행 고용 기반에서 소득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가입하는 '소득 기반'으로 바꿔야 한다. 또한 사회수당은 농어업, 돌봄, 공익참여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집단 수당으로 확장해야 한다.

근래 논의를 보면 사회보험과 사회수당에서는 개혁의 방향을 두고 공감대가 이뤄진 듯하다. 사회보험은 실시간 소득 파악을 토대로 소득 기반으로 발전시키고, 사회수당에서는 다양한 역할집단 수당이 논의되고 있다.
  

▲ 서울 명동 거리에서 점심식사를 하려는 시민들 2021.10.25 ⓒ 연합뉴스

 
인류 최초 기본소득과 음소득세

반면 저소득층 소득보장에서는 여러 대안이 경쟁하고 있다. 현행 생계급여를 혁신하는 '생계급여 강화', 모든 시민에게 동일액을 지원하는 '보편적 소액 기본소득', 그리고 서울시 안심소득으로 선보이는 '음(陰)소득세(Negative Income Tax)'가 그것이다. 

이 중 생계급여 강화는 기존 제도틀을 토대로 삼지만 개혁 폭이 예전보다 강하고, 기본소득과 음소득세는 인류사회에서 처음 시도되는 제도이다. 세 대안 모두 기존 틀에서 보면 상당한 수준의 혁신안이다. 차례로 살펴보자.

생계급여는 시행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대상 규모와 급여 수준에서 그리 개선되지 못했다. 반면 근래 제안되는 생계급여 강화는 이전에 비해 강도가 훨씬 높다. 예를 들어, 급여수준을 현행 중위소득 30%에서 40% 혹은 50%로 인상하고 대상 선정에서도 재산 기준을 대폭 완화한다. 이러면 대상도 크게 늘고 지원액도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다만 현행 틀을 유지할 경우 저소득층 소득보장제도로 생계급여, 근로장려금, 국민취업지원제도(한국형 실업부조)가 병존해 소득보장체계가 복잡해지는 문제가 남는다. 2020년부터 생계급여에 사업(근로)소득 공제가 적용되면서 저소득층 소득보장제도들이 모두 소득보장과 근로동기 부여라는 두 목적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는 제도 효율화와 수용성을 위해서 제도 단순화를 검토할 때다.

두 번째 대안은 보편적 소액 기본소득이다. 처음에 기본소득이 소개될 때는 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정도로 높은 금액으로 등장했으나 지금은 현실 여건을 감안해 월 10~30만 원의 소액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1년 100만 원(첫해는 연 25만 원으로 시작) 월로 환산하면 약 8만 원의 기본소득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기존 복지국가 소득보장과 병존하는 '기본소득 있는 복지국가' 혹은 '혼합복지체제'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에게 제공되기에 사각지대를 남기지 않는 장점을 지닌다. 소득이 있어도 지급되므로 소액 방식에서는 근로동기를 낮추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재분배 효과가 논란이다. 기본소득은 경제적 수준을 따지지 않고 동일액을 지급하기 때문에 조세기반의 현금복지에서 가장 재분배 효과가 작은 제도이다.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러한 분배 제도가 적절한지 의문이다.
  

 



▲ 음소득세는 과거 밀턴 프리드먼이 옹호했던 제도여서 보수적 소득보장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최근 한국에서 친복지 진영 일부도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심상정 후보도 유사 공약을 발표했다. ⓒ 셔터스톡

 
세 번째는 기본소득의 낮은 재분배 효과를 비판하며 부상한 음소득세이다. 음소득세는 과거 밀턴 프리드먼이 옹호했던 제도여서 보수적 소득보장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최근 한국에서 참여연대, 내가만드는복지국가 등 친복지 진영 일부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기존 소득보장제도를 대대적으로 폐지하는 밀턴 프리드먼의 방식을 '구조조정형 음소득세'로 비판하고, 대신 기존 제도들을 대부분 유지하는 '복지확장형 음소득세'를 제안하면서 이를 '시민최저소득'으로 명명했다.

음소득세는 정부가 정한 기준액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분 중 일정 비율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시민최저소득의 경우, 2022년 중위소득 100%(1인 가구 약 200만 원)를 기준으로 부족분의 50%를 지원한다. 이러면 무소득자는 부족분 200만 원의 절반인 100만 원을 지급받고, 100만 원 소득자는 부족분 절반인 50만 원을 지급받아 최종 소득이 150만 원으로 늘어난다. 이때 필요한 재정은 약 50조 원으로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 재정과 비슷하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시민최저소득은 월 8만 원 수준의 기본소득에 비해 중위소득 100% 이하 계층에서 소득보장 효과가 높다. 대신 중위소득 100%를 넘는 계층은 시민최저소득에서는 혜택이 없고 기본소득에서는 동일하게 월 8만 원을 받게 된다.


 



▲ 심상정 후보의 시민최저소득과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 비교 (2022년 1인가구 기준) ⓒ 오건호

  
사전 논점 세가지

음소득세는 현행 생계급여와 비교해 보면 보장 대상이 중위소득 30%에서 중위소득 100%로 대폭 확대되고, 최대 지원액도 중위 30%(2022년 1인 가구 약 60만 원)에서 중위 50%(100만 원)로 올라간다. 

보통 중위소득 50% 이하 가구의 비율을 상대적 빈곤율이라고 한다. 2019년 시장소득 빈곤율이 21.4%이고, 공적이전소득이 반영된 가처분소득 빈곤율은 16.3%이다. 만약 시민최저소득이 시행되면 중위소득 50% 이하 가구는 존재하지 않으니 현재 상대적 빈곤 기준에서 사실상 '빈곤 제로'가 구현되는 셈이다.

음소득세는 새로 선보이는 제도인 만큼 점검할 논점이 많다. 음소득세 정당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논점은 대상 기준(가구 vs. 개인), 근로동기 약화, 소득파악 형평성 등 3가지로 집약된다. (복지 구조조정 범위, 재산 반영 기준 등 여러 논점이 더 있으나 이는 정책 가치 영역이어서 설계자의 판단에 좌우되는 주제들이다.)

첫째, 음소득세 지급 대상은 가구인가, 개인인가? 근래 소득보장에서 개인의 창의와 자율을 중시하는 흐름이 부상하고 있다. 또한 가구 기준일 경우 수급권 확보를 위해 인위적으로 가구를 분리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소득보장에서 개인 단위를 지향하는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재 경제 공동체가 가구인 현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개인 지급일 경우 중상위계층 비경제활동 가구원이 모두 수급자가 되는 문제도 발생한다. 가구 분리는 미성년자와 부부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 소득보장 대안에 대한 논의는 소득보장 강화뿐만 아니라 소득 파악에서 세입 확충까지 재정체계를 혁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 셔터스톡

 
둘째, 음소득세가 근로동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급률 50% 음소득세에서는 추가로 시장소득이 10만 원 늘었을 때 실제 증가하는 가처분소득은 5만 원이다. 이런 소득보장체계에서 근로동기가 약화될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추가 소득 증가율이 0.5인 표준모델 이외에도 0.6인 수정모델 등을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근로장려금처럼 소득구간별로 탄력 증가율을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셋째, 음소득세는 전체 가구 거의 절반에 소득과 연동해 지급하기 때문에 촘촘한 소득파악이 중요하다. 작년부터 '실시간 소득파악'이 추진 중이고 우리나라는 전자거래 매출 자료 비중이 높아서 과세당국이 의지를 가지면 충분히 가능하다. 

수렴

지금까지 저소득층 소득보장 대안으로 생계급여 강화, 기본소득, 음소득세를 살펴봤다. 모두 현재 소득보장의 사각지대를 넘어서려는 획기적인 대안이다. 그만큼 저소득 소득보장을 혁신하려는 시대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대안이 서로 다른 모양을 띠지만 사실은 동일한 원리로 수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계급여에서는 근로소득 50%를 소득인정액 계산에서 제외하고(소득공제율 50%), 기본소득에서는 시장소득에 50% 소득세를 적용하며(과세율 50%), 음소득세에서 기준소득 100% 대비 부족액의 50%를 지급하면(지급률 50%), 세 제도는 소득보장이 정확히 같아진다.

 

▲ 생계급여 = 기본소득 = 음소득세. 소득공제율, 과세율, 지급률을 모두 50%로 설정하면 세 제도의 소득보장이 정확히 같아진다. ⓒ 오건호


위 그림은 각 50%의 공제율(생계급여), 과세율(기본소득), 지급률(음소득세)의 제도가 결과적으로 동일함을 보여준다. 즉, 세 대안이 서로 다른 기원에서 출발했지만 최종 도착지가 같다. 이는 저소득층 소득보장이 일정 기준액 대비 "부족분의 전부"를 채워주는 전통적 '보충성 원리'에서, 앞으로는 소득보장 강화와 근로동기 독려를 위해 기준액을 상향하고 "부족분의 일정 비율"을 채워주는 '지급률 원리'로 전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보편 증세도 회피하지 말아야

코로나19를 맞으면서 우리 사회에서 소득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강해지고 있다. 특히 저소득층 소득보장에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들이 논의를 이끌고 있다. 생계급여 강화는 예전과 비교하면 강도가 세고, 기본소득과 음소득세는 인류사에 처음 선보이는 소득보장이다. 이 중 음소득세는 보통 보수적 대안으로 알려져 왔으나 소득보장 효과를 증진하는 진보적 대안으로도 제안되고 있다.

앞으로 저소득층 소득보장 대안 논의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촘촘한 소득파악이 이뤄져야 한다. 대규모 재정이 필요하기에 상위계층 대상의 기존 증세 방안과 함께 소득공제 축소, 부가가치세 인상 등 보편 증세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이 대안 논의는 소득보장 강화뿐만 아니라 소득 파악에서 세입 확충까지 재정체계를 혁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오건호는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관심은 연금, 소득보장, 주거, 의료 등 기존 복지체제의 혁신입니다. 빈곤노인기초연금보장연대, 집걱정없는세상연대, 병원비백만원연대 등 여러 연대단체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내가 만드는 공적연금>, <나도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다> 등이 있습니다.
 

▲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 오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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