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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독후감)

민주당의 불안조장 정치 (Angst-Politics) , 1688년 명예혁명 이후, 휘그가 토리가 되고, 토리가 휘그가 되었던 영국역사

by 원시 2020. 4. 4.

민주당의 불안조장 정치 (Angst-Politics)

415 총선 특징은, 통합당과 민주당이 87년 유월항쟁으로 만든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누가 더 잔인하고 교묘하게 파괴하느냐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386들은 통합당에 대한 ‘공포심과 불안감’을 대중동원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마치 박정희-전두환-노태우가 ‘반북 반공’을 내세워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형성하고, 관제 데모를 동원한 것과 거의 똑같다.

 

 

사실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퇴행과 도덕적 퇴락, 즉 정치적 새옹지마는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이미 서구 신정치, 뉴레프트 68세대의 자본주의에 급속한 통합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변증법적 부패 dialectical degeneration’이다.

 

 

87년 유월항쟁을 통해 절반 쟁취한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리버럴 민주당 386들은 2020년에 괴뢰도당 위성정당을 만들어 자신들이 만든 민주주의 정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유린하고 있다. 정치적 방향타를 상실한 자들은 AI 안철수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정치적 허무주의와 유아독존에 안주하고 있다.

 

 

한 때 386 세대,  나름 이론가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힐 (Christopher Hill)이 “종교개혁으로부터 산업혁명”에서, 급진파가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토리가 휘그가 되고, 휘그가 토리가 되는 웃픈 역사적 사실이다.

 

1688년 제 2차 영국혁명 (피를 흘리지 않았다 하여 명예혁명이라고 알려진)에서, 제임스 II는 미스터리하게 왕권을 순수히 내주고, 오렌지 윌리암에게 왕권을 내줬다.

 

그런데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 토리와 휘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크리스 힐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왕당파는 기가 꺾기고, 휘그파의 급진성은 탈각되었다. 그 결과 차세대 토리가 휘그파의 급진 언어와 행태를 흉내내고, 차세대 휘그파가 올드 왕당파의 언어와 행태를 재현했다.

 

 

책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이렇다.

 

 

1688년 이후 영국 정치의 혁명적 시대는 끝이 났다. 1688년 이전 50년간 격동의 시대가 지나가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조용한 시대가 도래했다. 왕권신수설을 주창한 토리즘 (Divine right Toryism) 은 죽었다. 그러나 물론 1688년부터 1750년대까지 왕권 복권을 위한 반란들도 있었다.

 

 

자코바이트(Jacobite)가 그들이다. 1688년 왕권을 내준 제임스의 라틴 이름 자코부스(Jacobus)에서 따온 자코바이트(Jacobite)이다. 1715년 자코바이트 반란 항쟁은 주로 파산한 북쪽지방 지주와 스코트랜드 하이랜드에서 발발했다.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은 군사적 성공도 거뒀지만 그 자코바이트 세력은 외국 침략 군대였지, 영국 반란은 아니었다.

 

 

(참고: 자코바이트 1745년 반란: 1745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주도, 1688년 영국혁명 당시 왕권을 내준 자기 아버지 제임스 스튜어트 복권을 위해 일으킨 반란이다. 이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안에 벌어졌고, 당시 영국 군대가 유럽 대륙에 원정을 가 있었을 때였다.

 

찰스가 1745년 스코트랜드 하이랜드 글렌피넌에서 8월 19일 반란을 시작했고, 군사적 승리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746년 4월 컬로든 전투에서 반란군은 패배했고, 찰스는 프랑스로 도주했다.)

 

 

왕당파 토리만 죽은 것은 아니었다. 영국 왕정과 영국교회와 싸우며, 영국 의회주의를 쟁취하려 했던 지주계급을 대변했던 휘그파(the Whig)도 변질되었다.

 

 

1685년은 급진파의 마지막 조직적인 반란이었다. 휘그파의 정치적 지도자 세입스베리 Shaftesbury 와 몬머스( Monmouth) 계승자들도 1688년 이후로는 휘그파에 영향력을 별로 행사하지 못했다.

 

이러한 두 극단적인 세력, 토리 왕당파와 휘그당 급진파의 패배는 중도파, 소유계급, 타협파의 권력이 강화되는 시기와 일치했다. 휘그 소수특권 지배층(올리가키)과 영국은행(the Bank of England)의 등장이 그것이다.

 

휘그와 토리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긴 했지만, 역사적인 의미 이외에는 점차 퇴색되었다

 

휘그당이 점차 거대 비지니스 정당(산업과 무역)이 됨에 따라, 토리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자투리 (fringe)’를 아주 잘 이용했다.

 

공직에서 배제된 토리파이 과거 초기 휘그 공화주의( Whig republicanism) 언어들로 정치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버로 (borough: 한국으로 치면, 군이나 시 행정단위) 주민들의 참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토리파 인물, 사셔버럴(Sacheverell )은 교회와 왕당파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1688년 영국혁명 이전 휘그파 정치적 지도자 세입스베리와 몬모쓰가 카톨릭 교황 반대파 대중들에게 지지를 많은 것만큼이나 인기를 구가했다.

 

그 샤셔버럴 지지 군중들은 영국 은행을 불태워버리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사우쓰워크 (Southwalk )직조공들 , 전통적인 장인, 영국교회 소속이 아닌 ‘비-영국교회 기독교인들 (non-conformist)는 1709년에 교회와 이러한 왕당파 군중들에 반대했다.

 

이런 이유로, 논쟁이 벌어졌다.

 

1716년 셉테니얼 법안(Septennial Act. )을 놓고, 토리파들은 왕정과 영국교회 성직자들에 대항했던 구 휘그파와 공화주의자가 환생한 것처럼 발언했다.

 

이와는 반대로 휘그파는 절대 권력과 특권의 잇점을 칭송하면서, 오히려 반란자들을 비난했고, 대중들을 비웃고, 영국왕실을 칭송했다.

 

스위프트(Swift) 는 1681년 처형당한 스테펀 칼리지(Stephen College: the Protestant Joiner)를 가리켜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18세기 초에, 제임스 II 왕정복고를 시도한 자코바이트는 더비셔 광부들과 몬모스 시대 직조공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더비셔 광부들의 조상은 1649년 영국 왕정에 저항했던 평등파 (레블러스Levellers)였다. 또한 직조공들은 1688년 제임스 II가 왕권을 물려준 오렌지 윌리엄에 협조하지 않았었다.

 

그러한 사회에서 정직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8세기 후반, 진정한 급진파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휘그파 대부분은 자신들을 ‘토리’라고 불러야 했다.

 

토리 급진주의는 17세기 패배한 두 계급의 불편하고도 전적으로 부정적인 동맹이었다. 두 계급이란 시골 지주계급과 도시 빈곤층을 지칭하는데, 전자는 부르조아에게 패배했고, 후자는 귀족 지배자에게 패배했다.

 

18세기 초기 영국 대부분 지방 신문들은 그 독자들이 대부분 ‘토리 지지자’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토리 지지자들은 반정부파였고 정치적 부패를 혐오하고, ‘사회 안정’이라는 신화적인 황금시대를 회고적으로 그리워했다.

 

 

Christopher Hill(1967),Reformation to Industrial Revolution

 

 

 

(컬로든 전투: 좌, 자코바이트, 우 정부군대:  Jacobites and Government troops clash at the Battle of Cullo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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