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2020.dec.20.
리오 패니치 (Leo Panitch) 선생이 5주 전에 암 진단을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던 중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폐렴으로 어제 밤에 별세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림프종, 백혈병, 다발 골수증이 대표적인 혈액암인데, 리오 패니치는 다발 골수증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리오 패니치는 한국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의 지지자이고 연대 작업도 같이 했습니다. 저 역시 노동운동 선후배 동료들이 캐나다에 오면, 리오 패니치, 샘 긴딘, 그렉 알보, 데이비드 맥날리가 소개해주는 캐나다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같이 토론도 하고 노조 교육 프로그램에도 참가하곤 했습니다.
그는 지젝처럼 한국에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거나,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처럼 한국 출판사 돈 벌어다주는 책들이 번역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넓은 범위에서 보면, 리오 패니치는 한국 진보정당 운동 테두리 안에 있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이기도 합니다.
내일 오전이 되어서야 저보다 그를 더 잘 아는 리오 패니치의 친구,선후배,동료들이 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리오 패니치 선생이 대학원 석박사 학생들에게 굉장히 성의있게 ‘글 평가’를 해주고, 자기 의견도 꼼꼼히 달아주기로 유명합니다. 이런 코멘트 작업도 체력과 정성이 있어야 가능한데, 코로나에 무너지다니, 너무 애잔합니다. 한국의 최불암 닮은 이미지인데, 덩치와 키는 더 크고, 동네 아저씨, 노동자들의 친구처럼 외모도 그렇습니다. 목소리도 커렁커렁하고.
리오 패니치가 이런 교육관을 실천하게 된 건, 자기 선생이었던 랄프 밀리반드의 교육관과 교류와 연관이 많습니다.
리오는 캐나다 중부 매니토바 우크라이나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1967년 22살 나이로 런던정치경제학교 (LSE)에서 지도교수가 될 랄프 밀리반드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60년대만 해도 좌파건 우파건 캐나다 학생들도 영국이나 미국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러 떠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캐나다 대학은 자립적임.)
리오 패니치에 따르면, 벨기에 태생 폴란드 유태인이었던 랄프 밀리반드 자신이 이방인으로서 영국에서 좌파 교수로서 일했기 때문에, 각국에서 몰려든 좌파 학생들을 친구처럼 꼼꼼하게 보살펴줬다고 합니다.
리오 패니치와 랄프 밀리반드 (Ralph Miliband)는 이후 서로 공동작업도 많이 했고, 그들의 공유지점은 ‘계급 class’ 개념이 영국 미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경험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이론틀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 서유럽의 ‘사회복지국가 social welfare state’과 ‘자본가 계급’과의 관계, 국가의 본질에 대한 논쟁들이 좌파들 사이에 벌어졌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니코스 플란차스와 랄프 밀리반드의 논쟁,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논쟁입니다.
현실 사회주의 해체, 영국 노동당의 제 3의 길로 우경화,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이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 폐기, 이탈리아 공산당의 해체 이후, 자본주의 국가 논쟁은 시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계급’ 패러다임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 문제는 다양한 정책들과 제도들을 다룰 때 여전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랄프 밀리반드와 리오 패니치는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의 도구다’라는 ‘도구론적 국가’ 개념이나, 경제적 환원주의 입장은 반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주류 정치학계나 사회과학계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국가권력이 다른 사회 요소들보다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정치의 선차성 primacy of politics 이렇게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임)’는 입장도 반대합니다. 보나파르티즘처럼 국가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고, 그들은 오히려 국가권력과 계급과 파트너십을 이루고 있다고 봅니다.
국가 권력과 계급과의 관계는 이야기가 길어져서 다시 문제가 될 때 다루기로 하고,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는, 리오 패니치가 캐나다에서 잉글랜드로 가서 랄프 밀리반드와 같이 공부하고 그 이후 공동작업을 하면서, 랄프 밀리반드의 교육관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리오 패니치 책들.
리오 패니치는 그의 동료 샘 긴딘과 함께 캐나다 자동차 노조 (CAW) 교육 프로그램에도 깊이 관여하고 공동 작업들을 많이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리오 패니치와 샘 긴딘을 ‘구좌파’로 부르기도 하고, 제 선생인 데이비드 맥날리 (글로벌 슬럼프 Global Slump 저자. 그린비 출판사 2012 )를 신좌파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제가 볼 때는 공통점도 상당히 많습니다.
리오 패니치와 캐나다 자동차 노조 (CAW) 조직과 교육을 담당했던 샘 긴딘 (Sam Gindin)은 2012년에 “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 미국 제국의 정치 경제 The making of global capitalism : the political economy of American empire”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진보정당과 관련된 책으로는, 리오 패니치가 2001년에 쓴 책이 “사회주의를 혁신하기 – 민주주의, 전략, 그리고 상상 Renewing socialism – Democracy, Strategy, and Imagination”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민주노동당 이후 지금까지 진보정당운동을 해오거나 참여한 분들이면 이 책 내용을 이미 실천하고 있거나 많이들 공감할 것입니다.
소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 표방 국가들의 해산 이후, 그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반성을 담은 글입니다. 특히 레닌을 비롯한 20세기 현실 정치가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와 ‘독재’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전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승리’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자본이 국제화되는 시점에, 민족주의에 매몰되지 말자는 제안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1997년에 우경화 노선을 걸은 토니 블레어를 인정사정없이 비판한 책, “의회 사회주의의 종말, 신좌파에서 신노동으로 The End of Parliamentary Socialism : From New Left to New Labour”가 있습니다. 콜린 리즈 (Colin Leys)와 공동 저서이고, 데이비드 코우잇츠(David Coates)도 에필로그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토니 블레어가 영국 구-노동당의 3대 기치였던 ‘경제성장, 고용과 사회복지’를 다 버리고, 신 국제질서에서 경쟁력을 높이자고 주창하면서, 친-기업, 친-자본주의시장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서입니다.
브렉시트, 영국 노동당 내 분열과 무기력 등은 토니 블레어의 ‘제 3의 길’의 실패 이후 지리멸렬해진 영국 정치의 난맥상이긴 합니다. 리오 패니치가 주창한 ‘의회주의를 넘어서자’는 제안은 아직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20년의 영국 노동당이 가지고 있는 ‘온갖’ 문제들의 무게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무겁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시피, 캐나다는 미국에 비해서 공공 의료 서비스 제도가 상당히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나 19 위기 상황에서는, 한국 정부처럼 아주 강력하게 밀어부치지는 못하고, 시민의 자발성에 상당히 많이 의존해왔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시민들은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정부 보건부 지침을 잘 준수해오고 있습니다. ‘집에 2주 격리해 있어라’고 하면 진짜 다들 격리하고 있습니다.
병원 시설이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리오 패니치가 안타깝게도 코로나 19에 감염되어서, 다발 골수증 치료를 받던 와중이라 면역력이 더 떨어져 버린 모양입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강건한 체력의 소유자였던 리오 패니치가 혈액암과 코로나 19로 폐렴으로 쓰러질 줄이랴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황망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몇 글자 써봅니다. 코로나 19를 일상에서 어디까지 조심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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