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철학/민주주의(democracy)

2007년 정년퇴직 인터뷰. 민주화 운동의 숨은 공로자,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21세기 세계질서 재편기에 철지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문화국가"

by 원시 2025. 11. 24.

419 세대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옥자', 제 2의 '옥자'를 기다리며.

 

그런 '옥자'는 어딘가에 또 있겠지?

놀라운 건, 정옥자 선생이 고 3때 419 데모에 합류했고, 나중에 518광주, 1987년 6월 항쟁, 1997년 IMF 독재까지 경험했으니,

한국전쟁부터 2008년 미국 금융공황까지, 현대사의 증인인 셈이다. 

 

 

정옥자 교수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실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학생운동가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 

 

난 국사학과 수업을 들은 적이 없어서 만날 기회는 없었다.

단아하고 친근한 미소로 잘 알려진 선생님이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자살을 했다고 나온다. 그 밝은 미소 속에 그런 가족사의 비극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기사를 읽다가 갑자기 슬픈 전율이 느껴질 정도이다. 뭔가 한 대 맞은 느낌이다.

그냥 우리는 운동권 학생들을 도와준 우군의 교수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정선생님이 무슨 학적 작업을 했는지도 실은 나도 모른다. 

 

다만 그의 바램대로, "21세기 세계질서 재편기에 철지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한국이 문화국가"로 된 측면은 있다. 하지만 내부를 파고들어가면 민심은 20세기보다, 1980년대~1990년대보다 더 살벌해졌고, 사람들 사이에 상대적 빈부격차와 상실감은 더 커졌다. 세련된 질좋은 상품들은 양적으로 늘어났지만, 그로부터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그와 비례해 더 늘어났다. 

 

이 문제는 서울대가 정교수 말대로 취직공부나 고시공부(로스쿨)에 매달려서만은 아니다. 군부독재에서 민간 '리버럴' 대통령으로 변한 상황 속에서, 대학 속 학생,교수들은 그 정도 수준에 만족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부의 30년 세월에 대한 '대안적 대학 문화'를 만들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광주학살 주범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의 타도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의 추진 에너지는, 87년~92년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대안적 문화' 창조 에너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서울대의 신축 건물들과 설비들의 변화가 '대안적 문화'를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동시에 소중한 일인지를 알려준다. 2000년 이후 서울대 건물들은 그 이전에 비해 거의 1.5배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했고, 현대, 삼성, LG, SK 등 재벌기업들의 기부금과 로고로 가득차게 되었다. 서울대 '법인화'(기업화)의 조건들은 서울대 건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교수들과 강사들은 학자적 성격보다는 '법인의 피고용인'으로서 지위, 학생들은 졸업장 라이센스를 따는 '고객'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더 강력해졌다. 독재 30년 시절에 철학과에서 음대 피아노, 공대,의대교수까지 '민주주의' 성명서를 내면서, 학자적 양심 공동체를 성취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7년 IMF 독재 이후, 프로젝트 따내는 돈의 크기가 제자의 양을 결정했고, 교수 내부 빈부격차도 커졌다. 

 

그렇다고 해서, 정옥자 교수의 마음씨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더 절실하다. 정옥자 교수도 졸업하고 10년간 애 낳고 기르는 전업주부를 하다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사회생활과 지식노동자의 길을 걸었듯이, 어떤 휴식기 정지하는 시점도 있기 마련이다. 근거없는 낙관일 지 모르지만, 제 2의 정옥자는 서울대건, 꼭 서울대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학들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선배들의 오류를 넘어설 청년들은 늘 있을 것이다. 다른 밝은 미소로, 다른 색채로. 

 

 

 

 

 

31일 정년퇴직 앞둔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

 

업데이트 2009-09-26 19:31

 

 

 

정년퇴직을 앞둔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시집가고 10년 뒤에아줌마가 무슨이란 구박을 받으면서 공부를 다시 시작해 모교 교수가 돼 원없이 공부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면서내가 원래 말없는 성격이었는데 교수하면서 제자들을 즐겁게 해준다고 수다스러워진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활짝 웃었다. 이훈구 기자

 

조선시대때도 王이 못나면 측근들이 설쳤죠

 

현 정부를 민주화운동의 그림자라고 생각해요. 운동에 치우쳐서 제대로 된 공부를 못 했고 그러다 보니 정권을 잡았어도 의욕만 앞서지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거예요.”

 

31일 정년퇴직하는 정옥자(국사학) 서울대 교수는 작심한 듯 민주화운동의 적자를 자처하는 현 정부를 향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서른아홉 늦깎이로 1981년 서울대 교수가 된 정 교수는운동권의 소굴중 하나였던 국사학과문제 학생들의 지도교수였다. 그는 당시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이빨갱이로 낙인찍히는 것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던 교수 중 한 사람이었다.

 

국사학과 학생대표로 뽑혔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에 분노했고, 제자들이 시위에 앞장서거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위장취업에 나서 수업을 팽개쳤을 때도, 그래도 학업은 마쳐야 한다며 눈물로 호소한 교수였다. 그 역시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덕여고 학생회장으로 학생시위에 앞장섰기에 젊은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울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제가 정년퇴직한다고 하니까 81학번 제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얼마 전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그만 기념파티를 열어 줬어요. 다들 생업에 바빠 얼마나 모이겠나 싶었는데 당시 정원 20여 명을 꽉 채울 만하게 나타났어요. 다들 1980년대를 회상하면서 수업을 빼먹고 잘못한 것은 자기들인데 교수님이 왜 그렇게 저희들을 붙잡고 우셨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해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정 교수는 1986년 서울대 교수들이 전두환 정권의 정권 연장 기도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펼칠 때 이를 주도한배후이기도 했다.

 

정부에 의해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이 탄압받고 교권이 무너지는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해 4년 후배였던 동양사학과의 이성규 교수와 서명운동을모의했지요. 둘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하도 붙어 다니니까 주변에서 선후배 간에 바람났느냐고 놀려대기도 했어요.”

 

정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이후 서명서 문안을 작성한 것은 이성규 교수와 정운찬 경제학과 교수, 임현진 사회학과 교수였다. 그렇게 작성된 서명문에 첫 서명을 한 이가 정 교수였다.

 

여자인 제가 처음 서명을 해야 남자들이 부끄러워서라도 동참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맨 먼저 서명했어요. 하지만 1700여 명의 전체 교수 중 서명에 참여한 교수는 처음에 49명에 불과했어요. 당시 그 많은 남자 교수가 어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는지 저는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는 이런 사연의 일단을 동아일보 칼럼민주화운동은 계급장이 아니다’(8 2일자)에서 밝히면서손톱만 한 민주화운동의 전력이라도 팔아 공을 보상받겠다고 나서는 이 부박한 세상이 허망하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그 허망함에는 서명운동에 참여했다가 역풍을 겪은 가족사의 아픔도 숨어 있었다. 정 교수는 자세히 밝히기를 꺼렸지만 멀쩡하던 남편의 사업이 타격을 입었고, 그것이 화근이 돼 남편은 병으로 쓰러졌고 둘째 아들은 고교를 중퇴한 뒤 오랫동안 방황했다고 했다.

 

그에게도빨갱이라는 낙인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그의 삶에 이것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아는 이는 드물었다. 네 자매 중 맏이였던 그는 6·25전쟁 중 여덟 살 나이로, 피란길에서 절망한 아버지가 어린 세 동생을 껴안고 자신의 눈앞에서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던 피눈물 어린 가족사를 갖고 있다.

 

정 교수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해 두 아들을 낳은 뒤 다시 학업에 뛰어들어 부끄러움의 대상이던 조선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새롭게 각인시키는데 일조한 학자다. 오늘날 각광받는 ‘18세기 조선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군사(君師)라 불릴 만큼 신하들을 가르칠 수 있는 출중한 군주가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숙종-영조-정조가 바로 그런 학자 군주였습니다. 그들은 세자 때는 서연, 왕이 된 뒤에는 경연을 통해 당대 최고의 학자 아래서 조강, 주강, 석강이라 해 하루 세 차례씩 학문을 연마했기에 신하들을 압도할 역량을 갖췄습니다. 그런 왕들에 비하면 오늘날 천민자본주의 아래 민주정부의 대통령은 막대한 권한만 누릴 뿐 제대로 된 의무를 수행한다고 할 수 없죠.”

 

최근 청와대 참모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대변해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현상을 겨냥한 매서운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조선시대 역사를 봐도 왕이 똑똑하면 정승과 판서가 활약하고, 왕이 못나면 승정원이 설치기 마련입니다.”

 

원래 문학소녀를 꿈꿨던 정 교수는 퇴직 후 고향 강원 춘천에 마련한 집필실에서 학술서가 아닌쉽고 재밌고 즐거운 옛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가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보따리에는 청와대 386참모들이 어쭙잖게 꿈꾼 정조의 진면목을 담은 평전도 들어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얽힌 체험담도 담길 예정이라고 했다.

 

:정옥자 교수:

 

△1942년 강원 춘천 출생 △1965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1977년 서울대 대학원 석사 △1988년 서울대 대학원 박사 △1981∼2007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1999∼2003년 규장각 관장

 

저서로는조선후기 문화 운동사’ ‘조선후기 지성사’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등의 논저와역사에세이’ ‘역사에서 희망읽기’ ‘오늘이 역사다등의 역사칼럼집이 있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정옥자 교수 “서울대 출신 특권 그림자 짙다”


입력 2007.08.31 18:24

강병한 정치부장
강윤중 기자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65)는 31일 “서울대는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정년퇴임한 정교수는 “서울대는 엘리트로서 재고 살았다”면서 이같이 지적했다. 그러면서 서울대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법인화 문제나 재정 문제는 방법론에 불과할 뿐이고 대학으로서 무엇을 지향하며 어떤 인재를 키울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대가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서울대 출신이 누려온 특권의 그림자도 짙다”며 “혜택과 누림의 자세에서 벗어나 진정한 엘리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옥자 교수 “서울대 출신 특권 그림자 짙다”


‘요즘 교수’와 ‘요즘 학생’에 대해서도 비판의식을 드러냈다. “치열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에는 고시공부 한다고 하면 숨어서 했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학생들이 너무 취직준비와 자격증 취득에만 매달리니 딱하다”고 말했다. 교수사회에 대해서는 “과거에는 학생들을 (독재정권으로부터) 지키고 열심히 연구했으며 그것을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논문을 베끼고… 장사꾼보다 더한 교수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교수는 대학 사회의 속류화에도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물질적 기초는 대학 발전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지나친 물량화와 서구식 대학평가에 대한 종속을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대학사회에 만연한 ‘비판의식의 실종’을 걱정하며 “군사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은 대학의 비판의식에서 비롯됐다. 대학은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갖되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불거진 유명인사들의 학벌·학력 위조 사건에 대해서는 “학벌 없어도 우뚝 선 사람들이 많다”며 “학력이 높을수록 창조력이 줄어든다. 너무 학교라는 게 틀 속에 박혀 있어서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입시정책과 관련, 정교수는 교육부가 지나치게 대학에 개입하는 측면이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서울대 역시 인재를 다 차지해야 한다는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남에서 엄마 치맛바람으로 과외 받고 대학에 들어가봐야 쓸모 없다”며 “지방에서 어려운 환경을 뚫고 들어온 학생들 중에 상당한 인재들이 나올 수 있다. 조화와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1942년 강원 춘천 출생인 정교수는 65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0년간 주부로 지내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88년 서울대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81년에 서울대 국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으며 1999~2003년에는 규장각 관장을 맡았다.

서울대에서는 이날 정교수 외에도 오세영(국어국문학), 이명현(철학), 김홍우(정치학), 차배근(언론정보학), 송문섭(통계학), 김성기(경영학), 이교일(기계항공공학), 권순국(조경시스템공학), 정진(농생명공학), 이홍식(수의학), 김민(기악), 신수정(기악), 김정자(국악), 김종선(의학), 이효표(의학), 허봉렬(의학), 김형국(환경계획학), 엄정문(치의학) 교수 등 19명이 정년퇴임했다.

〈글 강병한·사진 강윤중기자〉

 

https://www.khan.co.kr/article/200708311824121

 

정옥자 교수 “서울대 출신 특권 그림자 짙다”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65)는 31일 “서울대는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정년퇴임한 정교수는 “서울대는 엘리트로서 재고 살았다”면서 이같이 지적했다. 그러면서 서울대의

www.khan.co.kr

 

 

3. 한국일보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3)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입력 2005.03.22 


나는 어렸을 적에 옛날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집안어른들은 물론 이웃의 어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었다. 있는 밑천 없는 밑천 다 털린 어른들은 급기야 나를 보면 "저 옛날얘기 빚쟁이 온다"며 피하는 시늉까지 하였다.

 

 옛날얘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살게 된다고 겁도 주었다. 그 때는 친척들이 많이 왕래하던 시절이라 집에는 새로운 손님이 끊임없이 왔기 때문에 나의 옛날얘기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주었다. 

 

그들의 얘기 중에는 겹치는 것도 많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역사이야기였고 대부분 조선후기의 야담이었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선에 있는 것이었다. 역사와 문학이 사촌쯤이라는 생각은 이 때부터 갖게 된 것 같다.

어른들의 옛날이야기, 특히 귀신이야기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할 즈음 글을 깨치자 무엇보다 책이 좋았다. 책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하였다. 책은 늘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자 친구였다.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차 끊임없이 묻기를 그치지 않던 아이에게 글을 깨치고 나서의 책읽기는 갈증의 해소이자 즐거움 그 자체였다.

6·25전쟁으로 인한 암흑 같았던 시절에 책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손에 닿는 것은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잡식성 남독이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천막 이동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읽기에 골몰하던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인생의 목표를 어렴풋이나마 공부하는 쪽으로 정했던 것 같다. 결국 책 읽기가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지리 선생님이 "이완용은 애국자다"라고 일갈하며 느닷없이 우리의 뒤통수를 때렸다. 너무나 놀라 어안이 벙벙한 우리들에게 "만약 이완용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의 선견지명으로 그나마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서양인들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지 않았나?" 하고 부연설명을 하셨다. 선생님의 주장은 분명히 틀린 것 같았지만 반격할 능력이 없던 내게 큰 충격이었다. 역사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일차적 계기였다.



문·사·철을 놓고 고민하던 대학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역사를 선택하였지만, 식민사학의 그늘과 실증사학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960년대 역사학은 실망스러웠다. 재미도 없었고 의식이 고양되는 기쁨도 없었다. 의미 부여도 못하고 고증에만 매달려 사실의 나열에 급급한 역사학에 회의가 들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책 속에 파묻혀 2년 여가 지나고 3학년이 되자 국사, 동양사, 서양사중에서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주저없이 국사를 선택했다. 우리 역사부터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이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잘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식민사학으로 왜곡되어 잘못 이해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실타래를 솔솔 풀어가는 작업은 항상 뿌듯한 충만감을 안겨주었으므로

대학졸업논문은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1881년 일본의 개화실상을 시찰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된 속칭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군사정부는 근대화를 지상과제로 내세웠고 학계에도 근대화담론이 무성하였다. 내가 그 논문을 쓰게 된 것은 근대화담론 속 개화정책의 일환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었지만, 많은 관련 자료가 사장되어 있는 것을 발굴해내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어서였다.



논문을 쓰기 위해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에 있던 서울대 중앙도서관 고도서 열람실에 들락거렸다. 

 

이 작은 방이 바로 규장각의 전신이었다. 대학원생과 교수들만 사용하던 이곳에 학부생이 혼자 앉아 있자니 따가운 눈총도 감수해야 했다. 한창 논문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일협정 반대데모로 휴교령이 내렸다.

교수나 대학원생은 출입증을 받아 연구실이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며 날마다 교문 앞을 서성거렸다. 그러한 내 모습이 군 부대장의 눈에 띄었는지 어느 날 나를 불러 세우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데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어서 괴롭다고 대답했다. 한참 생각하던 그는 내게 출입증을 끊어주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야말로 논문에 전념하였다. 강의도 없고 영화 보러 가자는 친구도 없어서 눈만 뜨면 도서관에 가서 자료 뽑고 정리하여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이 때 논문 쓰기에 푹 빠져본 경험은 훗날 다시 공부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것은 괴롭고도 감미로운 체험이었다. 꼭 필요한 자료를 찾지 못해 몇 날 며칠을 자료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드디어 찾아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엉성했던 논문의 구성이 각고 끝에 틀이 잡히고 술술 써지자 환희가 휘몰아쳤다. 논문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아이를 낳은 것 같다고들 했는데 뒤에 경험해 보니 비슷한 감정이었다. 드디어 지도교수님의 인정을 받고 ‘역사학보’에 실렸을 때는 정말 가슴이 뿌듯하였다.



그러나 대학 졸업과 함께 연구소 비슷한 곳에서 잠시 일하다가 결혼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 후 십여 년 간 아이들 키우며 그야말로 철저한 생활인으로 된장 고추장까지 담그며 살았다. 

 

이 기간은 고된 가사노동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맞은 휴식의 계절이기도 했다. 학자로서 동면기였다고 할까? 정신적 긴장감 없이 사는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물같이 속절없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만학도가 되었다. 십 년 동안 신문 한 장 제대로 읽을 새 없이 살아온 삭막한 생활 끝에 손에 든 책은 보석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듯이 공부에 빠져들면서 열정이 맑은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오직 공부에 대한 갈증으로 공부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자 능력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또 하나의 인생역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교수가 되었지만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의지를 더욱 다졌다.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입장에서 ‘공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라는 입장으로 전환되었다. 

 

학자가 되지 않더라도 역사공부를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판단기준을 분명히 하며 균형감각을 익히게 될 것이라고, 미래에 대한 예측도 일정부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가르쳤다.

전공시기도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문예부흥기라 할 18세기로 소급하였고 조선후기로 확대하였다. 분야도 사상사, 지성사, 문학사, 문화사 등 상부구조 연구로 갔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 규장각에 소장된 문집을 비롯한 수많은 고도서를 섭렵하였다. 규장각은 정조대왕 이래 자료의 보고였다. 규장각을 모태로 하여 성장한 나의 공부는 규장각 관장(1999년~2003년)으로 봉사하면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혼란은 서세동점에 편승했던 일제 35년의 강압통치와 6·25전쟁의 후유증 극복 과정이라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제국주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는 전환기라 생각한다. 이는 조선후기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여 조선사회를 재건하던 역사상과 상당히 유사하다. 

 

조선이 끝내는 문화중심국으로 우뚝 서서 문예부흥을 이룩해 낸 사실을 전범으로 삼기 위하여 그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는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아울러 19세기이후 전쟁사관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를 평화사관으로 복권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으며 민족 정체성을 세우는 길이다. 나아가 21세기 세계질서 재편기에 철지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문화국가로 거듭나는 단초를 여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은 남을 침략하거나 약탈하는 존재를 오랑캐라 불렀다. 우리나라는 오랑캐 짓을 한 전력이 없기 때문에 평화공존 논리를 개발하는 선두주자가 될 수 있는 명분을 갖고 있다. 우리의 역사문화 전통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최근래 역사, 한국군, 베트남 전 참전으로 아시아인들끼리 전쟁을 벌임)

 



● 정옥자 교수는

1942년 5월 24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온 뒤 살림을 하다가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999년부터 4년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규장각 관장을 지냈다. 그는 한국의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지는 정조시대를 깊이 연구하여 한국사회가 어떻게 하면 성숙한 문화국가가 되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문화운동사’ ‘조선 후기 문학사상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등이 있다.

 

 

동아일보. 2007년 8월 2일.

 

[동아광장/정옥자]

 

‘민주화운동’은 계급장이 아니다

 


입력 | 2007-08-02 02:58:00



드디어 정년이 눈앞에 다가왔다. 교수생활의 희로애락이 어제 일같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한다. 공교롭게도 1981년 신군부의 출발과 함께 교수생활을 시작했기에 시국 문제로 괴로울 운명이 마련돼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학문의 문리를 트기 위한 진통이나 학생을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치느냐 하는 원론적인 고민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더 큰 고통을 겪었다.

최루탄 매연으로 자욱한 교정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대학은 민주화운동으로 열병을 앓았다. 공부에만 전념하려는 학생은 출세주의자 내지는 기회주의자로 매도당하고 운동권 학생은 장래 정치로 성공하기 위해 민주화의 대의를 빙자한 지름길을 선택한 자로 의심받았다. 그 틈새에서 교수들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어느 한쪽으로 확실하게 태도를 정한 것이 아니어서 괴로웠고 그래서 방황했다.


4·19세대로서 여고 3학년 때 학생운동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경험이 있는 나는 그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80년대 캠퍼스 치열했던 나날


80학번인 어느 학생은 그날 내게 강의가 없다는 사실까지 확인하고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돌아갔다. 점심때가 되어 ‘점심이나 먹자’며 식당에 갔다가 이제 돌아가겠거니 했는데 연구실에 따라왔다. 커피를 타 주고 그것만 마시면 가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토론하는 것으로 때웠다.


가만히 살펴보면 학년마다 특징이 달라 학생운동의 성향이 강한 학년이 있는 법이다. 학교에 깔려 있던 형사들은 그런 기미까지 파악했는지 그 학번 중 비교적 온건한 학생이 과대표를 맡았는데도 구체적인 범법행위가 없는 상태에서 사전에 연행해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그 학생은 투사로 변했고 구속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지도교수의 진정서가 효과가 있다고 해서 생전 처음 진정서라는 것을 써서 친분이 있던 조영래 변호사를 찾아가 봐 달라고 부탁했다. 조언을 받아 몇 군데 보강해서 재판정에 갔다.


그런 사이사이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비분강개했고 나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부지런히 커피를 탔다. “정 선생 다방 차렸느냐?”는 동료 교수들의 핀잔을 들으면서….


1984년으로 기억되는데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이 인문대와 사회대가 연결된 5, 6, 7동의 ㄷ자형 건물을 봉쇄하고 교수연구실까지 뒤져 수업 받던 학생까지 잡아 굴비 엮듯이 연행했다.


풀려난 학생들은 강의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국립 호텔에서 국비로 MT 잘하고 왔다”고 했다. 멀쩡하게 공부에 전념하던 학생까지 의식화시켜 민주투사로 만들어 버렸던 시대였다.


요즘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일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1986년 4월 서울대 교수들은 신군부의 정권 연장 저의를 간파하고 민주화 서명운동을 일으켰다. 참새도 죽을 땐 ‘짹’ 하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교권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상황에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절박함과 참담한 굴욕감 때문이었다.


운동 전력 팔더니… 허망한 뒤끝


서명 교수는 불과 50명을 넘지 못했지만 다음 해 6월 항쟁 때는 100명이 넘었고 민주화운동의 불씨 하나는 지폈다고 생각한다. 지독한 자괴감에서 벗어나고 학생에 대한 교수의 최소한의 체면 차리기였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도 그때 서명 교수들은 지금까지 조용히 연구실을 지키면서 교수의 본분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열정을 바치던 학생도 대부분 건전한 생활인으로 살아간다.


손톱만 한 민주화운동의 전력이라도 팔아 공을 보상받겠다고 나서는 이 부박한 세상에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거나 건전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민주화운동의 뒤끝이 이렇게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은 누구의 탓일까?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