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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33세로 별세, 1934년 동아일보 보도, 민요시인으로 소개. 김소월의 시 "돈타령" 1934. 김소월 사망 원인 (아편)

by 원시 2023. 10. 13.

당시 동아일보는 김소월 사망 원인에 대해서 자세히 보도하지 않았다.  김소월은 광산업 실패와 동아일보 지국장 사업 실패로 염세주의에 빠졌고, 곽산에 들어가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시인이 사업가로 성공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돈타령.

 

1. 요닷돈을 누를쭐고? 요마음.

닷돈 가지고 갑사당기 못씃캇네

은가락지는 못사갓네. 아하!

막코를 열개 사다가, 불을 녓챠 요마음.

 

2. 되려니 하니 생각.

만주갈까? 광산엘 갈까?

되갓나 안되갓나, 어제도 오늘도.

이러 져리하면 이리져리 되려니하는 생각.

 

3. 잇슬때에는 몰낫드니

업서지니까 네로구나

 

잇슬때에는 몰낫드니

업서지니까 네로구나

 

몸에 갑진것 하나도 업네

내 남은 밋쳔이 본심이라.

 

잇든 것이 병발이라

업드니편만 못하니라

 

가는법이 그러니라

청춘 아울너 가지고갓네

 

술고기를 안먹으랴고

밥 먹고 싶플줄 네 몰낫지

 

색시와 친구는 봇튼게라고.

 

네쳐권 업슬줄 네몰낫지

 

인격이 잘나서 제로라고

무엇이 난줄을 네 몰낫지

 

천금산진 환복래 (千金散盡 還復來) 

업서진 뒤에는 아니니라

 

상감님이ㅡ 되여서락도

발은 것이 나드니라

 

인생부득 갱소년 ( 人生 不得 更少年)은

내가 잇고서 할 말이라.

 

한강수라 인도교가 

낫고 놉픔을 아럿드냐

 

가는 법이 그러니라

용기 아울너 가지고 간다

 

내가 누군줄 네 알겟느냐

내가 곳쟝 네 세상이라

 

내가 가니 네 세상 업다

세상이 업시 네 사라보라

 

내 쳔대를 네가 하고

누 천대를 네 밧나보랴

 

나를 다시 밧드는 것이

네 세상을 밧드는게니라

 

또나만 보라 내 또오마

또나만 보라 내 또오마

 

 

아니온다고 아니온다고

아니올 리가 잇겠느냐

 

잇서야 하겟기 딸으지만

잇고보니 네로구나

 

잇서야 한다고 딸으지만

잇고보면 네로구라

 

[삼천리] 53호. 1934. 8. pp.175-176

 

 

 

 

 

 

 

 

 

참고: 천금산진 환복래 : 이백의 시, 장진주 將進酒

 

天生我材 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千金散盡 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하늘이 나를 낼 적엔 재능이 반드시 쓸 곳이 있을지니
천금의 돈도 다 흩어 쓰면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로다.

 

 

 

김소월 별세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1934.12.29.

 

민요시인, 김소월 별세. 삼십 삽세의 일기로.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영문을 전수하엿으며 민요의 창작과 연구에 힘을 드리엇고, 최근까지 무슨 저술에 저수중이엇섯다 한다.

 

 

 

 

 

1990.8.30. 매일경제. 김소월 소개.

 

김소월 본명은 정식. 소월은 그의 아호.

1917년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다.

1920년 동인지 <창조>에 '낭인의 몸' 등을 게재, 문단에 데뷔.

1919년 3-1운동으로 오산학교 중퇴.

1921년 서울 배재고보에 학업.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배재고보 시절 발표작.

 

1923년 배재고보 졸업후, 일본 동경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 귀국.

귀국후, [영대] 동인으로 활동, '산유화' '촛불켜는 밤' 등 시를 발표.

 

1926년부터는 작품발표를 중단,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인생의 회의에 젖음.

 

'돈타령', '삭주구성' '차안서선생 산수갑산 운동' 등 시가 사업실패후 심경을 잘 나타냄.

 

 

 

 

1990.8.30. 매일경제. 김소월 소개.

 

김소월 본명은 정식. 소월은 그의 아호.

1917년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다.

1920년 동인지 <창조>에 '낭인의 몸' 등을 게재, 문단에 데뷔.

1919년 3-1운동으로 오산학교 중퇴.

1921년 서울 배재고보에 학업.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배재고보 시절 발표작.

 

1923년 배재고보 졸업후, 일본 동경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 귀국.

귀국후, [영대] 동인으로 활동, '산유화' '촛불켜는 밤' 등 시를 발표.

 

1926년부터는 작품발표를 중단,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인생의 회의에 젖음.

 

'돈타령', '삭주구성' '차안서선생 산수갑산 운동' 등 시가 사업실패후 심경을 잘 나타냄.

 

 

 

 

 

김소월은 일제강점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34년에 자살했다. 1923년에 일본에 유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돈화·김억에게서 배웠으며 김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창조』, 『개벽』 등에 시를 발표했고, 김억과 함께 『영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5년에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시론 「시혼」을 『개벽』에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민요적 율조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한국 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의


일제강점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 · 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 · 이돈화(李敦化) · 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주1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 · 「야(夜)의 우적(雨滴)」 · 「오과(午過)의 읍(泣)」 · 「그리워」 · 「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 「첫치마」 · 「엄마야 누나야」 · 「진달래꽃」 · 「개여울」 · 「제비」 · 「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삭주구성(朔州龜城)」 · 「가는 길」 · 「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 「꽃촉(燭)불 켜는 밤」(1925) · 「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 「첫치마」 · 「금잔디」 · 「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먼후일」 · 「꽃촉불 켜는 밤」 · 「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 · 「건강(健康)한 잠」(1934) · 「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 「팔벼개 노래」(1927) · 「돈타령」(1934) · 「삼수갑산(三水甲山) ·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 · 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1939), 하동호(河東鎬) · 백순재(白淳在)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참고문헌


『김소월전집』(김용직,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한국현대시인연구』(김재홍, 일지사, 1986)
『시와 상상력의 구조』(김현자, 문학과 지성사, 1982)
『김소월 연구』(신동욱 편, 새문사, 1982)
『꿈으로 오는 한 사람』(오세영 편, 문학세계사, 1981)
『현대시론』(정한모, 민중서관, 1973)
『문학과 인간』(김동리, 백민문화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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