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영화 조커 Joker, 사회복지상담사와 아서의 대화, 아서가 바랬던 것은 복지와 돈을 넘어선 '존재감'의 상호인정이 아니었을까?

by 원시 2020. 2. 8.

아서가 바랬던 것은 복지와 돈을 넘어선 '존재감'의 상호인정이 아니었을까? 

영화 조커는 정치적 반란을 다룬다. 마치 19세기 뉴욕 폭동을 연상시키는 '부자 타도' 무정부주의적 반란같다. 그러나 토드 필립 감독은 1981년 뉴욕 (영화에서는 고담 시티)를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2019년 미국  현실이기도 하다. 주목해서 볼 점은 아서와 사회복지사와의 대화인데, 이는 미국 정치,사회 체제와 규범의 오작동을 보여준다.  


첫번째는 아서가 사회복지사 상담의 한계를 폭로한다. 아서는 사회복지사 공무원에게 항의한다. 왜 당신은 나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라' '일은 잘 하고 있느냐?'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취급하느냐?'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 사람들이 이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알게되었다'고 소리친다.


아서는 자신에게 약을 주고, 정신상태를 점검하는 사회복지사 공무원에게 감사 표시를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공무적으로 행정적으로 기계처럼 대우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아서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친구, 우정, 사랑, 동료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다. 같은 동료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아서는 그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한다. 동네 10대 아이들에게 맞고, 사장에게 부당해고 당하고, 동료에게 배신당한다. 아서는 순진한 덜렁이 광대가 더 이상 아니고, 자기 존재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잔혹하고 단호한 악당' 조커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내가 존재하는 사실'을 '나를 무시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식임은 선언한다. 그리고 행동개시한다. 


아서가 엄마 페니를 질식시켜 죽인 후, 모친 사망 소식을 듣고, 직장 동료 게리와 랜들이 아서를 방문했을 때,

아서는 '엄마 사망을 자축한다'고 말하고, '정신병 약도 끊었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아서는 자기가 정신병 약을 먹고, 상담사와 복지사의 행정적 관리를 받는 것을 거부해렸다. 물론 그 대안은 어떤 이념적 지향을 표방한 혁명가가라기 보다는 악당 '조커'로 변신이다.


두번째 '조커'가 보여주는 것은 미국 복지 삭감이다. 아서는 상담사가 자기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반면, 복지 상담사는 시 당국이 아서와 상담 예산을 없애버려, 앞으로는 아서가 약과 상담을 제공받을 수 없음을 통보한다. 자기도 해고당하고, 아서도 상담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됨을 알린다.  


아서가 그럼 '약은 어디서 타냐?'고 묻는다. 상담사는 '미안하다 i'm sorry' 라고 답변할 뿐이다. 무능한 미국 사회체제를 보여준다. 토드 필립 감독은 정신병을 앓는 아서의 상담비용 삭감하는 미국 정부의 무능과 무자비함을 폭로한다. 그리고 행정적인 복지상담과 약 제공으로는 아서가 시민으로서 동료로서 공동체 일원으로서 자기 자존감을 회복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아서는 자기같은 정신병 환자를 시당국이 관리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은폐하려는 것과 같다고 불평한다. 


미국도 한국도 사회복지 체제 과소가 문제다. 특히 교육,의료,고용,육아,노인복지 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다. 사회복지 혜택과 복지비 예산 인상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회복지비 증가와 해당 공적 서비스의 증가가 인간존엄성 실현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아서가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조커'는 영웅의 승리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서가 반란 수괴같은 '조커'로 변신했다가 다시 결국 정신병동에 수감된다. 아서는 구질서와 기득권, 그들의 규범에 반항했지만, 그것들을 새로운 체계로 만들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겨우 할 수 있는 건, 정신병동 재수감이고, 재탈출 시도이다. 아서 (조커)는 자기 자신과 사회 전체를 비웃는다. 



사회복지는 아서의 자존감 확인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사회 구성원을 복지혜택의 수동적 고객으로, 행정 서비스 대상으로만 대우하는 사회복지제도는 아무리 돈을 많이 뿌린다고 해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시민들의 자유와 우정, 자존감의 상호인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사회복지는 공적 행복의 수단이지, 목표 그 자체는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아서의 상담사, 그 대화 배경은 어둡다. 







아서는 결국 다시 정신병동으로 수감된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발자국이 빨갛다. 멀리서 햇볕이 비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