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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국제정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사. 1968년 3월 21일. 카라메 전투 (Battle of Karameh) 이스라엘 군대의 전략적 패배와 팔레스타인 '파타'의 존재감을 아랍 세계에 알림.

by 원시 2023. 11. 20.

팔레스타인들에게  왜 카라메 전투는 중요한가?  

1.<1968년  3월 21일. 15시간 교전. 카라메 전투 Battle of Karameh>

 

카라메 전투, 1968년 3월 21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요르단 연합군이 이스라엘 방위군과 카라메에서 벌인 15시간 전투.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국경 근처에 있는 카라메(Karameh)와 사피(Safi)에 있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기지를 동시다발 공격했다.

 

1967년 ‘6일 전쟁’ 패배로, 요르단이 서안지구를 이스라엘에 빼앗긴 이후,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단체 PLO 전사들은 근거지를 요르단 국경 마을 카라메로 옮겼다.

 

이스라엘의 급습 목표는 카라메의 아랍 게릴라 캠프를 제거하고 ‘파타’ 지도자 아라파트를 체포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들에게 장소를 제공한 요르단을 응징하고자 했다.

 

 

3월 21일 새벽 이스라엘 보병은 공군의 지원을 받아 카라메 마을을 급습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요르단 군대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으나, 요르단 기갑부대와 팔레스타인 ‘파타’ 게릴라들이 합세해 저항했다.

 

이스라엘군은 15시간 전투를 벌여 카라메에 있던 아랍 게릴라 기지들을 폭파시켰고 140명 PLO 대원들을 체포한 후 퇴각했다.

 

양 측 모두 승리를 선언했다. 군사 기술적 측면에서는 카라메 게릴라 기지들을 파괴한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했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요르단이 승리를 선언할 만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군인들도 피해를 많이 입었고, 살해된 3명 이스라엘 군인들은 수습하지도 못한 채 카라메에 방치되었고, 이스라엘 탱크와 군대 차량도 버리고 퇴각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탱크와 차량을 획득한 요르단 군대는 이후에 암만에서 시가행진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이스라엘이 정전선을 침범했고 불균형 무력사용을 했기 때문이다.

 

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패배 이후 자존감을 상실했던 아랍 국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와 요르단 군대의 카라메 전투를 칭찬했고, 요르단에 있는 아랍 게릴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와 아라파트는 카라메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요르단 후세인 국왕은 팔레스타인 PLO를 높이 평가했고, “우리 모두 아랍 게릴라이다”라고 연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아랍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와 봉건왕조인 하시미테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후세인 국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요르단 내부에 훈련 캠프를 세운 PLO 사이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검은 9월 Black September” 사건으로 최악으로 치달아, 후세인은 PLO를 요르단에서 축출해 버렸고, PLO은 그 기지를 레바논으로 옮기게 되었다.

 

 

 

 

 

 

 

 

 

 

2. 이스라엘 입장에서 평가한 '카라메 전투' - '파타'의 기세를 올려주고 말았다. 

 

1) 이스라엘의 작전 이름 "불의 작전, 인페르노 오퍼레이션"

2) 작전 목표 - 요르단 강 근처 카라메 마을과 시파 마을에 있는 팔레스타인 '파타' 게릴라 소탕 및 기지 파괴.

3) 작전 경과

 

오전 5시 30분. 이스라엘 군대 요르단 강 넘어 동쪽으로 침입.

날씨는 좋지 않아, 헬리콥터의 무기 이동 1시간 지연.

이스라엘 낙하산 부대가 ‘파타’와 요르단 군대의 막강한 저항에 부딪힘.

 

날씨가 좋지 않아 카라메 동네 진입에 난항을 겪자, ‘파타’ 대원들과 게릴라들이 전투 준비를 할 시간을 줬고, 상당수 대원들이 이미 빠져나감 (야세르 아라파트도 그 지역을 빠져나감)

 

파타 게릴라 170명 사살, 170여명 체포, 조사 벌임.

카라메와 ‘사피 Safi’에서 61명 요르단 군인 사살.

이스라엘 군인 33명 사망, 161명 부상.

 

사피라는 마을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작전 (아수타 Austa 작전)을 전개했는데, 이스라엘 군인 33명이 사망하고 161명이 부상당했다

 

탱크 27대, 비슷한 숫자의 장갑차가 훼손당했고, 탱크 4대, 트럭 3대, 반무한 궤도 차량 2대가 ‘파타’와 ‘요르단’군에 의해 파괴되거나 진창에 빠졌고, 결국 요르단 군대 손아귀에 넘어갔다.

 

이스라엘 정보국장, 아론 야리브에 따르면, 이스라엘 목표, ‘인페르노 –불 작전’의 목표는   ‘파타’의 기지 파괴.

카레라 전투 이틀 후, 파타는 이스라엘 키부츠 2곳을 공격했음. (베이트 쉰 Beit Shean 계곡)

 

4) 이스라엘 군 내부 평가

 

요르단 군대가 참전할 것을 예상치 못함.

파타 게릴라 숫자가 생각보다 더 많음.

파타 게릴라 사망자 170명, 이스라엘 정규군 사망자 9명.

오후 2시에 이스라엘 작전 종료, 그러나 장갑자가 진창에 빠져 철수하는데 5시간이 더 걸림.

이스라엘 보병 사망 원인은 요르단 탱크 공격, 혹은 파타 게릴라와의 전투.

 

요르단 군대가 참전할 것을 예상치 못함.

파타 게릴라 숫자가 생각보다 더 많음.

 

파타 게릴라 사망자 170명, 이스라엘 정규군 사망자 9명.

오후 2시에 이스라엘 작전 종료, 그러나 장갑자가 진창에 빠져 철수하는데 5시간이 더 걸림.

이스라엘 보병 사망 원인은 요르단 탱크 공격, 혹은 파타 게릴라와의 전투.

 

이스라엘군의 평가, 파타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좋았다.

이스라엘군의 정보력 부족 비판. 파타 숫자 정확히 알지 못해 (100명, 500명, 수천명 단위)

 

출처:

 

에란 엘다르 (Eran Eldar). 카라메 전투를 다시 돌아봄. 

The Karameh battle revisited

Eran Eldar,

ISRAEL AFFAIRS (이스라엘 현안주제들) 2022, VOL. 28, NO. 2, 16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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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ingh 싱 책) 카라메 전투 pp.31-32.

 

 

타임 매거진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와 싸우는 팔레스타인 아랍 게릴라들은 사전에 이집트 정보국으로부터 ‘귀뜸’을 받았다. 카라메를 훈련 기지로 사용했던 2천 아랍게릴라는 주변 언덕으로 후퇴한 다음 이스라엘 군대를 저격할 태세를 갖췄다.

 

아라파트의 권한대행이었던 아부 리아드의 메모에 따르면, 아라파트는 이스라엘 침공 소식을 요르단 공무원에게 들었는데, 이 요르단 관리는 미국 중앙정보부 (CIA)로부터 그 정보를 입수했다.

 

1968년 3월 21일.

 

탱크와 헬리콥터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 1만 보병이 요르단 알렌비 (Allenby) 다리를 건너왔다. 이스라엘군의 목표물은 카라메였다.   

 

이스라엘군은 카라메 기지를 접수하고 아랍 게릴라들을 몇 시간 안에 소탕할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아랍 전사들 (페데인)은 요르단 대장 카마시(Khammash)로부터 이스라엘이 3일 안에 침략할 것이라는 계획을 전해듣고, 그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카마나쉬는 이스라엘 군대는 강력하기 때문에 파타는 그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게 좋겠다는조언까지 해줬다.

 

Amer Khammash ( 아메르 카마시. 요르단 대장, 후세인 국왕 정치 측근 1924-2010). 

 

 

 

그러나 아라파트, 아부 지하드, 아부 리아드와 다른 아랍 게릴라들은 카마나쉬의 조언과 달리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후퇴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스라엘 군이 세 개의 다리 위에서 동시다발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 엔진니어(공병)가 북쪽에 임시 부교를 만들고 전투부대는 강을 건넜다. 이스라엘 보병과 기갑부대는 동쪽으로 이동해 살트(Salt)에서 알렌비 다리까지 길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카라메 방어에 나선 요르단 60 기갑 여단과 조우했다. 2시간이 채 흐르기도 전에 이스라엘군은 무스리-카라메(Musri-Karameh) 도로 Salt 도로, 압둘라 다리 동쪽에 진을 치고 있던 요르단 방어선을 뚫기 위해 대포를 발사하고, 전투 공습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은 대포와 공군 공습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카라메 캠프를 폭파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아수타(Asuta)작전을 펼쳐 사해(the Dead Sea)에 있는 몇 개 소규모 게릴라를 밀어부치고 있을 때, 사피 (Safi) 근처에서는 학교 버스가 광산을 습격했다. 이스라엘 군은 공군의 지원을 받아이 소규모 게릴라 기지들을 급습했다.

 

이 급습으로 인해, 요르단 군인과 경찰 32명, 파타 군인 20명이 사망했고, 27명은 감옥에 갇혔다.

몇 시간의 급습을 종료한 이스라엘 군대는 요르단으로부터 철수했다.

 

 

파타’, 아라파트에게 카라메 전투의 의미

 

카라메 전투는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에서 정치적 군사적 변환점이 되었다. 카라메 전투를 치르고 난 이후, 아랍 국가 사람들과 팔레스타인들은 자존감을 회복했다.

 

1967년 7월 제 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패배 이후, 카라메 전투는 아랍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었다.

 

 

자료 사진.  요르단에서 배포함.

 

 

요르단 군대가 수거한  이스라엘 센츄리온 탱크 

 

 

 

이스라엘 센츄리온 탱크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보병이  5천여 세대가 사는 카라메 (Karameh) 로 진입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발포하는 요르단 기갑부대.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군대가 참전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카라메에 있는 파타의 기지들을  파괴했다.  지상군과 공습.  

 

 

이스라엘 군대가 퇴각한 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요르단 군대)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 이후, 요르단 국왕 후세인이 카라메, 시파 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다미야 다리 (북쪽), 압둘라 다리 (남쪽). 녹색은 요르단 군대와 파타 게릴라. 파란색은 이스라엘 군대 

 

 

 

 

 

 

 

 

 

 

 

 

 

이스라엘 군의 폭격을 받은 카라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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