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도서관에서 김태훈은 공부를 하다가, 유인물도 마이크도 아무 것도 없이, 맨몸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세 번을 외치며 도서관 창문을 열고 아크로폴리스 광장 쪽으로 투신 자살했다.
그 결단의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1. 김태훈 소개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김태훈 동지는 어려서 영세를 받았고 (세례명은 ‘다두’) 강한 희생정신의 소유자였다. 한때는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했고 강한 의지와 책임감을 어릴 때부터 보여 왔다고 동지의 부모님은 말씀하신다.
대학에 입학한 후 EHSA라는 써클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했으며 동지의 얼굴 모습에서 보여주듯이 편안하고 푸근한 사람이었다.
고향 광주에서 대학살 만행이 자행되고 이에 대한 학내시위가 잦아지자 평소 말이 없던 동지는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동지가 투신하던 그날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원서를 번역하고 있던 동지는 창 너머로 침묵시위를 벌이는 학우들이 무수한 경찰과 사복형사들에게 구타당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도서관과 아크로폴리스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던 그때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세 번의 구호소리와 함께 동지는 자신의 몸을 던졌다. 학원이 온통 중무장한 사복경찰로 채워지고 폭력과 체포, 위협의 눈초리에 숨조차 막히던 그때, 분노, 두려움, 부끄러움이 뒤섞인 채 싸움이 사그라져 갈 때, 동지는 핸드마이크도, 유인물도 가지지 않은 빈 몸으로 몸을 던져 우리를 일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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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호] 민주화운동으로 숨진 고 김태훈(경제 78)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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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작성
작성일2022.10.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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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59년 광주 출생
1971년 2월 서석초 졸업
1974년 2월 숭일중 졸업
1977년 2월 광주일고 졸업
1978년 3월 서울대 사회계열 입학, 경제학과
1981년 5월 27일
경제학과 동문 김태훈 열사다.
열사는 4학년 재학 중이던 1981년 5월 27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학내 침묵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이 전투경찰과 사복형사들에 의해 구타를 당하며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에 분노한 김 열사는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친 후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향해 몸을 던졌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대학본부와 중앙도서관 사이에 위치한 공간으로 김 열사의 투신 후 학내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서울대는 2001년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박종철 열사에게 처음으로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이번 학위수여식까지 모두 24명에게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했다.
고 김태훈 열사는 1959년 4월 13일 광주에서 출생했다. 1977년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재수하여 1978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김열사가 대학에 입학한 1978년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부조리함이 절정에 달했던 해로 학생운동은 탄압으로 동력을 상실했고, 긴급조치 9호로 인해 유신을 비판하는 말 한마디로도 체포되는 시기였다.
광주일고와 대학 선배들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다 고통을겪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군부독재 아래에서 신음하는 것을 목격한 김열사는 홀로 괴로워했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갑자기 종식되고 이후 학내 통제가 완화되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급격히 늘어났다. 하지만 그 해 12월 12일 군사를 동원하여(12.12 사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980년 5월 17일 민주인사 수백 명과 학생대표 백여 명을 연행했다. 이에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사실상 불가능해졌으나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의 대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여 전체 시민들의 대규모 운동으로 확대됐다. 이 운동을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김 열사는 수소문 끝에 이 참상을 듣고 괴로워했다.
그 이듬해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학생들은 5.18 항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침묵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학교 구내에 진입한 무수한 경찰과 사복형사들에게 구타당하며 끌려갔다. 이 때 도서관 6층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 열사는이장면에충격을받고,“ 전두환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세 번의 구호소리와 함께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자신의 몸을 던졌던 것이다.
결국 김태훈 열사는 죽음으로써 광주 학살이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잘못임을 세상에 고발했다. <서울대학교 60년사>는 열사의 희생에 대해 ‘김태훈의 투신은 학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광주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 김태훈 열사는 용인 천주교 묘지에 안치됐다가, 망월동 5∙18묘역을 거쳐 현재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됐다. 그의 광주일고 동창들은 매년 그의 기일이 돌아오면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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