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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1공화국

이승만 독재자는 대구를 가장 무서워했다.

by 원시 2016. 1. 6.

2016년 대구는 새누리당(박근혜) 지지율이 77% 정도이지만, 언젠가는 대구 민심도 변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그 대구 민심 변화의 역동성이 보인다. 

 

일제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가장 두려워했던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한 도시에서 보수적으로 변화된 시점은 박정희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1963년 대선), 울산 부산 대구 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업화' 투자를 하고 나서였다. 

 

그게 정치적으로 결실을 본 것은 1967년 대선이었다. 거칠게 말해, 세대로 치면, 대구는 3세대가 60년 동안 그 주류 투표 행태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구의 이러한 정치의식과 민심은 고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의 조건들이 물론 필요하다.

 

첫번째,  아직은 소수이지만 진보정당 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지속된다면 대구 역시 변화가 가능하다.

 

두번째,  선거제도가 바뀐다면 새누리당과 같은 보수당의 독주는 종식될 수 있다.

 

세번째 대구가 중앙정치에 예속되지 않고, 지역 시민들의 참여가 활발해지고, 서울에서 '하향 공천'을 하지 않고, 대구에서 자율적인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

 

 (대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해당 지역에 있는 대학 출신 국회의원 숫자가 전국에서 가장 적은 곳이다.) 

 

네번째  비-새누리당 정치세력과 정당들간의 유연한 선거연대와 정치적 공동 활동이 필요하다. 새누리당도 내부 분화가 필요하다. (유승민의 경우도 그런 사례가 될 수 있다, 합리적인 보수세력도 등장해야 한다) 

 

다섯번째 이런 국내적 사정 말고도, 국제적 정치 조건들이 변화되어야 한다. 한국은 유럽과 정치지형이 참 다르다. 

 

유럽국가들은 국경선을 서로 접하고 있어서, 다른 나라의 정치적 개혁과 변혁 내용들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변화와 역동성'을 추구하고 있다. 좌파건 우파건 그렇다. 한국은 일본,중국,북한,러시아 정당들과 교류가 거의 없거나, 체제와 관행이 너무 다르게 고립되어 발전되었다. 

 

최소한 분단체제가 극복되고, 고립된 섬이 아니라, 대륙과 자유로이 왕래가 가능해야, 정치도 유권자도 변화될 수 있다.

 

  

 

 

 

 

 

(이승만과 이기붕 가족, 1960년 419 혁명 발발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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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 15일 대통령, 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 흥미롭다.

 

진보당 조봉암과 자유당 이승만의 대결이었다. 신익희 후보가 선거 직전에 급사했기 때문에, 무효표가 많다.

경북에서도 이승만이 조봉암을 이기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근소한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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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후보는 경북에서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11만 7천표 가량 앞섰다. 장면 (민주당) 후보가 4,012,654표( 46.4%)를 획득해, 3,805,502(44%)를 획득한 이기붕을 눌렀다. 20만 6천표 차이로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울은 압도적으로 민주당 장면 후보가 앞섰다. 그러나 경기, 경북과 경남을 제외하고는 이기붕이 민주당 후보 장면을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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