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다. 지난 10년을 잠시.
2007년 겨울이었다. 이재영 실장은 당시 어머니와 함께 서울시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강남 아파트값 폭등과 세븐 버블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때였다. 이 실장은 어머니를 모시고 10평 안팎의 임대 아파트에서 살면서 민주노동당 임대 아파트 정책을 발표했다. 그다웠다.
민주노동당 시기에는 당원들과 직접 통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재영 실장과는 1년에 몇 차례 정도 통화한 것 같다. 2004년과 2005년에 당게시판에 올린 글들의 주된 주제는 당의 위기 원인들과 해법에 대한 것이었다. 예측대로 2006년 지방선거는 저조한 성적 (12% 득표로 2004년 13.1%보다 하락)을 남겼고, 당내 내분은 더 커졌고, 그 위기의 정점은 권영길 대선 후보 결정과 대선 참패 (3%)였다.
이재영 실장은 2007년 하반기 쯤에는 민주노동당의 분당에 대해서 결심을 굳힌 듯 했다. 난 정 분당을 해야겠으면, 2008년 총선 이후에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몇 가지 조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건넸다. 첫 번째는 권영길 후보 선정과정과 결과 책임 두 번째는 2004년 총선 이후 당내 분열의 씨앗이었던 비례후보명단에 NL계열 핵심 정치가들은 참여하지 않는다.(개방형 시민참여로 전환) 세 번째는 당내 민주주의 운영과 공정한 경쟁 규칙 확보를 위해 모든 당내 정파들의 합의를 이룰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조건들도 당에서 관철이 되지 않을 때는 총선 이후에 당을 새롭게 만들고, 만약 위 조건들이 관철된다면 민주노동당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당을 개혁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이재영 실장에게 물었다. 지난 7년~8년 넘게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 하나 알리려고 (당 인지도) 그렇게 애써왔는데, 아깝지 않느냐? 이재영 실장도 가장 아쉬운 것이 바로 ‘민주노동당’이라는 당 명칭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들을 (고) 이재영 실장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이재영 실장과는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는 마음을 굳혔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왜 그렇게 되었는지, 2004년부터 2007년 사이 민주노동당 내부 운영의 파행과 위기에 대해서 추적을 해왔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NL다수파의 오류는 창당과 성장에 공헌한 이재영 실장, 김정진 국장( 전 진보신당 부대표)과 같은 당간부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거나 일자리 자체를 밀쳐냈다는 데 있다.
모든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제도’와 ‘승진의 합리적 기준 마련과 운용’이다. 지금은 일반 대중들도 알게된 경기동부 NL를 비롯한 자주파그룹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비민주적 당 운영과 리더십 결여였다. 특히 당내 당직자 공직자 후보 인사의 독점과 타정파에 대한 비관용적인 배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노회찬, 심상정 의원들과 달리, 정당운동의 ‘당직자(활동가)’ 위치에 있었던 이재영 실장을 비롯한 평등파 활동가들은 자기 미래 비전을 민주노동당에서 찾기가 힘들었다. 이 주제는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 파쇼들과 투쟁할 당시 가졌던 운동권의 ‘삶의 태도’와 상당히 다른 그 무엇인가를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당 운영주체들 중에 중요한 기둥인 활동가들의 지위와 미래 비전이라는 주제는 2010~2011년 통합논쟁,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사태와 분열과도 직결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진보정당 활동가들과 9급~5급 공무원들의 인사관리체제를 비교해보자. 그 선발부터 인사 배치, 역할분담, 내부 승진, 임금과 복지, 상과 처벌 등 모든 활동들을 민주주의, 사회주의, 좌파 이론으로 설명하고 실천해야 한다. 정당은 80년대 거리 투쟁을 지휘한 조직들 수준과는 다르다.
과장된 비유이지만 이렇게 말해야겠다. 민주노동당 시절, 국가 권력을 목표로 한 정당을 만들어 놓고, 대학생 총학생회장 선거하듯이, 한 기업 노조 위원장 뽑듯이 그렇게 당 운영을 했던 것이다.
2006년 어느 날 이재영 실장은 나와 지인들에게 민주노동당 정책실을 그만 둔다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재영 특유의 서울 말투와 낙관적 웃음은 많이 사라졌다. 과장할 필요는 없다. 민주노동당의 성장 발전은 이름없는 많은 사람들과 당원들의 힘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재영 실장의 노력은 그 역사적 현장에서 빠질 수 없다.
당을 만든다는 것.
우리는 새누리당/민주당보다 더 정교하게 당내 이견들을 조율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다른 정견을 가진 조직들과 경쟁은 당내에서 장려하고, 마치 프로야구 10개 팀 운용하듯이 엄격하고 공정한 심판진들을 제도적으로 당 안에 장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윤진숙 장관과 같은 사람들을 TV뉴스에서 매일 보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할 것이다.
이게 (고) 이재영의 압축적 삶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자 숙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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