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공장” 신자유주의 이후 설 자리 잃어
수정 2010.06.20 23:16
펼치기/접기
김종목 기자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영국 미들섹스대 철학과 폐지로 본 ‘인문학 위기’ 담론
지난 4월 영국의 미들섹스대가 철학과를 폐지하고, 교수도 전원 해고하겠다는 계획을 통보했다. 철학과를 없애고 다른 학과에 돈을 투자하면 더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대학 측은 1년간 10여명 정도인 철학 전공 지망생 수치도 폐과의 근거로 들었다. 대륙철학 부문에서 훌륭한 연구 업적으로 평가받는 철학과라는 사실은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영국 미들섹스대의 철학과 폐지 계획은 영국 내 인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로지 ‘이익’의 관점으로 학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대학과 자본의 문제가 드러났다. 한편으론 학교 안팎의 ‘연대’의 중요성도 확인됐다. 사진은 학생·교직원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는 모습. 사진 출처 | 미들섹스대 홈페이지
영국 미들섹스대의 철학과 폐지 계획은 영국 내 인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로지 ‘이익’의 관점으로 학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대학과 자본의 문제가 드러났다. 한편으론 학교 안팎의 ‘연대’의 중요성도 확인됐다. 사진은 학생·교직원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는 모습. 사진 출처 | 미들섹스대 홈페이지
대학의 통보에 철학과 학생, 교직원들은 대학 건물을 점거했다. ‘대학은 공장이다. 파업하라! 점거하라!(THE UNIVERSITY IS A FACTORY. STRIKE! OCCUPY!)’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반대 운동을 벌였다. 노엄 촘스키 등 유명 지식인들이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한국 지식인들도 영국발 ‘인문학의 위기’ 사태에 대해 발언했다. 진행형인 한국의 인문학 위기와도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최근 ‘중앙대대학원신문’에 ‘대학은 공장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교수는 “미들섹스대학 같은 신생 대학이 경영난을 이유로 철학과나 기타 ‘장사’가 되지 않는 인문학전공 학과들의 문을 닫는 일은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며 “장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맨체스터대의 고전학과가 없어진 것이나, 영국문화연구의 산실 버밍엄대의 문화연구학과가 사라진 것은 신자유주의 이념 도입 이후 영국 대학에 불어닥친 변화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대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한정된 재정을 특정 분야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발상은 신자유주의 이전에 없었던 것”이라며 “신자유주의라는 현대판 ‘종교’는 머리만 있으면 손발 따위는 없어도 된다는 식의 세계관을 경영인들에게 주입해왔고, 그 결과가 인문학에 대한 대학당국의 홀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인문학의 ‘비판’ 속성과 ‘지식 소비재로서의 인문학’의 관계도 함께 분석했다. 그는 “인문학에 내장된 회의주의는 기존 체제에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며 “경영자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직원들이 인문학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 인문학 홀대나 죽이기의 정도는 영국보다 더 하다. 이 교수는 “영국의 교육부장관이 한국 대학을 본받자고 주장할 정도로 한국 대학은 솔선수범해서 ‘반인문학적 경영’을 펼쳐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정 대학을 공장으로 만들고, 교수들을 노동자로 만드는 주역은 누구인가? 공장의 인문학, 이것이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화두”라고 말했다.
박노자 국립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도 블로그에 관련 글을 올렸다. 박 교수는 “영국에서 인문학이 당하는 이지메의 정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서섹스대, 켄트대, 킹스칼리지 등에서 학생들이 용감히 막아 철학과 등 ‘위험도 높은’ 전공 교수들의 강제 해고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광적인 ‘긴축’ 분위기에서는 철학과, 문학과, 언어과, 문헌학과의 교수들은 앞날을 내다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인문학의 사회적·담론적 존립 기반의 변화를 들어 사태의 본질을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강단 인문학은 소수 사회귀족들에게 최고급 ‘교양’을 공급하고 문화자본 축적을 지원해주는 ‘귀족의 스승’ 지위였다. 2차대전 이후는 대학의 대대적 확장과 함께 마르쿠제, 알튀세르 같은 진보적 인문·사회학이 중산층이나 중산층 이하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박 교수는 “인문학이 소외를 극복하는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며 “인문학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한 것은 첫째 완전고용을 보장해주었던 1945~1974년 사이 복지 자본주의와 ‘미래’, ‘진보’에 대한 대중의 열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80~90년대 성장이 둔화되고, 완전 고용이 깨지면서 인문학의 존립 기반도 무너진다. 박 교수는 “원자화된 사회에서의 연대 대신 개인 경쟁이 왕성해지고 사회 미래보다 개인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이 우선시되기 시작했다”며 “범사회적, 연대적 미래 프로젝트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까지 다루는 철학이나 ‘전체’의 시공적 변이를 탐색하는 사학 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한국 상황에 대해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사회성의 위기”라며 “승자독식의 ‘공부의 신’ 사회에서는 인문학은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사회성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미들섹스대 철학과는 최근 킹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학생·교직원 투쟁도 있었지만, 지식인들의 국제 연대도 폐지를 막는 데 한몫했다.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주디스 버틀러 등 60여명의 유명 지식인들은 미들섹스대와 런던타임스에 공개서한을 보내 폐지반대를 촉구했다. 노엄 촘스키는 “영국의 지적인 위상을 위해서라도 결정은 뒤집혀야 한다”고 말했다. 폐과 같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인문학 죽이기에 맞서 지식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될 것 같다.
news/AI 엔지니어링