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 옹 인터뷰
글쓴이 : 원시
등록일 : 2004-05-14 17:03:45
<전화: 062-952-8308 윤석동, 김인숙>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없어지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의지의 끈을 놓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쩌면 포기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죽음과 생의 사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의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이 자연스런 현상은 아니다.
아직도 의문이다. 왜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았을까?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78세)님에게 물었다. 올해가 윤상원 선생이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올해 그럼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죠?”
“쉰 다섯(55)인가? 쉰 여섯인가? 그럴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 (김인숙씨:76세)께서 다시 정정해주신다 “아, 지 엄마는 또 쉰 일곱이라고 하네요.”
항상 청년의 얼굴이었던 그 윤상원이 오십대 중반이었다는 것이다.
“요새도 들에 나가신다고 저번에 (윤상원) 어머니께서 그러시던데요?” “고혈압이 있어서 약 먹고 그러네요.”
윤상원의 어머니께서도 무릎이 안좋아 병원에 다닌다고 저번에 그랬다.
“요즘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윤상원 생가)에 찾아오고 그럽니까?”
“아수울 때 (아쉬울 때)는 찾아오고 그러더니만, 요새는 …….”
말이 한참 끊어졌다. “안 잊고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1992년에 제가 다큐멘타리 찍는다고 몇 친구들과 가서 따님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인터뷰했는데, 그 때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이 5-18 계엄령군이 윤선생 집에 와서 대검으로 온 집안을 다 쑤시고 큰오빠 (윤상원) 행방을 찾았다고 하면서, 자상한 큰 오빠를 기억하면서 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결국에는 우시고…)
“저도 가끔씩 왜 5월 27일, 그 날 그렇게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이 빠져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예…. 그 때 우리 상원이가 고등학교 아이들을 다 불러놓고, 느그들은 다 나가라. 나가서 살아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역사의 징인 (증인)이 되어라고 했다고 …”
한참, 아니 평생을 생각해도 답을 찾기 힘들 이 질문을, 윤상원 선생 아버지는 “우리 상원이가”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볼티모오선(Boltimore Sun) 신문사 기자 마틴 (Martin)이야기를 했다. 한국을 두어번 다녀갔고, 윤상원 생가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마틴 기자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서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의 브리팅과 기자회견을 알렸다고 한다.
“그 마틴 기자가 우리 상원이가 참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길래, 그런 순수하고 정의로운 눈을 하고 있을 수 있느냐고,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냐고…합디다.”
“어렸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의리가 많았나요?” “그랬지요. 의리가 많고, 지 친구들이 누구한테 맞고 그러면, 아무리 힘센 놈들이라도 가서 상원이가 싸우고, 또 지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옷도 다 벗어주고 오고…”
윤석동 아버지는 윤상원 선생이 장남인데다, 중학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유학을 해서, 같이 지낼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 장남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농사짓는 아버지와 대학다니는 아들과의 어려운 관계. 그런데, 윤상원선생은 어떻게 70년대에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가 3남 4녀인디… 딸 중에 경희가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미제과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쌀 7대 (됫박) 값 밖에는 안되었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월급도 적고 배는 고프고 그러니까, 예를들어 쌀 1000 kg 을 가져다가 상품을 맹그는디, 중간에 배고파서 노동자들이 다 먹어버리고, 800 kg, 600 kg 만 상품 만드는데 가고, 그래서 또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때리고…
우리 상원이가 그런 것도 보고…들불 야학도 하고…” 윤상원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가족사를 통해서 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잠시 인터뷰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 소식을 잠시 물었다.
”지금 대구에 살아요. 아들 둘 낳고 잘 살아요. 남편이 대구에서 왔는디, 여수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지 친구가 소개해줘가꼬…지금은 대구서 아이들 키우고 잘 삽니다.”
“…님 같은 분들이, 나중에 많이 (광주 항쟁, 윤상원 선생등) 기록해주시고, 발전시켜주십시오. 이렇게 안잊고, 멀리서 전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지요.”
언젠가 광주에 간 적이 있다. 어린시절 야구한다고 시가행진하던 그 곳, 금남로에서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씨를 만났다.
중절모를 벗으면서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우리들에게. 인생이 어찌했든, 민주화가 어떻고, 자주-평등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자기 자식새끼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2004년 5월, 세월이 많이 흘렀다.
민주노동당도 국회의원이 10명이나 생겼다. 우리가 풀어야 한국문제는 민족, 노동, 여성, 생태 등 그 문제의 복잡성이 훨씬 증대되었고, 수 많은 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쩌면 윤상원 선생 같은 영웅보다, 면서기, 구청서기들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80년 5월 27일, 도청 한 사무실 방에서 M1 총을 들고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서 전사했던 윤상원,그리고 수많은 광주시민들과 그 후 그 후예들이 있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당 사람들이 그 도청을 다시 지키려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영혼을 붙들고 있겠다는 것인가?
새로 지은 5-18 광주 묘역, 그곳이 왜 그렇게 낯설까? 묘는 커지고 공식화되고 그랬는데, 한 구석 허전하다. 실제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왜 그리도 손님들이 무거운 어깨들로 나타나는지, ‘새벽에 몰래 다녀올까?’ 그런 심정이 든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기 이름을 아직 돌비석에 새길 때가 아닌 것같다. 돌비석에 절할 시간에, 산 사람들, 그들의 가족, 아직 남은 상흔을 껴안을 때이다. 아직은 우리가 복원해야 할 역사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마라톤을 한다면, 광주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 생가(예전 임곡마을)까지 해 봄도 괜찮을 것 같다.
윤상원 선생이 광주 도청, 아니 전라남도 도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서른 하나 (31세)의 나이로, 마치 한국의 예수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2009.05.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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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지만 진실한 노래이군요. 오랫만에 몰래 따라 불러봅니다.
표지 그림은,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윤상원 선생,
국내외 정세를 살피느라 신문을 보고 있다 (도청안)
지금까지 전두환이 싱긋 웃고 있다.
학살자는 공식적으로 아직 없다.
다만 자위발동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게 공식 입장이다.
보리피리를 불기 좋은 그런 오월
푸른 보리밭 사이로,
붉은 피보다 더 진한
그 푸르디 푸른 하늘을 이고서
온 짙은 초록 보리밭 사이로
젊은 시민군들
속삭이며 스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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