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자료. 민정기는 누구인가? 왜 그는 끝까지 전두환에게 충성하는가?
민정기, 서울대 철학과 졸업.
사과 없는 유언' 읽은 최측근…"전씨가 무슨 잘못했나"
[JTBC] 입력 2021-11-23 19:40
전두환 유언 "북한 보이는 땅에 뿌려달라"
[앵커]
전두환 씨는 끝내 마지막까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자서전으로 갈음한 유언엔, 북한 땅이 보이는 곳에 화장해달란 내용 뿐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전한 최측근은 전씨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며 사과를 묻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승혁 기자입니다.
[기자]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는 별도로 유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의 입'이라고 불린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앞서 발표한 회고록의 내용을 대신 전했습니다.
[민정기/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 사실상의 유서입니다. 건강한 눈으로, 맑은 정신으로 통일을 이룬 빛나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 땅이 바라다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
전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5.18 민주화운동 유족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민 전 비서관은 '사과했느냐'는 질문 자체가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민정기/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 무조건 막연하게 사죄하라.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길게 얘기할 것도 없고…]
취재진에게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민정기/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저 지금 나한테 질문한 사람들 기자 아닙니까? 기자라면 기사 쓸 때 6하원칙에 따라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전씨에게 책임이 없단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민정기/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 그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몇 월, 며칠, 몇 시, 어디서 어떤 부대를 어떻게 지휘했고. 대통령도 아니고 계엄사령관도 아니고 지휘 계통에 있지도 않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언제 어떻게…]
전씨의 연희동 자택엔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하나회 출신 장세동 전 안기부장도 찾았습니다.
[장세동/전 국가안전기획부장 : (발포 명령 없었다는 것 같은 입장인가요? 민정기 비서관과?)… (추가로 사과 입장 발표하실 건 없으세요?)…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하실 말씀 정말 없으세요?) 모든 사람들이 다 느끼는 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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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사.
민정기는 누구인가?
전두환의 ‘입’ 민정기 전 비서관
“회고록 통해 ‘나는 도살자·학살자가 아니다’는 소리도 못합니까”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회고록 집필, 단정적 기술을 피하고 가성(假聲) 사용하지 않아
⊙ “법원의 출판·배포 금지 결정, 유감 … 증거다툼조차 없었다”
광주 5·18을 다룬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 1권을 볼 수 없게 됐다. 한쪽에선 영화 〈택시운전사〉가 여름 극장가를 불태우고 있다. 수면 아래에 있던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모욕과 증오, 저평가가 다시 들린다.
광주지법(제21민사부)은 지난 8월 4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며 《전두환회고록》 1권에 대해 출판·배포 금지 결정을 내렸다. 또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 강지식)는 8월 11일 전 전 대통령이 회고록 발간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받는 인세 채권을 압류·추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전 전 대통령의 일가에게 내려진 추징금 총액은 2205억원. 지금까지 검찰은 1151억 5000만원(추징률 52.2%)을 추징, 미납 추징금이 절반 가까이가 남아 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회고록 1권의 판매금지 결정에 불복, 조만간 이의신청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정기(閔正基·75)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혔듯,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이견이 있고 그분의 서술이 냉정한 관찰자의 증언이라 할 수 없다 해도, 그 해석과 평가는 국민 각자의, 역사의 몫인데도 금서(禁書) 처분을 내린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결정”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이다.
“(법원 결정에) 이의신청을 한다는 방침은 확실하고, ‘곧 한다’는 것도 확실하지만 구체적인 시기는 정하지 못했어요. 이번 판결은 우리 입장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증거다툼조차 없어 본안심판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볼 때 (법원이) 회고록을 제대로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을 금서로 만드는 나라가 어디 있나요. 저는 그런 사례를 본 적이 없어요.”
이 대목에서 민 전 비서관은 차분하지만 작심하듯 말했다.
“설사 회고록 내용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자기들은 지금껏 전직 대통령을 ‘도살자·학살자’라 하지 않았나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나는 도살자·학살자가 아니다’는 소리도 못합니까.”
“5·18 관련 단체 반발, 예상했다”
법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며 《전두환회고록》 1권에 대해 출판·배포 금지 결정을 내렸다.
민 전 비서관은 《전두환회고록》의 준비작업에 처음부터 참여했고, 최종적으로 원고를 다듬고 완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자 출신인 그는 《대한일보》 《중앙일보》 《동양통신》 기자를 하다 1976년 최규하 국무총리의 공보비서관을 맡으며 관계(官界)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 초부터 퇴임 후까지 공보비서관으로 재직했다. 전 전 대통령의 퇴임(1987년) 후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은 법에 의거해 1급 비서관을 둘 수 있다. 전두환을 따르던 수많은 5공 세력들이 떠났지만 민 전 비서관만은 한결같이 남아 연희동의 ‘입’ 역할을 하고 있다.
— 회고록에 대한 광주시민들과 5·18 관련 단체 등의 반발을 예상하지 않았나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요. 그래서 (대통령께서는) 집필 과정에서 단정적인 기술을 피하려 애썼고, 애써 고상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가성(假聲)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각종 법원 공판기록, 검찰 수사기록, 신문조서, 진술조서, 국회 특위 회의록 등 객관적 진술과 증언, 정황으로 썼지 단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어요. 회고록에서 소개한 사실들은 모두 공적 기록에 바탕을 둔 진정한 사실입니다.”
기자는 《전두환회고록》의 출판·배포 금지 결정을 내린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판결문 중 일부다.
〈… 전두환 등이 12·12사태를 통해 군의 지휘관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후 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1980.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는 한편, 1980. 5.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한 강압을 가하자 광주에서는 이에 항의하기 위한 시민들의 일련의 시위가 발생하였고, 전두환 등을 위시한 군부세력은 1980.5.18.부터 1980.5.27.까지 공수부대를 비롯한 군부대를 광주에 투입함으로써 위 시위들을 난폭하게 진압하였다. 그 후 채무자 전두환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시위진압 등과 관련하여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유죄판결이 선고되어 확정되었다.(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중략) 따라서 이 사건 신청은 모두 이유 있으므로 이를 모두 인용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
민 전 비서관은 판결문에 반박했다.
“전 전 대통령이 광주 민간인 학살의 원흉이라는데 강경진압,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아무런 증거도 확인되지 않았어요. 또 전 전 대통령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특별법과 관련한 수사·재판조차 계엄군의 투입과 작전지휘에 전 전 대통령이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를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광주의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것이 기정사실화하고 말았어요. 아니라고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대법원에서 내란수괴 혐의로 확정판결이 나지 않았느냐’고요. ‘5·17시국수습 방안’에 집권음모와 국권탈취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황당한 논리를 가지고 색깔론이 나와요. ‘피고인의 머릿속 색깔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같은 행위를 했어도 다른 사람은 죄가 되지 않지만 전 전 대통령이 한 일은 죄가 된다는 논리였어요.”
논란 낳은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
민정기 전 비서관이 1994년 《월간조선》 3월호에 최초 인터뷰를 했다. 당시 그는 “의리는 시대를 초월하는 덕목”이라고 말했다.
《전두환회고록》은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5·18 당시 악의적인 유언비어의 유포, 교도소 습격, 무기고 탈취, 수백명의 집단적인 복면시위대 출현, 북한과의 무선 교신” 등의 이유를 들어 무장세력의 개입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은 작년 4월 27일 “5·18 당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묻는 《신동아》 기자의 질문에 “전혀(없다)”라고 답변했다.
법원은 전 전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을 근거로 ‘인터뷰를 한 시점에서 1년이 채 경과하기도 전에 회고록을 통해 5·18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한 것은 일구이언(一口二言)의 자기 모순적 주장’이라고 판단했다. 《전두환회고록》이 출판·판매 금지 결정이 내려진 데는 북한군 개입설과 이를 부인하는 《신동아》 인터뷰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민 전 비서관은 “《신동아》 기자와 만난 자리는 5·18 문제를 거론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작년 4월 불교 천태종 전 총무원장인 전운덕 대종사가 인사차 연희동을 예방하겠다는 연락이 와서 전 전 대통령이 만났던 겁니다. 전운덕 대종사는 지난 1997년 전 전 대통령의 사면 복권을 청원하는 300만명 서명운동을 주도한 일이 있어요.
이날 만남에는 정호용 전 국방장관, 고명승 전 3군사령관, 김충립 목사, 《신동아》 기자 2명이 동석했는데 대통령께서는 전운덕 대종사 외에 누가 참석할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리고 당시엔 회고록 원고작성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을 때였어요. 그 방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려워 기자 질문을 그냥 얼버무리려고 ‘모른다’고 답하셨다고 들었어요. 또 회고록을 준비 중인 만큼 나중 책을 통해 입장을 밝히면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당시 참석자 누구도 5·18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전 전 대통령의 입장과 관련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측근’이 없었어요. 저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고요. 다만 김충립 목사가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공작’을 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가 5·18단체와 사전에 만나 (전 전 대통령을) 설득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 같아요.”
— 회고록 내용이 5·18 당시 북한 개입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지 않나요.
“아닙니다. 정체불명의 500~600명이 당시 광주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그들 정체를 두고 북한군이라는 이도 있고, 일부에서는 보안사가 공작 차원에서 갱생원 원생들을 보냈다는 의혹도 있었다는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또 각종 진술과 증언, 정황에서 볼 때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기술했지, 마치 북한군이 개입한 것처럼 단정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어요.”
— 《신동아》 보도가 나간 뒤 전 전 대통령은 어떤 반응이셨나요.
“말도 못해요. 제가 … 다 옮길 수가 없어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민 전 비서관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전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7명의 대통령이 배출됐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전두환을 매도하고 핍박하며 한 개인을 …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거나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도 아닌데, 어찌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 잘 이끈 대통령이지 않나요? 전두환의 공과(功過)를 모두 봐야 하지 않나요?
보수우파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을 이만큼 만든 데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의 땀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진보세력, 다시 말해 반(反)대한민국세력, 민중혁명세력 입장에서 보면 이 3명의 대통령이 철천지 원수입니다. 이승만·박정희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전두환을 죽을 때까지 짓밟으려 합니다. 짓밟아서 아주 땅속에 매장해야 다시는 보수 우파가 고개를 못 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 문재인 대통령이 5·18 진상규명과 재조사 의지를 밝혔습니다.
“우리가 희망(재조사)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런 쪽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재조사를 하게 되면, 재론의 여지 없이, 완벽하게 모든 의문점을 제대로 조사해야 합니다. 자기네들이 문제삼는 ‘전일빌딩 헬기 기총소사’ 사건만 재조사하자고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진실’과 ‘실체적 진실’의 간격이 좁혀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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