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독재자 박정희와 그의 충복 차지철을 저격했다. 그런데 차지철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의 전 아내 송희성 여사는 이혼 후, 광주에서 교육자로 일했으며, 1980년 518 광주항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언론보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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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 前부인 송희성, 광주 민주회장 지내… 역사의 아이러니”
문화일보
입력 2023-12-29 11:15
https://munhwa.com/news/view.html?no=2023122901072836050001
1990년대 문화예술인들 모임에서 만난 정주영(오른쪽) 당시 현대 명예회장과 김종원 씨가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 낸
1세대 영화평론가 김종원
“육영수 여사, 출판비 익명쾌척
정주영, 시인학교 수차례 참석
문학인들과 소탈하게 어울려
원자료 확인 안 한 실수도 기록
제삶,문학의 육체 + 영화의 정신”
photo10·26 사건 때 총격에 의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숨진 차지철 전 경호실장. 그는 유신정권 독재를 비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 번째 부인 송희성은 광주 오월민주여성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화여대 국문과 출신인 송희성은 차지철이 공수특전단 대위였을 때 만나 결혼했으나 얼마 안 있다가 헤어졌다.
송희성은 그 후 고향 인근인 광주에서 교육자로 일하다가 1980년 5월 광주항쟁 때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도의원을 거쳐 한국여성지도자연합 광주·전남회장을 지냈다고 한다.
지난 2022년 타계한 송희성과 그의 전 남편 차지철의 비사(秘事)는 최근 나온 책 ‘시정신과 영화의 길’(한상언영화연구소 출간)에 기록돼 있다.
이 책은 1세대 영화평론가 겸 시인 김종원(85·사진) 씨의 회고록이다.
저자인 김 씨가 활동했던 영화, 문학 영역의 사연이 주류를 이루는데, 그 속에 우리 현대사의 숨은 이야기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한국시인협회가 시인들의 시집을 펴내며 ‘어느 고마운 분의 뜻을 받들었다’라고 밝혔는데, 육영수 여사가 문학 스승인 박목월 시인협회장을 통해 출판비를 익명으로 쾌척했다는 것 등이다.
한국경제 거목인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문예지 ‘심상’의 해변시인학교에 수차례 참석해 당대의 문학인들과 소탈하게 어울린 이야기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김 씨는 28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이 후학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집필했다”고 밝혔다.
“영화연구소를 하는 한상언 씨가 제 생애를 기록하고 싶다고 간곡히 청해서 1년 반 동안 구술했어요. 그걸 다시 1년 반 동안 글로 옮겼습니다.”
국판 612쪽에 달하는 책의 본문은 8.2포인트의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집돼 있다. 고향인 제주에서 영화를 처음 보고 시작(詩作)을 했던 어린 시절부터 팔순이 넘어서도 예술 현장을 지키는 현재까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는 신문사 기자, 잡지사 편집자, 사보 제작자, 영화사 기획자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면서 문학인들과 교우하는 한편, 영화 평론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데 힘썼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산파역을 하고 버팀목이 돼왔다. 방송에 출연하며 얼굴이 알려져서 오디오 ‘인켈’의 CF 모델을 한 적도 있다.
당연히 그의 회고록에는 영화감독, 배우들과의 일화들이 담겨 있다.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인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소속사들이 평문에 누구 이름이 먼저 올라가느냐로 엄청나게 신경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고소를 머금게 한다. “윤정희 선생 말년에 그 병증을 남들보다 일찍 알게 됐어요. 그래서 윤 선생에게 영화평론가협회 공로상을 서둘러 주도록 앞장섰지요.”
그는 1980년대에 책 ‘시네마 에로티시즘’을 펴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책 표지에 있는 영화 ‘엠마뉴엘 부인’ 화보가 선정적이라며 공보부가 판매 금지 조처를 했다. 그가 나중에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며 언제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쪽에 선 것은 이때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걸어다니는 영화사’로 불리지만, 한국영화 도래 시기에 대한 예증을 잘못 든 경우도 있었다. 전문가 의견만 듣고 원자료를 확인하지 않은 데서 비롯한 실수였다. 그는 “회고록은 엄밀해야 하니까 그런 내 실수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제 삶을 되돌아보면 문학이라는 오른발의 육체와 영화라는 왼발의 정신으로 이뤄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 함께 펴낸 시집 ‘시네마 천국’이 그 뚜렷한 증거이지요.”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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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 전경호실장첫부인 A일보 상대 소송
입력1991.07.11 00:00
10.26사태때 숨진 차지철 전청와대 경호실장과 결혼을 했다가 합의이혼한
송모씨(52)가 11일 자신에 관한 내용을 기사로 실은 A일보를 상대로 2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민사지법에 냈다.
차 전실장과 결혼을 했다가 29일만에 합의이혼을 한 것으로 확인된
송씨는 소장에서"A일보가 지난3월1일자 연재물속에 본인을 `끼있고
남성편력이 심한 여자''로 묘사, 차씨와의 과거등이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현재의 남편과 심한 불화가 생긴것은 물론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학교에서 소외당하는 등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송씨는 현재 모대학 동문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유명 사회단체의
대표로도 활동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3.
‘제2회 윤희순상’에 송희성씨
수정 2019-10-20 17:20등록 2006-09-03 21:16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안사람 의병의 노래〉 등을 만들어 부녀자들에게 보급한 여성 의병장 겸 독립운동가 윤희순(1860~1935) 선생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춘천시가 제정한 ‘제2회 윤희순상’ 수상자에 송희성(69)씨가 선정됐다.
송씨는 독립유공자 송봉해 선생 딸로 이화여대 시절 대학생 농촌계몽대를 조직해 농촌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서울 신촌역 공터에 도시빈민 부랑아동을 위한 천막집과 야학을 운영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는 당시 대학교수이던 남편과 함께 활약하다 구속당했다. 현재 한국여성지도자연합 광주·전남지부장으로 독거노인·장애인·외국인노동자돕기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시상식 10월18일 춘천문화예술회관.
518광주 항쟁 당시, 광주 여성들의 참여.
인자, 진, 아방궁... 5.18 숨은 주역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
[5.18 40주년 특집]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이제 '전설'에서 '역사'로 끌어올리자
20.05.15 18:27
박정훈(twenty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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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광주 한 병원의 모습.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518 당시 광주 한 병원의 모습.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5.18기념재단 영상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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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2일, 불로동 광주적십자병원은 헌혈을 하기 위한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날 도청 앞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부상자들이 몰려서, '병원에 피가 모자르다'는 소식이 들리자 주변 시민들이 너도나도 헌혈을 하러 병원에 모인 것이다.
당시 송원여고 교감이었던 송희성(83)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은 헌혈하러 온 시민들을 줄 세우는 등 병원에서 '질서 유지'를 돕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과 과장이었던 의사 김아무개씨와 여성 무리의 가벼운 실랑이를 목격하게 된다.
"느그들 피는 필요 없어야."
"그러면 우리 피를 검사라도 해서 써주세요."
검사를 받으면서까지 헌혈을 하려 했던 이들은 소위 '황금동 콜박스'라는, 유흥업소가 몰려 있는 거리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송 전 회장은 의사에게 절박하게 호소하는 여성들의 차림새를 보고난 뒤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수년간 방치 상태로 있는 옛 적십자병원 앞에서 그는 감회에 젖은 듯 말했다.
"내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다고... 오미 이렇게 우리가 대동(大同)세상으로 가는구나, 저분들도 저렇게 돕는구나,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내고 다녔어."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황금동 여성들의 전설
구 광주적십자병원 사적비 앞에 선 송희성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
▲ 구 광주적십자병원 사적비 앞에 선 송희성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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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헌혈까지 거부당했음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5.18 민주화운동 내내 강력한 여성군단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이 했던 일은 헌혈뿐만이 아니었다. 집회에 참여하거나 대치 상황에서 짱돌과 맥주병을 무기로 삼아 싸웠다. 물과 주먹밥을 시민군들에게 제공해주는 '보급병' 역할도 했으며, 공수부대에 쫓기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숨겨주기도 했다.
황금동은 금남로와 도청 등 공수부대의 사격과 무자비한 폭행이 이뤄진 곳과 매우 인접해 있다. 안전을 위해서는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런데 황금동 여성들은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적극적인 주체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술집 여자'라고 비하 당하고 차별받던 그들은, 민주화운동 과정을 통해서 한 명의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는 5.18 당시 광주가 해방구이자 평등한 자치 공동체를 구성했음을 입증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에 대해 정리된 자료는 전무하다. 한국현대사회연구소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499명의 구술을 담아 1990년에 발간한 <광주5월민중항쟁 사료전집>에서 6명의 증언자들이 황금동 여성들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황금동 여성들이 실제 항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기가 어렵다.
기록이 없다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온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가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2018년 <오마이뉴스> 정미경 시민기자의 '5.18 때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은 왜 잊혔나'(http://omn.kr/r9k2)를 통해서다. 이 기사는 공식 기록 하나 없이 잊힌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을 당시 광주 시민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정리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사를 바탕으로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추가 증언을 듣고, <광주5월민중항쟁 사료전집>을 참고해 정리한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황금동 쪽으로 도망치는 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주고 ▲ 금남로 등으로 주먹밥 등 생필품을 보급했으며 ▲ 시신들을 수습해서 염을 했고 ▲ 직접 집회나 대치 현장에서 싸웠다.
먼저 이들은 공수부대에게 쫓기는 시민군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돌봐주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송희성 전 회장은 "황금동 콜박스 네거리에서 학생들이 도망다닐 때, 다 감춰주고 그랬어. (밖에서 안 보이게) 셔터를 내려버렸어"라며 당시 황금동 여성들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시민군을 숨겨주는 것은 결코 우연한 계기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목숨을 거는 위험하고도 능동적인 행위다. 이들이 겁내지 않고 시민군을 숨겨줬던 이유는 전두환 군부세력과 계엄군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쓴 이재의씨는 당시 황금동의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황금동 콜박스 쪽으로 도망을 갔다. 황금동 일대 술집 여자들도 이를 뿌드득 갈며 식칼을 들고 다니면서 공수들의 행위에 치를 떨었다. 그들은 콜록이는 학생들에게 치약을 갖다 주기도 하고 돌도 날라다주었으며 마스크까지 가게에서 사다주었다." - <광주5월민주항쟁 사료전집> 중 -
한광진(69) 5.18광주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사무총장은 자신이 직접 황금동 여성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2018년 인터뷰 당시 밝힌 바 있다. 황금동 여성들이 부상 당하고 나온 자신에게 옷과 신발을 챙겨줬고 "어떤 길로 가면 계엄군을 피할 수 있는지 알려줬다"고 한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황금동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이용해서 시민군들의 도피와 은신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복 치마 안에 사람을 감싼 채 탁자 밑에 숨겨 놓고 앉아 능청스럽게 계엄군을 상대했다는 일화'는 그저 '영화 같은 이야기'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도와주고 살린 시민군의 숫자를 추정해 본다면 민주화운동 속 그들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자원 동원해 싸우다
▲ 위의 사진처럼 5.18민주화운동 기간동안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이 주먹밥을 나눠준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먹밥과 물을 함께 날랐던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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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 쪽으로 갔더니 술집 여자들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그 여자들을 보니 온 광주시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평소에는 술집 여자들이 낯설고 불결하게 생각되었는데 그렇게 작으나마 성의를 다해 마음을 나누는 그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따뜻한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광주5월민주항쟁 사료전집> 고등학생 김○○씨의 증언 중 -
황금동 여성들은 밥과 물을 비롯한 음식과 생필품의 보급을 담당했다. 이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물과 함께 금남로로 운반하고, 이를 시민군들에게 나눠줬다. 당시 주변 주민들은 "시내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 열심히 한다" (정경숙씨, 2018년 오마이뉴스 인터뷰)라고 말하는 등 이들의 활약을 높게 샀다. 그러나 대인시장·양동시장 상인들이 주먹밥을 지어 나른 사실은 널리 알려져 '광주공동체 정신'의 상징이 된 반면, 이들의 헌신은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다.
상무대에서 사망자의 시신을 지키고 염을 한 이들도 있었다. 작고한 고정희 시인이 <월간중앙> 5월호에 기고한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이라는 글에는 이들의 헌신이 기록돼 있다.
"도청 앞 맞은편 상무관에는 신원이 확인된 시체들이 질서정연하게 태극기와 무명천에 덮여 진열되었고 입구에 분향대가 마련되었는데, 주로 황금동 술집 접대부로 알려진 여성들이 자진해서 이들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을 씻기고 양말을 신기고 염하는 일을 도왔으며 민주영령을 위로하는 분향대를 지켰다(이들중 2명이 나중에 구속되어 정현애(오월어머니집 전 관장)와 감방생활을 함께 했다)."
당시 시민군 보급부장이었던 구성주(64)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도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상무대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중 황금동 여성들을 봤고, 외양상 독특했기에 이들이 황금동에서 일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현애(67) 전 관장과 5.18민주유공자 이영자(78)씨의 증언은 좀 더 구체적이다. 5.18 직후 체포되어 광산경찰서(유치장)에 있던 이들은 '진'과 '인자'(예명)를 만났는데, 이들은 '아방궁'이라는 유흥업소에서 일했고, 자신들이 5.18 당시에 시신 수습을 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아방궁에서만 7~8명이 시신을 염습해서 상무대로 옮기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아방궁에 대해서 정현애 전 관장은 황금동 콜박스 거리의 유흥업소, 이영자씨는 도청 뒤 나이트클럽, 송희성 전 회장은 도청 뒤 '요정'이라고 기억한다).
"그들도 광주 시민"
황금동 여성들의 활동이 시민군을 돕는 일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집회에 참여하고, 대치 상황에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짱돌을 던지고, 황금동에서 바리케이드가 쳐지자 빈 맥주병을 나르기도 했다. 총이 없을 뿐,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해 싸웠다.
"집회에서 외쳤던 구호는 '전두환을 때려잡자'. '양키들은 물러가라' 등이었고 정의가,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군중 속에는 황금동 술집 여자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그들을 보고 신기해하며 야! 하는 감탄을 하기도 하고, 그들도 광주 시민인데 당연하다는 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런 말을 들었다. - <광주5월민주항쟁 사료전집> 공장노동자 김○○씨의 증언 중 -
23일 도청집회의 상황을 묘사한 위의 문장에서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의미심장하다. 처음에는 그들이 집회에 함께하자 일시적으로는 '신기하다'는 감정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자연스럽게 '광주 시민'이라는 평등한 위치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조용하게 시민군을 도왔던 존재가 아니라, 직접 항쟁에 나서서 자신들이 '광주 시민'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목포 출신 '인자'와 서울 출신 '진'... 구체적이고 중요한 증언들
현재의 황금동 모습.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현재의 황금동 모습.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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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서 언급한 증언 자료는 황금동 여성들의 활동을 설명하는 데는 불완전하다. 먼저 이들은 일반적인 시민 대학생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이들이 항쟁에 참여한 계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지 등은 외부인이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활약상 역시 목격자들의 증언만으로는 구체적, 입체적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황금동 여성들의 직접 증언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80년 이후 황금동 여성들을 만났거나 연락했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또한 황금동 거리를 둘러봐도 80년대 '황금동 콜박스'라는 유흥의 거리는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금 황금동은 옷 가게와 음식점이 모여 있는 흔한 도시의 중심부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올해 초,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여성 운동가들로부터 황금동 여성들의 신원을 짐작하게 해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 여성들만 모여 있던 광산경찰서에서 진과 인자(예명)이라는 황금동 여성들을 만났다는 정현애 전 관장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100여 명 정도가 유치장에 있었어요. 황금동 여성들은 15~20명 정도... 외모상으로 눈에 띄었어요. 방(유치장)을 고정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멤버가 바뀌었거든요. 그러다가 아방궁이라는 술집에서 일하는 진과 인자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인자는 집이 목포였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술집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남자친구가 대학생이었고, 하루는 그 남자친구 부모인지 친구인가가 면회를 왔어요. 남자친구는 해남 출신인데 5.18 항쟁에 뛰어들었다고 해요.
진은 집이 서울인데 집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희생당한 시신들이 도청으로 집결하고 이를 상무관으로 옮겨놓았는데, 진이 이 시신들을 돌봐주고 지키는 일을 했다고 해요. 인자는 서포트 역할을 했고요. 아방궁에서만 7~8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물자를 공급하거나 수혈을 하면서 시민군들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상무관에 있다가 26일에 아방궁으로 다들 돌아갔는데, 누군가가 신고를 해서 잡혀 왔다고 해요. 둘은 1차 훈방(7월 3일)에 풀려난 것으로 기억해요."
그는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하나 말해줬다. 황금동 여성들이 자신들이 왜 잡혀온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죄목을 경찰서에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저렇게 죽으면 어여쁜 아가씨가 돌봐준다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답하면서 '폭도 고무'라는 황당한 죄명을 댔다는 것. 이에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이 황당해서 전부 웃었다고 한다.
5.18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가두방송'을 했다가 체포된 차명숙(59) 대구경북 5·18동지회장은 광산경찰서에 오기 전에 505보안 상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당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제 기억으론 여덟, 아홉 명쯤 됐던 것 같아요.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컸어요. '당당한 일을 해서 상을 받아야 하는데 잡혀왔다'고 했거든요. 특이하다고 느꼈어요. 제 밥이나 속옷 등을 챙겨놨던 것 같고... 헌혈도 하고 시신을 닦았다고 들었거든요. 거기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헌혈을 어떻게 해? 라는 반응이 있었어요."
5.18 유공자인 이영자씨의 증언도 비슷하다.
"25~27살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걔네가 그래요. '언니 나는 실은 상 받아야 할 일을 했는데 죄인이 돼서 왔어요.' 들어보니까 시신 수습을 하고, 광목으로 옷을 만들고 염을 해서 도청 앞 상무대로 옮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언젠가는 너희가 상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줄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그런데 (5.18) 유공자가 된 것 같지는 않아요. 모임에서 본 적도 없고, 이름이나 신상을 모르니까 찾기도 어렵고요."
계엄군의 서류... "직업 : 접대부(향락)"
계엄군에 붙잡힌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서류로 남아 있진 않을까?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남아 있는 '훈방' 관련 자료(5.18 광주 민주화운동자료총서)를 살펴봤다. 7월 3일 훈방 명단에 '인자'라는 이름은 있었으나, 정 전 관장이 말하는 이와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직업란을 살펴봐도 황금동 여성들로 특정될 수 있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훈방자에게 받는 '각서' 자료가 일부 남아 있었는데, 한 여성의 직업이 접대부(향락)으로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소 역시 한 여관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황금동 여성들'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5.18전자자료총서 캡처. 한 여성이 훈방조치를 받고 나갈 때 썼던 각서다. 직업란에 부분에 접대부(향락)이라고 적혀 있다.
▲ 5.18전자자료총서 캡처. 한 여성이 훈방조치를 받고 나갈 때 썼던 각서다. 직업란에 부분에 접대부(향락)이라고 적혀 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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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추적은 딱 여기까지였다. 위 각서에 쓰인 이름과 광산경찰서에서 감옥생활을 했던 두 명의 예명을 바탕으로, 5.18 단체들과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에 질의했으나 마땅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만나거나 연락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났다" "만나기 어려울 거다"라며 부정적인 전망을 드러냈다.
<오마이뉴스>가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한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적으로 항쟁을 했던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을 이대로 야사(野史)로 남겨둘 수만은 없다. 유치장에 있던 황금동 여성들의 말처럼, 그들은 당당하고 옳은 일을 했고,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황금동 여성들의 증언이 세상에 알려지면, 80년 5월 광주에서는 계층과 지위를 초월한 항쟁이 벌어졌고, 여성들 또한 항쟁의 주체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될 수 있다. 이는 5.18의 의미를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전설'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오마이뉴스>는 한 명 한 명 '광주 시민'으로서 항쟁에 참여했지만, 기록되지 못한 그들을 계속 찾을 것이다.
※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오마이뉴스>는 5.18 민주화운동의 숨은 주역 중 하나인 '황금동 여성들'을 재조명하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만약 자신이 '황금동 여성들'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거나, 혹은 황금동 여성들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꼭 오마이뉴스에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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