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비교/국제정치2016. 11. 2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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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으로 달려가던 옛 친구가 메시지를 통해 "피델 카스트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어떤 감정보다도 광화문에 눈이나 오지 않았으면 하는 솔직한 심경이었다. 쿠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쿠바 혁명에 대한 책들은 몇 권 읽었지만, 그 이후 56년간 쿠바의 구체적인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대해서는 모른다. 쿠바는 나에게는 어떤 단절적 인식이다. 


쿠바는 휴양지로 알려져 있고, 미국 공항에서 하바나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캐나다 토론토를 통해서 한국 사람들도 많이들 방문한다고들 한다. 

예전 다니던 직장에서 선배 피디들이 "쿠바" 다큐멘타리를 한국에 최초로 소개한 바가 있다. 애써 찍어온 베타캠 테이프들은 김포 공항 세관에서 압수해버렸다. 다행이 친척이 세관에 근무하셔서 겨우 부탁해서 원본 테이프들을 나중에 돌려받아서 만든 게 <카리브해 고도 쿠바 3부작 /kbs 방영) 이었다. 
 
1958년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하게 된 이유들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쿠바 민중들이 미국 조폭들 돈과 훌겐시오 바티스타로 대표되는 친미 군부독재자들을 더 이상 가만 두지 못하겠다는 그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혁명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1901년 생인 상사 출신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1937년 주간지 타임 표지 모델에 "쿠바의 보스"로 소개될 정도로 막강하면서도 권모술수가 뛰어났다. 하지만 바티스타는 장기적 전망을 가진 쿠바의 경제 정책보다는 마피아식 보스 후원자 경제를 선택했다. 

바티스타는 1백만 달러 이상 카지노를 비롯한 '게임 산업' 투자자들에게는 아바나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미국 마피아 메이어 란스키 (Meyer Lansky)는 아바나를 조폭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코폴라 영화 <대부 Godfather >에서도 미국 마피아 두목들이 하바나 호텔에서 그들의 비지니스를 논하기도 하고, 하바나 길거리에서 혁명군들의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바티스타의 미국 조폭들과의 더러운 동맹으로 하바나는 매춘 산업과 카지노와 같은 게임산업이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바티스타는 공항, 고속도로, 건설업 투자권을 배후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쿠바 민중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군부 세력들, 미국 조폭 자본들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하바나 청년들을 중심으로 쿠바 민중들의 자존심은 더 이상 인내하지 못했다.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지도 하에, 쿠바 혁명을 알리는 몬카다 습격 (Moncada Barracks) 이후, 바티스타는 반대파들을 무참히 숙청하고, 언론 자유를 탄압하고, 반대자들을 투옥시켰다. 쿠바인들의 격렬한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은 "반란군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바인들의 혁명 동참을 알려나갔다. 이렇게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옥죄어 나가기 시작했고, 피델 카스트로 혁명 부대는 동쪽 지역부터 해방시키고, 그 산악지대에서 혁명군 라디오 방송을 하바나로 송출했다. 아바나 시민들의 투쟁을 격려하고, 동시에 혁명군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958년 12월 하바나 거리는 싸늘한 혁명의 기운이 지배했고,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는 그의 측근 180명을 데리고 3억 달러를 챙겨 쿠바를 빠져나갔다. 1959년 1월 8일 마침내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군대가 하바나에 입성했다.

바티스타는 쿠바 탈출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숨어 살다가, 1973년 8월 6일 바티스타는 사망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특파한 자객 팀이 도착하기 이틀 전에 그가 사망한 것이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무엇인가? 향후 쿠바의 진로 

->http://bit.ly/2g6x2hF






1959년 1월 8일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는 쿠바를 탈출했고,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하바나에 입성했다.  




(1901-1973: 군부 출신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1937년 4월 26일자 타임 주간지 표지 인물, 36세 당시 바티스타 "쿠바의 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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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는 1백만 달러 이상 카지노를 비롯한 '게임 산업' 투자자들에게는 아바나를 개방하겠다고 선언. 미국 마피아 메이어 란스키 (M Lansky)는 아바나를 조폭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아바나는 매춘 산업과 카지노가 성행하게 되었다. 

당시 바티스타는 공항, 고속도로, 건설업 투자권을 배후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15세 아들이 바티스타에게 살해당했다고 시위하는 쿠바 시민)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지도 하에, 쿠바 혁명을 알리는 몬카다 습격 (Moncada Barracks) 이후, 바티스타는 반대파들을 무참히 숙청하고, 언론 자유를 탄압하고, 반대자들을 투옥시켰다. 



쿠바인들의 격렬한 저항이 지속되었다.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은 "반란군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바인들의 혁명 동참을 알려나갔다.



이렇게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옥죄어 나가기 시작했고, 피델 카스트로 혁명 부대는 동쪽 지역부터 해방시키고, 그 산악지대에서 혁명군 라디오 방송을 아바나로 송출했다. 아바나 시민들의 투쟁을 격려하고, 동시에 혁명군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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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시민들이 게임 기계를 거리에서 부수고 있다. 당시 미국 마피아들의 근거지가 되었던 아바나의 단면.





혁명군들이 아바나에 입성하기 시작했다.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는 그의 측근 180명을 데리고 3억 달러를 챙겨 쿠바를 빠져나갔다.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숨어 살다가, 1973년 8월 6일 바티스타는 사망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특파한 자객 팀이 도착하기 이틀 전에 그가 사망한 것이었다.


1959년 1월 8일, 바티스타가 도망간 지 8일 후에,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에 입성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90세 일기로 사망했다. 카스트로는 쿠바 대통령을 역임했고 쿠바 공산주의 혁명 지도자였다. 2008년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전까지 피델 카스트로는 거의 50년간 일당을 유지하며 쿠바를 통치했다. 카스트로 지지자들은 피델이 쿠바를 다시 쿠바인들에게 되돌려 준 인물이라고 칭송하지만, 그의 정치적 적들은 피델 카스트로가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해버렸다고 비난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지난 4월 쿠바 공산당 전원회의 마지막 날 근래 보기 드문 연설을 했다. 그는 자기가 늙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쿠바 공산주의 사상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고 쿠바인들은 승리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자료 출처: 


http://www.bbc.com/news/world-latin-america-38114953



Fidel Castro, Cuba's former president and leader of the Communist revolution, has died aged 90, state TV has announced.



Fidel Castro ruled Cuba as a one-party state for almost half a century before handing over the powers to his brother Raul in 2008.


His supporters praised him as a man who had given Cuba back to the people. But his opponents accused him of brutally suppressing opposition.


In April, Fidel Castro gave a rare speech on the final day of the country's Communist Party congress.


He acknowledged his advanced age but said Cuban communist concepts were still valid and the Cuban people "will be victo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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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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