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관련 언론 보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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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40주년]① 궁정동의 총소리…엇갈리는 평가
2019-10-25 06:00
[편집자 주: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의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과 만찬중 김재규 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숨졌습니다.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국가원수 피살이었습니다. 연합뉴스는 26일 40주년을 맞는 10·26 사건을 당시 수사 관계자, 변호인 등의 회고록과 증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3건의 기사를 송고합니다. 기사에 인용된 회고록 내용과 증언에는 전달자의 시각과 입장이 반영되어 있는 만큼 진실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립니다.]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탐사보도팀 기자 = 26일은 궁정동 안가에서 유신 정권을 일거에 무너뜨린 총성이 울린 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분분하다.
박 대통령 시해 혐의로 체포된 김재규와 박선호 의전과장을 비롯한 중정 직원 6명은 그해 12월 20일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과 2심(80.1.21)에서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육군 대령이던 박흥주 중정부장 수행 비서관은 단심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이듬해 3월 6일 총살형에 처해 졌고, 김재규 외 6명에 대해서는 대법원 상고 기각 나흘만인 5월 24일 교수형이 집행됐다. (안동일,『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p.393)
경호실에서도 차지철 실장, 정인형 처장, 안재송 부처장, 김용섭, 김용태(이상 경호원) 등 5명이 현장에서 중정 경비원들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정승화(2002년 사망) 육군참모총장은 1980년 내란 방조 혐의로 기소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징역 7년으로 감형된 그는 1995년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1997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승화,『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p.273)
다만, 법률적인 판단과 무관하게 사건 전후로 그가 김재규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데다, 이후 김재규와 함께 육군본부 B2 벙커로 이동하는 등의 석연찮은 행적은 의혹을 남겼다.
합동수사본부 문건을 보면 수사관들은 이런 부분과 함께 정 총장이 김재규의 요구대로 병력을 통제하고 이동 지시를 내린 점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전두환 회고록 1 혼돈의 시간』.12·12 사건 검찰수사 기록 6,438∼6,442)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2016년 사망) 비서실장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 중요 임무 종사 미수 공모 혐의로 군법회의 1심에 이어 2심(1980.1.28)에서도 사형을 받았으나 곧바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의해 무기로 감형했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1988년에 특별사면 복권 됐다.(안동일,『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p.368)
◇ 여전히 엇갈리는 평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불리는 10·26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부모나 임금을 살해한다는 의미의 '시역'(弑逆·부모나 임금 살해)부터 '계획 살인', '우발적 단순 살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일각에선 10·26이 결과론적으로 유신 체제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들어 정반대의 평가를 하거나 재평가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평가는 통찰의 결과라기보다는 다분히 평가자 개인의 성향이나 김재규와의 관계 등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이 짙다.
김재규의 1·2·3심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13대ㆍ14대 국회의원 역임)는 그를 단순한 대통령 시해범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로 유신이 철폐된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재평가를 주장한다.
김재규가 1심에서 사선 변호인 조력을 거부한 뒤 국선변호인을 맡았고 2·3심에선 사선 변호인단에도 참가한 안동일 변호사는 재판을 거치면서 김재규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처음 김재규를 정치공작을 자행해 온 유신 독재의 주구이자 주군을 살해한 패륜아로 봤지만, 4차까지의 공판 과정에서 줄곧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다는 것이다.
◇'우발적 사건' vs '계획적 거사'
10ㆍ26의 성격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볼지 아니면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볼지에 대한 견해도 여전히 엇갈린다.
사건 발생 직후엔 김재규가 차지철과 다투다 충동적으로 총을 뽑았다는 추정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다.
김계원 비서실장도 검찰신문(제3차 공판 79.12.10)에서 10ㆍ26을 우발적 사건으로 추정했다. 김 부장의 평소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가 고려됐고 만찬에서 정치 문제로 계속 수세에 몰리던 상황 등을 들어 '돌연적 결심'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1973∼1975)을 지낸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대사(1989∼1993)도 2011년 5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김재규가 만찬장에 갈 때만 해도 살의(殺意)는 없었으며 "사건을 촉발한 건 차지철이었다(The triggering factor was Cha Jeechul)"면서 '격정에 의한 범죄(passion of crime)'로 추정했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사장도 김재규가 거사 직후 지나칠 정도로 당황했던 점이나 권총 오작동으로 추가 격발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우발적 행동'에 무게를 뒀다.
반면,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낸 항소이유서 내용을 토대로 계획된 거사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안 변호사에게 10·26 이전에도 서너 차례 대통령 시해 준비를 했지만 결행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강신옥 변호사도 "우발적 거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구상해오다 그날 전격적으로 단행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김재규에게 "박선호 의전과장에게조차 끝까지 숨긴 이유가 무언가"라고 묻자 "보안 때문에 그랬다. 정승화도 내게 속아 궁정동 식당에 왔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던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14·15대 의원)도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우발적 범행은 절대로 아니다"고 했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 때 수사과장으로 재직했던 이학봉 합수부 수사국장에게 사후에 '3단계 혁명계획'을 털어놓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두환 회고록 1 혼돈의 시대』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11월 6일 이학봉 국장이 김재규를 찾아가 "무슨 생각으로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겁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 '3단계 혁명계획'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소요 확산으로 민심이 떠난 상황에서 대통령을 죽이고 혁명 성공을 위해 정 총장을 사건에 끌어들이는 것이 1단계, 정 총장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서울에 진주시키는 동시에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국가통치 기능과 권력을 장악하는 2단계, 혁명 선포 후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의장 자리에 본인이 앉는 3단계의 전략을 짰었다는 설명이다.
허 이사장은 "김재규는 합수부 조사 때는 (범행을) 자책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를 민주 투사로 생각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돼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수차례 진술(자필 진술서나 조사 과정의 발언)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김재규·김계원·정승화 등 3인이 '궁중암살 공모'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이들 모두가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박 대통령 서거 사실 등에 대해 허위 보고를 한 점을 들었다. 김 실장과 정 총장이 김재규의 요구로 경호실과 수경사, 9공수 병력출동을 지시하면서 장관에게는 보고하지 않은 점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허 이사장은 강조했다.
한편, 사건 직후 시중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와 관련,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는 그해 11월 19일 자 전문에서 "한국의 진보나 보수 등 이런 견해를 가진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당분간 우리 직원들의 삶이 고달플 수도 있게 됐다(Suspicion of U.S. complicity in the death of President Park persists in Korea…(중략)…)"고 썼다.
duckhwa@yna.co.kr
0·26 40주년]②국내외 문건·증언으로 재구성한 10·26(1)
2019-10-25 06:00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탐사보도팀 기자 = "어디로 가지? 육본(육군본부), '부'(중앙정보부 남산 분청)?" "육본으로 가시죠."
김재규(53)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직후 황급히 현장을 빠져나오며 차량 동승자들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김재규는 조수석에 탄 수행 비서관 박흥주(39)가 "그렇게 하시죠"라며 정승화(50) 육참총장의 '육본행' 제안을 거들자 그대로 따랐다.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 1심(국선)과 2·3심(사선)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79·홍익법무법인 대표) 변호사는 "이 한 마디가 김재규의 운명을 갈랐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건 당일 오후 6시 중정 안가에 도착했고 만찬 중이던 7시 45분 김재규의 총격에 즉사했다. 차지철(45) 경호실장은 김재규의 총격을 두 차례나 받고도 숨이 붙어 있었으나 확인사살에 나선 김태원(32)의 M16 소총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국가원수 살해 사건이었다.
◇ 용산 미군 헬기장의 갈등
사건 당일 오전 용산 미군 헬기장에서는 김재규와 차지철 경호실장이 갈등했다.
박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 행사와 보안시설 개소식 참석을 위해 헬기장에서 '1호 헬기'에 오른 뒤, 김재규가 1호 헬기에 동승하려 하자 차지철 경호실장이 제지하며 "2호기로 오라"고 했다.
10·26 사건 때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장(육군 중장)이었던 김영선(90) 전 국회의원(11·12·13대)은 이 갈등이 저녁까지 이어졌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2018년 12월 국내 인터넷 매체 미디어파인과 인터뷰에서 "(궁정동) 만찬은 비서실장 김계원(2016년 사망)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이후 2호 헬기를 타지도 않았고 중정이 관할하는 보안 시설 개소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김계원이 귀경 중 차 실장에게 만찬을 제안하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해 '최후의 만찬'이 성사됐다는 게 김영선 전 의원의 전언이다.
오후 4시 헬기 편으로 귀경한 박 대통령은 6시께 김계원, 차지철과 함께 중정이 관할하는 궁정동 안가의 만찬장에 도착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 대응 문제로 대통령에게 질책을 당하자 오후 7시께 만찬장 밖으로 나갔다. 김재규는 만찬장에서 약 50m 떨어진 안가 본관에서 김정섭 중정 제2 차장보와 식사 중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만찬을 마치고 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어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꺼내 호주머니에 숨기고 돌아왔다고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전모 발표문은 기록하고 있다.
◇ 처절한 사건 현장 긴박했던 3분
대통령의 질책에 차지철의 '훈수'까지 듣고 격분한 김재규는 부하인 박선호와 박흥주를 불러 '거사' 결행을 지시했다. 두 사람은 "(살해 대상이) 각하까지입니까?"라고 물으며 이행 여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실제 현장에 있던 경호원이 4명인데 7명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며 '연기'를 건의했으나 여의치 않자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박선호는 절친한 해병대 동기인 정인형 경호처장에게 총을 쏘기 전 "우리 같이 살자"고 소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안동일 변호사가 쓴『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에 따르면 만찬장에선 대통령 왼쪽에 앉았던 가수 심민경(24·예명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에 이어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고, 차지철은 '도라지' 노래로 흥을 돋웠다. 초조한 듯 시계를 들여다보던 김재규는 식당 관리인인 사무관이 들어와 "과장님이 뵙자고 합니다"라고 속삭이자 따라나섰다. 이어 신재순(22)이 심민경의 기타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을 부르자 대통령도 따라 불렀고, 이후 심민경이 기타 줄을 조율하던 중 총성이 울렸다. 오후 7시 45분이었다.
김재규는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며 권총을 뽑아 차지철과 대통령에게 각각 한 발씩을 쐈다. 그는 총신이 짧아 휴대하기 좋은 독일산 월터 PPK 권총을 쏘기 전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말도 내뱉었다. 이어 김계원을 툭 치며 "각하를 똑바로 모시세요"라고 힐난했다. 대통령은 가슴 부위에 총탄을 맞고 머리를 식탁 쪽으로 떨구었다가 오른쪽 신재순 씨 쪽으로 쓰러졌다.
합동수사본부의 사건 발표문에 따르면 김재규는 오른쪽 팔목에 관통상을 입고 화장실로 피신하는 차지철을 향해 3번째 탄환을 쏘려 했으나 총신에 탄피가 끼어 방아쇠 작동이 안 됐다. 방 밖으로 나와 박흥주 비서관의 총을 빌리려 했으나 실탄이 없었고, 박선호(45) 의전과장의 38 리볼버(Smith & Wesson) 권총을 가지고 돌아왔다. 차지철은 경호원을 부르며 방문 쪽으로 나오려 했고, 김재규와 마주치자 저항하려다가 복부에 다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김재규는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각하' 머리 쪽으로 1발을 추가로 발사해 절명케 한다.
검찰 신문 기록을 보면 김재규는 첫 총성 후 밖으로 도피한 김계원을 복도에서 만나 "혁명이 끝났으니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시오"라고 마무리를 당부했고, 김계원은 "알았어"라고 답한다.
대기실 마루 쪽 문 앞에 있었던 박선호는 첫 총성을 신호로 경호원들을 제압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안재송 경호부처장과 정인형 경호처장에게 선제 사격을 가해 쓰러뜨렸다. 주방에서 식사 중이던 박상범과 김용섭, 또 뒤뜰 쪽으로 나가던 김용태 등 경호관 3명은 박흥주와 이기주(31·중정 경비원), 유성옥(36·중정 운전사) 등이 난사한 15발의 흉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경호원 박상범(76)은 4발의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확인 사살을 모면해 목숨을 건졌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 경호실장에 임명돼 화제가 됐다.
불과 3분 만에 목적을 달성한 김재규는 안가 본관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피 묻은 셔츠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고 식당으로 뛰어온 그는 정 총장에게 "큰일 났다. 차 타고 가며 얘기하자"라며 그를 전용차에 태웠다. 뒷좌석 좌우에 김정섭과 정 총장을 앉히고 자신은 중간에 앉아 육본 벙커까지 이동했다. 합동수사본부 수사전모 발표문에 담긴 사건 기록이다.
◇'네 시간 천하'로 끝난 김재규의 10ㆍ26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최근 연합뉴스 기자에게 당시 김재규가 정승화에게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대통령 서거'를 암시하면서 기밀 유지와 계엄령 선포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전두환 회고록 1 혼돈의 시간』에 기록된 이후 상황은 이렇다.
오후 8시께 육본 벙커에 도착한 김재규는 청와대에 있던 김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최규하 총리를 데리고 오라고 요청했다. 최 총리와 김계원을 필두로 구자춘 내무부 장관, 김치열 법무부 장관, 유혁인 정무 1 수석 비서관 등이 속속 벙커에 도착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들까지 모이면서 장소가 비좁아지자 이들은 밤 11시께 국방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최 총리는 노 장관에게서 대통령 서거 사실을 보고 받은 뒤 김재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그는 "대통령 유고다. 보안을 유지하고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어 김재규는 김계원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 계엄령을 선포해 계엄사 간판을 군사혁명 위원회로 바꿔 달자며 국무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김계원은 최 총리에게 계엄령 선포를 위한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했고 최 총리가 수락했다.
그런데 국무회의 계엄 선포 의결 절차 진행 중 제동이 걸렸다. 신현확 부총리와 김성진 장관 등이 비상계엄 선포 사유를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다. 김계원은 계엄령을 의결, 선포해 속전속결로 권력을 장악하려던 김재규의 예상이 빗나가자 자신들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노 장관과 정 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렸다. 사건 발생 후 4시간가량이 흐른 오후 11시 30분이었다.
duckhwa@yna.co.kr
(계속)
10·26 40주년]③국내외 문건·증언으로 재구성한 10·26(2)
입력 2019.10.25. 06:02 수정 2019.10.25. 10:36(서울=연합뉴스) 홍덕화 탐사보도팀 기자 = 전두환 회고록은 10·26 사건 발생 후 김재규가 맞이한 최대 위기를 '동지'로 생각했던 김계원 비서실장과 정승화 육참총장의 갈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계원은 김재규의 설득으로 육군본부 벙커에 오기는 했으나 고민 끝에 김재규가 시해범임을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정승화 육참총장에게 알렸다. 사실을 알게 된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오후 11시 50분 국무회의가 열려 계엄 선포 안을 심의하던 중 김성진 문공부 장관 건의로 10분간 정회한 비상 국무회의는 이튿날 새벽 두 시에 속개됐다.
김계원의 실토로 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게 된 최 총리와 신 부총리 등 국무위원들은 대통령 유해가 안치된 사실 확인을 위해 국군서울지구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27일 새벽 3시 국무회의를 마쳤고 4시10분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사령관에는 정승화 육참총장이 임명됐으나 국무위원 중 누구도 그가 김재규의 요청으로 사건 현장 인근에 있었던 사실은 알지 못했다.
자정 무렵 정 총장에게서 '신병 확보' 지시를 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 군사정보과장 오일랑 중령에게 육본 헌병 대장 복장을 하도록 했다.
국방부 장관실에서 최 총리와 국무위원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김재규를 밖으로 유인하는 일은 정 총장의 비서실장으로 위장한 김진기 헌병감이 맡았다.
그가 조약래 국방부 장관 보좌관을 보내 정 총장이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을 하자 김재규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김진기와 오일랑이 국방부 지하 계단 쪽으로 김재규를 데리고 가자 박흥주가 따라붙었으나 헌병들애 제지됐다. 대기하던 차량 앞에 온 오일랑은 뒷문을 열고 "부장님, 타시죠."라며 김재규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김재규가 체념한 듯 저항하지 않자 뒷좌석 왼쪽에 밀착해 앉아 김재규의 권총을 빼앗았다. 27일 0시 30분의 일이다.
보안사 정동 분실로 압송된 김재규는 허화평 대령의 안내로 2층 응접실로 가더니 "전 사령관 좀 오라고 해. 지시하거나 상의할 일도 있다"고 했고 "(내가) 여기 잡혀 있는 사실을 알면 부하들이 쳐들어올 거야"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전두환 당시 사령관은 인근 중정 분실 쪽이 반격할 수 있다는 허화평 대령의 우려를 받아들여 27일 오전 2시 김재규를 서빙고 분실로 이송하도록 했다.
조갑제의 『제5공화국』에 따르면 그사이에 박흥주와 박선호 등 사건 가담자 6명도 전원 체포됐다. 보안사의 우국일 참모장은 새벽 1시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청와대 경호실 직속인 33 헌병대 병력 지원을 받아 사건 현장인 궁정동 식당을 접수하고 (중정의 반격에 대비해) 보안사 경비도 강화하겠다고 건의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신병을 확보해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는 정 총장의 지침을 받아 새벽 2시께 헌병대 병력을 안가에 보내 중정 경비원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와 조사받던 김재규는 수사관들이 상황 파악을 위해 켜 놓은 라디오에서 새벽 4시 10분께 '정승화 계엄사령관 임명 소식을 듣고 돌연 손뼉을 치면서 떠들어댔다고 전두환 회고록은 전한다.
허화평 이사장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요청으로 범행 현장 인근에 있었고 사건 직후 육본으로 동행한 사실을 그때서야 수사관들이 알게 된다고 전했다. 김재규는 계엄사령관 임명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안도한 듯 조사관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사실을 줄줄이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학봉 당시 수사국장은 이를 전 사령관에게 즉각 보고했고 수사관들은 정승화와 김재규의 공모에 대한 심증을 굳히게 됐다고 허 이사장은 부연했다.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 후 첫 단계 계획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비상계엄 선포를 재촉하면서도 그 사유를 궁금해하는 국무위원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급기야 김성진 문공부 장관 등이 반발하며 정회를 요구했고 국무회의는 중단됐다. 전두환 회고록은 이 시점을 "김재규에게 치명적인 순간"으로 묘사했다.
"김재규와 김계원은 계엄령 선포 의결을 앞둔 시점에서 상황이 그렇게 반전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중략)...김계원 실장이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이때였다. 비상 국무회의가 좌초되자 김재규의 쿠데타 기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계원은 회의가 중단되자 슬며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옆방으로 가 국방부 장관 보좌관에게 노재현 장관과 정승화 총장을 급히 불러오라고 요청했고, 두 사람에게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임을 밝히고 "그에게 권총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는 게 전두환 회고록에 묘사된 당시 상황이다.
김재규를 체포해 조사한 전두환 계엄사 합수본부장은 사건 발생 이틀 만인 10월 28일 중간수사 결과를, 11월 6일에는 수사 상황 전모를 각각 발표했다. 다음 날인 7일에는 언론 공개 하에 현장 검증을 했고 11월 13일에는 김재규와 수하 7명, 김계원 등 8명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 미수 혐의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다.
김재규는 서빙고 분실로 압송된 뒤 수사관들에게 "김계원이 나를 배신했지만 정 총장은 병력 동원 내용을 장관이 아닌 내게만 보고하는 등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며 정 총장과의 묵계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전두환 회고록은 전했다.
이학봉 수사국장 등 수사관들은 정 총장이 최소한 육본 벙커에서 병력 동원 상황을 김재규에게 알려주던 그 상황까지는 김재규의 의도대로 군을 움직여주었다고 의심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정 총장은 훗날 12·12사태로 총장 공관에서 합수부 수사관들에게 강제 연행돼 조사를 받을 때 벙커 내 총장실에서 김재규에게 군 수뇌 소집 사실과 계엄군의 출동 상황을 보고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정 총장은 또 수사관이 "계엄군의 점령 목표에 대해 (김재규에게) 문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에 "김재규에게 협조하고 있다는 뜻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라고 시인했다. (1980·2·6. 피의자 신문조서, 12·12사건 검찰 수사기록 6,990쪽.)
김재규와 그의 중정 부하 6명, 김계원 등 8명은 12월 4일 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첫 공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 중 7명은 12월 20일 1심 판결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유석술 피고인만 증거 은닉죄로 3년 형을 받았다. 이듬해 1월 28일 항소심 판결에서는 김계원 피고인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현역 군인이던 박흥주 대령은 단심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이듬해 3월 6일 수도권 부대 소재지인 경기도 시흥시 소래면의 한 야산에서 총살됐다.
안동일 변호사의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를 보면 박흥주는 사형 집행 직전 '대한민국 만세'를 두 번이나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한다.
태윤기 변호사 등은 재심 청구(1979·12·26) 등을 통해 박흥주의 사형집행을 막으려 애썼다. 그러나 계엄 당국은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도 나기 전에 박흥주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것이 문제라고 안동일 변호사는 지적했다.
김재규와 박선호, 유석술, 이기주, 김태원, 유성옥 등 부하 5명은 상고심 판결(1980·5·20)에 기대를 걸었으나 허사였다. 김재규는 최후 진술에서 부하들은 죄가 없으니 선처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명에 대한 교수형은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집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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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등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시해사건 공소장 전문
피고인 김계원은 본적지에서 김길준의 장남으로 출생, 연희전문학교2년을 수료, 학도병으로 일본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 소위에 임관, 종군타가 8·15해방으로 귀국, 군사영어학교를 졸업, 육군소위로 임관된 이래 제27사단장·육군대학총장·제5군단장·제6군단장·제1군사령관·육군참무종장등을 순차 역임하고 1969년11윌 육군대장 예편과 동시 중앙정보부장·중국대사를 거쳐 1978년12월22일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근무중 1979년10월30일 면직된자.
부산·마산사태 역이용 범행결심|군장악목적 육참총장등을 유인|(김계원) 김재규범행 때맞춰 밖으로 나가 진행상황을 감시|사건후 사실을 안밝혀 목적달성의 시간여유 가져|박흥주는 서울역·남대문에 「중정」직원배치…병력이동상황등 살펴
피고인 박흥주는 원적지인 평남 평원군 평원면 장림리에서 박천순의 2남으로 출생, 서울고등학교및 육군사관학교 18기로 각졸업, 소위로 임관된이래 1964년8월 제6사단장 김재규의 전속부관·제12사단 65포병대 대장등을 차례로 거쳐 1978년4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로 임명되어 근무중 1979년10월27일 면직된자.
피고인 이기주는 본적지에서 망부 이정진의 2남으로 출생, 부천 시온고등학교 2년을 중퇴하고 해병에 입대, 1972년11월30일 하사로 제대한 다음 중앙정보부 겅비원으로 채용된 후l975년11월4일 중앙정보부 궁정동 식당경비원 조장으로 근무 중 1979년10월27일 면직된자. 피고인 유성옥은 본적지에서 망부 유점용의 4남으로 출생, 고양중학교2년을 중퇴하고 육군에 입대, 중사로 제대한 다음 l971년12윌 중앙정보부 운전사로 채용된 후 1978년8월3l일 위 식당 행정차량 운전사로 근무중 1979년10월27일 면직된자.
피고인 김태원은 본적지에서 망부 김만대의 5남으로 출생, 장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 병장으로 제대한 다음 1974년11월 중앙정보부 경비원으로 채용된 후 1976년10월14일 위 식당 경비원으로 근무중 1979년10월27일 면직된자.
피고인 유석술은 본적지에서 유태준의 2남으로 출생,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 하사로 제대한 다음 1973년11월8일 중앙정보부 경비원으로 채용된 후 1977년8월4일 위식당경비원으로 전보되어 근무중 1979년11월6일 면직된 자 등인바,
▲1, 피고인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자신의 정국 수습책이 거듭 실패하여 그 무능함이 노출되어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인책해임설이 나돌아 그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한편 군 후배이고 연하인 전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의 오만방자한 태도와 월권적 업무간섭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위 차지철만을 편애하는데 불만을 품고 1979년4월 일자 불상경부터 대통령등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잡을 것을 기도하고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그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세움에 있어서 장소는 피고인이 관리하는 서울종로구 궁정동 50번지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으로 하고 시기는 적절한때를 선택하며 대통령과 위 차지철은 자신이 직접 살해하고 수행한 경호관은 현장에서 심복인 피고인 박선호, 동 박흥주 등을 시켜 처치키로 하며 대통령시해 후 국가 안전과 질서 교란을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고 중앙정보부의 권한과 동부의 조직력을 이용,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사법·행정권을 총괄하는 혁명위원회를 구성, 자신이 위원장에 취임하여 집권기반을 확보한 후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계획하고 부산·마산 소요사태를 거사의 계기로 역이용하여 기회를 엿보아오던 중.
(가) 1979년10월26일 하오4시경 서울중구필동소재 중앙정보부 남산본청 부장사무실에서 차지철로부터 이날 하오6시경 식당에서 대통령주재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당일 대통령과 차지철및 경호원일행을 살해하여 범행할것을 결심하고 대통령시해 후 이용할 목적으로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정승화및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식사하자는 구실로 하오6시30분까지 식당에서 약50m 상거한 피고인의 본관집무실에 오도록 유인하여 놓고 하오4시30분경 집무실2층 침실금고에 보관중이던 독일제32구경 권총(총번159270) 1정에 실탄7발을 장전하여 고장유무를 확인한후 서가 책뒤에 숨겨두고,
(나) 이날 하오 5시50분경 대통령영접차 도착한 피고인 김계원과 식당현관앞 정원의 경계석에 앉아 대화도중 김계원이 차지철의 강경한 태도와 월권에 불만을 토로하자 피고인의 범행에 동조할 것으로 판단하고 오늘 해치울테니 뒷일을 부탁한다는 취지의 제의를 하여 김계원의 승낙을 받고,
(다) 이날 하오6시5분경 식당에 대통령과 차지철등이 도착, 만찬이 시작되고 있던 중 이날 하오 7시 만찬석에서 나와 집무실에 가서 동소에 와있던 육군참모총장과 재2차장보를 만나『만찬이 끝나는대로 다시 오겠다』고 한후 2층 침실로 올라가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권총1정을 하의 시계주머니에 넣고 식당으로 돌아가다가 이날 하오7시10분경 식당에 인접한 중앙정보부 구관정원에서 피고인 박선호·박흥주에게 「오늘저넉 해치우겠으니 각오하라. 각하등은 내가 직접 해치울테니 총성과 동시에 너희들은 똑똑한 놈 3명을 골라서 경호원들을 처치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육군참무총장과 제2차장보가 집무실에 와있다고 고지, 범행가담의사를 확고히 하도륵 촉구하여 30분내 준비완료하겠다는 승낙을 받고,
(라) 피고인 박선호는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직후 하오7시15분경 식당서편 정원에서 피고인 유성옥 이기주에게 『부장님 지시인데 오늘일이 잘 되면 한몫 볼 것이다. 부장님이 안에서 총을 쏘는데 맞추어 너희들은 주방내의 경호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하여 승낙을 받고,
(마) 피고인 김태원은 하오7시40분경 식당 건너편 경비원 대기실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식당에서 총성이 들려 심상치않은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직감하고 M-16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던중 동박선호로부터 청와대에서 경호원들이 오면 사살하라는 지시와 아울러 하오8시5분경 이기주로부터 식당안에 아직 완전히 절명되지 않은 사람을 확인사살하라는 지시를 받고 식당안 경호원 대기실에 들어가 경호원들이 피격된 것을 보고 국가변란사태인 점을 알면서 지시에 따라 가담하기로 응낙함으로써 각 국현문란 목적의 폭동·살상에 가담할 것을 순차로 상호 공모하고,
▲ 2, 피고인 김재규·김계원·박선호·박흥주·이기주·유성옥·김태원은 전기공모내옹에 따라
(가) 피고인 김재규는 하오7시38분경 식사중이던 식당 만찬석을 나와 인접 부속실에서 박선호로부터 범행준비완료보고를 받고 하오7시40분경 만찬석으로 들어와 앉으면서 우측 옆자리에 앉아있던 김계원을 우측 손으로 툭치면서『각하 잘 모시시오』라는 말과 동시에 하의시계주머니에 감춰둔 권총을 꺼내 피고인의 좌측 옆자리에 앉아있는 차지철을 향하여 1발을 발사, 우측팔목에 관통상을 입히고 바로 일어서면서 앞자리에 앉아있는 대통령의 흉부를 향하여 1발을 발사, 관통상을 입힌 다음 계속 발사하려다가 권총의 격발장치 고장으로 발사되지 않자 식당 밖으로 나가 박선호로부터 미제38구경「리벌버」권총(총번J-60l68) 1정을 받아 다시 만찬석으로 들어와 그곳에 있던 문갑을 잡고 방어하는 차지철의 목부를 향하여, 이어서 머리를 숙이고 신음중이던 대통령에게 접근, 후두부를 향하여 순차로 각1발씩 발사하고,
(나) 피고인 김계원은 만찬석상에서 김재규가 석상을 수회 이석할뿐 아니라 특히 15분간이나 외부에 나가 있다가 들어온 것으로 보아 결행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면서도 이를 용인하고 있던 중 하오7시40분경 김재규가『각하 잘 모시시오』라는 말과 함께 우촉손으로 툭 치는 것을 신호로 차지철및 대통령에게 권총을 발사하자 김재규의 범행을 순조릅게 하기 위하여 동소를 빠져나와 만찬석 입구에 서서 수행경호관들의 처치등 범행진행 상황을 예의 감시하고,
(다) 피고인 박선호는 식당현관앞 대기실에 있으면서 동일하오7시40분경 김재규의 권총발사를 신호로 이미 소지하고 있던 미제 38구경「리벌버」권총으로. 동소에 앉아있던 경호부처장 안재송및 경호처장 정인형에게 순차로 각1발썩 발사하고,
(라) 피고인 박흥주·이기주·유성옥은 주방옆에 주차한「제미니」서울1다2578호 승용차에 대기하고 있다가 동일 하오7시40분경 김재규의 총성을 신호로 주방쪽으로 달려나와 박흥주·유성옥은 주방 후문에서, 이기주는 주방창문밖「블륵」담에 올라가서, 박흥주는 독일제「웰슨」38구경 9연발 권총(총번 J-21974), 이기주·유성옥은 38구경 5연발 「리벌버」 권총 (총번 J-59962)(총번 J-58274)을 각 사용하여 주방에 있던 대통령운전사 김용태·경호원김용섭·박상범·식당종업원 이정오·식당운전사 김용남을 향하여 박흥주는 7발, 이기주·유성옥은 각 4발씩을 집중 사격하고,
(마) 피고인 김태원은 동일 하오8시5분경 M-16소총(총번 J-776874)을 소지하고 식당 대기실에 들어가 쓰러져 있는 안재송에게 1발, 정인형에게 2발, 식당만찬석내에서 신음하고 있는 차지철에게 2발, 주방에 쓰러져 있는 김용섭에게 1발을 각 발사하여,
(바) 대통령은 동일 하오7시50분쯤 두부총창등, 차지철은 복부총창등, 정인형은 경부총창등, 안재송·김용태·김용섭은 각 흉부총창등으로 위일시경 이곳에서 사망케하고 ,박상범에게는 3주간의 치료를 요하는 우둔부 관통상을 가함으로써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샅해하고,
▲ 3, 피고인 김재규·김계원·박선호·박흥주·이기주·유성옥·금태원등은 전기 공모내용에 따라 계속하여,
(가) 피고인 김재규는 동일 하오7시43분경 식당현관에서 김계원에게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보안유지를 철저히 하십시오』라고 말해 김계원으로부터 『알았소』라는 대답을 들은후 본관집무실로 가서 육군참모총장과 제2차장보에게 큰일났으니 빨리 차에 타라고 하여 동승시킨후 차안에서 육군참모총장의 『무슨일이냐』는 질문을 받자 피고인인 자신이 범인임을 숨기고 대통령이 저격당하여 사망하였다고 하면서 보안유지와 북괴남침 위협만을 장조하며 중앙정보부로 가려고 하다가 육군참모총장의 제의에 따라 동일 하오8시5분경 육군본부「벙커」에도착, 각군참모중장에게는 적이 알면 큰일이라는 구실로 3일간대통령서거 사실의 보안유지를 강조하고 육군참모총장등 군 주요장성과 국무위원들의 동향을 감시함과 아울러 비상계엄을 선포하도륵 유도하고,
(나) 피고인 김계원은 하오 7시43분경 김재규로부터 전기 보안유지 강조의 말을 들은후 이기주가 소지하고 있던「리벌버」권총 1정을 교부받아 휴대하고 범행에 대한 보안유지와 사태가 불리해지면 피고인 자신이 대통령을 살리려고 했다는 구실로 삼기위해 하오 7시55분경 대통령의 숭용차로 대통령의 유해를 국군서울지구벙원에 후송하여 당직 군의관 소령 송계용에게 진단케한 바 『이미 5분전에 사망하셨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소령 송계용및 대위 정규형에게 환자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숨긴후 『이 사람을 꼭 살려달라』고 하고 이곳을 경비중인 유성옥에게 의부와 연락을 금지시키라고 지시한 후 병원을 나와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사무실로 가서 하오 8시40분경 비상소집된 최광수등 대통령 수석비서관 7명과 전 대통령 경호실차장 육군중장 이재전에게 『대통령각하께서 큰일을 당하였으니 대기하라. 각하께서는 무슨 일이 나서 병원에 계시고 차실장은 지금 부대를 지휘할 수 없으니 부대를 장악해서 경계를 강화하고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단속을 잘 하시오. 경호실의 병력출동은 필요없다』고 말함으로써 범행목적 달성에 시간적 여유릍 얻고 하오 8시50분경 이곳에서 국무총리 최규하에게『오늘 만찬회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움 끝에 각하가 김재규의 잘못쏜 총에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한 사실을 허위보고 하고 하오9시경 김재규로부터 육군참모총장도 여기있고 국방장관도 이리 올것이니 국무총리등과 함께 육본「벙커」로 오라는 전화연락을 받고 김재규가 육군참모총장을 설득, 군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직감하는 한편 하오 9시5분경 이곳에서 내무부 장관 구자춘·법무부장관 김치열로부터 『각하가 어떻게 된 것이냐』는 물음에 간신배를 제거한다는것이 각하께서 다치셨다고만 대답하여 동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계속 은폐하고
하오 9시10분경 이곳에서 다시 김재규로부터『국무총리를 모시고 오라』는 전화연락을 받고 국무총리·내무·법무부장관과 같이 하오9시30분경「벙커」내 육군참모총장실로 가서 그곳에 김재규와 같이 국방부장관 노재현 및 군 중요직 장성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김재규가 먼저와서 군을 장악하고 있는것으로 생각, 국방부장관등에게 『각하께서 유고가 생겼읍니다. 차실장이 너무 강경해서 일어난 사고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지금부터 총리를 모시고 사태를 수습해야 된다고 제의하여 계엄령선포를 유도하고
하오 10시25분경 육군참모총장실내에 있는 화장실에서 김재규로부터 『사태수습이 더 급선무이고 보안을 유지해야 하며 최단시일 내에 계엄사령부 간판을 혁명위원회로 바꾸어 달도륵 유도해야 된다』는등 앞으로의 범행 전개과정을 듣고 김재규가 군부까지 완전장악하여 내란이 성공되어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 하오 10시40분경 국방부장관실에서 김재규가 국무총리릍 비롯한 정부 각부 장관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보안유지를 장조하며 대통령 유고에 따른 국내치안 질서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함에 있어 그 사유를 대통령 서거로 하지 말고 국내치안문제로 하자고 제안하자 이에 호응하여 대통령 유고로 인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자고 건의하고,
(다) 피고인 박선호는 하오 8시경 식당 건너편에 있는 경비원 대기실에 가서 전기와 같이 김태원에게 차지철등을 확인사살하게 하고 경비원대기실에서 경비원들을 통제하면서 중앙정보부 남산분청에서 본관 집무실로 전송되는 보고문을 통해 병력 이동상황을 확인한후 김재규의 내란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고 병원으로 대통령의 유해틀 모시고 간 유성옥등에게도 계속 보안을 지킬것을 지시하면서 김재규의 지시를 대기하고,
(라) 박여주는 동일 하오7시45분경 식당밖에서 대기하다가 김재규를 따라 본관 집무실로가서 김재규 및 육군참모총장·제2차장보등과 같이 승용차에 동승하여 동일하오8시5분경 「벙커」에 도착한 후 「벙커」내 총장부관실에 대기하면서 김재규와 청와대에 있던 김계원 간에 전화연락을 하여주는 동시 범행 진행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한편 동일하오8시40분경 김재규의 경호차량을 육군본부로 오게하고 경호조장 대위 김인수에게 남대문과 서울역 근처에 직원 각 1명씩을 배치해 병력 이동 상황이 있을때는 즉각 무전연락토륵 지시한 후 계속 국방부장관실로 김재규를 수행하면서 김재규의 신변보호와 아울러 지시를 대기하고,
(마) 이기주는 동일 하오8시5분경 식당에서 전기와 같이 박선호의 지시에 따라 김태원에게 위 차지철등을 확인사살케 하고 그후 청와대경호실에서 총성의 원인을 확인하러 왔을때에도 총성을 듣지 못했다고 거짓말하여 그들을 돌려보내는 한편 병원으로 대통령유해를 후송하고 간 유성옥 등과 계속 상호연락을 취하고 범행은폐를 위하여 27상오7시경 유석술로 하여금 위범행에 사용된 권총등을 매몰시키는 한편 김재규의 지시를 대기하고,
(바) 유성옥은 동일 하오7시45분쯤 위 식당주방에서 사살된 김용섭과 중상을 입은 박상범이 휴대한 38구경「리벌버」권총 각1정을 탈취하여 그중 1정은 위 식당「보일러」공 강무흥에게 보관시키고 다른 1정은 피고인의 허리춤에 휴대하고 동일 하오19시55분경 동 김계원과 같이 대통령을 병원으로 후송하여 대통령의 안면을 손으로 가리면서 환자가 대통령인 사실을 숨기고 병원장 공군준장 김병수에게도 외부와 전화를 걸지 못하게 제지 감시하며 경비원 대기실에 있는 이기주와 계속 전화연락을 취하는 한편 김재규의 지시를 대기하고,
(사) 김태원은 동일 하오10시쯤 서울종로구종로6가소재 이화여대부속병원에 입원 가료중이던 위 식당요리사 이정오에게 가서 동인에게 집에 전화하지 말고 부상이유를 단순한 오발사고라고 말하라고 보안지시를 하고 다시 위 경비원대기실로 돌아와서 동박선호로부터 육군븐부쪽에도 잘 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계속 보안을 유지하며 식당부근 경계근무를 하는한편 김재규의 지시를 대기하던중,
(아) 동일 하오 11시30분경 국방부장관실에서 국무총리와 내무·법무장관등이 김재규의 주장에 반대하고 호응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계원은 김재규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태도를 돌변하여 국방부장관부속실로 국방부장관과 위 육군참모총장을 불러내어 동인들에게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이다』고 말하여 김재규가 군수사기관에 체포됨으로써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고,
▲ 4, 피고인 유석술은 10월26일 하오7시40분경 경비원 대기실에서 휴식중 식당에서 요란한 총성과 함께 주방요리사 김일선으로부터 주방안의 경호원 요리사등이 생사불명의 총상을입었다는 말과 10월27일 상오5시쯤 대통령유고의「라디오·뉴스」를 들어 대통령과 차지철 일행이 샅해된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오7시경 위 대기실에서 이기주로부터 미제38구경「리벌버」6연발 권총(총번 36K-4491) 1정, 동 실탄5발, 동 탄피1개, 독일제32구경「웰타타」7연발 귄총(총번159270) 1정, 실탄4발, 망사「슬리퍼」1족 등을 매몰하라는 지시를 받고 동 물건들이 대통령등을 샅해하는데 사용된 증거물등이라는 점을 알면서 물건등을 은박지로 포장하여 대기실 정원 서쪽 분수대 뒤에 매몰함으로써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은닉한 것이다.
<사건일지>
▲ 10월26일=밤7시40분 첫발발사 ▲27일=상오4시 비상계엄선포 ▲28=전두환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 수사중간 발표 ▲30일=전본부장,『김계원 전비서실장을 연행수사중』이라고 2차수사결과 발표 ▲11월3일=국장 ▲6일=합동수사본부.『군부·외세개입없다』고 수사전모 발표와 기자회견 ▲7일=현장검증 ▲13일=김재규등 8명을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 ▲26=김재규등 8명을 내란목척살인 및 내란미수·증거은닉등 혐의로 구속기소 ▲12월4일=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재판장 김영선 육군중장) 첫공판.
<변호인인 명단>
▲김재규(53)=이돈명 조준희 강신옥 홍성우 황인철 김정두 유택형 김제형 계창업 태윤기 나석호 염봉제 김교창 하경철 이세중 이돈희 민병훈 소중영 안명기 박두환 홍남순 ▲김계원(56)=김수용 이병용 ▲박선호(45)=강신옥 ▲박흥주(40)=태윤기 ▲이기주(31)·유성옥(36)=안동일·신호양·신선길·정상용(이상 4명은 국선변호인) ▲金泰元(32)=김홍수 ▲유석술(30)=김성엽
<재판부및 검찰판>
◇재판부 ▲재판장=김영선(육군중장) ▲심판관=유범상(육군소장) 이호봉(육군소장) 오철(육군소장) ▲법무사=신복현(육군준장)
◇검찰관 ▲검찰관=전창렬(육군중령) 이병옥(육군소령) 차거한성(육군대위)
[출처: 중앙일보] 김재규등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시해사건 공소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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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계원(金桂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 생전 인터뷰
『김재규는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다 내 방을 한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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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일주일 전 朴대통령이 실연(實演)을 했다. 식사 중에 朴대통령이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테이블 밑에 누워 나를 쳐다봤다』
■『(궁정동 시해 현장에서)내가 김재규의 손을 쳐서, 권총이 불발됐다. 그 권총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다. 전방 근무시절 그걸 알았다. 10·26 당시 내 말을 믿지 않아 진술하지 못했다』
■『내가 심문받던 옆방에서 김재규가 고문받는 소리,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형받으러 나가는 김재규가 천천히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내 방을 바라봤다』
■『쿠데타를 할 군(軍)병력은 차지철이 보유하고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차지철의 심복이었고,(차지철이) 하나회다 뭐다 뒷돈을 대주었다. 김재규는 쿠데타할 능력이 없었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
1923년 경북 영주 출생. 연희전문학교 졸업. 육군 참모총장(대장), 중앙정보부장, 駐대만총영사관 대사,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現 원효실업 회장.
▲ 사진설명: 《월간조선》 1987년 10월호에 실린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첫 번째 인터뷰 기사. |
金 前 실장은 1987년 9월16일 월간조선과 만나 朴대통령의 마지막 순간을 처음으로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18년이 흐른 뒤 다시 월간조선 기자와 만났다.
간혹 金 前 실장의 근황이 언론에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토막소식 정도였고 어느 것도 그가 겪은 고통과 부채의식을 담아 내진 못했다.
그는 한 해가 저무는 지난 12월28일 기자와 만나 작심하듯 기억을 다시 꺼냈다. 27년 전 궁정동 만찬장이 마치 살아난 듯 꿈틀꿈틀 재연됐다.
먼저 『「그때 그사람들」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金 前 실장은 『다 못 보고 15분 정도만 잠깐 봤다』며 『난 별로 흥미가 없어서 봐도… 옛날 회상을 하니 기분이 나빠서』라고 했다. 재차 『조금 본 인상은 어떠냐』고 묻자, 『아 글쎄, 조금 보다 그만뒀다니까』라고 손사래를 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기자는 10·26이 일어나던 해의 대통령 면담일지 복사본을 金 前 실장에게 보여 주었다.
- 18년치 대통령 면담일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1979년 6월에서 9월까지의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일지를 보면 대부분 車智澈(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 독대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또 배드민턴을 자주 치고 자유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차지철이 金실장보다 먼저 대통령과 만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경호 관계니까 차지철이 먼저 보고한 것이지요』
- 車실장이 보고할 때는 먼저 청와대 비서실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경호실장은 비서실의 허가가 없어도괜찮았어요』
대통령을 못 만나는 중정(中情)부장
金桂元 비서실장이 1978년 朴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고 있다. 金실장은 6년간의 駐대만 대사 생활로 인해 국내 정세에 매우 어두웠다. 이것이 비서실장으로서 金載圭와 車智澈의 권력투쟁을 조정·통제하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
『(김재규가 대통령과 만난 경우가) 별로 없죠. 자꾸 (차지철이) 제한을 하니…』
朴대통령에게 누가 먼저 보고하느냐는 것은 파워게임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하느냐와 상관이 있다. 차지철이 김재규의 대통령 접근까지 가로막은 전횡은 결과적으로 10·26의 불행한 씨앗을 낳은 셈이다.
- 그건 이상합니다. 대통령의 접근권은 의전수석이나 비서실장에게 있는데, 정보부장이 경호실장 허가를 받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대통령의 뜻이니…』
- 그게 바로 문제의 발단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어떨 때는 오히려 제가 답답해서 김재규에게 「꼭 대통령을 만나고 싶으면 내게 찾아오라」고 말해 만남을 주선한 일도 있어요』
- 金실장이 정보부장으로 계실 때도 경호실장이 대통령과의 접견을 막았습니까.
金 前 실장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1969년 10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중앙정보부장(제5대)을 맡았고, 1971년 2월 駐대만 대사로 임명됐다.
『아닙니다. 마음대로 대통령을 만났어요. 한밤중에 서슴없이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또 그래야 했고요. 그런데 비서실장을 맡고 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김재규는 경호실장 허가 없이는 일과시간에도 대통령과 접견할 수 없었어요』
- 1979년 당시 대통령께서 지나치게 차지철에게 의존하려 한 것 같아요. 귀찮은 것은 모두 그에게 맡기고….
『朴대통령께서는 당시 저하고 잡담이나 하며 지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뭐 일을 잘합니까. 駐대만 대사로 6년이나 외국에 나갔다 왔는데 저를 비서실장으로 기용했어요. 저를 곁에 둔 것은 그냥 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金載圭), 『그놈(차지철)이 자리가 없다고 나를 밀어 버렸다』
趙甲濟 기자가 보여주는 朴대통령 면담일지를 보며 당시를 기억해 내는 金桂元씨. |
기분이 상한 김재규는 승용차로 직접 현장에 내려갔다.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진 않았다. 대신 이날 새로 건립된 KBS 對北 방송 송신소로 향했다. 거기서 金실장과 조우한다.
- 김재규가 헬기를 못 탄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제게 전화를 해왔어요. 「가려고 했는데 그놈이 자리가 없다고 밀어 버려서 전 자동차로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 「밀어 버렸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떠밀어 냈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金부장은 청와대 헬기장에 오진 않았어요』
- 그럼 金부장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지 못했겠군요.
『아닙니다. 가긴 갔어요. 삽교천엔 안가고 송신소에 갔어요. 그날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對北 송신소 개소식이 함께 열렸기 때문입니다』
- 그 자리에서 김재규를 분명히 봤나요?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만났어요. (김재규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헬기에 못 탔으니까.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어요. 제가 朴대통령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차지철은 당시 경호실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김재규를 핍박해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나 저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밑에 꿇어 엎드리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軍수뇌부와 함께 한 車智澈 경호실장. 앞줄 왼쪽부터 黃汀淵 해군참모총장, 周永福 공군참모총장, 車智澈 경호실장, 李世鎬 육군참모총장, 陳鍾埰 보안사령관. |
『전두환(全斗煥)은 차지철의 심복이었다』
- 쿠데타할 생각은 없었다고 봅니까.
『글쎄… 있었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김재규 하고 싸울 때 차지철이 (쿠데타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차지철이 쿠데타를 한다면 동원할 무력이라도 있었나요.
『될 겁니다』
- 우선 청와대 경호실과 30단이 있을 테고….
『그것 말고도 軍에 심복이 있었습니다. 全斗煥 장군도…. 「하나회」다 뭐다 뒤에서 돈 대준 것 아닙니까』
- 비서실장 입장에서 보면, 당시 全斗煥 보안사령관도 차지철 밑에 있다고 보신 겁니까.
『네, 왜냐면 경호실 차장이니 뭐니 차지철이 갖다 놓은 것 아닙니까』
- 차지철 밑에서 작전 차장을 한 게 노태우, 全斗煥, 김복동씨가 있었고 수경사령관도 차지철 사람이었습니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 당시 하나회 존재를 아셨습니까.
『그땐 몰랐습니다. 제가 불행한 것이 비서실장 하기 직전에 6년간 駐대만 대사로 갔다 와서 국내 사정은 전혀 몰랐어요』
- 그 때문에 비서실장 자리를 고사하셨다지요.
『네, 못 하겠다고 하니 朴대통령이 「괜찮아.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줄 테니 걱정마라」 하시더군요』
-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비서실장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줘야지, 왜 대통령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을까요.
『軍 시절부터 朴대통령과 관계가 있으니… 제게 그런 말씀하실 수도 있죠』
- 朴대통령과 軍 시절 어떤 인연이 있나요.
『과거 朴대통령께서 보병으로 계셨는데 진급이 안 돼 소외되셨어요. 제가 미국 가서 포병학교 교육을 받고 오니 轉科(전과)를 하셨더군요. 그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는 있었어요. 고향이 같으니까. 포병으로 오니 반갑다고 했어요』
- 군단 포병단장을 같이 하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선임이었습니다. 제가 포병감을 하고, 朴대통령은 군단 포병사령관을 하셨습니다』
- 사실상 朴대통령이 직속부하셨군요.
『직속은 아니지만 방계라고 할까요? 그리고 제가 포병학교 교장을 하고, 그 다음다음에 교장을 하셨습니다』
朴대통령이 宮井洞(궁정동) 나棟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5분. 궁정동은 중앙정보부장 공관 옆에 있는 비밀 식당으로 몇 달 전에 지어진 새 건물이었다. 만찬장에는 직사각형 식탁이 있었다. 식탁 안쪽에 朴대통령이 혼자 앉았고 그 맞은편엔 김계원, 김재규가 착석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왼쪽 측면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대화가 부마사태, 金泳三씨 문제, YH사건 등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김계원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TV를 켜는 등 애를 썼지만 되레 험악해졌다.
『중정부장과 경호실장을 바꾸려고 했다』
1952년 포병학교장 시절의 金桂元(가운데). |
『그래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안 돼요. 그래서 TV를 틀라고 했어요. 「삽교천 행사 뉴스가 나올 겁니다」라고 대통령께 말씀드렸어요』
- 뉴스를 보고서도 또 이야기가 그 쪽으로 흘렀지요. 왜 그런가요. 朴대통령이 화가 많이 났습니까.
『차지철이 자꾸만 바람을 넣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계속돼야만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니…』
- 따지고 보면 죽은 자리를 朴대통령과 차지철이 만든 셈입니다. 계속 김재규가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나요.
『네, 사실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데… 낮에만 해도 (朴대통령의) 기분이 좋으셨는데…』
- 당시 법무장관이던 金致烈(김치열)씨 이야기를 잠깐 할게요. 10·26이 있기 며칠 전 그가 朴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불려갔다고 해요. 대통령이 시국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정보부장으로 내정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10월26일 발령이 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김재규는 자신이 물러날 줄 알고 그날 「결행」을 한 것은 아닐까요? 당시 실장께서 김재규에게 人事(인사) 이야기를 하셨나요.
『그런 얘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내심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자리를 바꾸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기회가 오면 朴대통령에게 건의하려 했지요. 하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 김재규에게 혹시 인사가 날 거라고 정보를 준 사람은 없었을까요.
『글쎄요. 절대 그런(인사)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요』
- 인사에 대한 느낌은 받았나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재규도 그 자리가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시해할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나 쿠데타 계획이 있었다면 저에게 귀띔 정도는 했을 거라고 믿어요. 김재규, 前 국방장관 李鍾贊(이종찬·1916~1983), 朴대통령, 저 이렇게는 정말 가까운 사이입니다』
- 5·16 이전의 말씀이지요.
『네, 심지어 여자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할 정도예요. 김재규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면 먼저 제게 귀띔했을 겁니다』
만찬석상에서 시국수습 방안을 두고 朴대통령과 차지철에게 혼이 나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金 前 실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재규가 그날 뭔가 달랐다면, 그 자리에 권총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물도 아니고, 총을 가져오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식당 2층 자신의 사무실에 얼마든지 총을 숨겨 놓을 수 있었을 텐데 뭐하러 허덕거리며 옆집에 갔을까요?』라고 했다.
김재규는 당시 만찬장을 빠져나와 50m를 걸어 인근 본관으로 갔다. 식당으로도 쓰이는 1층 회의실 문을 여니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2차장보가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눈 김재규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책장 선반 뒤에 감추어 두었던 권총을 꺼내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김재규는 자포자기 심정에서 朴대통령 사살』
- 시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권총을 지녔을 텐데, 도중에 권총을 가지러 간 게 이상하긴 해요.
『그렇지요. 처음에는 계획이 없었다고 봐요』
그날 저녁 7시40분쯤 김재규가 쏜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쪽 팔목을 꿰뚫었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김재규는 다시 朴대통령을 겨냥한다. 총알은 朴대통령의 가슴에 꽂혔다.
- 朴대통령이 총에 맞은 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피신했습니다. 왜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고 생각하나요.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순간, 「이젠 나는 죽었다. 이러나 저러나 차지철을 죽였으니 용서 못 받을 것이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 1탄과 2탄 사이에는 약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또 김재규가 차지철은 앉아서 쏘고 朴대통령은 서서 쐈습니다. 엉겁결에 차지철을 쐈는데, 朴대통령도 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시간차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김재규의 권총이 고장이 났습니다. 왜 불발이 됐나요.
『불발이 난 것은 제가 김재규의 손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 권총(독일제 월터PPK)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어요. 전방 근무 시절 경험이 있습니다. 권총이 나뭇잎에 걸려 불발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이 총은 테러용으로 못 쓰겠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쳤기 때문에 불발이 난 겁니다. 그런데 제 말을 믿질 않아 당시 말을 못 했어요』
- 朴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고 「난 괜찮아」라고 하셨는데, 같이 있던 두 명의 아가씨(심수봉·신재순)에게 피하라는 뜻이었나요.
『그것보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성들이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하니, 「나를 너무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 그때 朴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나요. 보통사람 같으면 몸을 피하려고 했을 텐데, 가만히 계셨습니다.
『朴대통령께서 비스듬히 쓰러지셨는데 저는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1975년 10월 영동-동해 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의 朴대통령. |
「궁정동 피습」을 예감한 박정희(朴正熙)
당시 만찬장 테이블 밑은 日食집처럼 다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파였다.
『10·26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인가, 朴대통령이 제가 보는 데서 實演(실연)을 했어요. 식사 중에 朴대통령께서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테이블 밑에 누워 저를 쳐다보셨어요』
- 그런데 막상 일이 나자 피신하지 않고 조용히 계시니…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죠. 옆으로 누우셨지요』
- 어쨌든 피하진 않으셨잖아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하게 돼 있거든요. 차지철은 도망갔고요. 朴대통령은 오히려 체념한 듯한 행동을 했어요.
『사실 朴대통령 스스로도 자기가 총에 맞았다고 느끼지 못하셨을 겁니다. 통증보다는 뭐랄까… 정신적 쇼크가 더 컸을 거예요』
김재규는 차지철과 朴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입힌 뒤 권총이 고장 나자 만찬장에서 뛰어나가 정보부 의전과장인 朴善浩(박선호)의 권총을 받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문갑을 잡고 피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복부를 향해 권총을 쐈다. 그러고 나서 식탁 왼쪽으로 돌아 50cm 앞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정분을 끊고」 朴대통령의 머리를 쏘았다.
그러나 金실장은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이 총질을 해대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 金실장께서 비판받는 부분인데… 김재규가 총을 들고 들어왔을 때 문 밖에 있지 않았나요? 朴대통령 머리에 확인 사살할 당시 말입니다. 안에서 朴대통령을 보호해야 하는데, 밖에 계셨습니다.
『당시 朴善浩가 김재규에게 현관에서 총을 주는 것을 본 것 같아요』
- 덮쳐서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그때 대통령이 총에 맞았는지 잘 몰랐어요』
- 차지철을 쏜 뒤 朴대통령을 쏴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시지 않았나요.
『대통령이 쓰러진 것은 본 것 같아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기보다 식탁 밑으로 들어간 줄만 알았습니다』
- 아니 그것보다 김재규가 총을 들고 있어 겁이 나 들어갈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있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朴대통령이 총에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金실장은 中情(중정) 요원이 모는 차의 뒷좌석에 朴대통령을 무릎 위에 비스듬히 누이고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갔다. 1987년 그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 朴대통령 체구가 아주 작고 가벼웠어요.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서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죠. 처음엔 좀 신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내 양복에 피가 많이 묻었는데 그것도 몰랐어요. 병원에 가서 얘기 들으니까 「이미 절명하셨습니다」 그래요>
- 朴대통령을 안고 가시다가 숨이 넘어가는 때를 기억합니까.
『몰랐어요』
- 살아 있다고 봤습니까.
『네』
- 두 분의 키가 비슷하시지요.
『네, 朴대통령과 제가 누가 크냐고 서로 물을 정도였습니다』
「육본(陸本)으로 오라」는 김재규 전화에 최규하(崔圭夏) 총리 벌떡 일어서 『갑시다』
- 朴대통령의 키는 164cm였어요.
『제가 162cm인데… 저보다 크셨네요』
- 10·26 당시 崔圭夏(최규하) 총리가 처음 청와대로 왔을 때, 「차지철과 김재규가 싸우다 김재규의 잘못된 총에 각하가 돌아가셨다」고 정확하게 말씀드렸나요.
『네, 그렇게 알았으니까요』
당시 朴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범행현장을 떠나 육본 벙커를 향한다. 그때가 저녁 8시5분쯤이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朴대통령 시해 사실을 듣고 1군과 3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한 뒤 국방장관·합참의장·해군총장·공군총장·연합사 부사령관 등을 육군 벙커로 오도록 연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金실장은 육본으로부터 걸려온 김재규의 전화를 받았다.
- 崔총리와 몇몇 장관에게 육본으로 가자고 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재규가 육본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의심이 가능한 게 아닙니까. 김재규가 金실장에게 전화로 육군 벙커로 오라고 했을 당시 崔총리는 어떻게 했나요.
『崔총리가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 「갑시다」고 했어요』
- 당시 崔총리의 판단이 중요한데, 왜냐면 김재규가 범인인 줄 알았는데 김재규가 벙커로 오라고 해서 가겠다는 것은 좀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 김재규가 朴대통령을 쏘아 죽였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닙니까.
『알았죠』
박근혜(朴槿惠),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
訪韓한 카터 美 대통령과 朴正熙 대통령. |
『저는 김재규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육본에 갔다고 하더라도 軍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봤어요. 또 내가 말하면 들을 것으로(쿠데타를 돌릴 것으로) 봤어요』
- 金실장께서 朴槿惠(박근혜)씨에게 朴대통령 시해를 전했을때 반응이 어땠나요.
『특별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朴槿惠를 보니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말을 못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라고 했어요』
- 朴槿惠씨가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뜻이네요.
『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은 당시 朴대통령의 有故(유고)만 밝힌 채 사건의 진상에 대해 함구했다. 金실장은 崔총리에게 『국가안보를 위해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힌 뒤 내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인을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金실장은 김재규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10월29일 연행된 뒤 구속돼 김재규의 공범으로 발표되었다. 1979년 12월20일 「김계원 피고인」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종사 미수죄였다.
1980년 5월24일 새벽 김재규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金실장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했다.
- 金실장에게 김재규가 깍듯하게 대했지요.
『네, 김재규가 사형당하는 날 제 방 쪽을 한참 봤어요』
- 그때 마지막 표정은 어땠나요.
『복도가 어두워 표정은 못 봤습니다. 제 방 위치를 아니까 천천히 걸으며 이쪽을 봤어요』
- 육군 구치소 안에서 만난 적은 없나요.
『없어요. 간수가 한 명씩 붙어 있었으니까요』
- 김재규가 사형 당하러 가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나요.
『전날 제 담당 간수가 「내일 아침에 갈 겁니다」라고 그래요. 밤에 잠이 와요? 그렇게 있으니 새벽에 웅성웅성 거려요』
- 金실장은 그 당시 무기징역이 확정된 상태였습니까.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 사형선고 받은 뒤 얼마 만에 무기가 됐나요.
『나흘인가 닷새 뒤에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사형수 상태로 며칠 있었죠』
- 감형될 것이라고 예상했나요.
『당시엔 제가 크리스천이니 기도만 했어요』
사형수(死刑囚) 생활
- 사형수의 느낌은 어떤가요.
『글쎄요. 당시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죽을 때 내 모습이 어떨까. 총알이 내 이마를 뚫을까, 가슴을 뚫을까」라고 생각했지요』
- 한국전쟁을 겪었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적었을 텐데….
『마찬가지예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누구나 똑같아요』
金실장은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된 지 이틀 뒤 안양교도소로 이감됐으며, 1982년 5월1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 李一順(이일순·당시 80세·1982년 1월8일 사망)씨의 부고를 접해야 했다.
- 조사를 받으실 때 고문을 당하셨나요.
『직접적인 고문은 없었고 잠을 재우지 않았어요. 잠이 들라치면 깨워요』
- 조사받을 때 김재규를 봤나요.
『못 봤어요. 다만 고문당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또 우리 집사람 목소리가 옆방에서 났어요. (그 소리를 들으니) 아주 괴로웠어요. 집사람을 고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 김재규 소리가 많이 났나요.
『네, 비명도 들리고』
- 그때 간이 좋지 않았다는데… 김재규가 간이 안 좋아 제대로 집무를 못 본 사실을 압니까.
『네, 그때 그런 얘기가 많았죠. 얼굴도 시커멓다 하고…』
- 김재규가 軍장교 시절 자동차 추락사고가 났을 때, 그를 업어서 병원까지 데려갔었죠. 그 이후 가까워졌지요.
『그렇죠. 그때부터 저를 은인으로 생각했어요』
1960년 金桂元 당시 소장이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총장이던 김재규와 인연을 맺었다. 그 즈음 김재규의 지프차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金桂元이 중상을 입은 그를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신민당 전당대회
육군보안사령관 시절의 金載圭. |
『비서실장으로 와 보니 둘 사이가 이미 나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두 사람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어요. 이미 청와대 비서실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신민당 全大에서 김재규의 對野(대야) 공작이 실패해 이철승씨 대신 金泳三씨가 총재로 당선됐어요. 그날 저녁 全大를 놓고 식사하면서 朴대통령이 신문지를 둘둘 말아 김재규 머리를 치면서 나무라셨다고 하던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실은 차지철도 공작을 했죠.
『네, 제도 「朴대통령이 왜 저렇게 하실까」 하고 느꼈어요. 공작을 여러 사람에게 맡기니 혼선이 일었어요. 두 사람을 통하지 않고 朴대통령이 직접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야당 정치인을 불러 (공작을) 지시했어요』
- 全大 이후 눈에 띄게 차지철이 김재규를 욕하고, 朴대통령도 김재규를 무능하다고 보는 것을 느꼈습니까.
『그렇게 느끼진 않았는데… 성격상 두 사람은 안 되겠다,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빨리 바꿨어야 했는데….
『이틀 늦은 것 같아요. 삽교천에 다녀오자마자 바로 했어야 했는데…. 청와대 의전수석인 최광수에게도 몇 번 이야기했어요. 「요 다음에 대통령께 보고할 때 나도 하겠지만 너도 건의 드려라. 둘이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최광수를 믿고 좋아했어요』
박정희(朴正熙)와 카터의 감정 폭발
신민당 全大 한 달 뒤인 6월29일 카터 대통령이 訪韓(방한)한다. 카터가 도쿄에서 김포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밤에 남의 나라를 방문한 것도 결례인데 보안상을 이유로 도착시간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바람에 朴대통령은 미리 나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인 6월30일 청와대에서 두 사람은 頂上회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국내 안보를 일방 강연하듯 쏟아 내며 카터를 무안스럽게 만들었다. 화가 난 카터는 옆자리에 앉은 밴스 美 국무장관에게 『이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는 이 방에서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써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 카터와 만났을 때 배석하셨죠.
『네. 朴대통령이 우리 실정을 오래 말씀하셨어요. 15분쯤 하셨나요?』
- 15분이면 통역시간과 합쳐서 30분 정도는 되겠네요.
『네, 「주한 미군철수는 안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 인권문제에 대한 지적은 없었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만날 때 많이 고민을 하시던가요.
『그런 것 같아요. 혼자 방에서 골똘히 생각하셨어요』
- 카터 대통령의 인상은 어땠나요.
『무뚝뚝하고… 두 분이 서로 잘 안 맞았어요』
- 「朴대통령 카터에게 엿 먹이는 구나」 하는 느낌을 받진 않으셨나요.
『그렇게는 안 느꼈고… 「자기 열성을 다해 카터를 설득시키려고 애쓰시는구나」하고 생각했어요. 朴대통령은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반박하는 식이 아니었고 이해시키려 하셨습니다』
- 그 자리에서 카터가 발언을 하지는 않았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어요』
- 자기 고집은 좋은데 손님을 불러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잘못된 거지요. 술술 부드럽게 해야되는데…』
- 우리 쪽에서 안 말렸나요.
『대통령이 그렇게 하실 줄 누가 알았나요』
- 그렇게 하려면 참모들하고 먼저 논의를 했을 텐데….
『통역을 맡았던 최광수가 말을 부드럽게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을 겁니다』
- 카터 등장 이후 미국이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로 압박해 오니 朴대통령이 꽁하고 벼르고 있지 않았나요? 마치 「너도 내 욕 많이 했으니 내가 할 이야기는 하겠다」는 식이 아니었나요.
『사실 카터도 잘못이에요. 남의 나라에 국빈으로 와서 비행장에 내려 軍 숙소로 바로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악수만 하고 바로 미군 숙소로 가버렸어요. 그런 불미스런 일이 어딨나요. 화가 더 났죠』
- 평소 朴대통령이 카터를 이야기할 때 「땅콩장사나 하던 사람」 정도로 얘기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하지만 과히 좋지 않게 생각 했어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직설적으로 욕한 적이 있습니까.
『기억에 없는데… 뭐 있었을 겁니다. 회담을 마치고 본관 앞에 나가 보니 카터가 탄 리무진이 안 떠나요. 朴대통령과 제가 옆에서 기다리는데 당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리무진에 탔다 내렸다를 반복해요. 한참 있어도 떠나지 않아요. 또 10m쯤 갔다가 다시 멈춰 서요.
의전비서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하니 「카터와 글라이스틴이 이야기한다」는 정도만 얘기해요. 나중에 들으니 글라이스틴이 카터에게 욕을 얻어먹었던 것 같아요』
회담 후 카터는 리무진을 숙소 입구에 세워둔 채 차 안에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회담 진행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朴대통령은 그간 카터에게 묻어 두었던 섭섭한 생각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해 7월20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朴대통령의 이날 압박이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최태민과 박근혜
-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네, 朴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 朴槿惠씨도 朴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김재규와 차지철, 그리고 박정희
- 이 문제 역시 朴대통령의 접근권 관리가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빨리 정보부장을 바꿨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朴대통령이) 두 사람 모두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어. 둘 다 좋아했으니까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좋아한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두 사람이 동향인 데다 육사 동기(2기)고 초등학교 교사 경력도 같았다고 해요. 사실 확인은 안 했지만 김재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김재규는 朴대통령과 어릴 때부터 친분관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대할 때 동생처럼 대했지요.
『네, 朴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어떻게 보면 朴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네, 맞아요』
- 김재규도 朴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네, 그럼요』
- 朴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을 朴대통령이 조장하거나 암묵적으로 악용해 권력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고 보진 않으십니까.
『정치인으로 두 사람을 경쟁시켰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朴대통령 성격으로 볼 때 악의적으로 그렇게 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朴대통령은 두 사람 다 귀엽게 보셨어요』
- 이럴 때 JP(김종필) 같은 분이 朴대통령을 만나 간언할 수 있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JP도 차지철을 상당히 경계를 했겠네요.
『네』
「박정희는 JP를 후계자로 고려 않았다」
건설부 장관 시절 국회에서 답변하는 金載圭. |
『그랬을까요? 누가 괜히 한 말일 겁니다』
- 朴대통령의 지시로 그런 연구를 했다고 하던데요.
『저는 朴대통령이 어떤 계기가 있었다고 해도 JP에게 (대통령직을) 넘기진 않았을 것으로 봐요』
- 그런 느낌을 받았나요? JP를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제가 육군참모총장 시절, 「JP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外相의 韓·日 청구권 협상 메모를 두고 학생데모가 심할 때였는데, 朴대통령에게 그 얘기했더니 짜증을 내시며 「그런데도 그 친구 왜 못 알아들어」라고 하시면서 저보고 「金장군이 JP와 가깝잖아. 나가라고 얘기해」라고 할 정도였어요. 제가 비서실장 시절에도 국내·외 사정이 한참 복잡해 웬만하면 JP를 불렀을 텐데 한 번도 부르지 않았어요』
- 朴대통령이 1979년 당시 만난 사람을 보니 공화당 사람과는 거리를 두신 것 같아요.
『싫은 사람은 안 만나려 하셨어요』
- 朴대통령이 김수환 추기경과 만나시지는 않았나요.
『제가 한번 만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과히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 그분들을 싫어하셨나요.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같은 분들 이름을 거명하면 그냥 머리를 흔들었어요』
- 그분들이 곧잘 바른 소리를 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셨나요.
『저는 그런 분들과 朴대통령을 연결시키려 했는데 「그만둬」 했어요. 朴대통령이 김재규나 저를 보시면, 어린애처럼 생각하시고 「그만둬」, 「나둬」, 「싫어」라고 하셨어요. 물론 딴 비서관들에겐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셨어요』
- 정승화 장군과 차지철의 관계는 어땠나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였어요. 그런데 차지철은 정승화를 좀 밑으로 봤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정승화는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경솔히 움직일 사람이 아니지요』
사무라이 기질 있던 김재규
- 김재규의 軍 시절 당번병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 눈에 비친 김재규는 사무라이 영화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김재규는 일제시대 일본군 소년 항공병으로 갔다 왔다고 하는데 그학교 교육이 사무라이 기질로 만드는 겁니다. 격하면 배를 가르는 것은 보통이고. 김재규가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 그가 사무라이 얘기를 자주 하지 않던가요.
『그냥 일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기질이 있었다고 봐요』
-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존경했던 이가 잘못되면, 그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한다고 봅니다. 김재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글쎄…』
- 김재규는 평소 예절이 바른 사람이었죠. 차지철과 다르죠. 차지철은 교양이 없고 안하무인이고.
『그럼요』
- 그런데 김재규는 갑자기 폭발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던데… 누가 「김재규가 건설장관 시절, 국회 상임委 도중 갑자기 화를 내더라」고 기억하더군요. 10·26이 일어난 그날 밤도 그런 성격이 폭발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러니 옆 건물 2층까지 뛰어가 권총을 가져왔겠죠』
朴正熙의 애창곡
- 金실장은 朴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모든 것이 깨끗하고 직선적인 사람입니다. 구질구질하게 말을 돌려서 하는 분이 아니셨어요. 그분을 두고 요즘 친일파라는 말이 많은데 그런 사람을 친일파라고 하면, 대한민국에 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요즘 과거사 문제로 떠드는데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나요』
- 朴대통령이 사석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뭐… 없어요. 일본 노래를 부른들 또 어떴습니까. 그걸 가지고, 그걸 부르면 친일파가 돼버리는 건가요?』
- 朴대통령이 어떤 노래를 주로 부르셨나요.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으악새 슬피우니~」 두 가지만 불러요. 트럼펫도 부셨는데, 잘은 못하셨지만 오르간도 치시고요. 사범학교 출신이니 음악 기초는 합니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에 들어가면 천재라고 했지요』
-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金大中씨가 대통령 후보로 뽑힐 당시 정보부장을 하셨죠. 그때 정확하게 예측을 하셨나요? 아니면 金泳三씨가 후보가 된다고 보셨나요.
『예측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잘못해서) 대통령께서 좀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웃음)』
- 오히려 朴대통령은 金泳三씨가 되면 경상도 표를 나누니까 오히려 金大中씨가 된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시진 않았나요.
『글쎄요. 그때 그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당시 저는 정치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여를 안 했어요』
- 정치는 다른 사람이 했나요.
『그때가 제가 정보부장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나중에 공화당 쪽 사람에게 들으니 제가 그걸 잘못해서 잘렸다고 해요』
-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가요.
『大選을 잘못 예측해서…』
- 大選이 아니라 전당대회가 아닙니까.
『뭐든 「잘못해서 잘렸다」는 이야기를 그때 들었어요. (全大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 朴대통령이 김형욱을 사석에서 욕하신 적이 있나요.
『농담처럼 이야기하시지, 그렇게 심하게 욕한 적은 없었어요』
朴대통령, 부마(釜馬)사태 심각하게 안 봐
- 권력자로서 朴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비정하다고 하지만, 행정하는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고 합리적인 분으로 보더군요. 권력자냐, CEO냐를 두고 시각차가 크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낀 적은 없나요.
『별로. 당시에는 어느 정도 통치에 자신감이 있으셨다고 봅니다』
- 1979년 釜馬사태 당시 비상계엄령은 과잉조치가 아니었나요.
『저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김재규가 (부산에) 갔다 와서 「보통이 아니다」라고 해요. 저에게 「실장님,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해요. 차지철은 반대로 「괜히 (김재규가) 놀라서 저렇다」고 반박했어요. (두 사람의 시각차가)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국가안보회의를 열었지요. 당시 釜馬사태 분석보고를 했는데, 朴대통령이 釜馬사태를 계기로 국정쇄신을 하려 하셨지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 朴대통령은 釜馬사태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 평상시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닌데 작은 허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독재시대의 과잉이 사태를 키웠다고 봅니다. 조금만 뚫려도 김재규처럼 「큰일났다」고 과대평가한 것이지요. 지역도 한정됐는데 계엄령을 내리니 더 문제가 됐어요. 계엄령은 누구의 주장인가요.
『차지철일 겁니다』
-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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