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흙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가급적이면 자연을 모방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
이윤창출의 수단으로 전락한 화학제품 상품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새로운 무지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언론보도 출처.
경향신문. 2016년 기획기사.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609182235005
삶의 질의 문제.
화학제품에 의존해 살아가는 ‘호모케미쿠스(Homo Chemikus)’와 화학물질을 권하는 ‘케피아’(화학·마피아의 합성어)의 세상을 생생히 기록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
화학물질 ‘사용 용도’ 관리가 핵심…가정용 제품 기준 ‘더 엄격’
입력 : 2016.08.31 22:32 수정 : 2016.08.31 23:45도르트문트 | 이혜리 기자
유럽 관리제도 ‘리치’
유해성 검증 기업에 부담시켜 대체물질 못 찾으면 불이익도
생산·유통회사 정보공유 의무화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화학물질 ‘사용 용도’ 관리가 핵심…가정용 제품 기준 ‘더 엄격’
“10만개나 되는 화학물질이 세상에 나왔는데 우리는 무지했고,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실험도 거의 없었죠. 그 두려움 때문에 ‘리치(REACH) 제도’를 만들었어요.”
23일 오후 4시(현지시간)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도르트문트에서 만난 라이문트 바이스 박사(55)는 “리치의 출발은 두려움이었다”고 말했다.
바이스 박사는 이곳에 위치한 노동부 산하 연방작업안전보건연구소(BAuA)에서 2006년 유럽연합(EU)이 만든 리치 제도 지원 업무를 하고 있다. 리치는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양과 위해성에 따라 등록·평가·허가를 받도록 하는 규제다. 핀란드에 있는 유럽화학물질관리청(ECHA)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독일의 BAuA같이 국가 기관별로 피해 사례를 보고하고, 기업이 제출한 화학물질 자료 검토와 유해성 연구를 하고 있다.
리치의 핵심은 화학물질이 사용되는 ‘용도’를 관리하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화학물질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에 화학물질이 어떻게 응용돼 어떤 제품에 사용되는지까지 확인한다. 유해성 연구가 필요한 화학물질은 고위험물질 후보 목록(SVHC)에 올려 지속적으로 심사한다. 유해하지 않다고 결론나면 목록에서 제외하고, 새롭게 유해하다고 밝혀진 물질은 추가하는 유동적인 구조다. 31일 현재 169개 물질이 고위험물질 후보로 지목돼 있다.
특정 용도로 쓰일 때만 유해한 화학물질은 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유해성이 있다고 확정되면 허가물질 목록에 등재한다. BAuA에서 화학제품 평가 및 위험관리 그룹장을 맡고 있는 키어스틴 히셰 바그너 박사(50)는 “임산부나 어린이는 화학물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고려해 가정용 제품은 더 엄격한 허용기준을 정하고 계속 실험한다”고 말했다. 유해성이 인정돼 허가물질 목록에 등재된 화학물질은 기업이 가급적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만약 사용할 경우 다른 물질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다른 물질로 대체하지 못하면 기업은 별도의 정부 심사까지 받는다. 히셰 바그너 박사는 “돈을 절약하거나 태만해서 대체물질을 찾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고 했다.
특히 화학물질의 유해성 검증 부담을 기업이 지도록 했다. 기업은 반드시 화학물질 안전보고서(CSR)를 제출해야 한다. 바이스 박사는 “정부에서 한다면 돈이 없어 실제 필요보다 더 적은 물질을 시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화학물질의 유해성 정보는 생산하는 업체부터 유통하는 업체까지 모든 회사가 의무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동물실험을 금지하고 대체시험법을 활용하도록 한 것도 리치의 특징이다.
BAuA와 달리 제품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연방위해성평가연구소(BfR)도 있다. 유럽에선 2011년 식품이 닿는 용기 등에 함유되는 화학물질 규제(FCM), 2013년 생물을 죽이는 살생물질이 들어 있는 제품에 대한 규제(BPR), 화장품 규제도 추가로 만들었다. 히셰 바그너 박사는 “살생물질 규제가 시행됐지만 유럽에서도 아직 모든 살생물질 제품에 대한 실험이 끝나지 않았다”며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 하나의 알약, 시럽 반 스푼에 삶이 바뀌었다”
입력 : 2016.08.31 22:31 수정 : 2016.08.31 23:42진치히 | 이혜리 기자
독일 ‘탈리도마이드’ 비극
지난 24일 오전(현지시간)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의 작은 도시 진치히에서 만난 탈리도마이드 피해자 비앙카 포겔(55·왼쪽)과 비어깃 슬뢰서(55)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단 하나의 알약’이었다. 비앙카 포겔(55)의 인생을 뒤바꾼 것은 탈리도마이드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 콘테르간 알약 한 개였다. 1960년 임신 3개월차인 포겔의 어머니가 이 약을 먹은 뒤 포겔은 남들보다 짧은 팔로 태어났다. 손이 어깨에 달린 아기를 보고 사람들은 “당장 버리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포겔이 기형아로 태어난 이유가 약에 들어있는 화학물질 때문인지 몰랐고 약을 판매한 그뤼넨탈 회사도, 독일 정부도 사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안다. 포겔은 “나는 화학물질의 부산물”이라고 했다.
지난 24일 오전(현지시간)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의 작은 도시 진치히에서 만난 탈리도마이드 피해자 포겔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팔이 없기에 컵과 그릇을 입술로 물어서 옮기고, 발로 자동차 운전을 하는 그는 이젠 그런 방식이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까지의 과정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라고 했다. “생긴 대로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2007년 탈리도마이드 피해자를 소재로 만든 영화 포스터.
포겔의 어머니는 입덧이 심해 콘테르간 약을 먹었다. 당시 광고에선 “1000알을 먹어도 죽지 않는 수면제의 혁명”이라고 했다.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임신부가 입덧을 한다고 하면 의사들도 정확한 처방 없이 이 약을 권했다.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음료 형태로도 팔렸다. 약의 복용법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꿀 바른 사탕처럼 팔렸다”고 포겔은 당시를 설명했다.
역시 탈리도마이드 피해자인 비어깃 슬뢰서(55)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슬뢰서의 어머니가 심한 입덧으로 힘들어하자 그의 아버지는 보다못해 당시 다섯 살인 슬뢰서의 언니가 먹던 음료형 콘테르간 약을 어머니에게 줬다. 어머니는 처음엔 “안 먹겠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약을 먹었다. ‘반 스푼’이었다. 슬뢰서의 아버지는 딸이 기형아로 태어난 게 자신이 권한 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뒤 벽에 머리를 박았다.
탈리도마이드 성분을 함유한 수면제 콘테르간.
1961년 11월27일 독일 신문사 디 벨트가 처음 약에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면서 사건이 알려졌다. 며칠 뒤 독일 정부는 약 판매를 금지했다. “1년만 더 일찍 판매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면 우리는 이렇게 태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포겔은 한숨을 쉬었다. 1957년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콘테르간은 판매 직후 부작용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독일 정부는 빠르게 조치하지 못했다. 슬뢰서는 “처음엔 피해자 수가 적었기 때문에 정부가 의혹을 무시하고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조금이라도 더 빨리 금지 처분을 했으면 피해자 수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늦어져 최종적으로 금지 처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포겔은 “거대한 화학산업계의 로비력이 강하고, 정부는 기업을 도와줬기 때문에 약에 대한 정보가 수면 아래로 숨고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화학물질 관리 제도의 문제도 있었다. 당시 소련의 위성국이던 동독에서는 콘테르간 판매가 허가되지 않았다. 허술한 심사 과정을 거쳐 허가를 받은 서독에서만 1만명에 가까운 피해자가 나왔다. 미국에서는 프랜시스 올덤 켈시라는 공무원이 이 약 허가를 검토하면서 ‘사람에게는 수면제 효과를 내고 동물실험에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허가 제출 자료를 이상하게 여기고 허가를 내주지 않아 피해자가 17명에 그쳤다. 켈시는 미국을 구한 영웅으로 떠올라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럼에도 독일 정부와 그뤼넨탈 회사는 아직까지 콘테르간과 기형아 출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검찰이 그뤼넨탈사를 수사해서 기소하고, 피해자 부모들이 그뤼넨탈을 상대로 소송했지만 유명 변호사들을 선임해 대응한 그뤼넨탈에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태아에 미치는 영향을 제약회사가 반드시 검증토록 하지 못한 법의 맹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죄 판결이 났지만 그뤼넨탈사와 정부는 100만마르크씩 총 200만마르크를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기금으로 냈다. 20년치 연금을 지급하고 이후는 정부가 부담하기로 했다. 소송에서 진 피해자 부모들은 이 방안에 합의했고, 이후 더 이상 그뤼넨탈에 법적인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인터넷이 없어 정보도 제대로 알 수 없고 기형아 출산의 책임을 부모에게 떠넘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결론이었다. 2012년 그뤼넨탈사가 피해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사과한 것이 전부다. 포겔과 슬뢰서는 “아직도 정부와 그뤼넨탈이 사고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슬뢰서가 말했다. “저한테는 매일 생활하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안고 사는 거예요. 시장에만 가도 사람들과 부딪치는 게 무섭고, 제가 계산대 앞에 서면 사람들은 불쌍한 눈빛으로 제 물건을 대신 계산대에 올려주죠. 높은 데 있는 건 남편이 다 집어줘야 하고요. 문제는 절대 끝난 게 아니죠.”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던 슬뢰서는 어깨가 아파 일을 그만뒀다. 포겔도 몸이 좋지 않아 유치원 교사 일을 그만둘 계획이다. 포겔은 “내가 좋아하는 승마도 계속하고 싶지만 몸이 아파서 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울고 있다”고 말했다.
2013년 8월에야 이들이 받는 연금 액수도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되는 수준으로 올랐다. 그 전까지는 팔다리가 모두 없고, 장기도 손상돼 거의 자발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장애 정도 심각’ 단계 피해자가 한 달에 545유로(약 68만원) 정도를 받았고, 2013년 이후 7000유로(약 873만원)로 높아졌다. 치료비 등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포겔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콘테르간 때문에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연을 적어서 정부에 제출하고 정치인들에게도 요구했다”며 “이후 정부가 탈리도마이드 피해자들의 삶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정부와 의회는 한 달 545유로로는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콘테르간 피해자 지원법을 개정해 연금 액수를 높였다고 했다. 현재 이 연금을 받고 있는 피해자는 2400명 정도다.
독일에선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일컬어 ‘한국판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고 한다. 포겔은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기업은 제품을 팔려고만 하고, 정부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탈리도마이드 사건과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비슷한 점이 많아요. 그래도 탈리도마이드 사건 이후 독일이 바뀐 점은 있습니다. 약의 허가를 매우 복잡하게 하도록 하고, 처방전이 있어야만 약을 줄 수 있고, 복용법을 약품에 기재해주도록 제도적 개선을 했죠. 지속적으로 항의해서 연금 액수도 올렸고요. 절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갈 길이 멀어요.”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화학사고’
입력 : 2016.08.26 10:06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화학사고’
인도 보팔 1984년 12월2일 인도의 보팔에서 일어난 화학물질 누출사고 피해자를 가족들이 수레에 실어 옮기고 있다. 당시 미국 유니온카바이드의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한 메틸이소시안염 가스 40t이 누출돼 2259명이 즉사했고 지금까지 2만여명이 후유증으로 더 사망했다. <보팔 피해자 지원단체 보팔메디컬어필 제공>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화학사고’
미국 ‘러브캐널’ 1978년 미국 나이아가라폭포 부근 주민들이 ‘러브캐널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후커케미컬사가 폭포 주변 웅덩이인 러브캐널에 화학폐기물을 매립해 20여년간 주민들의 피부병·두통 등을 일으켰다는 역학조사가 나와 세계에서 처음으로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환경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미국 환경보호청(EPA) 제공>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화학사고’
대한민국 서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제조·판매업체들의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1994년부터 시판된 가습기 살균제로 4000여명이 폐섬유화 등 질환을 얻어 피해 신고를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화학사고’
중국 톈진 2015년 8월12일 중국 톈진의 항구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물류창고에 있던 시안화나트륨 550t과 40여종의 독극물 3000여t이 누출됐다. 165명이 숨지고 800여명이 다쳤으며, 인근 화이허강과 톈진항 앞바다까지 독극물로 오염됐다. <AP연합뉴스>
손댈수록 헐거워진 ‘화평법’…그 뒤엔 ‘케피아’ 있었다
입력 : 2016.08.25 23:07 수정 : 2016.08.26 09:56이혜인 기자
② 침묵의 연결망, 케피아
대한민국에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은 여기저기서 입질과 손을 타고, 난산을 거듭한 대표적인 법률이다. 기업과 정부 부처는 화학물질의 규제 수준을 낮춰 선진국보다 관리망을 헐겁게 유지하려 힘썼다.
학계와 언론도 방조·방관하거나 묵인했다. 기업들의 이익을 우선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돼서 견고한 ‘침묵의 연결망’을 형성한 것이다. 화평법은 결국 지나치게 느슨한 물질 등록 기준 등으로 인해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재발을 막기엔 역부족인 반쪽짜리 법이 됐다.
화학사고가 터진 나라에서 시끄러웠던 ‘케피아’(화학과 마피아의 합성어)가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도마에 오른 시점이었다.
환경부는 2011년 화평법을 입법예고했다.
화평법의 전신인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국내 유통되는 화학물질 중 85%(약 3만7000종)의 제조·수입자들은 물질의 유해성을 파악할 의무가 없도록 했다. 환경부에선 연간 0.5t 이상 유통되는 화학물질 정보를 등록하도록 하는 화평법 초안을 내놨다. 산업계에서는 크게 반발했다. 기업이 화학물질 유해성을 평가하고 등록하는 데 큰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산업통상자원부(당시 지식경제부) 산하 산업연구원은 화평법 도입 시 2022년까지 2조6000억원의 비용이 소요되고 2만여개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그러는 사이 화학물질 관련 사고는 계속됐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 후에 2012년 구미에서 불산 누출사고가 일어났다. 2013년 1~3월 사이 작업장에서 불산·염소 등이 누출되는 큰 사고도 6건이나 발생했다. 화평법은 화학물질 사고가 잇따른 후 2013년에서야 다시 논의의 테이블로 올라왔다.
환경부와 전문가들은 제품에 들어 있는 화학물질 유해성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내용이 화평법에 담기길 원했다. 농약·세정제 용도의 화학물질이 완제품 단계에서 사람이 흡입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져 팔린 가습기 살균제의 재판을 막기 위해서였다. 2013년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심상정 의원(정의당)은 화학물질 제조·수입자가 화학제품 제조사에 물질의 용도·유해성 정보 등을 전달하고, 역으로 화학제품 업체도 화학물질 제조자에게 물질 이용 정보를 전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환경부 법안과 심 의원의 법안이 합쳐져 환노위에서 통과됐다.
법안의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산업계와 경제단체들이 들고일어났다. 화평법 시행 시 기업들이 관리해야 할 물질이 많아 중소기업이 다 망한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경제5단체장이 새누리당 원내지도부와 회동을 갖고 법안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를 전달했다. 기업들은 제품에 사용되는 화학물질 정보를 화학물질 제조자에게 전달하게 하면 기업의 영업기밀이 새어나가서 국부가 유출되고 산업계가 위축된다는 주장을 폈다. 당시 심상정 의원실에 있던 박항주 보좌관은 “유럽연합(EU)의 화학물질관리법은 완제품에 화학물질을 쓰는 하위 사용자도 등록의무를 지게 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도 해외에 제품을 수출할 때 외국 법을 다 따르는데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 때만 영업기밀 때문에 못한다는 주장은 말이 안됐다”고 밝혔다. 결국 화학물질 제조·수입자가 용도 정보를 달라고 ‘요청’할 경우에만 제품 제조업체가 정보를 주는 것으로 대폭 손질된 채 화평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기존 화학물질 등록 기준도 연간 유통량 0.5t에서 1t으로 올라가면서 국내 유통되는 물질의 상당량이 등록 대상에서 빠져나갔다.
산업부는 전적으로 기업 편에 섰다. 화평법 제정 논의가 오고갈 때 산업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방지 대책으로 ‘완제품 전체의 물질관리’보다 ‘생활화학제품 위주의 관리 강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산업부 의견이 수용돼 화평법에서 유해화학물질 함유 제품의 신고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빠졌다.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은 “산업부는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면서도 완제품에 대한 관리 부분을 타 부처(환경부)에 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고 말했다.
화평법 제정에 앞장서다 기업의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돌아선 공무원도 있다. 화평법 제정 담당 부서인 환경부 화학물질과 이지윤 과장은 2014년 1300여개의 화학물질 제조·수입·사용 업체가 속해 있는 한국화학물질관리협회의 상근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이 과장은 “중소기업이 화평법을 이행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업계 쪽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기업과 산업부 논리에 힘을 실어준 언론도 많았다. 특히 경제매체들은 전적으로 업계의 편에 섰다. ‘화평법, 화학산업 경쟁력 저하 우려’ 등의 제목을 단 기사가 쏟아졌다. 당시 국회 환노위의 한 보좌관은 “가습기 살균제 이슈가 채 두 달을 못 가는 게 한국의 언론 환경인데 화평법 비판 뉴스는 1년 내내 신문 1면과 사설을 통해 쏟아졌다”고 말했다.
2013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며 업계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화평법은 시행령 부분에서 원안 취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대폭 손질됐다. 소량 신규 화학물질은 1t(2020년 이후는 0.1t)까지 간이등록을 하도록 시행령에서 정해지면서 관리체계가 크게 느슨해졌다. 몇몇 학자들은 화평법이 기업 이익을 침해한다면서 기업과 산업부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옥시에 유리하게 가습기 살균제 허위 보고서를 작성한 혐의를 받고 있는 유일재 호서대 교수는 화평법에도 업계 입장을 더 많이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다.
<특별취재팀 김기범·이혜인·이혜리·이효상 기자>
재앙’을 만든 불편한 진실의 조각들
입력 : 2016.08.25 23:07 수정 : 2016.08.26 10:11
이효상·김기범·이혜인·이혜리 기자
경향신문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 취재팀은 지난 5월부터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범람하는 생활화학제품을 취재했다. 공공·민간·전문 분야에서 만난 사람도 100명에 가까웠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거대한 코끼리와 같았다. 정부와 기업, 언론과 연구자 등 각 집단의 잘못과 무능이 수없이 중첩됐다. 취재팀은 사건의 전모를 조망하려 했지만, 끝내 코끼리의 전신을 볼 수는 없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세월호 사건’과 비교했다.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지만 책임지는 정부 부처는 나오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온전한 의미의 책임자 처벌은 아직 요원하다. 연구자 집단이나 언론은 사건이 터진 후에야 많은 말을 쏟아내며 호들갑이다. 재발을 방지할 대책이 있긴 있는지 의심스러운 점도 닮았다. 여전히 숱한 화학물질과 생활화학제품이 고삐 풀린 채 정보도 없이 세상을 덮고 있지만, 한국의 법·제도와 기업문화는 겉돌고 뒤처져 있다.
누군가는 반성을 했고, 누군가는 책임을 회피했다. “여기까지 밖에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었고, 누구는 알면서도 말을 못하겠다고 했다. 한 조각, 한 조각 모은 화학세계의 부분적 진실을 지면에 옮긴다. 이 포스트잇은 그들의 증언록이다.
소비자·살균제 업체들 ‘안전성’ 질문에 책임 떠넘기기 바빴던 ‘무능한 정부’
입력 : 2016.08.25 23:06 수정 : 2016.08.26 10:10김기범 기자
편백나무 추출 가습기제 질문에 ‘농림부·산림청에 문의’ 답변
산업부→식약처→산업부 “문의하라” 정부는 ‘무한 되풀이’만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소비자·살균제 업체들 ‘안전성’ 질문에 책임 떠넘기기 바빴던 ‘무능한 정부’
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을 확인하려고 기업이나 시민들이 보낸 민원에 대해 정부의 태도는 무책임 그 자체였다.
국회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위가 25일 공개한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김신범 실장의 예비조사 전문가 중간보고서를 보면, 옥시레킷벤키저를 포함한 가습기 살균제 관련 업체들은 2006~2007년 안전검사·표시사항·인증절차 등에 대한 질의를 산업통상자원부(당시 산업자원부)에 제출했다. 2006년 한 업체는 가습기 살균제 독성성분인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수입해 제품을 만들면서 “안전기준에 적합한지, 안전검사나 검정을 받아야 하는지” 문의했다. 2007년 1월에는 옥시가 옥시싹싹가습기당번·옥시크린스프레이·좀먹는하마 등 제품에 대해 자율안전제품으로 시험·인증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민원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산업부는 “살균제는 관리품목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우리 소관이 아니다”며 다른 데 알아보라는 식이었다.
한 업체는 2007년 11월 산업부에 보낸 질의에서 “편백나무 천연추출수를 가습기용 분사액으로 사용하려 하는데 시판하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물었다. 이 업체는 “여러 군데 문의를 해보았으나 모두 자신 소관이 아니라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엄연히 제품을 만들면 공산품이 될 텐데 산림청이나 농림부로 문의하라는 답변까지 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라고 호소했다.
국정조사 특위 정춘숙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민원들에서도 산업부가 책임을 회피한 정황들이 나타난다. 세퓨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던 아토오가닉 측은 2009년 11월 “새로운 가습기 살균제의 성분 등록자료와 제품 시안을 검토해달라”는 민원을 제출했지만 산업부(당시 지식경제부)는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에 의해 자율안전확인대상 공산품으로 관리하고 있는 생활화학가정용품에 살균제는 포함이 안된다”고 답했다. 다른 업체가 2011년 1월 “사무실 한편에 제조실을 만들어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려 하는데 시험검사 및 표시사항에 대해 알려달라”고 제기한 민원에 대해서도 산업부는 같은 답을 내놨다.
산업부는 시민의 안전성 관련 질문도 다른 부처에 떠넘기는 행태를 보였다. 2011년 2월 김모씨가 “요즘 아기가 있는 집에서는 PGH 성분으로 만든 가습기 살균제 세퓨를 많이 사용한다. 인체에 전혀 해가 없다고 선전하는데 정말 안전한지 알고 싶다”고 보낸 민원에 대해 산업부는 “소관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당시 식약청)에 문의하라”고 답했다. 김씨는 이미 식약처로부터 “공산품의 품목허가 및 관리에 대해서는 지경부로 문의하라”는 답을 받은 뒤였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처, 국민권익위원회, 산업부 등은 같은 해 5월 다른 시민의 PGH에 대한 질의에도 6번이나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행태를 보인 바 있다(경향신문 8월16일자 10면 보도). 김신범 실장은 “2006~2007년 사이 업체들의 가습기 살균제 제품에 대한 질의가 집중됐고, 일부 제품은 KC마크 인증까지 받은 사실로 볼 때 정부가 살균제를 새로 관리품목으로 지정할 것인지 검토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며 “당시 가습기 살균제를 신규 관리품목으로 지정하거나 식약처가 의약외품으로 지정했다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살균이 살 길”…깨끗해진다면 ‘락스물’도 마셨다
입력 : 2016.08.17 22:28 수정 : 2016.08.18 10:07박광연·최민지·최미랑 기자
정부·기업·언론 ‘세균 공포’ 합작…속은 소비자들 자발적 복종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 관련 논문을 써서 외국 학술지에 발표하려 했더니, 외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반려했다. 화학물질을 가습기에 넣어 세균을 없애야 된다는 놀라운 생각을 한 건 한국 밖에 없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조사에 관여했던 한 학자의 말이다. 청결이란 개념이 소개된지 불과 100여년만에 한국은 놀라울만큼 청결한 나라가 됐다. 정부의 지속적인 청결 장려 속에서 기업은 누구도 상상하지 않은 제품의 최초 개발에 성공했고, 언론은 이를 광고했다.
경향신문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 취재팀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겨레> 신문이 창간부터 1999년까지 게재한 기사와 광고를 통해 시대별로 변화하는 ‘살균’의 의미를 분석했다. 개화기부터 해방 직후까지의 시대가 정부와 공권력의 ‘위생 관리’로 대표되고, 1970년대는 질병 예방을 위한 살균의 필요성이 소개되던 시기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살균이 본격화된 시대였다. 특히 1990년대부터는 ‘살균의 상업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기사와 광고의 양으로 살폈을 때 언론이 ‘세균’에 가장 높은 관심을 보인 해는 1994년이었다. 그해는 유공 바이오텍 사업부가 최초의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 메이트’를 개발한 해이기도 하다. 4개 언론사에서 총 580건의 세균 관련 기사와 광고를 게재했다. 이는 전년도보다 240건 많은 양이다.기업이 ‘세균’을 제품 홍보에 적극 활용한 것이 기사·광고량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닥터크리너’라는 자외선 칫솔 소독기는 “칫솔에 세균이 득실거린다”는 내용의 연구를 인용한 광고 및 기사를 이 해에만 39건 게재했다. 한 차량용 공기청정기는 모델이 차 안에서 방독면을 쓰고 “세균이다!”라고 외치는 광고를 36건 실었다.
‘세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제품 홍보는 1980년대에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1984년 ‘세균’이란 단어가 들어간 기사·광고 208건 중 64건(30.8%)이 질병을 소개하는 기사였고, 29건(13.9%)만이 제품 홍보와 관련이 있었다. 1994년에는 세균 기사·광고 중 홍보용이 212건(36.55%)이었고, 질병 소개 기사는 70건(12.07%)에 그쳤다. <위생의 시대>를 쓴 고전평론가 고미숙씨는 “광고가 무지에서 오는 시민들의 공포와 전문가의 권위를 이용했다”며 “‘세균을 멀리 하라’는 방역의 한 방식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1955년 5월29일자 경향신문.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이 매일 들어가 살펴서라도 청결을 독려해서 우리가 제일 듣기 싫은 외국인들의 비평인 냄새난다는 소리를 듣지 말도록 하고…”라는 담화 발표(그림 왼쪽). 1937년 12월5일 동아일보. 1937년 10월10일부터 오물소제령이 실시되며 시민들이 오물통을 가옥 내로 옮기게 되면서 겪은 불편을 기사화(오른쪽).
1955년 5월29일자 경향신문.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이 매일 들어가 살펴서라도 청결을 독려해서 우리가 제일 듣기 싫은 외국인들의 비평인 냄새난다는 소리를 듣지 말도록 하고…”라는 담화 발표(그림 왼쪽). 1937년 12월5일 동아일보. 1937년 10월10일부터 오물소제령이 실시되며 시민들이 오물통을 가옥 내로 옮기게 되면서 겪은 불편을 기사화(오른쪽).
▶1920~1964년 ㅣ 강요된 청결
일본은 식민지 통치의 한 방편으로 ‘청결’을 강조했다. 위생법이 만들어졌고, 위생경찰이 수시로 조선인들의 청결을 검열했다. 조선인들은 논밭에 있던 화장실(청결통)을 집 안으로 들여야 했고, 위생세를 내야 했다. 동시에 일본은 미용·청결이라는 이름으로 비누·샴푸·치마분(가루 치약) 등을 소개하고, 몸에 난 털을 남자의 수치라고 했다. 해방 이후엔 정부가 일본의 역할을 이어 받았다.
대통령부터 ‘깨끗한 나라’를 위해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고, “냄새난다는 소리를 듣지 말자”고 말했다. 하지만 전후 상당 기간 청결을 위한 도구들은 신문지면에 소개되지 않았다.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살균이 살 길”…깨끗해진다면 ‘락스물’도 마셨다
▲ 1927년 12월11일 동아일보. 구취의 원인에 대해 다룬 기사.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살균이 살 길”…깨끗해진다면 ‘락스물’도 마셨다
▲ 1935년 7월13일 동아일보에 실린 ‘화왕샴푸’ 광고 기사. 화왕샴푸는 “아름다운 머리는 자태를 갑절돋뵈게합니다 미용상으로나 또 위생상으로나 머리는 적어도 1주일에 1회는 화왕샴푸로 감으십시오”라고 광고.
▶1965~1979년 ㅣ 질병의 시대
1973년 5월10일 경향신문. 한 독자가 일부 지방 주민들이 오염된 우물물을 마시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소독 살균제를 보내왔다.
1973년 5월10일 경향신문. 한 독자가 일부 지방 주민들이 오염된 우물물을 마시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소독 살균제를 보내왔다.
청결은 질병을 예방하는 필수 조건이 됐다. 여름마다 콜레라나 아폴로 눈병 등 전염병 위험이 강조됐다.
특히 식중독이 기승을 부렸다. 먹거리 살균이 급선무가 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식품 살균에 사용되는 ‘자외선 살균등’이 국내에 소개됐다.
1969년 6월5일 경향신문 기사. 462만 시민의 방역에 연막차 15대, 연막소독기 31개밖에 동원할 수 없는 서울시의 방역 장비 실태를 보도했다.
1969년 6월5일 경향신문 기사. 462만 시민의 방역에 연막차 15대, 연막소독기 31개밖에 동원할 수 없는 서울시의 방역 장비 실태를 보도했다.
국내 업체들은 자외선 살균등 개발에 착수한 후 정부에 살균등 ‘금수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살균의 필요성은 큰데 살균제는 많지 않다 보니 살균제가 광범위하게 쓰였다. 야채와 과일을 씻는데 식기세척용 세제를 사용하는가 하면, 식수 소독에 락스를 쓰기도 했다.
▶1980~1989년 ㅣ 살균의 상업화
1980년 7월14일 매일경제에 실린 광고. “도마도 세척에서 보잉 747 정밀유도장치 세척까지”라며 세제의 범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1980년 7월14일 매일경제에 실린 광고. “도마도 세척에서 보잉 747 정밀유도장치 세척까지”라며 세제의 범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업들은 앞다퉈 살균 제품을 내놓았다. 사람의 상처부터 과일·야채 및 부엌 위생용품까지 한 번에 살균·소독할 수 있는 제품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한 제품으로 토마토부터 보잉 747 부품까지 세척 가능한 세제도 출시됐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대통령부터 청결을 강조하는 기폭제가 됐고, 두 국제행사를 판촉 수단으로 삼는 살균 제품도 이어졌다.
특히 가구 단위보다는 식당 등 사업장을 노린 살균·소독기, 식기세척기가 대거 쏟아져나왔으나, 일부 제품들은 정부 기준을 어겨 제조사 대표가 구속되기도 했다.
▶1990년~ ㅣ ‘독’이 된 남용
1992년 4월20일 매일경제에 실린 자외선 살균 소독기 광고.
1992년 4월20일 매일경제에 실린 자외선 살균 소독기 광고.
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살균’은 세탁기·가습기·전자레인지 등 거의 모든 가전제품의 필수 기능이 됐다. 심지어 도시락 용기도 ‘살균’ 기능이 있다는 광고를 할 정도였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세균이 많은 곳을 찾아냈고, 기업은 이내 그 해결책을 시장에 내놓았다.
1995년 12월2일 동아일보의 가습기 메이트 광고.
1995년 12월2일 동아일보의 가습기 메이
트 광고.
너무 서두르다보니 트리클로산처럼 몇 년 뒤 사용이 금지되는 물질이 유해성에 대한 고려 없이 비누에 들어가기도 했다. 언론과 기업은 세균의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전파했고, 소비자는 살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 현재 수천명의 피해자 신고가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가 나왔다.
<특별취재팀 ㅣ 김기범·이해인·이해리·이효상 기자>
적당히 지저분한 삶이 건강하다?
입력 : 2016.08.17 22:10 수정 : 2016.08.17 22:11이혜인 기자
지나친 살균, 유익한 균도 죽여
오히려 질병 유발하는 ‘역설’
롭 나이트 교수 유튜브 캡처
롭 나이트 교수 유튜브 캡처
100% 살균된 환경은 인간을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완벽하게 지켜줄까. 아니다. 지나친 살균은 인간에게 알레르기·천식부터 비만, 자폐까지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살균이 오히려 병을 불러오는 ‘살균의 역설’이다.
지나친 살균은 인간과 몇십억 년 동안 공존해온 공생균까지도 살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의 장에는 비피더스균·락토바실러스균과 같이 유익한 균이 살고 있다. 유익한 균은 음식물 분해를 돕기도 하지만 인간의 몸에 유해한 균들이 번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제왕절개로 태어나 생활화학제품에 갇혀 살며 항생제를 다량 복용하는 식의 극도로 살균된 환경에서 자라는 현대인들은 유익한 균의 장내 유입부터가 어렵다. 고려대 의대 김희남 교수는 “부모·형제들로부터 수많은 접촉을 하면서 균이 아기에게 전달되는데 너무 깨끗한 환경은 균의 전달을 막는다”며 “적당히 지저분하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더 건강한 삶을 유지시켜 준다”고 말했다.
현대병인 아토피·비만 등의 원인에는 장내에서 유익한 균은 줄어들고 유해한 균은 많아지는 ‘장내 세균 불균형’이 있다. 지난해 김희남 교수 연구팀은 아토피 환자의 장내에서 한 세균의 종류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을 발견했다. 이 세균은 장벽에 균열을 일으켜 아토피를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이 혈관을 통해 온몸에 퍼지도록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아토피에 영향을 주는 유해한 균이 갑자기 늘며 장내 세균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2008년 핀란드 터쿠 대학병원 소아과 마코 칼리오마키 박사가 비만 아이들의 대변 속 세균을 7년 동안 분석한 결과 비만 아이들은 정상인 아이들에 비해 장내 유해균인 포도상구균의 양이 많고 유익한 균인 비피더스균이 훨씬 적었다.
이 때문에 유익한 균에 인간을 인위적으로 노출시켜 건강을 지키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소아과 교수인 롭 나이트는 2011년 딸이 제왕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온 직후에 부인의 질 안에 있는 미생물 배양액을 딸에게 묻혔다. 임신을 한 여성의 질에는 락토바실러스균 등 유익한 균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오픈바이옴’을 비롯한 장내미생물 연구기관에서는 장질환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변 미생물 이식술을 시행하고 있다.
건강한 환자의 대변 속에 있는 균을 배양해 환자의 장에 주입하는 것이다. 건강한 환자의 대변이 들어 있는 캡슐을 장질환 환자에게 처방하기도 한다.
130종 생활화학 스프레이…얼굴 화장·스타킹, 머리부터 발끝까지 ‘칙!칙!’
입력 : 2016.08.04 23:00 수정 : 2016.08.05 17:05김기범·박광연·최민지 기자
옷에 뿌리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쿨 스프레이’나 ‘꽃가루 부착 방지 스프레이’ 등 이색 스프레이 제품이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임정연씨(27)는 날씨가 더운 날에는 ‘뿌리는 스타킹’을 즐겨 사용한다. 지난해 여름부터 쓰기 시작했다. 아나운서인 임씨는 “방송 화면에 다리까지 잡히기 때문에 다리 라인을 살리기 위한 용도의 스프레이”라며 “치마는 입어야 하는데 요즘처럼 더워서 스타킹을 못 신을 때 뿌리면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스프레이 제품이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종류와 형태는 백화점·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에 국한돼 있지 않다. 취업준비생인 김하느리씨(26)는 “홈쇼핑에서 엄마가 파운데이션 액을 얼굴에 뿌려주는 에어브러시 파운데이션을 사줘서 쓴 적 있다”며 “파운데이션이 고르게 안되고, 입이나 눈코에 자꾸 들어가서 찝찝하고 아팠지만 비싼 거라 끝까지 다 쓰긴 했다”고 말했다.
시중에 판매되는 생활화학제품은 액상·스프레이 형태의 제품이 같이 나와 있거나 아예 스프레이만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경향신문이 지난달 서울 다이소 종각점·명동점, 롯데마트 서울역점의 생활화학제품을 직접 확인한 결과 모두 130종의 스프레이 제품이 팔리고 있었다. 흔히 스프레이 하면 떠오르는 방향제·탈취제, 헤어스프레이 외에도 발수제·다림질풀·소매 세척제·식물 영양제도 분무·분사 방식의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독한 성분’이 들어 있는 접착제·구두약·스티커 제거제·얼룩 제거제 등도 스프레이 제품이 나와 있고, 일부 약국에선 스프레이 무좀약도 판매되고 있다. ‘허브형 정전기 방지제’처럼 공기 속 오존과 만나 발암물질을 생성하는 향료가 추가된 제품, 과일·채소의 잔류농약을 천연물질로 세척한다는 스프레이도 있었다.
개·고양이 등 집에서 기르는 반려동물의 냄새가 밴 물건에 뿌리는 ‘애완용 냄새 탈취제’나 담배냄새 제거제도 있다. 산도깨비사의 담배냄새 제거제는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메틸이소치아졸리논(MIT)의 유해성이 확인돼 환경부가 지난 1일 수거명령을 내렸다. 여성 청결제나 조루 치료제도 스프레이 제품이 팔리고 있다. 대학생 김모씨(25)는 “생리 불순으로 치료 받을 때 의사가 여성 청결제가 바이러스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권해 스프레이 제품을 샀다”며 “습윤감이 남다보니 생리 기간 외에는 잘 안 쓴다”고 말했다. 그는 “닦아내지 않아도 된다고 제품 설명서에 나와 있지만 찝찝해서 닦아내고 있다”고 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이기영 교수는 “스프레이 제품의 항균·살균 기능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며 “항균·살균 성분은 인체 세포에도 독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화학물질 기본정보도 없이 관리하겠다는 것은 기형적 체계”
입력 : 2016.09.06 22:42 수정 : 2016.09.06 22:46자르브뤼켄 | 이혜리 기자
KIST 유럽연구소 환경안전성사업단 김상헌 단장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독일 자를란트주 자르브뤼켄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럽연구소 환경안전성사업단의 김상헌 단장(47·사진)을 만났다. 사업단은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을 등록하고 사용 용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평가하도록 한 유럽연합(EU)의 리치(REACH) 제도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최근엔 한국 기업들이 화학물질을 리치에 등록하는 과정도 직접 돕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시행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의 하위 법령 초안을 만들기도 한 김 단장에게 한국의 화학물질 관리제도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물었다. 김 단장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화학물질 기본정보도 없이 관리하겠다는 것은 기형적 체계”
한국은 유엔·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제노동기구(ILO) 등이 공동으로 만든 ‘화학물질 분류·표시 국제기준(GHS)’을 2008년 도입했지만, 정부는 모든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고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가늠하는 연구나 인프라 구축도 되지 않았다. 화학물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없이 그것을 관리하는 제도만 있는 기형적 체계이다.
EU와는 상반된다. EU는 리치라는 기본적인 정보시스템 위에 식품이 닿는 용기에 들어있는 물질을 관리하는 FCM 규제, 생물을 죽이는 살생물질이 들어있는 제품을 관리하는 BPR 규제, 기업들의 화장품 안전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코스메틱 규제 등의 관리 구조가 중층적으로 갖춰져 있다. 김 단장은 “유럽은 2011년에 이미 모든 유해화학물질에 꼬리표를 달았다”며 “유럽과 한국 간 격차가 10년 정도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화평법에서 등록하도록 한 510개 기존화학물질도 2018년에야 1차 등록이 시작된다.
“결국 제도는 있는데 제도를 실행할 인프라가 없는 격이죠.” 김 단장은 “작업장·환경·소비자라는 세 분야에서 각각 어떻게 화학물질에 노출되는지 연구해야 한다”며 “유럽은 20~30년 전부터 화학물질 노출을 측정하는 도구들을 연구하고 노출 평가 모델을 만들어 활용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엔 제대로 된 노출 측정 도구조차 없고 학계에서 만든 일부 모델 외에 국가와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노출 평가 모델이 없다”며 OECD에서 인증하는 실험실인 GLP가 국내에도 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는 화학물질 수나 작업장·환경·소비자와 같은 세부 분야로 들어가기엔 역부족인 상태라고 전했다. 화학물질 연구도 화학·생물·환경공학·약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선 제품 중심의 위해성 평가를 하는 BfR이라는 정부기관이 있지만 한국엔 없다. 국립환경과학원에서 일부 연구용역을 하는 정도다.
이런 유해성 정보가 만들어지면 다른 정부 부처와 해당 물질을 사용하는 기업에 적극적으로 공유돼야 한다. 김 단장은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리치 제도 운영을 노동부에서 하고 있지만 한국은 환경부에서 한다”며 “화학물질을 접촉하는 1차적 공간이 작업장이기 때문에 해당 물질의 유해성 정보를 환경부에서 받아도 노동부에서 감독하는 작업장까지 전달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다림질 보조제와 프린터 잉크 등이 위해우려제품에 추가된 데 대해서도 김 단장은 “단일 화학물질과 그것을 섞어서 제품을 만든 경우를 이원화해서 규제해야 하는데 한국은 섞여있기 때문에 효율적이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 몇 개 막은 것밖엔 안된다”고 했다.
기업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BASF나 피앤지 같은 글로벌 화학업체들은 리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적극 대응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규제 반대’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 김 단장은 “리치에 화학물질을 대표등록하려면 자체적으로 유해성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리치에 대표등록한 화학물질은 거의 없다”며 “모두 자체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다른 기업에서 한 결과를 빌려와 공동등록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럽에서 유해화학물질 2000여종의 사용이 제한됐기 때문에 이에 따른 대체물질 개발에 유럽 기업들은 투자하고 있다”며 “결국 연구·개발(R&D)이 잘되는 곳이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정면으로 맞선 불편한 진실…‘케피아’가 판치는 세상 생생히 목격”
입력 : 2016.09.18 22:35 수정 : 2016.09.18 23:19김기범 기자
기획팀, 취재를 마치며
경향신문 ‘毒한 사회 - 생활화학제품의 역습’ 특별취재팀 기자들이 지난 12일 4개월간 ‘취재 캠프’로 썼던 편집국 회의실에서 기사에 등장한 스프레이 제품들을 보며 취재 과정 뒷얘기와 시민·기업·정부에 하고 싶었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이혜인·김기범·이효상·이혜리 기자.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이대로 가면 더 큰 재앙 온다.” 8월1일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와 함께 시작된 ‘毒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 시리즈가 9월7일 시민 7명의 ‘생활환경 유해물질 노출 회피 실험’으로 마무리됐다.
지난 5월부터 4개월간 전문가 100여명을 만난 3부 7편의 장정이었다.
출근 전 12개의 생활화학제품을 접하는 직장인, 아이 둘을 키우며 생활화학제품 81개를 쓰는 집, 독성·발암물질을 품고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스프레이 제품…. 시리즈는 뭣이 독한지도 모른 채 화학제품에 의존해 살아가는 ‘호모케미쿠스(Homo Chemikus)’와 화학물질을 권하는 ‘케피아’(화학·마피아의 합성어)의 세상을 생생히 기록했다.
50년 전 ‘탈리도마이드’ 비극을 겪은 독일에선 선진화된 중독센터와 화학물질관리제도(리치)를 갖추고도 여전히 화학사고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시리즈는 모두 편리함에 물들어 있고 정부는 덮고 가기 급급한 한국에서 생활화학제품의 ‘불편한 진실’을 던진 첫 기획 기사였다. 추석 연휴 전인 지난 12일 아쉽고, 독한 얘기가 쏟아진 방담엔 특별취재팀 기자 4명(김기범·이혜인·이혜리·이효상)과 현장을 함께 뛴 수습기자(최미랑)가 참여했다.
■불편한 진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김기범 = 20~30년 후 사람들은 지금 시대를 얘기하며 “와, 그땐 이런 물질도 생활용품에 넣어 썼대. 진짜 용감무식하지 않아?” 이럴 것 같다. 우리가 깨끗하다면 락스물도 마시던 1960~1970년대를 그래픽 했듯이. 과학이 발전할수록 유해물질은 더 밝혀지고 몰랐던 것도 점점 나타날 것이다. 기업이나 정부가 어떤 제품의 유해성 문제가 제기되면 늘 “확실하지 않다” “기준치 이하다”라고 시민들에게 강변하는 것들 말이다.
최미랑 = 시리즈를 하면서 독자들에게 ‘이것만 피하면 된다’고 뚜렷한 지침을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결론은 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포름알데히드였다가 또 어떤 때는 파라벤이었다가. 한 물질이 유해하다고 하면 기업들은 다른 물질을 쓴다고 광고한다. 그건 그 물질이 안전하다는 게 아니라 규제 자체가 없다는 뜻일 수 있다.
이혜인 = 모든 화학물질은 기본적으로 ‘전부 유해해요’라고 인식하고 의심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기획취재 자체는 너무 재밌었는데, 왜 이렇게 기사 쓰기가 어려웠나 모르겠다. 전문가들도 자기 분야 팩트만 갖고 좁혀서 얘기하니까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의 갈증 나는 취재가 반복됐다.
김기범 = 남이 안 간 길을 간 기획이기 때문 아닐까. 지금껏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매체가 없었으니까.
이혜리 = 독일에 다녀와 보니 아쉬운 점이 있었다. 선진적인 사회를 면밀히 알고 한국 상황을 보는 것과 한국 상황만 계속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독일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중심이었고, 사람을 중심으로 화학물질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고 있었다. 그걸 보니까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될지도 보였다. 1~5편에 한국 사회 기획이 나갔는데 독일을 먼저 갔다와서 취재와 시리즈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혜인 =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선진국을 먼저 들여다보면 더 깊고 풍부하게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적게 쓰고 안 써도 살 수 있다”
김기범 = 생활화학제품을 안 쓰거나 적게 쓰고 살아 보는 실험(3부 2회)을 한 뒤 샴푸를 안 쓰고 있는데 처음엔 좀 불편했다. 세정력과 상관없이 거품이 잘 안 나는 게 찝찝하더라. 어떤 탈취제·방향제는 아무 쓸모도 없는데 써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활화학제품 위험성을 계속 의식하고 살려면 스스로 정보를 다 찾아봐야 된다. 다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불편과 수고로움이 있어야만 나와 가족의 건강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혜리 = 시리즈 하면서 곰팡이 제거제 3개 중 2개를 버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을 쌓아놓고 있는 것도 보였다. 샘플은 제조일자도 없는데 나중에 써야지 하고 쟁여놓고 있었다. 이번에 사용할 몇 가지만 두고 나머진 버렸다. 독일 마트를 가 보면 위생에 도움 되지 않고, 위험할 수 있다고 제품에 써 있다. 위험을 알고도 소비자가 선택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한국처럼 알지 못하고 선택하는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이혜인 = 예전엔 자기 전에 아로마 오일을 손목에 발랐다. 마스크팩도 사재기해서 두고두고 쓰고. 기획 하면서 사용을 줄이다 보니 뭔가 허전해지더라. 어쩌면 뭔가를 새롭게 쓰는 게 필요와는 무관한 재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로마도 기분 전환으로 썼다는 걸 알았다. 플라시보 효과처럼 자기만족 하면서.
이혜리 = 어떤 측면에선 사람들에게 불편한 기획이었던 것 같다. 생활화학제품을 사용하는 익숙한 패턴에 문제 제기를 하는 거였으니까.
이혜인 = 주변에서도 “써서 안 죽어” 그런 반응이 많았다. “나 담배도 피우는데 뭐 어때” 하는 사람도 있고.
이효상 = 사실 생활화학제품은 많이 안 쓰지만 흡연자다 보니 이 기획이 처음엔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취재하다 보니 인간을 우선하지 않는 인식이 문제투성이 화학물질관리제도의 기반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미랑 = 이전에는 유해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좋은 걸 쓰면 되지 않을까’ 했던 것 같다. 돈을 더 주고, 더 안전한 걸 사겠다고 말이다. 가끔 기분 전환이 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위험성을 알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화학물질을 피해 보는 ‘케미-프리’를 실천해 봤으면 한다. 생활화학제품 안 쓰는 실험에 참가해 조금만 노력했는데 변화가 생각보다 컸다.
이혜리 = 이번에 탈리도마이드 기사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공감한 게 “절대 포기하면 안됩니다. 갈 길이 멀어요” 이 말이었다. 그게 딱 맞는 말이다. 많은 전문가를 만났지만 그들도 모든 걸 알고 있진 않았다. 앞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된다. 정부도 관심을 갖고 투자했으면 좋겠다.
경향신문 70주년 창간기획 ‘毒한 사회 - 생활화학제품의 역습’ 기사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대로 가면 더 큰 재앙 온다’는 1면 프롤로그(8월1일자), 81개 생활화학제품을 쓰고 있는 집을 그린 ‘독 안에 든 호모케미쿠스’ 기사(8월5일자), 화학물질을 권하는 ‘케피아’의 닫힌 세계를 생생하게 담은 증언록(8월26일자), 독일에서 만난 탈리도마이드 피해자들(9월1일자)이다.
경향신문 70주년 창간기획 ‘毒한 사회 - 생활화학제품의 역습’ 기사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대로 가면 더 큰 재앙 온다’는 1면 프롤로그(8월1일자), 81개 생활화학제품을 쓰고 있는 집을 그린 ‘독 안에 든 호모케미쿠스’ 기사(8월5일자), 화학물질을 권하는 ‘케피아’의 닫힌 세계를 생생하게 담은 증언록(8월26일자), 독일에서 만난 탈리도마이드 피해자들(9월1일자)이다.
■“화평법·제도 보완 너무 미진하다”
이혜인 = 화학제품 성분을 더 공개해야 한다. 한국은 기업의 영업기밀이라며 너무 많이 인정해준다. 우리보다 못살고 뒤처진 나라에서도 공개하는데 그 나라에 수출하면서 한국에서만 영업기밀을 주장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혜리 = 결국 신뢰의 문제다. 독일은 유해할 수 있는 제품엔 유해한 물질이라고 써놓은 걸 볼 수 있다. 그걸 써놓으면 독일 소비자는 믿는다. 한국에선 유해하지 않은 물질이 들어 있다고 써놔도, 신뢰가 깨진 상태라 믿을 수가 없다. 전 성분 공개하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다. 독일에선 기업은 정부에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유해성 테스트도 하고, 2차 관리를 하고, 민간단체가 3차 인증·관리를 하면서 소비자는 믿고 사용한다는 기본 전제가 있다.
이혜인 = 화학제품 관리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작업장 안전관리를 안 하거나, 자살률이 높은데 방치하는 거나 일맥상통한다. 사람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효상 = 우리가 화학물질 관리를 해 보고자 시도한 게 1990년대 초반이고 가습기 살균제 사고, 구미 불산 누출사고 이런 것들을 거쳐서 2014년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이 나왔다. 그 과정에서 산업부는 계속 반대만 했다. ‘기업들 다 망한다’면서. 그런데 제품을 만들어서 이익을 보려면 최소한 안전성을 보증할 능력이 있어야 되지 않나. 기업 사람들 만나 보니 안전하게 제품을 만들라고 강제하는 법률이 없으니까 안전을 확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더라. 그래서 국가가 완벽한 방어체계를 갖춰야 하지만 정부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시민사회와도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1대 국회부터 20대까지 국회든, 정부든 발의한 화학물질 관련법안이 70개가 안된다. 그래도 20대 국회에 화평법과 관련해 벌써 4개가 발의됐다. 누더기가 된 화평법은 개정·보완될 대목이 많다.
■“가습기 살균제 수십년 싸워야 할 문제”
김기범 = 생활화학제품 기획을 착안한 기폭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었다. 가해기업 일부는 구속됐고, 국회 국정조사특위가 꾸려지고 청문회도 열렸지만 여전히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이효상 = 반성이라면, 사회 자체가 다 반성을 안 하고 있다는 거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옥시도 그렇고, 방치한 정부도 사과를 하지 않는다. 가습기메이트에 들어 있던 원료물질을 최초로 개발한 롬앤드하스에서 근무했던 사람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흡입하면 쥐가 죽는 물질이니 쓰면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SK케미칼은 이 정도 이하로 쓰면 괜찮다며 팔았다. 안전에 대한 인식이나 기업윤리가 달랐다. 작은 업체들을 만났을 때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대기업이 쓴 물질들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서 썼다고 하더라. 시장에서 잘 팔리는데, 대기업이 만들었으니 안전하겠지 하고 아무런 검사 없이 작은 기업들까지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서 판 거다.
김기범 = 기준치 이하면 괜찮다는 사고방식을 기업이나 정부가 사람들에게 주입하는데 과학적인 척하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다. 쥐와 사람이 다르고, 사람마다 민감도가 다른 걸 무시한 거다.
이혜인 = <청부과학>이라는 책에도 나온다. 담배회사들이 초기에 과학을 갖고 논지 흐리기를 많이 했다. 어떤 사람은 담배 때문에 폐암에 걸리는데 어떤 사람은 멀쩡하다 하면서 보편적으로 위험이 증명 안됐다는 논리로 논지를 흐렸다.
이혜리 = 독일에선 탈리도마이드 피해자들이 수십년 지난 지금 한 달에 800만원 정도씩 받고 있다. 그러면 1년에 1억원이다. 옥시에서 10억원을 주더라도 10년 치일 뿐인데 20년 후에 독성으로 인한 피해가 나타나면 어쩔 것인가.
김기범 = 가해기업들이 지금 피해자들의 전 생애를 고려한 규모의 기금을 만들고, 정부도 돈을 내놓아야 한다. 그 돈으로 새로운 피해자 찾기도 해야 한다.
이혜인 = 독일이 나치를 오랫동안 얘기하고 반성하듯이 한국도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100~200년 후까지도 반성하고, 논의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시리즈 도움 주신 분들
고광표(서울대 교수)·고미숙(감이당 연구원)·고영림(을지대 교수)·고정금숙(여성환경연대)·김병윤(여시재 연구원)·김상헌(KIST 유럽연구소 환경안전성사업단장)·김성균(서울대 교수)·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김정수(환경안전건강연구소)·김충용(실험동물센터장)·김형렬(가톨릭대 교수)·문은숙(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문효방(한양대 교수)·박동욱(한국방송통신대 교수)·박동진(연세대 교수)·박철원(박사)·백도명(서울대 교수)·송기호(민변 국제통상위원장)·아이잭 신(한국영상학회 이사)·양은경(충남대 교수)·유현정(충북대 교수)·이규홍(안전성평가연구소 흡입독성센터장)·이기영(서울대 교수)·이덕환(서강대 교수)·이덕희(경북대 교수)·이종현(네오앤비즈)·이은주(연성대 뷰티스타일리스트과)·이정훈(서울시의원)·이주홍(녹색소비자연대)·이채원(언론학 연구자)·이혜경(국회 입법조사관)·임종한(인하대 교수)·장재연(아주대 교수)·전병율(차의과학대 교수)·전병학(박사)·전현표(KIST 유럽연구소)·정남순(환경법률센터 부소장)·조경현(영남대 교수)·조용민(고려대 환경의학연구소)·차민석(스페이스리서치)·최경호(서울대 교수)·최예용(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홍윤철(서울대 교수)·국회의원 김삼화·김현권·신창현·서형수·이용득·이정미·이훈·정춘숙, 소비자시민모임, 익명 요구한 전문가·공무원·기업 인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