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자료.
봉오동의 전설적인 영웅, 홍범도 장군
항일유적답사기 (14) - 봉오동 전적지 Ⅱ
03.05.06 17:2-
박도(parkdo)
▲ 포수에서 독립전쟁의 영웅이 된 홍범도 장군
홍범도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시 서문안 문렬사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평안도 용강군 화장골에서 살았는데 순조 때 농민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홍경래 난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가친척이 화를 입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와서 장사를 하며 살았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할아버지 생전에 남긴 빚 때문에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녀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官妓)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가난한 부부는 생계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혼 이태 후에는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임신기간에 영양 섭취가 부족했던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다 이레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윤식은 심청의 아비처럼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떴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병정,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했다.
그는 공장에서 막일꾼 생활 중에 부도덕한 공장주가 품삯을 일곱 달이나 주지 않고, 도리어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야겠다는 데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공장주를 냅다 꽂고서는 그 길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러나 평생을 절간에서 보낼 사나이가 아니었다. 한 해 남짓 수도 생활을 청산하고 하산했다.
그때 홍범도는 수도 생활 중에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봇짐을 지고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해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하고 방랑객이 되었다.
▲ 봉오동 전적지 계곡 들머리,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유인했던 곳이다
ⓒ 박도그는 그때 불평등한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 했기에 무예를 닦는 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에서 만난 포수로부터 사냥총 한 자루를 구입했다. 그 길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사냥꾼생활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사상과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4년의 갑오 동학 농민전쟁과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특히 일제 깡패무리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포위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난 홍범도는 울분이 하늘을 찔렀다.
일제 침략자들이야말로 천하에 제일가는 야수 무리로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항일 투지가 불탔다.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후,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라 정미 7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섬멸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홍범도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여서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경술국치 이듬해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첫 국내 진 격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했다.
▲ 지금은 '봉오저수지'로 변한 봉오동 들머리
ⓒ 박도홍범도 의병부대는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지금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비조(鼻祖)로 불려지고 있다.
일제하 우리나라 독립 전쟁 효시(嚆矢)로 일컫는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 지휘 아래에 이루어졌다.
아울러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이 주역으로 쟁취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와의 생사 결전에서 부인과 두 아들까지 잃고 혈혈단신으로 남으면서도 항일 구국 투지만은 평생토록 굽히지 않았다.
장군은 일제에게는 ‘나는 장군’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 ‘백두산 호랑이’로 추앙 받았다.
장군의 거룩한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에,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에, 백두산 밀림과 드넓은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장군은 조국 광복 이태 앞둔 1943년 10월 2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파란 많았던 항일 구국 생애를 마감하였다.
▲ 1984년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 세워진 홍범도 흉상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지 40년 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는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지고 생전에 살았던 곳은 ‘홍범도 거리’로 명명되었다.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 독립군 측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10년 만에 숙원인 독립전쟁 제1회전을 통쾌한 승리로 이끌어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떨쳤다.
아울러 우리 독립군 부대간의 군사통일을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병력 보충과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반면 일제는 그동안 얕잡아 보았던 우리 독립군의 전투력을 새롭게 평가하여 독립군을 근원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서둘러 만들었다.
아무튼 이 봉오동전투로 민족 수난을 극복하려는 한국 독립군에게 큰 광명을 줌과 아울러, 지휘관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에게 무서운 대상으로 인식되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독립군의 명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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